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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전찻길 따라 3만 보 걸으면 당기는 맛

서대문 전차정거장터부터 청량리까지,,,‘전라도집 5대 식당'서 마무리

전차가 도로 위를 누비던 시대를 기억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1899년부터 1968년까지 70년간 서울 시내 동서남북을 오갔기 때문이다. 대한제국 때 도입된 전차는 일제의 강제병합 이후 경성의 식민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노선 신설과 복선화가 이루어졌다. 1920년대 후반 버스가 등장하면서 교통 경쟁관계가 시작됐지만 일단은 서울의 교통체계는 전차를 중심으로 재편됐다.      


대한제국의 도시개조사업으로 부설된 전차는 초기에는 도성의 중심 가로인 종로를 중심으로 홍릉과 용산, 마포 등의 조선인 거주지를 운행했다. 그러나 일제 식민시기에는 청계천 남쪽 황금정통(현 을지로)을 중심으로 신용산과 본정(현 충무로) 등 일본인 거주지에 신설됐다.     


1916년 총독부 신청사 건립이 시작되면서 전차노선은 안국동, 통의동, 효자동까지 확장됐다. 1920년대 후반에는 총독부와 남대문을 잇는 전차 태평통선이 신설됨에 따라 일제의 군도(軍都) 용산까지 직통노선이 완성됐다. 당초 한성의 도시개조사업이 식민도시 경성개조사업으로 둔갑한 것이다.      


1928년 경성부의 부영버스와 1929년 경인버스가 잇따라 등장하면서 전차 독점체제였던 도시교통이 버스와 경쟁체제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일본의 교통정책은 철도 중심의 궤도교통을 보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동차교통 발달은 억제됐다. 이 같은 정책에 따라 전차는 일정 기간 대중교통의 주도권을 잡았지만 인구 증가에 따른 교통수요를 따라잡지 못해 한계에 이르게 된다.       


1920년대 이후 경성의 인구가 증가하고 시가지 확장이 일어나면서 교통수요도 늘어났다. 도심과 교외지역 교통망 연결을 위해 전차·버스노선의 확충과 운행대수의 증가는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전차 운영사인 경성전기의 경영방침이 현상 유지였기 때문에 1930년대 중반 이후 경성은 교통난에 시달렸다.      


대중교통은 공익을 위해 저렴한 요금과 시설 확충을 꾸준히 해야 하는 사업이었지만 사기업이었던 경성전기는 회사 이익을 우선했다. 해방 후 서울 인구는 100만 명을 넘어섰지만 전차 운행대수는 외려 감소하는 등 교통난이 가중됐다. 이후 전차를 늘리는 등 안간힘을 썼지만 버스에 비해 효율이 떨어지는 전차의 선로는 서서히 철거됐으며 끝내 1968년 모두 사라진다.       


전차 1899부터 1968년까지 운행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 문화지평은 지난 9일부터 ‘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 역사’를 주제로 총 8차례 답사를 한다.


이와 관련 필자가 대표로 있는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 문화지평은 공익활동 지원사업으로 ‘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 역사’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9일 첫 프로그램으로 1899년 5월 개통한 첫 전차 노선인 서대문부터 청량리까지 전찻길을 따라 답사하며 다양한 주변 역사를 알아봤다.      


최인영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연구교수는 이를 “서대문정거장은 대한제국의 중심지였던 경운궁과 외국인 거류지였던 정동 일대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는 지리적 이점이 있었다”고 그의 박사논문 ‘전차교통의 변화 양상과 의미(1899~1968)’에서 분석했다. 


당시 정동 일대는 각국 공사관, 영사관이 밀집했고 주변으로는 이들을 대상으로 물건을 파는 상점들이 들어섰다. 대부분의 상점들은 주로 대안문(현 대한문) 앞이나 서대문정거장 주변에 몰려있었기 때문에 성벽을 사이에 둔 서대문정거장은 여객뿐 아니라 화물 운송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인천에서 서대문정거장까지 경인철도를 통해 화물이 운송됐고 정동 일대에 위치한 외국계 회사까지는 전차를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서대문정거장 역할 때문에 전차 노선도 남대문이 아닌 서대문으로 바뀌었고 서대문정거장과의 연결을 위해 서대문밖으로 전차 ‘서대문선’이 부설됐다.     


