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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당지 한정식 식당은 맛도 좋을까?

방학동 '대문'...시내 반값 간장게장‧보리굴비‧도시락 인기

다담회 3대 회장 역임한 정명용 회장 운영

간송 전형필 옛집‧백파 홍성유 묘역 인근


아주 오랜만에 식사 약속 때문에 서울 북부 지역인 방학동에 갔다. 동명연혁고에 따르면 방학동은 도봉서원 건립을 위해 조선 한 임금이 도봉산에서 학이 평화롭게 노는 것을 보고 ‘방학(放鶴)’이라고 했다는 설과 지형이 마치 학이 알을 품는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설로는 곡식을 빻는 ‘방아’와 관련해 방아골로 불리던 것을 지명을 한자화 한 일제 강점기 때인 1914년부터 음이 비슷한 ‘방학리’(放鶴里)로 썼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전에는 경기도 양주군 ‘암회리’(岩回里)였다. 도봉산 줄기가 동남방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다시 되돌아와 암회리라 했던 것이다. 암회리가 방학동으로 180도 변한 것은 과거에 있었던 일종의 ‘행정편의주의’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 지역은 예부터 도당과 신당에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있다. 그만큼 풍수지리학적으로 지세가 남다른 곳이다. ‘학이 알을 품은 지형’이란 호사가들의 이야기가 흘려들을 일은 아닌 것이 연산군을 비롯한 왕가의 묘소가 많이 쓰여졌기 때문이다. 왕가의 묘소는 지관을 시켜 풍수가 뛰어난 곳을 쓰는 것이 원칙이다. 여염에서 조차 묘 자리는 명당을 찾는 것이 일반적인데, 하물며 왕가는 어떻겠는가.


필자가 지난 12일 오진권 회장(연세대 외식산업고위자과정 총동문회장 역임)과 함께 방문했던 한정식 ‘대문’ 인근에는 왕가인 연산군 묘, 정의공주 묘, 회산군(성종 다섯째 아들) 묘역, 임영대군파 오산군 묘역이 있다. 연산군 묘는 유배지였던 강화 교동에 있었다가 1512년(중종 10) 연산군의 부인인 거창군부인 신 씨가 지금 자리로 이장할 것을 청해 이듬해 왕이 아닌 대군의 예로 이장했다. 이후 1524년(중종 19) 연산군의 사위 구문경과 딸 휘순 공주의 무덤이 이곳에 조성됐다.


1537년(중종 32) 거창군부인 신 씨가 죽자 연산군 봉분 동쪽에 묘를 마련했다. 의정궁주 조 씨의 묘가 연산군 묘 바로 아래에 있다, 세종의 넷째 왕자 임영대군이 이 땅을 사패지로 받았는데, 후사가 없던 의정궁주의 제사를 임영대군이 모시게 됨에 따라 1454년(단종 2) 현 위치에 의정궁주 조 씨의 묘를 조성한 것이다. 거창군부인 신 씨가 의정궁주의 묘 위쪽에 연산군 묘를 이장해달라고 요청한 것은 그가 임영대군의 외손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문화재로 지정된 방학동 간송 옛집


1.jpg 시루봉 아래 방학동 골목 안쪽 북한산 둘레길 한쪽에 위치한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의 옛집.[사진=도봉구청 제공]

이처럼 연산군 묘역에만도 왕가 묘가 다수 조성돼 있는 등 일대가 묘와 무덤이 많은 곳이다. 도봉구 내에는 세종의 아들인 영해군 이담 후손의 묘역과 태조 이성계의 딸인 의령 옹주와 부마 계천위 이등의 묘 등 조선 왕족의 묘를 비롯해 여염에서는 풍양 조 씨, 덕수 이 씨, 죽산 안 씨, 사천 목 씨 등의 묘역이 있다. 이는 조선시대 사대문 안과 성저십리(도성 밖 4km)에는 성묘나 벌목이 금지돼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을 벗어나 묘를 썼기 때문이다.


묘뿐만 아니라 문화재도 다수 분포해 있다. 한정식 ‘대문’에서 불과 너 댓 집 이웃에 간송 전형필 옛집(국가등록문화재 제521호)과 묘역이 있다. 간송과 아버지 전명기가 생존해 있던 1919년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전통한옥이다.


당시 지주였던 전명기는 인근에 있었던 대규모 농장과 경기 북부, 황해도에서 오는 소출을 관리하기 위해 이곳에 따로 집을 지었다. 본가는 종로 4가에 있었다. 간송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옛집 옆에 묘역을 조성하고 제사가 있거나 양주군 농장을 방문할 때 이곳에 들러 생활했다.


