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지뜰' 구례 농촌유학 이야기 3편
농촌유학의 일상은 참 묘하다. 아름다운 호숫가를 걸으면서도 현재의 기분이 아닌 “이 순간도 추억이 되겠지?”라고 말한다. 아마 기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제 갓 일주일이 지난 이 생활도 언젠가 끝이 난다. 그래서 더 농촌유학의 하루하루가 소중하게 느껴진다. 아니 더 특별해야만 한다고 다짐한다.
농촌유학을 냄새로 기억한다면, 찐한 봄맞이 중인 들판의 똥 냄새가 떠오를 것 같다. 아직 꽃도 피지 않은 봄부터 농부 어르신들은 부지런히 밭을 고르고 비료를 뿌리고 다시 뒤집기를 반복한다. 평소에 사 먹는 채소들이 어떤 과정으로 우리의 손에 들어오게 되는지 매일 어깨너머로 배운다. 집에 텃밭이 있는 농촌유학 가정들도 밭을 갈고 씨 뿌릴 준비를 하고 있다.
만약 이 시간을 음악으로 기억한다면 요즘 딸과 차를 타고 다니면서 듣는 제이홉의 ‘Sweet Dreams’가 우리의 농촌유학 주제곡이 될 것이다. 주말 저녁에만 허락되는 TV 시청 시간, ‘나 혼자 산다’에 LA에 사는 제이홉 일상을 보게 되면서 우리 모녀는 ‘Sweet Dreams’에 빠졌다. 제법 따스한 봄날, 늦은 오후 남원으로 한국무용을 배우러 오가는 차 안에서 들었던 달콤한 이 노래가 우리 기억의 BGM이 되어 줄 것이다.
농촌유학 첫날, 이름도 생소한 ‘시업식’에 참석했다. 유치원생, 초등학생까지 모두 모여 입학과 전학을 축하하며 한 학기를 시작하는 행사이다. 우리 학교는 반갑게도 병설 유치원 아이들이 북적댔고, 입학생도 4명이나 됐다. 요즘 서울, 경기도 지역에도 신입생이 없는 학교가 있다는데, 전라남도 구례 작은 학교에 1학년 4명은 꽤 자랑할만하다.
딸이 속한 3학년은 올해 11명으로 이곳에서는 ‘과밀 학급(?)’으로 불린다. 올해는 학교가 지난 4년간 농촌유학을 진행하면서 가장 많은 9 가정, 19명의 아이들이 새롭게 함께하게 됐다. 선생님께서도 최근에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모인 것은 처음이라고 하셨다.
오랜만에 학교가 아이들의 활기로 가득 찼다.
1학년 신입생들에게는 지역 장학금 15만 원과 책가방, 화분을 선물로 주셨다. 특별히 6학년 언니와 오빠들이 직접 1학년 아이들에게 가방을 매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중에 들어 보니, 저학년 아이들 사이에 다툼이 있을 때 고학년들이 중재를 하면서 학교 질서를 지켜나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생님이 개입하여 상황이 심각해지기 전에 언니, 오빠들이 완충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이들이 서로 돕는 교우 관계를 배울 수 있다. 도시 학교에서는 볼 수 없는 작은 학교만의 문화이다.
전학 온 아이들도 모두 앞으로 나와 꽃다발을 선물로 받고, 전교생 앞에서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 아이도 환영의 마음을 아는지, 자기만의 공간에 꽃다발을 고이 모셔 두었다.
아이들만큼 학부모인 나도 환영을 받았다.
개학 첫날 아침 9시 10분부터 일찌감치 학부모 전체 모임을 열어 병원, 마트, 쓰레기 버리기까지 농촌 유학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나누었다. 금요일에는 1기로 참여했던 아버님이 서울에서 내려오셔서 ‘슬기로운 농촌유학’을 주제로 2년 반 동안의 시골 생활을 공유해 주셨다.
1기 아버님은 농촌유학을 통해 아이와 나만의 ‘보물’을 찾아보라고 말씀해 주셨다. 아버님의 보물은 당연히 아들이었고, 특별히 놀러 다니거나 활동을 하지 않아도 늘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셨다고 한다. 그 결과 아들과 엄마보다 더 끈끈한 애착 관계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하셨다.
농촌유학을 오기 전 나는 항상 직장을 다녔기 때문에 아이를 보면 함께 있어 주지 못하는 애처로운 마음이 있었다. 아이가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해도 일부러 싫은 소리를 잘하지 않았다.
그런데, 농촌에서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니 잔소리를 더 많이 하게 된다. 맞벌이를 핑계로 그동안 길러 주지 못한 생활 습관을 잡아주고 싶었던 것뿐인데, 감정이 상하는 일이 잦아졌다. 아버님 말씀을 들으면서, 훈육을 하더라도 화는 내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아버님이 말한 농촌유학의
'보물'은 곧 '의미'가 아닐까?
반복되는 농촌유학 일상에서도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한다면 더 보람찬 시간이 되고 후회를 덜 하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1기 아버님께서는 농촌유학을 통해 아이들이 좀 더 불편하고 심심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해주라고 조언해 주셨다. 아이의 시간을 미리 채워주려고 하지 말고, 아이가 스스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아마 요즘 학부모들은 아이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면 그것만큼 힘든 고문은 없을 것 같다.
이 얘기를 듣고, 금요일 하루는 일정을 비우기로 했다. 매일은 어렵겠지만, 조금씩 아이와 심심한 시간을 가져보도록 ‘노오력’ 해 보려고 한다. 실은 엄마인 나조차도 가만히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건 아닐까 속으로 두렵기도 하다.
