뉴스를 검색하다가 같은 사건을 보도하는 두 개의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하나는 어떤 판결을 "정의"라 부르며 찬사를 보냈고, 다른 하나는 그 판결을 "재앙"이라고 비판했다. 과연 어느 쪽이 진실일까? 아니, 진실은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신문과 방송이 "객관적"이라고 믿는 착시현상이 있다. 미디어는 사실을 전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실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이야기를 바꾼다. 마치 거울이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비추는 것처럼, 같은 사건도 프레임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온다.
객관성이라는 이상
객관성이란 무엇일까? 이상적으로, 그것은 사실에 기반한 공정한 접근을 의미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객관성은 대부분 이상으로만 남는다. 어떤 기사는 단어 하나의 선택으로 독자의 감정을 이끌고, 어떤 방송은 화면 구성을 통해 특정 관점을 암묵적으로 강조한다. 예를 들어, 시위 장면을 보도할 때, 평화로운 행진에 초점을 맞추는지, 아니면 충돌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지에 따라 시청자는 완전히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객관성을 믿고자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단순하고 명확한 진실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바람은 우리를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할 때가 많다. 미디어는 우리가 믿고 싶은 진실을 보여주며, 때로는 그 과정에서 왜곡된 이야기를 제공한다.
주관적인 진실의 모자이크
모든 진실은 관찰자의 시각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뉴스 기사를 작성하는 기자, 방송 화면을 편집하는 프로듀서, 그리고 그것을 소비하는 우리 모두가 자신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본다. 그렇다면 미디어가 제공하는 정보는 결국 주관적 진실들의 모자이크에 불과하지 않을까?
객관성의 허상은 미디어를 단순한 정보 전달자로 여기도록 만든다. 그러나 미디어는 정보를 선택하고 구성하는 과정에서 본질적으로 편향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미디어의 내용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그 뒤에 숨겨진 맥락과 의도를 탐구하게 된다.
비판적 시각의 필요성
나는 더 이상 한 가지 기사나 방송만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한 사건에 대해 여러 소스를 비교하며, 누락된 이야기가 무엇인지 스스로 묻는다. 필터 버블 속에 갇히지 않으려는 노력은 나의 정보 소비 방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동시에, 내가 가진 선입견도 점검하려 애쓴다. 우리가 스스로의 편견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미디어의 편향을 비판하는 것도 큰 의미가 없다.
객관성의 허상은 우리가 미디어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재고하게 한다. 미디어를 비판적으로 소비한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분석하는 것을 넘어, 자신이 정보를 대하는 태도를 돌아보는 일이다. 객관성이란 이상을 포기하는 대신, 주관적인 진실들의 조합 속에서 더 나은 이해를 추구할 수 있다.
이제, 나는 두 개의 기사를 모두 닫았다. 어느 한쪽을 쉽게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내가 찾고자 했던 답이었다. 진실은 단 하나의 기사에 갇혀 있지 않다. 진실은 우리가 끊임없이 질문하고 탐구하는 과정 속에 존재한다. 객관성의 허상 속에서, 나는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질문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