첫 전찻길 답사는 서대문정거장터 표석이 있는 이화외국어고 정문에서 시작했다. 경인선의 시발역 표시다. 전차 역시 경인선과 연계 때문에 당초 남대문을 시발역으로 계획했으나 서대문으로 바뀌었다.     

 

전상봉 역사문화해설사(서울시민연대 대표)는 “전차는 근현대 서울의 주요 교통수단으로써 시민들의 삶과 시간 개념, 공간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며 “이번 프로그램은 문화재로 남은 노면전차가 가져온 도시 경관의 변화를 이해하는 시간을 될 것”이라고 운을 뗐다.      


서울역과 용산역 중심으로 철도운송이 재편되면서 서대문정거장은 1919년 3월 폐역이 됐다. 이 지역에는 철도사택이 들어서면서 관사촌을 이루다가 1955년 이화학원이 매입해 외국어고를 지었다. 이화여자외국어고 옆 농협중앙회 자리는 과거 스테이션호텔이 있었다. 1901년 문을 연 호텔은 주인이 영국인 엠벌리에서 프랑스인 마르텡으로 바뀌면서 애스터하우스(Astor House)로 거듭났다.      


이러한 전찻길의 개설과 확장, 철거에 따른 정거장 주변의 역사·문화자원, 자연·생태자원, 산업·관광자원 등에 대한 시층별 ‘시공간’ 답사를 통해 서울이라는 공간의 역사적 가치 재발견하는 것이 이번 답사 프로그램의 목적이다.      


높은 퀄리티 소·돼지 부속 전문

‘전라도집 5대 식당’은 머리고기와 내장을 잘 삶아 높은 퀄리티의 맛을 제공한다.

첫 답사는 오전 9시에 시작해 오후 4시까지 점심 식사시간을 빼고 무려 6시간 동안 3만보를 걸었다. 많이 걸어선지 이른 저녁이지만 배가 출출했다. 29명이 출발해 19명이 ‘완답’을 했고 식사를 함께할 8명이 찾은 곳은 청량리시장 뒷골목 ‘전라도집 5대식당’이란 소머리국밥·순대국밥 전문점이다.      


필자가 청량리 뒷골목을 여러 차례 누비면서 눈여겨봐 뒀던 식당이다. 점포 겉모습이 허름해서 음식도 당연히 질보단 양에 충실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보기 좋게 빗나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상당한 고퀄리티로 머리고기와 내장을 삶아냈다.      


첫 주문은 머리고기와 모둠순대로 시작했다. 소량 다품종 주문을 시연하기 위해 접시 크기를 중(中)으로 했다. 식사 인원이 여럿일 경우 자주 사용하는 주문기술(?)이다. 다양한 메뉴를 맛보기 위함이다.      


제공된 머리고기와 모둠순대는 가격에 걸맞은 자태(?)를 뽐냈다. 머리고기는 쫄깃함과 고소한 맛, 적절한 살과 기름부위 등 균형 잡힌 한 접시였다. 모둠순대는 접시에 담은 머리고기와 달리 달군 철판에 담겨 나왔는데, 부위 속성을 알면 무릎을 칠만한 배려다.     


모둠순대에 조금씩 담겨 나온 오소리감투와 새끼보의 식감이 좋아 따로 한 접시 씩 달라고 두 번째 주문을 넣었다. 오소리감투는 돼지 위 부위다.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한 식감을 갖고 있다. 오소리감투는 권력다툼을 의미하는 데, 그만큼 돼지 위를 두고 쟁탈전을 치른 데서 나온 어원 이리라.        


새끼보는 소나 돼지 자궁을 일컫는 말이다. 아기보, 암뽕 등으로도 불린다. 이 식당서 파는 새끼보는 돼지의 것이다. 쫄깃함보단 부드러움이 더하다.  맛보다는 식감을 느끼려는 각별한 입맛이 아니면 머리고기나 순대를 선택하는 편이 좋겠단 개인적 생각이다.      


이날은 머리고기, 모둠순대, 오소리감투, 새끼보 등 안주류를 주로 접했지만 다음번엔 국밥을 먹어봐야겠다. 안주류로 나온 메뉴를 국밥에 ‘퐁당’ 빠트리면 고스란히 해당 국밥이 된다. 이 식당을 빠져나와 길을 되짚어 동대문 창신골목시장서 2, 3차로 배를 불린 이야기는 생략한다. 수원성갈비, 나주홍어 등 이미 한번씩 소개한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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