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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권 당첨금으로 문 연 60년 된 양념돼지갈비 노포

[서울미래유산 맛집] 서대문구 미근동 ‘서대문원조통술집’

 1394년 한양 천도 이후 한반도의 행정‧경제‧문화 중심지로 발전한 서울은 깊고 넓은 시층을 가진 역사도시다. 서울의 역사를 백제의 고대도시 한성백제까지 끌어올려 2000여 년으로 보기도 한다. 600년, 2000년은 서울의 역사를 이야기하는데 어쩌면 숫자에 불과하다. 그만큼 서울은 이제 정치경제, 사회문화 모든 방면에서 거대한 국제도시가 됐다.      


서울의 지명은 시대에 따라 달리 불렸다. 삼국시대 백제에서는 북한산‧북한이라고 불렀다. 기원전 18년 백제 온조왕 때부터 기원 후 475년 개로왕 때까지 약 500년 동안 백제의 수도였다. 송파구 한강변에 남아있는 풍납토성이 당시 왕성이었고 위례성, 한성으로 부르기도 했다.      


고구려에서는 북한산군‧남평양, 신라시대는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장악하면서 신주를 설치했고, 선덕왕 때에는 서울 지역을 한산주로 개칭했다.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전국을 9주로 나누게 되면서 경덕왕 때에 한산주를 한주로 고쳐 불렀다.      


고려시대 들어서 초기에는 양주로 부르다가 문종 때 남경으로 승격됐다. 중국 원나라 내정 간섭기인 충렬왕 때에 중앙과 지방 조직을 개편하면서 한양부로 바뀌었다. 이후 조선 건국과 천도를 통해 도읍으로 정해지면서 태조 4년(1395년)에 비로소 한성부라고 했다. 일제 치하에서는 굴욕적으로 경기도 관할의 경성부로 격하됐고 서울이란 이름은 해방 이후에 만들어졌다.       


해방 직후에는 사회 전체가 혼란한 시기였다. 서울 역시 명칭이 서울, 경성, 한성 등이 마구 뒤섞여 쓰였다. 그러다가 해방 1년 후인 1946년 8월 15일자로 서울특별자유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당시로서는 경기도와 대등한 관계의 행정기관 수준이었다. 정부수립 후인 1949년 11월 지방자치법이 공포되면서 서울특별시로 정해져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서울’이라는 명칭 유래를 학계에서는 삼국시대 신라 때로 보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신라 혁거세왕에 대한 내용에 따르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 사라(斯羅), 사로(斯盧)라고 했고 이것이 도읍 명칭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이름들은 수도(京)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됐고 유수한 세월을 거치면서 소리가 변해 오늘날의 서울이라는 말로 정착된 것으로 보고 있다.      


풍수에 입각한 서울의 중심은 보신각

   

서울 시내 도보답사를 위해 출발지로 삼은 보신각은 조선의 치국 윤리인 오상(인의예지신)에서 신(信)에 해당하는 중심이다.

애초 조선 태조가 개성에서 천도를 해서 수도로 정할 때 잘 알려진바 대로 풍수를 기반으로 했다. 또 유교국가의 근본인 인의예지신 오상을 치국의 도리로 삼았다. 동서남북 4개의 대문 이름과 종루에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인 오상을 녹여 넣었다.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智의 의미 내포) 등 4대문에 인의예지를 담았고 중앙인 종각을 보신각으로 이름 지었다.     


특히 종각은 조선시대 지역을 나누는 기준점으로 작용했다. 종각 북쪽 경복궁과 창덕궁 양궁 사이를 북촌으로 인식했고 남쪽으로는 남촌, 서쪽은 웃대로 불렀다. 일제 강점기에는 종각 북쪽을 중심으로 혜화동 일대나 창경궁까지 북촌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지금은 안국역을 중심으로 양궁 사이를 북촌으로 부르고 있다.     


