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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전망의 백미를 즐기며 뜯는 갈비  

 정조 화성능행차 코스 화홍문 앞 ‘연포갈비’

[유성호의 맛있는 동네 산책/머글랭가이드@수원] 수원은 서울서 참 가까운 도시다. 기차를 타면 20분, 전철을 타도 36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서울 시내 중심에서 외곽 나가는 시간과 같다. 서울 끝에서 반대 편 끝까지 가는 시간보다 덜 걸린다는 의미다. 수원을 거쳐 가는 1호선 신창행 전철에 급행이 생기면서 생활권은 더욱 가까워졌다.      


서울 사대문 안에서 수원 행궁까지 약 40여 km다. 정확히 도로원표가 있는 광화문 사거리부터 수원시청까지 40.5km다. 성인 남자의 경우 1km 걷는 시간을 약 16분으로 치면 40km를 걸으려면 11시간가량 필요하다. 중간에 쉬고 밥 먹는 시간을 모두 합치면 수원까지 열서너 시간 정도 걸린다는 계산이다. 걸어서 하루 만에 당도할 수 있는 도보 일일생활권이다.      


사도세자를 국왕급으로 추존한 정조의 효심 

후일 장조로 추존된 사도세자가 묻힌 융릉의 모습. 문인석과 석명등, 병풍석 등이 다채롭고 화려해 정조의 효심을 엿볼 수 있다.[사진제공=경기문화재연구원]

서울에서 수원을 가장 많이 다녀온 조선의 임금이 있다. 모두 잘 알고 있는 수원 화성을 지은 정조다. 정조는 즉위하는 동안 수원 화성을 13번 다녀왔다. 우리 역사에서 ‘비운의 왕세자’란 수식어가 붙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안장한 현륭원(고종 때 융릉)이 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영조의 의해 뒤주에 갇혀 처참하게 훙서(薨逝)한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존해서 왕릉으로 모신 이가 바로 정조다. 정조는 사색당파 무리들의 입김에서 조금씩 벗어나 왕권을 늘릴 때마다 명분을 만들어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풀고자 했다. 자식 된 도리를 다하고자 한 것이다.       


이에 앞서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고 나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애도하는 의미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호를 수은묘라 했다. 영조가 훙거(薨去)하고 왕권을 이어받은 정조는 먼저 수은묘에 수봉관을 뒀다. 이어 사도세자의 시호를 장헌(莊獻)으로 올리고 수은묘를 영우원을 격상시키는 한편 사당 이름도 경모궁(현 서울대병원 내)이라고 바꿨다. 참고로 왕과 왕비의 묘는 능(陵), 왕의 생모 묘는 원(園), 그 외 왕자나 공주, 옹주 등 왕실 묘소는 묘(墓)라고 한다. 왕세자 묘를 원으로 부른 것은 영우원이 처음이었다.      


묘호가 격상되면 이에 따른 인적, 물적 지원과 관리체계 또한 강화된다. 정조는 또 경모궁의 위상을 종묘보다 한 등급을 낮고 다른 궁보다는 더 높이도록 했다. 정조는 이처럼 무리를 해서라도 아버지 사도세자의 신원(伸寃)을 풀고 신원(身元)을 회복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정조의 ‘사도세자 신원 회복’ 프로그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789년 영조의 부마이고 정조의 고모부였던 금성위 박명원이 ‘영우원의 묘역이 매우 비좁고 초라하여 서둘러 천봉 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수원 화산으로 옮길 것을 결정했다. 이때 2품 이상 대신들의 동의를 거침으로써 후환을 없앴다. 그만큼 정조의 왕권이 상당히 커졌단 의미이기도 하다. 


