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림시장사거리 인근 단일 메뉴 승부 식당...‘용마해장국’ㆍ'용마갈비'
우림시장사거리 인근 단일 메뉴 승부 식당들
소 목뼈·선지·우거지 환상 조합 ‘용마해장국’
40년 전통 시간이 멈춘 듯한 옛맛 ‘용마갈비’
1933년 조성된 망우리공동묘지가 몇 번의 명칭 변경을 거쳐 지난해 4월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탈바꿈했다. 묘역에는 애국지사, 문화예술인, 사회인사 등 근현대사의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인사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누워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망우리란 지명에서 유래했다. 숙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현재 건원릉 자리를 친히 답사하고 무학대사의 권유로 이곳을 자신의 능지(陵地)로 결정했다. 기쁜 마음으로 환궁하던 중 지금의 망우리 고개에 올라 ‘내가 이 땅을 얻었으니, 근심을 잊을 수 있겠다.’라고 말한 데서 ‘망우리’(忘憂里)라는 이름이 붙게 됐다. 태조의 능지는 구리 인창동 지역에 건원릉을 포함해 9개의 조선 왕릉(현릉·목릉·휘릉·숭릉·혜릉·원릉·수릉·경릉)으로 이루어진 구리 동구릉 경내에 있다.
일제의 강제병합 후 강점기 시대인 1912년부터 1932년 사이에 망우리 망우산에는 화장장과 공동묘지가 등장했다. 우리의 전통 장례문화는 땅에 시신을 묻는 매장문화였다. 조선총독부는 자신들이 정한 공동묘지 외에는 묘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공동묘지 조성을 위해 경성부는 1920년대 전후로 신당리, 아현리, 이태원, 수철리 등 동서남북에 부립공동묘지를 설치했다.
이들 네 지역의 공동묘지 터가 부족해지자 일제는 1933년 망우리공동묘지를 조성했다. 경성부는 망우리 일대의 임야 약 250만 평방미터(75만 평)를 매입하고 그중 170평방미터(52만 평)를 묘역으로 조성했다. 이 계획에 따라 그해 6월 망우리공동묘지 시대가 열렸다.
이후 해방과 한국전쟁이 이어지면서 서울 상황이 혼란스러워졌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많은 사망자를 냈고 서울 시내에는 미처 수습하지 못한 시신들을 서둘러 가매장했다. 이에 서울시는 시내 곳곳에 묻혀있던 시신을 망우리공동묘지로 이장했다.
1933년 망우리공동묘지가 조성된 후 이곳은 40년 동안 묘지 4만7700여기로 가득 차면서 일제강점기, 해방과 한국 전쟁, 산업화 시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영원한 안식처가 됐다. 한식과 추석 때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성묘객으로 가득했다. 1973년에 접어들면서 더 이상 묘지로 쓸 공간이 없어졌다. 공동묘지로서의 역할을 끝난 것이다.
그러면서 변화가 생겼다. 더 이상 새로운 묘지를 조성하지 않으면서 1977년 망우리공동묘지에서 망우묘지공원으로 명칭을 바꿨다. 이후로도 기존 안장된 묘주의 가족과 후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1990년대 들어 커다란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공원에 묻힌 위인들의 얼을 기리자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이다. 1997년부터 독립운동가와 문학인 등 15명 역사위인의 무덤 주변에 추모비가 세워졌고 1998년 망우리공원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2000년대 들어 이 공간은 시민과 역사가 호흡하는 곳으로 변모했다. 일대가 공원화되고 시민들의 역사인식이 점차 높아지면서 망우리공원을 찾는 발길이 늘어났다. 성묘의 공간이 아니라 시민들의 여가와 산책, 운동과 힐링을 즐기는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고, 2016년 망우리 인문학길 사잇길 2개 코스가 조성되면서 근현대 역사인물의 스토리텔링 보물창고가 됐다.
2022년 드디어 지금의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무명의 공동묘지에서 망우리공동묘지, 망우묘지공원으로 이름이 바뀌더니 90년대 말 묘지 기능이 사라지면서 망우리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됐다가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네 번의 명칭 변경 속에는 우리의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고 지금은 역사위인을 기리면서 역사와 문화를 향유하는 복합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 안장된 애국지사로는 대표적으로 유관순 열사를 들 수 있다. 1919년 기미년 만세운동을 하다 투옥돼 이듬해 9월 순국한 그의 시신은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돌보는 사람이 없어서 묘지를 망실하고 말았다.
이태원 지역이 주택가로 개발되고 길이 나면서 이태원 공동묘지에 있던 무연고 2만8000여 기를 망우리공동묘지로 옮겼다. 이때 유관순의 묘 역시 무연고 합장묘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하고 기리고 있다. 애국지사 묘로는 유관순을 비롯해 좌우 이념투쟁에 희생된 삼학병, 도산 안창호 곁에 잠든 흥사단원 향산 이영학, 도산 안창호(가묘·도산공원으로 이장), 위창 오세창, 만해 한용운 등이 있다.
