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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로 물벤 '헌인릉'...식후경은 '명인밥상'

송파구 가락동 손승달 한식명인의 야심작

제철 나물·묵나물·젓갈 등 기본 반찬 화제

육전·간장게장·낙지볶음 등 단품요리 인기          


지난 호에는 태조 이성계의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 씨가 묻힌 정릉 산책과 능 입구에 있는  ‘봉화묵집’을 소개했다. 이번 호는 태조의 아들인 태종 이방원과 그의 부인 원경왕후 민 씨가 묻힌 헌릉 산책과 인근 맛집을 소개한다. 헌릉은 순조숙황제와 순원숙황후가 묻힌 인릉과 같은 궁역이여서 흔히들 둘을 합쳐 헌인릉이라고 부른다.      


헌릉은 쌍릉으로 능상 아랫부분이 병풍석으로 둘러있다. 쌍릉은 ‘트윈베드’라고 보면 된다. 왕과 왕비의 봉문을 각각 조성하는 방식이다. 기본적인 왕릉 형식은 태조의 건원릉을 따랐다. 각 능상에 12칸으로 된 난간석을 둘러 서로 연결했다. 무덤 앞으로는 양석과 호석·문인석·마석을 배치했다.       


언덕 아래쪽에는 정자각이 있으며 능상에서 볼 때 정자각 왼쪽 편에 비각을 세웠다. 세종 2년(1420)에 원경왕후가 서거하자 광주부 대모산(현 서초구 내곡동)에 산릉을 조성하고 능호를 헌릉이라 했다. 이태 후인 세종 4년에는 태종이 훙거하자 원경왕후 능 옆자리에 쌍릉으로 안장했다. 요즘  KBS 1TV에서 한창 방영 중인 대하드라마 ‘태종 이방원’을 떠올리면 나란히 누워 있는 모습이 다소 이질적이다.       


헌릉은 조선시대 최초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능상을 나란히 조성했다. 엄밀히 말해 진짜 최초 쌍릉은 북한에 있는 제2대 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인 후릉이다. 헌릉은 남한에서 처음 조성된 것이다. 넓은 능역과 확 트인 전경, 정자각에서 능상까지 높이 차이(사초지) 등 조선 전기의 왕릉의 위엄을 잘 드러나 있는 능이다. 물론 지금은 주변 궁역에 비닐하우스가 잔뜩 들어서 있어서 다소 볼썽사나운 모습이 없지 않다.     

  

이방원이 직접 고른 자기 묘 ‘헌릉’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릉은 태종(이방원)이 상왕 시절에 직접 지시해 정한 곳이다.[사진=문화재청]


세종실록 세종 2년 9월7일(임신) 2번째 기사를 보면 헌릉은 태종이 상왕 시절에 직접 지시해 정한 곳임을 알 수가 있다. 그 내용을 보면 ‘광주의 대모산 자락에 천광을 하는데 주척 기준으로 깊이가 13척 3촌이다. 흙의 빛이 번지르르하며 윤택하고 수기는 없었다. 상왕이 일찍이 이양달로 하여금 수릉을 살펴 이 땅을 얻어 놓은 것이다. 이날에 이르러서 상왕이 선지를 통하여 이르기를, ‘조금 동쪽으로 하고 그의 오른편을 비워 두어서 나의 백세 뒤에 쓰게 하라’는 기록이 있다.      


헌릉의 능침은 모두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다. 병풍석 면석에는 십이지신상과 영저와 영탁을 새겼다. 문무석인은 각 2쌍씩, 석마, 석양, 석호는 각각 4쌍식 배치했다. 이는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玄·正陵) 제도를 계승한 것으로 조선왕릉 중에서 석물이 2배나 많은 것이다.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은 5개로 조선 전기의 상설제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향로, 정자각, 신도비각이 배치돼 있다. 신도비각에는 1422년(세종 4)에 세운 신도비(보물)와 1695년(숙종 21)에 임진왜란으로 손상된 신도비 옆에 증설해 세운 신도비 등 2개의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세종 때 예문관 대제학 변계량이 짓고 예조참의 성개가 썼다. 내용은 “하늘이 장차 유덕한 이에게 큰 임무를 내려주려 할 때에는 반드시 성자·신손을 낳게 하여 큰 운수를 열고 큰 복조를 길게 하는 것이다.”로 시작해 “우리 신의왕태후께서 지정 정미년 5월 신묘에 태종을 함흥부 후주의 사제에서 낳으니, 우리 태조의 제5자이었다.”로 이어지고 명나라 황제에게 보낸 일, 제1·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일 등 일대기를 적고 있다.    