영우원의 수원 천봉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그해 7월 11일 천봉이 결정되지 마자 당일 정승 후보자를 추천하게 하여 김익을 영의정으로 삼아 총호사로 임명하는 등 천봉 조직을 갖췄다. 8월9일에는 새로운 원의 이름을 현륭원(顯隆園)으로 정하고 영우원 봉분을 제거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봉분은 회다짐을 해서 단단하게 굳은 관계로 재궁(왕과 왕후의 관)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10월 2일 정조가 지켜보는 가운데 시작된 봉분 제거작업은 꼬박 하루가 걸렸다. 이 과정을 계속 지켜보고 있던 정조가 격한 감정을 보일까 두려웠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언교에 따라 자리를 떴다.      


다음 날 재궁을 꺼내보니 금으로 쓴 명정의 글씨가 뚜렷하고 재궁 나무 재질과 칠색이 맑았다. 이에 정조도 동의했다고 한다. 이때 상태가 좋지 않을 경우 담당했던 관리들이 문책당했다. 정조는 아침저녁으로 조석상식과 주다례를 올렸고 재궁에 직접 가칠(加漆)까지 했다. 그리고 너무 슬퍼서 몸도 제대로 못 가누고 목이 메어 곡도 못했을 정도였다고 정조실록은 전한다. 


10월 5일 재궁을 가마에 실은 천봉 행렬은 영우원을 출발해 뚝섬에서 한강에 설치한 부교를 건너 과천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날 수원 신읍치에서 머물렀다가 신시(申時)에 현륭원에 도착해 정자각에 모셨다.      

정조는 현륭원을 군왕의 지위에 준할 정도로 단장시켰다. 물론 사도세자가 왕을 지내지 못해 묘를 지키는 석물과 혼유석, 지석 등은 간소했지만 당대 최고 석공을 동원해 아름다운 조각의 병풍석을 설치하는 등 기존의 왕세자 묘소보다 ‘고퀄’ 능역을 조성했다.      


사도(장헌)세자는 마침내 고종 광무 3년(1899) 10월 10일에 왕으로 추존됐다. 묘호가 장조(莊祖)로 올려졌으며 현륭원은 융릉으로 격상됐다. 현재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산1의1에 위치해 있다. 원래 현륭원 터에 살던 주민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이주했다. 그곳이 바로 팔달산 아래 신도시 화성, 현재 수원이다.  


화성은 수원을 먹여 살리는 ‘문화먹거리’

아름다운 수원화성의 장안문 야경. 정조가 능행차를 할 때 지나는 성문이라서 다른 곳보다 크고 화려하다. 성곽을 따라 우측으로 가면 멀리 화홍문이 희미하게 보인다. [사진=양순모]

정조 하면 떠올리는 게 수원화성이다. 정조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신도시를 만들기 위해 수원화성 축성을 기획하고 설계를 정약용, 축성 관리감독은 채제공에게 맡겼다. 정조에게는 현륭원의 수호도시로 화산 북쪽 팔달산 아래에 신도시 화성을 건설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화성 축성은 1794년(정조 18) 봄에 착수, 2년 반이 걸려 1796년 가을에 완성됐다. 이로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모하고 추존하는 예와 효도를 다했다.      


그리고 생모 혜경궁 홍씨를 위한 효도 이에 뒤지지 않았다. 정조는 왕위에 머무는 동안 매년 사도세자 탄일을 전후한 1월 말에서 2월 초 사이 수원 능행을 했다. 모두 13번의 수원 능행에 나섰고 1795년 을묘년은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다른 때와 달리 성대하게 펼쳤다. 이때 능행은 7번째에 해당한다. 보통 2박3일이나 3박4일 일정과는 달리 을묘년 행차는 7박8일 일정으로 진행됐다. 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는 동갑내기였기 때문에 규모면에서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능행으로 해석된다.        


을묘년 윤 2월 정조는 대규모 행렬과 함께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으로 행차했다. 이때 모든 기록을 ‘원행을묘정리의궤’로 남겼다. 의궤 안에는 ‘반차도’라고 해서 원행 당시 행차 모습을 그림으로도 남겼다. 반차도를 통해 당시 의복과 군사 병력 배치, 서열과 의전 등을 엿볼 수 있다.            


