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지뜰' 구례 농촌유학 이야기 4편
남도의 봄은 참 얄궂다. 난대 없는 폭설로 산수유꽃 위로 눈이 소복이 쌓였다. 노란 꽃 위에 보송보송 하얀 털모자를 쓴 것 마냥 그 꼴이 귀엽다. 눈을 몰고 온 꽃샘추위 덕에 하얀 눈 쌓인 지리산 봉우리 아래 노란 산수유꽃이 어우러져 더욱 이색적인 풍광을 자아낸다.
매년 이맘때면 가장 먼저 피는 봄꽃 중 하나인 산수유꽃을 보러 엄청난 인파가 구례 산동면으로 몰려온다. 그런데, 올해는 축제 첫날부터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불더니 주말 내내 진눈깨비까지 내렸다. 설상가상으로 주 초에는 폭설이 내렸다.
다행히 다음날은 제법 해가 떠서 눈 녹는 소리가 톡톡톡 들린다. 이제는 완연한 봄이다.
변덕스러운 날씨 탓에 결국 아이가 감기에 걸렸다. 체온을 재어 보니 38도를 넘었다. 농촌에는 주말에 여는 병원이 없었기에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준비한 감기약도 이틀을 먹이니 똑 떨어졌다.
시골 약국에는 아이들 약이 없다고 얘기를 들었던 터라 월요일에 학교 끝나자마자 아이를 데리고 남원에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30분을 달려 도착한 소아과에서 ‘코미시럽’ 한 병을 처방받고 약국에서 해열제와 감기약을 종류별로 2개씩 샀다.
‘시골에서 아이가 아프면 어쩌지…’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니, 상비약을 넉넉히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했다. 다행히 열은 반나절 만에 떨어졌고 처방받은 ‘코미시럽’ 덕분에 감기는 호전되고 있다.
기분 탓인지, 맑은 공기 덕분인지 아이 감기도 도시에서보다 빨리 나았다.
엄마, 나 발바닥이 아파.
이러다가 평발 되겠어.
아이는 개학 첫날부터 줄기차게 놀고 있다. 학교에서 2교시 후에 중간 놀이 시간에 놀고, 점심시간에 놀고, 방과 후 통학차를 기다리며 논다.
학교가 끝나고 별일이 없는 날에는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해 질 무렵까지 뛰어논다. 집에 들어올 때쯤엔 햇볕에 그을렸던 얼굴이 저녁 찬 바람을 맞아 빨갛게 된다.
감기에 걸려 콧물까지 훌쩍이니 영락없는 시골아이다.
날씨도 날씨지만, 농촌에 오면서 갑자기 체력 소모가 많아져 감기가 온 것 같다. 발이 아프다고 할 정도면 얼마나 많이 뛰어놀고 있는지 알만하다. 그렇게 아이의 몸도 농촌 생활에 적응해 나가고 있다.
아빠! 나 이제 적응 다 끝났어
저녁에 아빠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아이가 말했다. 유학 시작 일주일 만에 적응이 끝났다니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이도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기 위해 신경 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에게 학교생활에 관해 물어보면 좋다는 대답만 한다. 담임 선생님도 좋고, 특히 영어 원어민 선생님이 제일 좋다고 한다. 평소에 한국말을 못 하는 영어 원어민 선생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실제로 만나고 나니 신기하고 즐거운 경험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가장 기대했었던 전교생이 참여하는 학교 오케스트라는 지원했던 바이올린 대신 선생님께서 손을 보시더니 첼로를 배워보라고 추천해 주셨다고 한다. 마침 아이가 첼로를 배우고 싶다고 했었는데, 도시에서는 비용이 부담되고 선생님을 구하기 어려워 미루고 있던 차였다.
학교에서 방과 후 수업으로 우연히 체험해본 배드민턴이 재미있어서 이것도 계속 배워보기로 했다. 모두 새로 시작하는 것들인데 아이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어 다행이다.
자기 발에 꼭 맞는 인라인스케이트를 받았다며 스스로 보호장구를 착용하고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는 영상을 보여 주며 뿌듯해하기도 한다.
둘째 주부터는 농촌 유학을 와서도 계속 배우고 싶다던 한국무용과 피아노를 각각 주 2회씩 하면서 나름의 루틴을 만들어 가고 있다. 1년 정도 개인 레슨으로 배웠던 바이올린도 계속할 기회가 생겼다. 구례군에서 운영하는 ‘섬지뜰 오케스트라’에 참여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아직 학기 초이지만, 벌써 아이에게 많은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하는데 드는 비용은 매월 단돈 4만 원이다.
한국무용은 남원시립국악연수원에서 배우기 때문에 월 1만 원, 피아노는 산동면에 있는 유일한 학원에서 배우는데 전남학생수당 10만 원을 제외하고 3만 원만 부담하면 된다.
