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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과 남양주를 잇는 애절한 사랑, 그리고 식후경

단종 장릉과 정순왕후 사릉 답사 후 찾은 맛집 

강원도 영월 봉래산 골짜기 돈육 맛집 ‘육정가’ 

영월 역전 다슬기해장국촌 강자 ‘다슬기한마당’

단종장릉 인근 감자보리밥 유명 ‘장릉보리밥집’

여독을 푸는 새콤달콤한 육수맛 ‘팔당초계국수’

정순왕후사릉 근처 콩·두부 요릿집 ‘고모네콩탕’         


지난 호 말미에 옛 전찻길 신용산선 답사를 마치고 강원도 영월로 왕릉 답사를 위해 떠났다고 적었다. 이번 호는 15일 다녀왔던 영월에 있는 단종 왕릉 장릉(長陵)과 22일 경기도 남양주 진건읍에 있는 정순왕후의 사릉(思陵)을 다녀온 이야기와 함께 인근 식후경 식당을 소개한다.      


강원도 영월읍내에 있는 단종이 사사당한 관풍헌. 뒤에 모텔 건물이 볼썽사납다.


장릉은 조선 6대 단종의 능이다. 단종은 1457년(세조 3년) 서인인 노산군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다. 처음엔 영월 청령포로 유배됐으나 홍수 때문에 읍내 관풍헌으로 옮겼다. 단종은 이곳에서 계유정난으로 왕권을 찬탈한 숙부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고 숨을 거뒀다. 세조실록에는 자결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버려진 시신을 영월호장 엄흥도가 수습해 가매장했다. 엄홍도가 관을 매고 매장할 곳을 이리저리 찾다가 소나무 밑에 사슴 한 마리가 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엄홍도가 다가가자 사슴은 자리를 피했고 그 자리에 앉아 쉬었다가 일어서려는데 지게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엄홍도는 그곳에 단종을 급히 가매장했는데, 그곳이 지금 장릉 자리다.      


그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장사 지내려 하자 마을 사람들은 세조의 후환이 두려워 말렸다. 엄홍도는 “옳은 일을 당해도 화를 입어도 달게 받겠다”란 말을 남기로 야밤에 홀로 장사를 지낸 후 충청도 동학사로 숨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동학사엔 단종, 정순왕후, 엄홍도의 위폐가 모셔져 있다. 후일 가매장한 노산군 묘를 찾아낸 이는 영월 군수 박충원으로 이에 대한 기록을 비석에 기록한 낙촌비가 장릉 입구에 있다.   

    

조선왕조의 가장 아픈 손가락 단종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돼 위리안치 된 청령포. 홍수가 나서 관풍헌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단종은 조선왕조 역사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자 종천지통(終天之痛)이다. 단종은 태어날 때부터 즉위와 유배 기간, 그리고 사사된 그날까지 만 16년의 짧은 생을 살았다. 행복한 날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의심이 들 정도로 슬픔과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세종의 아들이자 단종의 아버지인 문종이 세자 시절 왕세자빈 권 씨(현덕왕후)는 단종을 낳은 지 이틀 만에 산후통으로 사망했다. 세종과 소현왕후의 적통 세손으로 태어난 단종이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던 것이다. 친모 품에 한번 안겨보지 못하고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작은 할머니) 젖을 먹고 자랐다. 8살 원손을 왕세손으로 명한 세종은 1450년 승하한다. 끔찍하게 사랑을 주던 할아버지의 부재, 두 번째 맞는 큰 슬픔이다.      