이 반차도는 청계천 변에서 타일 벽화로 만날 수 있다. 2005년 장통교 아래 설치된 높이 2.4m, 길이 192m로 가로세로 30cm 규격의 세라믹 자기타일 5,120장을 사용한 도자벽화다. 반차도는 당시 도화서에 있던 단원 김홍도 지휘 아래 그려진 것이다.      


서울과 경기도는 2016년 을묘년 원행을 복원해 매년 대대적인 축제로 연계해 행사를 치르고 있다. 물론 지난해에는 코로나19로 행사 자체를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다. 수원 능행은 서울 창덕궁 돈화문 앞에서 출발해 한강 배다리를 건너 안양, 의왕지역을 지나 수원의 지지대 고개를 통해 화성행궁까지 이르렀던 45㎞ 구간에서 열린다.      


서울시 구간은 창덕궁~노들섬~시흥행궁까지다. 행렬은 △창덕궁~노들섬(10.3㎞) △노들나루공원~시흥행궁(10.8㎞)에 도착해 하루를 묵는다. 이튿날 수원 구간은 △금천구청~만안교(4.9㎞) △만안교~호계삼거리(7.9㎞) △호계삼거리~지지대(4.8㎞) △지지대~종합운동장(3.3㎞) △종합운동장~연무대(2.9㎞)로 짜였다.     


기록에 따르면 정조는 을묘년 행차를 2년 전부터 준비했다. 특히 능행 주변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을묘년은 부모 환갑 기념도 있지만 정조 즉위 20년이란 의미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보여준 ‘퍼포먼스’로 후대에 평가되고 있다. 효심, 애민정신, 탕평의 리더십을 총체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둔전의 소 때문에 생겨난 수원갈비 


KBS TV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에서 김영철 씨가 2층에서 식사하는 모습.  멀리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이 보인다. 아래는 1층 조망. [방송화면 캡처] 

이 같은 정조의 마인드가 융합해 녹아든 것이 수원화성이다. 수원화성은 수원을 먹여 살리는 ‘문화먹거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수원화성의 백미는 팔달산 정상에 위치한 서장대에서 바라본 시내 야경이다. 또 우아한 조형미가 돋보이는 서북공심돈은 야경 출사 포인트로 손꼽히는 곳이다. 이곳을 지나면 나오는 장안문을 통해 조금만 걸으면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이 나온다.      


화홍문은 수원화성의 북쪽 수문으로 일명 북수문이라고도 부른다. 수원천(당시 광교천)이 여름에 자주 범람하자 성을 쌓으면서 문루 아래 물이 지나는 수문을 만들었다. 한국전쟁 당시 성곽 상당수가 파괴됐지만 화홍문은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됐다. 화홍문 위쪽으로는 방화수류정이 있고 옆으로 북암문이 있어서 성 밖 커다란 연못인 용연에 다다를 수 있다.      


방화수류정은 성곽의 동북쪽에 불뚝 솟아있는 바위 위에 자리하고 있다. 용도는 화성 동북쪽 군사지휘부인 동북각루로 만들었다. 그러나 높은 위치에서 화홍문과 성곽 아래 용연 등을 조망할 수 있어서 군사시설뿐만 아니라 정자 역할도 겸했다. 화홍문과 함께 조선시대 건축미를 잘 반영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20‧30년대 년대 사진을 봐도 화홍문은 지금과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러나 주변 경관은 지금과 큰 차이를 보인다. 화홍문 우측으로는 소나무 군락이 있을 뿐 민가나 건축물은 보이지 않았다. 멀리 장안문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지금은 소나무 군락은 모두 사라지고 주택과 상점 건물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오늘 소개하는 ‘연포갈비’도 그중 하나다.      


수원은 전국 3대 우시장이 설 정도로 소가 많았는데 이는 수원화성과 관계있다. 화성을 자립 능력을 가진 신도시로 만들기 위해 정조는 주변에 대단위 둔전(屯田)을 두고 농사를 지었다.  당시 농사에는 소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정조는 농사를 위해 농민들에게 벼 종자와 소를 나눠 줬다. 대신 쌀의 절반과 3년마다 소 한 마리씩을 세금으로 거둬들였다.      