도시에서 배운다면 상당한 사교육비를 부담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농촌 유학은 그야말로 ‘혜자스럽다’. 농촌 유학을 통해 경제적 부담 없이 아이가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마음껏 해볼 수 있다는 것이 학부모로서 가장 만족스럽다.
농촌 유학을 준비하면서 가장 고민이 되었던 것은 아이의 전학이나 나의 퇴사보다 친정 부모님의 생계였다.
생활비를 넉넉하게 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아이를 봐주시며 늘 빠듯하게 사셨다. 그럼에도 엄마는 농촌 유학을 떠나겠다는 딸을 위해 만기를 1년 남긴 20년짜리 보험을 해약했다.
그리고 3월부터는 인근 아파트 청소 일을 시작하셨다. 나도 턱없이 부족하지만 조금의 용돈을 드리고, 언니도 보태기로 했다.
어쩌면 이기적일 수 있는 딸의 결정에 엄마와 아빠, 언니는 그동안 고생했다며 푹 쉬면서 아이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오라고 응원해 주셨다.
엄마는 언니와 나, 남동생을 키우기 위해 늘 최선을 다하셨다. 언니와 나는 가끔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우리 엄마 같은 엄마가 될 자신이 없어”
“나도, 그래. 우리 엄마 같은 엄마가 세상에 어디 있냐?”
언니와 내가 고등학생 때, 엄마는 학원비를 벌기 위해 몇 년간 가사도우미 일을 하셨다. 엄마는 그때 청소기를 돌리면서 큰 소리를 자주 들어 지금도 귀가 안 좋으시다.
어려운 형편에도 언니는 미술 입시를, 나는 서울대생에게 논술 과외를 받았다. 엄마는 딸들이 하고 싶다는 것은 다 할 수 있게 지원해주셨다. 엄마의 희생으로 언니는 예대를 나와 건축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나는 문학 특기자로 대학에 입학해 언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엄마는 어린 시절 그림을 잘 그리는 문학소녀였다. 딸 여섯에 아들 둘 8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엄마는 장사하는 할머니 대신 동생들을 키우고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딸은 살림 밑천이라고 생각하는 분이셔서 우리 엄마에게도 딸들을 뭣 하러 가르치냐고 시집이나 보내라고 잔소리를 하셨다.
엄마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미싱 공장에 취직해 꽃다운 나이를 보냈다. 스물다섯 살 엄마는 아빠를 만나 언니와 나를 낳고 언니와는 무려 10살 차이가 나는 늦둥이로 드디어 아들을 낳았다. 할머니는 둘째인 내가 또 딸이라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 오지도 않으셨다고 한다.
하지만, 엄마는 남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언니와 나, 남동생 모두 차별하지 않고 사랑으로 키워주셨다.
엄마는 지금도 항상 무언가를 배우신다. 한복, 홈패션, 현대의상, 옷 수선까지 패션학원과 여성회관을 30년이 넘게 다니고 계신다.
언니와 내가 쓰던 방에 미싱 두 대를 들여놓고 작업실을 만들어 시간만 나면 옷을 만드신다. 손자, 손녀들도 이 방을 ‘도도도방’이라고 부를 정도로 할머니의 공간을 좋아한다.
꼬장꼬장했던 외할머니도 뒤늦게 우리 엄마만큼은 공부를 가르쳤어야 한다고 후회하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엄마의 인생을 떠올려 보니,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애순이가 떠오른다.
어려서는 바쁜 할머니를 대신해 동생들을 키우고, 젊어서는 공순이 생활을 하며 살림 밑천으로 살아온 엄마.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막내 아들 볼 때까지 시댁 눈칫밥 먹으면서도 딸 둘 애지중지 키워 대학원까지 보낸 우리 엄마.
현실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결혼한 딸을 위해 손녀 육아까지 도맡아 주시고, 이제는 몸 아픈 아빠 대신 청소일도 마다하지 않는 생활력 강한 우리 엄마.
그 와중에도 여성회관에서 하는 수업은 빼먹지 않고 다니면서 옷을 만드는 우리 엄마.
엄마 이야기로도 드라마 한 편이 뚝딱 만들어진다. 나는 우리 엄마 같은 좋은 엄마는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엄마의 품에서 자란 나도 딸을 위해 무엇이든 해주고픈 마음은 같다.
아이가 며칠 전 이웃 언니 집에 다녀오더니 우리 집에는 아무것도 없다며 책상을 사달라고 한다. 새 책상을 사주기엔 돈이 아까워 당근으로 남편에게 작은 테이블 하나를 구해 오라고 했다.
책장도 없는 작은 테이블에 집에서 쓰던 네모난 책꽂이 하나를 놓아 주었다. 그날 밤 아이는 책상에서 무언가 사부작사부작하더니 노트 한 권을 내밀었다. 다이어리 꾸미기를 하다가 시를 한 편 뚝딱 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