종각 일대는 예부터 서울의 중심 역할을 했다. 종각 근처인 광화문 사거리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던 자리에는 도로원표가 있었다. 도로원표란 서울과 전국 도시 간의 도로상 거리를 표시하는 기점을 나타내는 표석이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조선총독부가 설치했다.      


도로원표는 1935년(고종 40)에 광화문 일대가 정비되면서 고종 칭경기념비전 안으로 옮겨졌다. 앞면에는 ‘道路元標(도로원표)’, 양 옆면엔 대구·대전·부산·목포‧평양‧원산 등 전국 18개 주요 도시와 거리를 한자로 음각해 표시했다.      


서울의 기준 도로원표와 지하철수준점

     

서울과 전국 도시 간의 도로상 거리를 표시하는 기점을 나타내는 표석인 도로원표(사진좌측)와 지하철 선로 깊이와 역사(驛舍)의 상하축 높이를 결정하는 기준인 지하철 수준점.

역사도시 서울은 걸어가면서 만날 수 있는 역사자원이 차고 넘치는 곳이다. 특히 4대문 안은 발걸음을 조금만 옮겨도 근현대 역사를 쉽게 접할 수 있는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오랜 시간 한 나라의 수도 역할을 하면서 성장한 서울은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볼거리와 스토리가 많은 곳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냥 보여주지 않는다. 아는 만큼 보여준다. 그래서 역사를 해설해 주는 해설사와의 동행 답사가 중요하다. 시내 역사답사는 2000년 대 들어 꾸준히 늘어났다.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필자가 만든 문화지평이란 비영리민간단체도 답사와 디지털아카이빙을 전문으로 하는 곳으로 매년 꾸준하게 서울 시내 곳곳을 누비는 답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서울 곳곳을 걷는다. 걸어야 보이기 때문이다.      


지난 24일 일요일을 이용해서 시내 도보답사와 맛있는 식당을 찾기 위해 집을 나섰다. 일단 일행과 보신각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곳에서는 서울 시내 사방 어디로든 가기 편하기 때문이다. 보신각 앞 잔디밭을 자세히 보면 돌덩이 하나가 있다. 이는 지하철 수준점인데, 수도권 전철의 높이 및 깊이 기준이 되는 원점이다.      


이 수준점을 기준점으로 지하철 선로의 깊이와 역사(驛舍)의 상하축 높이가 결정된다. 수준점은 1970년 지하철 1호선을 개통하면서 설치됐다.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곳에 위치해 있어서 지하철 수준점이란 것을 대부분 모르고 지나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표현이 들어맞는 곳이다. 정시에 일행과 만나 방향을 정했다. 마침 사회적 거리두기가 조정되면서 국공립 박물관도 들여다볼 수 있어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고 기온도 겨울 날씨치곤 따뜻해서 걷기 알맞았다.       


종각에서 북쪽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면 옛날 화신백화점이었던 자리에 들어선 지상 33층짜리 종로타워를 만난다. 재개발 당시 옛 화신백화점의 전면부는 살릴 예정이었으나 ‘가족 빼고 다 바꿔라’던 삼성의 혁신과 맞물려 설계가 변경되면서 지금의 외관이 완성됐다. 한때는 건축가들이 뽑은 ‘한국 최악의 건축’ 3위에 뽑혔을 정도로 지탄을 받았다. 종로타워를 지나면 옛 공평빌딩을 부수고 새로 지은 센트로폴리스 빌딩이 나온다.      


이 빌딩 지하는 서울시서 운영하는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 있다. 2015년 공평동 도시환경정비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조선초기부터 근대 경성에 이르는 서울의 골목과 건물터가 거의 완벽하게 발굴됐다. 이를 보존하기 위해 전시관을 꾸민 것으로 서울의 지층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조선초기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100년에 약 1m씩 흙더미가 쌓인 서울의 지층 단면을 보면 많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도시정비 사업에서 발굴된 매장 문화재는 최대한 ‘원위치 전면 보존’을 하는 ‘공평동 룰’이 적용된 첫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시대 일대는 견평방으로 청진동, 공평동, 인사동 일대를 포함한다. 견평방은 의금부를 비롯한 관청, 시전 등이 들어서 있는 한양의 행정과 경제의 핵이었다. 전시관에서는 옛 견평방 모습을 경험할 수 있는 ‘한양의 가(家) 견평방 가옥’이란 기획전시를 열고 있다.         