문화예술계는 근대 조각 선구자 권진규, 소파 방정환, 이중섭, 박인환 등과 사회인사로는 송촌 지석영, 죽산 조봉암 등이 있다. 요절한 조선의 명은공주와 조선후기의 영의정 부마 김현근이 묻혀 있다. 아카시아를 보급한 산림관료 사이토 오토사쿠와 산림녹화에 힘쓴 아사카와 다쿠미 등 일본인도 있다.
문화지평, 도시역사문화연구회 회원들과 함께 김태휘 해설사를 앞세워 이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보는 시간을 지난 5월 28일 가졌다.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있기 때문에 하루에 돌기에는 역부족이라 몇 차례 나눠 돌아보기로 하고 이날 첫 방문을 한 것이다.
2017년 이후 첫 방문인데, 산뜻한 공원으로 바뀐 모습에 깜짝 놀랐다. 심지어 셔틀버스까지 오가고 있어 접근도가 좋아진 것이 큰 변화 중 하나다. 중랑망우공간에서 시작한 답사는 인물가벽, 김말봉, 유관순, 노고산천골취장비, 지석영, 아사카와 다쿠미, 안창호, 유상규, 권진규 묘 등을 둘러봤다.
한 여름이 시작되는 때라 잡초가 무성하게 올라온 묘역이 많았다. 묘역관리에 아쉬움이 많아 보여 자원봉사 단체와 협업으로 묘지 제초와 묘역 주변 정비 관련 사업을 응모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여성 최초의 예술원 회원인 소설가 김말봉과 그의 부군 묘에 무성히 자란 묘를 보고 있자니 여럿이 달려들면 묘를 금세 단정한 모습으로 만들 것 같은 충동은 비단 필자만의 마음일까. 이런저런 마음을 뒤로하고 식후경을 위해 사전에 봐둔 ‘용마해장국’으로 향했다.
망우역사공원에서 약 25분을 걸어서 망우동에 다다랐다. 망우동은 우림시장오거리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발달된 곳이다. 공원에서 시장까지는 내리막과 평지라서 딱 걷기 좋았다. 목적지는 지역 강자 ‘용마해장국’이다. 맑고 깔끔한 육수가 인상적인 해장국(9000원)으로 이열치열하기 적당이다. 탕국을 좋아하는 식객들의 성지 같은 곳이다.
이곳은 따로 주문할 필요가 없다. 일단 앉기만 하면 자동으로 1인1그릇으로 주문이 접수된다. 메뉴가 해장국 딱 한 가지뿐이기 때문이다. 소 목뼈와 선지, 콩나물, 우거지, 다진 마늘 한 숟가락이 주요 식재료다. 설설 끓는 해장국이 나오면 다진 마늘을 추가하거나과 청양고추를 기호대로 첨가하면 된다. 고추기름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맑은 육수를 해하고 싶지 않았다.
뜨거우면 깍두기 국물로 살짝 식히고 신맛을 더해 먹기 편하게 하면 된다. 목뼈를 마치 소꼬리 모양으로 잘라서 자칫 오해할 수도 있을 정도다. 망우동 구석에 위치해 있지만 충실한 한 그릇 덕에 인기가 많은 곳이다. 대기 손님이 많기 때문에 점심은 1시30분 무렵 가는 것도 지혜다. 2시부터 브레이크 타임이지만 주방이 쉴 뿐 문을 닫진 않는다. 옛 위치에서 용마공원 쪽으로 50미터가량 옮겼다. 망우동 가면 꼭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다.
용마해장국서 나와 2차로는 인근에 있는 지역 강자 40년 노포 ‘용마갈비’를 찾았다. 입구가 작아서 지나치기 십상인데 이날도 그랬다. 입식이라 불편한 좀도 있겠지만 브레이크타임이 없어서 세 시경 가면 조용하고 편안하게 식사할 수 있다. 메뉴는 달랑 하나 돼지갈비(1만4000원) 단일 메뉴다. 벽에 걸린 단출한 메뉴판은 실소를 자아낸다. 한편으론 미학적이란 생각까지 들게 한다.
용마갈비 돼지갈비는 단맛을 배제하고 간명한 간장 양념이 좋았다. 설탕 때문에 찐득하게 타들어가는 강한 양념과는 결이 달랐다. 정성스레 썰어낸 김치와 채소, 넉넉한 상추와 마늘 인심이 훈훈했다. 가게 안으로 뚫을 듯 내리쬐는 강렬한 햇볕과 그것에 노출된 테이프글씨의 균열, 소박하다 못해 외로워 보이는 메뉴판이 잠시 시간을 붙잡아 세운다. 용마갈비는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곳이다.
3차는 지인이 알려 준 우림시장 내 소머리수육 식당을 찾았으나 그 집이 아니란 소리를 나중에 들었다. 이래서 망우역사공원을 한번 더 갈 때 우림시장을 다시 들러야 할 일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