간송 일가는 땅도 땅이지만 종로 일대 상권을 쥐락펴락한 서울 최고의 부호였다. 간송의 재산이 한때 약 논 4만 마지기(약 800만 평 정도)로 소출 순수익이 연간 15만 원이었다고 한다. 당시 서울 시내의 큰 기와집 1채가 1000원이었다고 하니 한 해 150채씩 사들이는 어머 어마한 금액이다.


간송은 막대한 재산을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보화각(국가등록문화재 제768호)을 설립하는 데 사용했다. 보화각은 일제 강점기 해외로 반출되는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전진기지였다. 지금은 간송미술관이란 이름으로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해 있다.


간송은 휘문고보에서 야구선수로도 활약했고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법과에 들어가 1930년 졸업했다. 귀국 후 문화재 수집에 주력했는데, 휘문고보 시절 선생 고희동의 소개로 만난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인 위창 오세창과의 교유가 큰 작용을 했다. 간송(澗松)이란 호 역시 위창이 지어 준 것이다.


간송 옛집은 100년 넘은 전통한옥으로서 건축적 가치도 커서 본채 1동과 협문, 화장실, 담장 등 부속 시설이 2012년 12월 14일 등록문화재 등재됐다. 이에 도봉구는 2013년부터 2년에 걸쳐 보수 공사를 완료해 일반에게 공개했다.


한정식 ‘대문’ 뒤편은 시루봉이란 야트막한 봉우리가 있다. 시루를 닮았다고 붙은 이름이다. 시루봉 앞으로는 방학천이 흘렀다. 풍수지리학에서 말하는 배산임수다. 배산임수는 양택(주거지)과 음택(묘지) 풍수 모두에서 좋은 자리로 친다.


식객 백파 홍성유도 인근에 묻혀


2.jpg 백파 홍성유와 다담회 회원들이 경기도 이천 ‘놀부집’에서 찍은 단체사진. 뒷줄 가장 왼편이 ‘대문’ 정명용 회장, 사진 가운데 넥타이를 매고 서 있는 사람이 백파 홍성유 선생.

과거에는 워낙 오지이고 민가가 없어서 묘를 많이 썼다. 때문에 종교기관에서 운영하는 대규모 공원묘지도 들어서 있다. 천주교혜화동성당에서 운영하는 공동묘지가 세 곳이 있는 데, 그중 하나가 시루봉 자락 약 13만㎡(3만8000평)에 2750기 묘지를 수용하고 있는 방학동 묘원이다.


이 묘원에는 많은 유명 인사들이 묻혀있다. 대표적 인물로는 ‘표본실의 청개구리’로 유명한 횡보 염상섭, 농민문학의 선구자 소설가 이무영, 그리고 ‘소설 장군의 아들’로 유명한 백파 홍성유 등이다. 이들 중 백파는 독특하게도 우리나라 외식업계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


백파는 호방한 문체를 바탕으로 대중적 역사 소설을 즐겨 쓴 소설가로 유명하다. 풍운아 김두한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한국 근대사의 이면을 그린 ‘장군의 아들’은 1990년에 임권택 감독에 의해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져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백파는 1928년 10월 4일 서울에서 태어나 경동고를 거쳐 1952년 서울대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1957년 한국일보에 장편 소설 ‘비극은 없다’가 당선돼 등단했다. 그는 전국의 맛있는 음식점을 발굴하고 소개한 ‘한국 맛있는 집 666점’(1987)과 ‘한국 맛있는 집 1234점’(1999) 등을 발간하는 등 식도락가로도 유명했다. 2001년 2월 뇌출혈로 쓰러져 이듬해인 2002년 11월 24일 타계했다. 한국소설가협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천주교혜화동교회 방학동추모공원에 안장됐다. 이 자리에는 그의 첫 부인이 먼저 묻혀 있었다.


백파의 묘지석에는 “백파(伯坡) 선생님 여기 잠들다. 벗을 사랑하고, 술을 사랑하고, 맛과 멋을 즐기던 선생님 당신은 언제나 따뜻함이 넘치는 분이었습니다. 하늘처럼 맑게, 학처럼 고고하게 일생을 사셨던 가슴 넉넉한 신사였습니다. 이제 이 따뜻한 언덕에 편히 쉬소서”라고 새겨 있다.