농촌유학 시작 전날 밤까지 구례 관광 지도를 펼쳐놓고 무엇을 하면 좋을지 고민만 하다 조급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이제는 아이가 스쿨버스를 타고 등교하면 걸음이 가는 데로 한가로이 산책을 하거나 온천을 한다. 앞으로 ‘나를 끄는’ 시간을 더 가져야겠다.
농촌에서의 일상은 한마디로, 한 번에 되는 게 없다. 카드 하나 만들려고 해도 지역 농협 은행 계좌가 없어 은행을 여러 번 방문했다. 전입신고를 하러 면사무소에 가서도 양식에 적힌 말이 무엇인지 몰라 물어물어 겨우 작성했다. 직원 얼굴을 기억할 정도로 도움을 요청하러 면사무소에 자주 가게 됐다. 도시에 살 때는 주민센터에 10년에 한 번도 방문할 일이 없었는데, 농촌에서는 직접 정보를 찾아다니고 물어보지 않으면 알 길이 없다. ‘마을’ 즉 ‘동네’를 기반으로 모든 정보가 공유되기 때문에 우선 그 커뮤니티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일찌감치 전입신고를 해둔 덕분에 받은 지역 상품권으로 이사 떡을 맞췄다. 떡집에 들어서자마자 사장님이 힐끗 나를 보더니 말했다.
“농촌유학 학부모 맞죠? 이사 떡 하시려고요?”
“네,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여기 분은 아니 신 것 같아서…”
며칠 후 떡집 사장님께서 추천해 주신 가래떡과 팥시루떡을 찾으러 갔다. 그런데,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 분명히 가래떡이 스무 덩이 정도 나온다고 했는데 양이 너무 많았다. 팥시루떡도 손바닥보다 더 큰 크기에 두께는 무려 3겹이다.
보통 도시 떡집에서 사 먹던 떡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무시무시한 크기였다. 사장님께서 떡집에 처음 온 손님이라 잘해주셨다고 한다. 우리 마을뿐 아니라 산책하며 가끔 인사를 드렸던 윗마을회관에도 떡을 드렸다. 마침, 마을회관에 가니 동네 할머니들께서 모여 간식을 드시고 있었다.
“아이고… 이사 왔다고 떡을 가져왔어?”
“얼른 이리 편히 앉아서 닭 좀 먹고 가”
“떡이 간도 잘 맞고 맛있네! 고마워요. 잘 먹을게!”
할머니들이 하는 말의 반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치킨에 콜라, 몸에 좋다는 지리산 고로쇠 물까지 얻어 마셨다. 다음에 또 놀러 오라는 할머니의 말씀에 꾸벅 인사를 하고 겨우 빠져나왔다.
신기하게 시골에서 한 번이라도 만난 사람들은 거의 곧잘 나를 기억해 냈다. 길을 지나가면서 인사를 해도 농협에서 단순한 문의를 했을 뿐인데 모두 내가 어떤 말을 했는지까지 정확히 기억했다.
생각해 보니, 시골엔 사람이 드물어서 낯선 사람을 기억하기 쉬울 것 같다. 도시에서는 유독 친절한 사람이 아니라면 여러 번 본 사이라도 먼저 아는 체를 하지 않는다. 이렇게 시골의 따뜻함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다행히 지금까지 만났던 농촌 분들은 우리 모녀를 두 팔 벌려 환영해 주었다.
농촌유학 첫 주 일상은 시골과 도시를 비교하기 바빴다.
‘서울에서는 이렇게 안 했을 텐데…’
‘서울이라면 이렇게 해줬을 텐데…’
이제는 도시와의 비교를 멈추고 농촌의 방식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한 번에 되지 않아도 여러 번 찾아가야 해도 남는 게 시간인데 무엇이 문제인가? 이번 주에 못 하면 다음 주에 한다고 생각하고 여유 있는 마음을 가져야 속이 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차피 내 속도에 맞춰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구례에 농촌유학을 오면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이 지리산온천이었다. 겨울이면 수족냉증과 만성 부종에 시달리는 나에게 이보다 좋은 환경은 없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오랜만에 여유롭게 온천을 즐기기로 했다.
특히, 지리산온천 노천탕은 흡사 신선놀음이다. 때마침 아무도 없는 노천탕에 톡톡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노천탕 물에 빗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물 위에 크고 작은 원이 그려졌다. 나도 하늘에서 내려주신 빗방울 마사지를 받으니, 낙원이 있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 하는 환상에 빠져들었다. 직장 생활에서 묵었던 몸과 마음의 때를 실컷 벗겨 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사우나 문을 나선다. 온천은 도시의 때를 벗는 일종의 나만의 정화의식이다.
농촌의 환경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신선함의 연속이다. 경험해 보지 못했었기 때문에 당연히 내 상상보다 훨씬 아름답고 좋은 것들이 많다.
사실 농촌유학뿐 아니라 우리의 인생도 끝은 정해져 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며 살지 않기에 일상의 소중함을 쉽게 망각한다. 마흔 무렵, 삼 십 대 때와는 다르게 내 인생에도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다. 그 덕분에 농촌유학에 더 확신이 생기기도 했다. 긴 인생에 1~2년 일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한다고 해서 큰일이 나지는 않는다.
농촌유학은 일상의 삶의 소중함을 연습할 기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