      

고궁박물관 ‘군사의례’ 특별전 열어

 

국립고궁박물관은 조선 왕실 군사력의 상징을 보여 주는 ‘군사의례’ 특별전을 오는 3월1일까지 연다. 사진 상단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갑주, 철종 어진, 활쏘기 체험, 주색 철력.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을 나와 경복궁으로 향했다. 주차장을 쪽 입구를 통해 국립고궁박물관으로 향했다. 조선 왕실 군사력의 상징을 보여 주는 ‘군사의례’라는 특별전을 보기 위해서다. 군사의례는 문치(文治) 뿐 아니라 무치(武治)를 겸비한 ‘통치 밸런스’를 보여줌으로써 왕권의 존엄과 권위를 세우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한마디로 군사의례는 군사력을 드러내고 임금의 통치행위를 상징하는 것이다. 또한 일식, 전염병과 같은 자연현상과 에피데믹 상황을 구일(求日)의식이나 역귀를 쫓는 의식인 계동대나의 등 군사의례로 막으려고 했다. 이는 지금 우리에겐 매우 생소한 행위로 느껴지는 재미난 사실이다.       


경기대 사학과 이왕무 교수는 “군사의례는 국방이나 외적을 막는 것으로만 활용된 것이 아니라 요즘 같은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을 막는 민속적 차원에서도 활용됐다”며 “왕실의 군례에 대한 최초 전시란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특별강연회서 말했다.          


전시장 한쪽에서는 관람객들이 직접 활쏘기에 참여할 수 있다. 네발을 쏴서 명중을 시키면 기념품을 준다는 소문을 듣고 도전을 했지만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내친김에 지하에 있는 조선 황실 상설전시관과 어차 옆에 마련된 편의공간도 둘러봤다.                 


고궁박물관 뒷문을 통해 서촌으로 접근하면 세종음식문화거리가 반긴다. 다양한 음식점이 몰려 있는 먹자골목이다. 금천교시장이었던 곳을 세종음식문화거리라고 이름을 단 후부터 유명 먹자골목으로 성장했다. 그중에도 체부동이란 잔치국수 전문점은 가성비 좋기로 유명하다.      


먹자골목을 뚫고 지나면 배화여고 쪽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서울시 민속문화재 홍건익 가옥도 굳게 닫혔던 대문이 오랜만에 열렸다. 이곳은 한옥 회의실을 무료로 개방한다.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작은 소모임도 진행할 수 있다고 하니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배화여고 캠벨기념관을 멀리서 보고 사직단 뒷길로 해서 서울시교육청 유아교육진흥원, 종로도서관, 황학정 국궁전시관, 수도교회를 거쳐 인왕산 능선을 따라 걸으면 경신고등학교 쪽으로 빠지게 된다.     


도가니탕 전문 ‘대성집’ 일요일 휴무 헛걸음

60년이 넘은 노포 ‘대성집’은 일요일 휴무를 한다. 도가니와 힘줄 부위인 스지도 함께 삶아 내오는 도가니수육은 맛과 가성비가 뛰어나 인기를 끌고 있다.

이날은 사실 도가니탕으로 유명한 ‘대성집’을 가려고 했으나 ‘일요일 휴무’에 딱 걸렸다. ‘대성집’은 개업한 지 60년이 훌쩍 넘은 도가니탕 전문점이다. 지금도 커다란 솥이 훤히 보이는 오픈 주방에서 도가니와 탕을 설설 끓여내지만 옛 대성집도 많은 사람들이 무쇠솥을 많이 기억한다. 옛 대성집은 경희궁 자이아파트 단지가 개발되면서 사라지고 지금 자리로 이전했다.       