백파가 펴낸 ‘한국의 맛있는 집’ 시리즈는 조선일보 등 신문에 연재한 내용을 기초했다. 당시만 해도 방송에서 맛집을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고 영향력도 신문을 따라가질 못했다. 때문에 백파가 신문에 소개한 식당은 한마디로 ‘대박’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조선일보 기자 출신인 주간조선 최준석 선임기자(전 편집장)는 백파에 대해 “외식업계에 정말 대단한 영향력을 가진 분이었다”라고 기억했다. 최 선임기자는 “백파가 소개한 식당이 지면에 실리는 날이면 식당이 북새통을 이뤘고 2주간에 1년 매출을 뽑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실로 대단했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변 외식업계에서 줄 대기와 유혹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덧붙였다.


백파가 소개한 식당 업주들은 ‘다담회’(多啖會)란 모임을 만들었다. 1993년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너른마당’이란 식당에서 발족했다. 다담회는 백파가 소개한 1234곳 식당 대표들 중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모였다. 다담이란 많이(多), 씹는(啖) 다는 한자로 음식과 인생은 오래 곱씹을수록 진정한 맛과 멋이 난다는 의미에서 지었다.


‘방학양어장’ 이어 2003년 ‘대문’ 개업


3.jpg ‘대문’ 한정식 단품 음식과 도시락(한가운데).

초대 회장은 SBS 전국 맛집 리포터로 활약했던 고 이준희 씨, 2대 회장은 백파가 맡았다. 3대 회장이 바로 이번 칼럼에서 소개할 한정식 ‘大門’(대문)의 정명용 대표다. 정 대표는 부인 권동옥 여사와 함께 ‘대문’이란 상호로 2003년부터 영업을 시작했다. 그 전 19년 동안은 ‘방학양어장’이란 횟집을 운영했다.


당시 평당 1만원 하던 땅 약 1300여㎡(400평)을 사들여 건평 120평(400㎡) 짜리 식당영업과 주거용 복합건물을 지었다. 모든 자재를 정 대표가 일일이 골라 실어 나른 후 직접 건축에도 참여해 꼼꼼함과 견고함을 더했다. 당시만 해도 파격적인 중정(中庭)을 들여 한식당의 정취를 한껏 살렸다. 개별 별실이 많아 상견례 장소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별실 이름이 방실, 학실, 양실, 어실, 장실로 이름이 붙었는데 이는 ‘방학양어장’의 오마주인 셈이다.


‘대문’의 대표 메뉴는 프리미엄 한정식코스도 있지만 최근에는 가벼운 한정식도시락, 간장게장, 보리굴비, 낙지볶음, 한방보쌈 등으로 시그니처로 내놓는다. 한정식도시락은 불고기, 보쌈, 잡채, 흑임자연근무침, 해파리냉채, 젓갈, 궁채나물, 계절나물, 김치와 밥으로 이뤄져 한정식코스 요리를 도시락 버전으로 만들어 인기를 얻고 있다.


간장게장(1만8000원)과 보리굴비(1만7000원)은 웬만한 전문점의 반값에 불과해 손님들이 많이 찾고 있다. 프리미엄 한정식 코스 요리로 나오는 메뉴를 각각 단품으로 주문할 수도 있어서 기호에 맞게 상을 재구성할 수도 있다. '대문' 한정식 음식은 고르게 높은 수준의 맛을 자랑하는 것이 특징이다.


맛과 멋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명소


4.jpg ‘대문’ 한정식은 아담한 중정을 들였고 식당 안팎을 화초와 작품사진, 수많은 소품들로 가득 채워 맛과 멋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대문’은 단순히 식사만 하는 곳이 아니다. 담장과 울타리가 따로 없는 ‘대문’은 입구서부터 다양한 장식물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정 대표가 세계 여러 여행지를 다니면서 직접 찍은 사진이 식당 내외부에 빼곡하게 걸렸다. 아마추어 작가 수준의 빼어난 솜씨다. 필자도 식당 입구에 걸린 인도 타지마할 궁전 사진을 보고 전문 사진작가가 찍은 것을 출력한 것으로 오해했을 정도다.


부인 권 여사는 다양한 종류의 생화로 식당 안팎을 꾸미는데 소홀함이 없다. 어느 하나 시들은 것이 없을 정도로 제때 교체하면서 식사 분위기를 돋운다. 아울러 다양한 소품들로 꾸며놔 대기하거나 식후에 커피 한잔하면서 둘러보는 재미를 주는 곳이다. 도봉산 시루봉 자락 명당지에 있는 한정식 명가 ‘대문’은 맛과 멋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은 정 회장 내외와 2대 대물림을 위해 자녀들이 함께 식당을 이끌고 있다.



5.jpg 사진 좌로부터 오진권 회장, ‘대문’의 권동옥 여사, 정명용 회장, 연대 외식산업고위자과정 총동문회 사무총장을 역임한 북한산 한식 ‘고향산천’ 이주영 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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