  

정자각 북서측에는 제향 후 축문을 태우는 소전대가 남아 있다. 이는 태조의 건원릉, 신덕황후의 정릉, 태종의 헌릉 등 조선 전기 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석물이다. 헌릉을 보면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란 말이 떠오른다. 부부 사이가 좋든 나쁘든 어쨌거나 나란히 누워있지 않는가. 헌릉을 돌아본 후 산책길을 따라 인릉으로 넘어갔다.         


천장 예산절감 표본 순조 ‘인릉’

순조 인릉은 세종 영릉, 장경왕후 희릉을 천장하고 묻은 석물을 재사용해 예산을 아낀 능이다.[사진=서울역사박물관]

인릉은 조선 23대 순조숙황제와 순원숙황후 김 씨의 능이다. 인릉은 같은 봉분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이다. 헌릉이 트윈베드라면 인릉은 더블베드다. 우왕좌비(右王左妃) 형식에 따라 앞에서 봤을 때 왼쪽에 순조, 오른쪽 순원숙황후를 모셨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돼 있다. 비각 안에는 두 기의 능표석이 있는데 1기는 조선시대에 세운 조선국 표석이고, 1기는 대한제국시대에 세운 황제국 표석이다. 고종 때 일괄적으로 대한제국 표석을 만들면서 2기가 들어선 것이다.      


능침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둘렀다. 인릉은 원래 파주에 있었다가 1856년(철종 7)에 현재의 자리로 천장 했다. 천장 후에 편찬한 ‘인릉천봉산릉도감의궤’에는 능침 석물을 다시 사용 한 기록이 있다. 다시 사용한 석물은 1469년(예종 1)에 세종의 영릉을 천장하고 묻은 구 영릉 석물과 1537년(중종 32)에 장경왕후의 희릉을 천장 하고 묻은 구 희릉 석물이다.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 대부분의 석물이 재사용됐다. 이는 왕릉 천장에 따른 비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다.      


1834년에 순조가 즉위 34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835년(헌종 1)에 파주 교하의 인조 장릉 근처에 능을 조성했다. 그러나 풍수지리적으로 불길하다는 여론이 제기되면서 1855년(철종 6)부터 본격적인 천장 논의 끝에 이듬해에 헌릉 서쪽 언덕인 현재 자리로 천장 했다. 그 후 1857년(철종 8)에 순원숙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인릉에 합장했다.     


순조는 정조와 유비 박 씨의 아들로 1790년(정조 14)에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났다. 1800년(정조 24)에 왕세자로 책봉되고 같은 해 6월에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대왕대비인 정순왕후 김 씨(경주)가 수렴청정을 했다. 이 시기에 정순왕후를 비롯한 벽파와 시파가 대립하는 시기였고 이는 천주교 박해로 이어졌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대규모 천주교 탄압이 벌어져 정약용 등이 유배당하고 1년 사이에 300여 명의 교인이 죽음을 당했다.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에서 물러나자 정국 주도권은 순원숙황후의 아버지인 김조순에게 돌아가고 이때부터 안동 김 씨 세도정치가 시작됐다. 조정의 요직은 외척 중심으로 독점되면서 갖은 부정부패의 만연과 수해, 전염병 등으로 민심이 피폐해지자 홍경래의 난(1811년) 등 민란이 일어났다.      


이에 순조는 세도정치를 견제하기 위해 아들 효명세자(문조)에게 대리청정을 명해 수습하려 했지만 그가 일찍 세상을 뜨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순조는 경희궁 회상전에서 45세로 훙서했다. 묘호가 처음엔 순종이었다가 철종 때 순조로 추존됐고 대한제국 선포 후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에 따라 순조숙황제가 됐다.   