원래 창업주는 따로 있지만 물려줄 사람을 물색하다가 지금 주인인 이춘의 씨를 낙점했다고, 전라도 남원이 고향인 이 씨는 1974년 물려받았기 때문에 사실상 제2의 창업자라고 해도 손색없다. 이 씨가 물려받은 이유는 종업원으로 일하던 10년 동안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솔선수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성집’은 도가니와 힘줄 부위인 스지도 함께 끓인다. 스지가 들어가면 국물이 농후해지고 식감도 다양해진다. 도가니 수육 한 접시에 소주 한잔 하고 도가니탕이나 해장국으로 마무리하는 선육후탕(先肉後湯)을 즐기는 손님이 많다.        


아쉽지만 대성집을 등 뒤로 하고 활기찬 영천시장을 관통해서 서대문로터리에서 인창고등학교로 오르는 식당가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일요일인 데다가 코로나19 여파로 많은 식당이 문을 닫은 상태이거나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또 헤매다 발길이 닿은 곳이 ‘서대문 원조 통술집’이다.       


‘일갑자 메뉴’ 양념 돼지갈비가 대표 메뉴

창업 때부터 지금까지 메인 메뉴로 자리 잡고 있는 양념돼지갈비. 삼겹살과 목살, 돼지껍데기도 인기 있는 메뉴다.


그동안 수차례 앞을 지났지만 때가 맞질 않았다. 돼지갈비, 삼겹살이란 메뉴가 주는 소구력도 약했다. 그러나 서울미래유산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과 노포가 주는 푸근한 이미지가 이날만큼은 발길을 이끌었다. 하루 종일 공복이었던 허기도 결정에 한몫했다.         


통술집은 1961년 개업했다. 올해로 정확히 개업 60년이 되는 노포다. 한 장소에서 한 갑자를 버틴 덕에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 창업주 박종채 씨는 1950년대 말 전남 광양서 상경했다. 한국전쟁을 겪고 고단한 서울 살이를 하다가 난생처음 창경궁 나들이를 갔다. 행복감을 배가시키기 위해 기대감으로 복권을 산 것이 덜컥 당첨됐다.      


주택복권은 1969년에 처음 발행됐으니 아마도 다른 복권이었을 것이다. 참고로 발행 당시 복권 액면가는 100원, 발행 총액 5000만원, 1등 당첨금은 300만원, 총 50만 매씩 서울에서만 판매됐다. 로또가 나오면서 판매액이 급감하자 2006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아무튼 박 씨는 1961년 ‘통술집’이라는 상호로 지금 있는 서대문구 미근동 서대문경찰서 앞에서 돼지갈비 집을 열었다. 개업 초기는 드럼통 탁자가 3개뿐이었다. 밑반찬은 파절이, 무생채무침, 김치, 쌈채소와 고추, 마늘‧양파 등 개업 때와 크게 변함이 없다.      


이 식당의 대표메뉴는 돼지갈비다. 돼지갈비 양념장 레시피는 박 씨의 부인 고수덕 여사와 아들 박남태 씨만 알고 있다. 양념 돼지갈비는 창업 때부터 팔아 온 흔치 않은 ‘일갑자 메뉴’다. 매실액을 사용해 5일간 재운 고기는 부드럽고 윤기가 나고 고기를 주물러서 육질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달달한 돼지갈비 양념은 옛 추억의 맛을 소환한다.  약수동 우성식당 돼지갈비와 살짝 겹치는 맛이다. 돼지갈비와 더불어 삼겹살은 육향과 육즙을 동시에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원육이 좋다. 고 여사는 원육을 마장동에서 공수한다고 했다. 목살, 돼지껍데기도 많이 찾는 메뉴다. 껍데기는 삶지 않고 소주에 담가 잡내를 잡은 후 갈비양념에 버무린 것이 맛의 비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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