문종은 왕세손을 즉시 왕세자로 책문했지만 그 역시 세종 승하 2년 후 갑자기 훙서한다. 천붕의 슬픔이 채가시지 않은 5일 후 단종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조선 6대 왕에 즉위했다. 문종이 생전에 정한 고명대신인 김종서, 황보인 등이 황표정사를 행했다. 어린 단종의 인사권을 행하기 어렵자 대신들이 관직 후보자 이름에 황색 표기를 한 것을 황표정사라 하는데, 이런 인사개입으로 국정 혼란이 가중됐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등 의지할 곳이 모두 사라진 단종에게 궁과 왕좌는 두려움 자체였다. 숙부인 이방원(수양대군)은 이를 틈타 계유정난을 일으켜 세조가 된다. 세조는 즉위하자마자 단종에게 젖을 먹여 키운 혜빈 양씨마저도 청풍으로 귀양 보냈다. 이젠 정말 궁 안에는 단종의 바람막이가 돼줄 이가 한 명도 없었다. 단종의 피난처는 한 뼘도 남지 않았다.       


단종의 여섯 번째 숙부이자 세조의 친동생인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도모했으나 실패했다.  끝나면서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머나먼 창령포 유배길에 올라 끝내 사사되면서 단종애사의 막을 내렸다. 송현수(단종의 장인) 등도 단종 복위를 계획했지만 사전 발각돼 실패했다. 이를 빌미로 세조는 노산군을 첩첩산골 영월로 유배 보냈다.      


유배 호송과 사약 집행을 했던 금부도사 왕방연은 어명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청령포 건너편 강 언덕에서 비통함을 시조로 표현했다. 구전돼 오던 내용이 한시로 남으면서 후대에 전해졌다.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단종 못지않은 비극적 정순왕후의 삶       

정순왕후 사릉의 잉(孕)에서 답사 단체사진을 찍었다.


비극은 끝나지 않고 또 다른 갈래로 이어졌다. 단종보다 1살이 더 많았던 비 정순왕후는 단종이 유배를 가자 대군부인으로 강등되고 생이별을 하게 된다. 80 평생 동대문 밖 숭인동에 있는 정업원 뒷산 동망봉에 올라 영월 쪽을 바라보며 단종을 그리워했다. 처음엔 시녀들이 구해오는 양식을 받아 생계를 꾸렸으나 후일엔 염색 일을 직접 하면서 호구를 했다고 전해진다. 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 이별을 한 곳은 청계천 영도교다. 영영 되돌아올 수 없는 다리란 의미로 붙였다.      


정순왕후가 죽자 중종은 대군부인의 예로 해주 정씨 사가 묘역에 묘를 조영했다. 그리고 177년 후 숙종 24년(1698년) 단종과 정순왕후를 추승해 종묘 영년전에 위패를 들이고 능호를 각각 장릉과 사릉으로 했다. 사릉은 ‘단종을 밤낮없이 공경함이 바르다’란 뜻을 담고 있다. 사릉 인근에는 해주 정씨의 사장 묘가 꽤나 많이 분포해 있다. 이는 왕가 능역에 사가 무덤을 두지 않는다는 원칙에 맞지 않지만 정순왕후의 시누이이자 단종의 유일한 누이 경혜공주가 출가한 해주 정씨 묘역에 조영했던 묘를 이전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했기 때문에 지금의 역사로 남았다.        


사릉은 도성으로부터 100리 안에 있어서 왕실에서 친히 제향을 했다. 그러나 단종 장릉은 수 백리 떨어진 곳이라 영월 현감이 대행하도록 했다. 그 역사가 이어져 내려와 지금도 단종제 초헌관은 영월군수가 하며 심지어 장릉 관리주체도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가 아닌 영월군이다. 어린 단종과 정순왕후의 유배와 죽음, 생이별과 모진 수모 등을 김태휘 해설사로부터 듣고 있자니 가슴 한쪽이 저려왔다.      


함께 답사를 다녀왔던 황규인 씨는 장릉을 보고 “영혼이라도 함께하기를 기원하는 정순왕후의 사릉에서 모셔온 정령송 한그루가 능침 길가에 동행하듯 서있다. 강원도 영월 외딴곳에 홀로 외로움과 억울함에 몸서리쳤을 그의 혼백을 이처럼 무심하게 치제했었음에 참으로 미안하고 안타까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고 답사기를 적었다. 함께 했던 모두의 아린 마음을 대변하는 글이라 큰 공감을 이끌어 냈다.   