   

순원숙황후는 본관이 안동인 영안부원군 김조순과 청양부부인 심 씨의 딸로 한성부 양생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순원숙황후는 왕세자빈 간택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냈지만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외척 김관주 등의 방해로 삼간택에서 탈락될 위기에 처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1802년(순조 2) 10월에 왕비로 책봉됐다. 인릉에 남아있는 조선 왕실의 역사는 이 정도다.      


청계산입구역 먹거리촌 발달

청계산입구역에서 핫한 곳은 ‘청계산곤드레집’, ‘소백관’, ‘청계산기와집’, ‘서산공원’ 등이고 요즘은 ‘부안애서’가 뜨고 있다.

중년들에게 헌인릉에 대한 기억 중 상당 부분이 소풍이란 공통점이 있다. 서울 지역 중고등학교 소풍지로 헌인릉, 서오릉, 동구릉 등 시 외곽지역 왕릉이 인기가 많았다. 당시만 해도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낮았고 능침까지 올라가도 아무런 제재가 없었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지금이야 언감생심이지만 당시만 해도 왕릉은 그냥 큰 무덤이었던 것이다. 이번 헌인릉 답사는 조선 역사 초기 왕권 확립에 큰 역할을 했던 태종 이방원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때마침 TV 대하드라마와 묘하게 겹쳐 재미를 더했다.     


열두 가지 반찬 그 이상의 맛

송파구 가락동의 ‘명인밥상’은 갖은 제철 나물과 묵나물, 젓갈, 조림 등으로 이뤄진 12첩 반찬군단과 육전, 간장게장, 낙지볶음 등 단품요리 조합이 좋다.


3시간가량 왕릉 2기를 돌았더니 적당한 허기가 졌다. 헌인릉 인근에는 식당가가 그리 발달하지 않았다. 그나마 인근에 신분당선 청계산입구역에 식당가가 비교적 크게 발달해 있어서 이곳을 이용하면 된다. 청계산입구역에서 가장 핫한 곳은 ‘청계산곤드레집’, ‘소백관’, ‘청계산기와집’, ‘서산공원’ 등이고 요즘은 ‘부안애서’가 뜨고 있다.      


필자와 일행들은 그러나 이들의 유혹(?)을 물리치고 송파구 가락동에 있는 ‘명인밥상’으로 향했다. 이곳은 언필칭 ‘외식업계 형님’, ‘명인’으로 불리는 손승달 오너셰프가 운영하는 한식당이다. ‘명인밥상’의 시그니처는 거창한 단품요리가 아닌 갖은 제철 나물과 묵나물, 젓갈, 조림 등으로 이뤄진 12첩 반찬에 있다. 필자가 보기엔 그렇다는 것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여기에 시래기된장지짐까지 보태지면 천하무적 반찬군단이다.      

이번까지 두 번째 방문인데 맛의 변화가 없다는 것이 장점이다. 돌솥밥과 함께 제공되는 미역국은 휴대용 가스버너에서 계속 데워먹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부드러운 육전과 은근한 불맛의 낙지볶음, 간장게장, 모둠전 등은 반주를 겸할 수 있는 최적의 조합이다.      


‘명인밥상’ 소개 글을 보면 식당의 철학이 잘 표현돼 있다. ‘밥과 반찬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맛있는 것만 먹어도 짧은 인생! 스토리와 전통의 생명력 있는 맛의 경험을 드립니다. 엄선된 고기와 해산물 손질부터 조리까지 청결, 맛, 서비스 모든 부분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태 한식 명인들이 만든 20여 가지 한식 셀프바를 운영한다고 적고 있다. 특히 지역의 숨은 맛과 스토리를 찾고 전통의 맛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내세운다. 이런 문구가 현장 상황과 가히 틀리지 않는 것은 이를 지키려는 오너십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너무 시끄럽게 웃고 떠든다고 옆방의 어필까지 나왔으니 이날은 분명 유쾌하고 기분 좋은 식사를 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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