소가 늘어났고 이를 처분하기 위해 자연스레 우시장이 형성됐다. 덩달아 소고기가 주요 식재료가 됐고 갈비가 지역 특화 메뉴로 발전했다. 처음에는 해장국에 소갈비를 넣어 팔던 것을  소금양념을 한 갈비로 메뉴를 만든 것이 히트를 쳐서 수원갈비로 자리 잡았다. 수원갈비 특징은 한 대 길이가 13cm, 무게만도 250g에 달한다.      


아름다운 화홍문‧방화수류정 감상하며 식사 

연포갈비 대표 메뉴는 한우생등심인데 이날은 특별히 살치살만 골라 내왔다. 서울 강남 절반 값으로 맛볼 수 있다. 사진 우측 맨 아래는 봉주현 대표(좌)와 어머니 이윤재 여사.

      

 ‘연포갈비’는 화홍문 우측에 위치해 있다. 창가에 앉아서 밖을 바라보면 화홍문이 한눈에 들어온다. 낮엔 늠름한 자태로 서 있다가 야간이 되면 오색 조명이 비치면서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는 화홍문과 뒤로 보이는 방화수류정 역시 건축미가 빼어난 정자다. 이쯤 되면 ‘연포갈비’는 최고의 조망을 가진 갈빗집이라고 해도 손색없다. 게다가 그 옛날 정조가 능행차 때 이 길을 지났다. 지금도 수원화성 능행차 마지막 코스에서 ‘연포갈비’ 앞을 지나 연무대로 향한다.


‘연포갈비’는 개업한 지 20년이 넘은 저력 있는 갈빗집이다. 봉순근 1대 대표와 이윤재 여사가 문을 열었고 지금은 빙상국가대표 코치출신인 봉주현 씨가 대를 이어 운영하고 있다. 봉 대표는 카운터를 맡지 않고 처음부터 주방으로 들어가 바닥부터 배웠다. 스포츠맨 특유의 끈기와 성실함, 배우려는 욕심으로 지금은 노련한 중견 외식업자가 됐다.       


‘연포갈비’는 한우생등심과 생갈비, 소금, 후추 꽃소금, 참기름, 다진 마늘 등으로 간을 한 양념갈비가 주력이다. 한우생등심에는 등급이 우수한 살치살이 따라 나온다. 생등심과 육회는 한우를 사용하고 나머지는 미국산 소고기를 쓴다. 밑반찬으로 묵나물무침, 나물무침, 양파장아찌, 샐러드, 상추무침, 백김치, 고구마정과, 잡채, 물김치 등 웬만한 세미 한정식급 상차림이 계절마다 조금씩 바뀌면서 제공된다. 주차장 시설이 좋아 관광객, 단체회식, 가족모임 손님이 많이 찾는 곳이다. 물론 코로나19 이전 이야기다. KBS TV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에 수원갈비 대표집으로 소개돼 유명세를 탔다.     

  

지난 6일 ‘매향통닭’ 최용철 대표와 함께 ‘연포갈비’를 찾았다. 최 대표는 방송 카메라기자와 펜 기자를 거친 언론인 출신으로 15년 전 필자와 같이 일한 인연을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 그 역시 수원 통닭골목이 형성되는 마중물 역할을 한 첫 점포인 ‘매향통닭’을 이어받은 2세대 외식인이다. ‘매향통닭’과 ‘연포갈비’는 창업 1세대와 2대가 지금도 함께 경영하면서 오랫동안 내림 손맛을 전수하고 있다. 두 메뉴는 수원을 대표하는 먹거리로 성장한 데는 이 같이 손맛을 이으려는 노력이 숨어 있다. 두 곳 모두 수원화성을 둘러보고 여정을 정리하면서 식사하기 좋은 곳이다.


                 

1920~30년대 찍은 화홍문과 주변 지역 사진. 멀리 장안문이 보이고 현 연포자리 주변에는 소나무 군락지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도시의 변화를 보여주는 사진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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