   

장릉·사릉 다니며 다양한 미식 접해     

번호 순서대로 육정가의 돈육 3종 세트, 다슬기한마당의 다슬기순두부, 장릉보리밥집의 보리밥, 팔당초계국수의 초계비빔국수, 고모네콩탕의 황태두부전골.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일행보다 하루빨리 전날 밤 영월에 도착한 필자는 단백질 보충을 위해 영월 봉래산 자락으로 스몄다. 이리저리 빅데이터를 돌려보니 이곳에 질 좋은 숙성 돼지고기를 파는 ‘육정가’란 식당이 있었다. 저녁 8시가 가까워지는 시간인데도 만석이었다. 커피 한잔 마실 시간만큼 기다리다 안내를 받고 삼겹살, 목살, 가브리살 3종을 골고루 주문했다.      


선진포크 원육을 웻에이징 해서 사용했다. 숙성에 공을 들여서인지 골짜기치곤 싸지 않은 가격이다. 공짜로 나오는 된장찌개를 업그레이드시켜 ‘된장전골+생면+볶음밥’ 구성으로 정식 메뉴로 만들었다. 매우 영리한 메뉴의 탄생이다. 육씨 성과 정씨 성을 가진 부부가 창업해 상호가 육정가일거란 아르바이트생의 뇌피셜이 재미났다. 세경대 간호학과 신입생이라는 아르바이트생의 서글서글한 대응이 기분을 좋게 하고 음식 맛을 한껏 높였다. 서울서 유학을 왔다는 데 성품이 참 좋다. 간호학이 그에게 적격인 듯 느껴졌다.      


뒤이어 간호학과 2학년 제천생 여학생의 등장했다. 옳지 그대로구나, 후배를 같은 식당 알바로 데려온 과 선배였다. 영월의 밤이 이들 청춘들로 인해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 세경대는 간호학과 등 보건계열이 강세를 보이는 대학이다. 미안하게도 필자는 처음 들어봤지만 이들로 인해 좋은 인상을 받게 됐다.      


다음날 아침에는 속풀이를 위해 영월 역전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다슬기해장국 집을 찾았다. ‘다슬기향촌성호식당’엘 찾았으나 이른 아침부터 밥 대신 번호표를 쥐어줬다. 기다림 보다 옆집인 ‘다슬기한마당’에서 편한 식사를 선택했다. 순두부탕에 다슬기를 넣은 다슬기순두부가 매력을 뽐낸다. 청양고추를 털어 넣자 매력을 더더욱 불 뿜는다.   

   

식재료 색으로는 생경한 짙은 청동색의 다슬기. 마치 전복 쓸개 같은 색인데, 건강한 맛이다. 반찬은 염도만 잘 잡으면 다슬기향촌성호식당을 넘어설 수 있을 듯하다. 관광지라 그런지 영월의 식대가 전반적으로 높게 형성돼 있다. 관광 활성화를 위한다면 영월군청과 소상공인은 이 부분에 대한 고민도 필요해 보인다.     

 

점심은 장릉 인근에 있는 ‘장릉보리밥집’에서 서울서 온 일행들과 만나 함께 했다. 열다섯 가지 정도 되는 갖은 반찬에 포슬포슬한 감자가 들어 있는 감자가 들어 있는 보리밥 메뉴가 일품이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는 길이 막혀 길 위에서 끼니를 거를까 봐 팔당에 내려 ‘팔당초계국수’를 한 그릇 했다. 새콤달콤한 육수 맛이 초여름 갈증을 풀기 적당했다. 올여름 초계국수를 사랑하기로 마음먹게 된 곳이다. 남양주 사릉 답사 후에는 ‘고모네콩탕’이란 콩과 두부 음식 전문점에서 식후경을 했다. 맛은 적당히 있으되 인심은 적당히 아쉬운 곳으로 정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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