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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장 제물포 앞바다서 잡은 물고기 ‘찐맛집’

인천 연안부두 밴댕이‧물메기탕전문 ‘원조밴댕이’

근대 열강의 각축장이자 개항도시,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주 무대, 각종 근대 건축물과 월미도, 연안부두 등을 가진 문화관광 도시 등이 인천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다양한 정체성이다. 이는 인천이 가진 역사적 사실과 사건, 매력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 또 부산과 함께 대표적인 항구도시이자 수도 서울과 불과 30km 떨어져 있는 위성 배후도시 등 기능적인 면에도 매우 중요한 도시다.          


인천은 우리 역사에서 백제 초기 비류가 정한 도읍지 미추홀(彌鄒忽)로 처음 등장했다. 기원전 18년 비류가 인천의 대표 산인 문학산 주변을 도읍으로 했던 미추홀 왕국을 세웠다는 설화가 내려오고 있다. 인천을 이야기할 때 비류와 미추홀을 빼놓으면 안 되는 이유다.       


비류는 고구려 시조 주몽의 큰 아들이다. 둘째 아들이 온조다. 설화는 비류와 온조 동복형제외에 먼저 낳은 이복형이 등장하고, 골자는 왕위 계승문제로 이어진다. 주몽이 이복형을 태자로 책봉한다는 소식에 비류와 온조는 형제간 다툼을 피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두 왕자를 따라 많은 백성들도 길을 나섰고 한산에 이르러 비류는 바닷가서 살 것을 결심했다. 이에 신하들은 북쪽으로는 한강, 동쪽으로는 높은 산들이 둘러 있으며 남쪽은 기름진 농토가 있는 하남 땅을 주장했다. 온조는 그 말을 따라 하남에 터를 잡았고 비류는 미추홀에 정착했다.      


미추홀은 바닷가라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식수는 물론 농사짓기도 어려웠다. 자신을 따라 나섰던 백성들이 힘겨워 하자 비류는 온조의 삶이 궁금해졌다. 몰래 위례성을 찾은 비류는 온조와 백성들이 편히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랐다. 자신의 고집으로 백성들을 험지로 몰아넣은 것을 자책하고 괴로움 끝에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했다. 건국한지 10년만의 일이다.        


미추홀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고구려 장수왕 때(475년) 매소홀현(買召忽縣)으로 기록에 등장했다. 미추나 매소는 ‘거친 들판(맷골)’, ‘물로 둘러싸인 고을’이란 의미로 해석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경덕왕 때는 소성현, 고려 숙종(1095~1105) 때는 숙종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의 내향(왕비의 친정 고향)이었던 관계로 경원군으로 바뀌어 승격됐다. 그 뒤 인종(1122~1146)때에 순덕왕후 이씨의 내향이라고 인주로 승격됐다. 그러나 이자겸의 난으로 인주 이씨가 몰락했고 공양왕 2년(1390)에 이르러 다시 경원부로 ‘원위치’ 했다.      

조선 왕조가 열리면서 경원부는 다시 인주가 됐다. 그러다가 태종 13년(1413) 주(州)자를 가진 도호부 이하 군·현의 지명을 산(山), 천(川) 두 글자 중 하나로 바꾸라는 통에 지금의 인천이 탄생하게 됐다. 인천은 제물포란 작은 포구로부터 발전했다. 제물포는 ‘제물’이 있는 포구란 뜻이다. 제물은 조선초 해안수비를 위해 만든 수군 군영이 있던 제물량에서 따왔다. 제물량은 성창포와 영종도 사이 좁은 수로를 말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제물량 성창포에 수군만호가 주둔했다. 성창포가 전략적인 요충지였다는 의미다 이에 반해 제물포 어업이나 군사상으로 크게 중요하지 않은 작은 포구에 불과했다. 그랬던 제물포가 1882년 조선 조정이 일본과 ‘제물포조약’을 체결하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개항 이전에는 제물포란 지명 자체가 역사적으로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지금은 근대 개항의 도시 인천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으니 격세지감이라고 할 수 있다.      


개항기 국제무대 중심된 작은 어촌 제물포

사진 좌측 위는 1904년경 호주 기자가 찍은 제물포 항구의 모습이고 아래는 같은 장소에서 찍은 최근 모습이다. 사진내 좌측이 청나라조계지, 우측이 일본조계지다.

작은 어촌이었던 제물포 일대는 서구 열강과 외교 조약을 맺는 주 무대로 사용됐다. 1882년 5월 22일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 이로부터 1주 후에 영국과 조영수호통상조약, 같은 해 6월 독일 조독수호통상조약이 이 지역에서 체결됐다.     


그러면서 각국의 외국인 거주지를 위한 조계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일본은 1883년 9월 인천항 일본조계차임약정서를 체결하고 조계를 설치했다. 조계 지역은 중국이 남경조약 이후 상해를 비롯해 5개 항구를 열면서 동양 지역에 등장한 특수한 형태 외국인 거주지다.      


당시 일본 조계는 현 자유공원 남쪽 관동1·2가와 중앙동 1·2가 일대를 포함한 지역에 설치됐다. 이듬해 청나라와 인천상화조계장정을 시작으로 각국 공동조계가 설정됐다. 이 때문에 제물포 지역이 자연스레 확대됐다. 조계 설정과 외국인들의 이주는 제물포를 국제도시로 만들었다.      


조계지 별로 각 나라의 특색을 가진 다양한 건축물이 들어서면서 저층 한옥과 초가만 보던 조선 사람들에게는 신박한 풍경이었을 것이다. 각 나라들은 자신들의 우월성을 자랑하기 위해 크고 웅장한 건물을 경쟁적으로 지었다. 외교업무를 담당하는 영사관 개설로 외교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지금 중구청사는 당시 일본이 영사관으로 지은 건물이다. 해방 후에는 인천시청사로 사용했다. 현재 화교소학교 자리는 청국영사관 자리다. 올림푸스호텔 자리는 영국영사관이 있던 곳이다.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제물포구락부

   

1901년 인천에 거주하던 독일, 미국, 러시아, 일본 등 조계 내 외국인들의 친목을 위한 사교장소로 만들어진 제물포구락부의 옛 모습과 현재 모습.

최근 근대건축물 관련 검색을 하다가 제물포구락부로 랜선을 타고 들었다. 제물포구락부(인천시 유형문화재 제17호)는 각국 조계가 형성된 후 1901년 인천에 거주하던 독일, 미국, 러시아, 일본 등 조계 내 외국인들의 친목을 위한 사교장소로 만들어졌다. 이에 앞서 외국인들은 1891년(고종28년) 사교구락부를 만들었고 당시 다른 건물을 사용하다가 건물을 지어 옮긴 것이다.      


제물포구락부는 자유공원 경사면에 지어졌으며 연면적 446.9㎡. 지상 1층 지하 1층, 연와조 건물이다. 러시아 건축기사 사바틴이 지었다. 사바틴은 정동의 러시아공사관, 덕수궁 중명전‧정관헌, 경복궁 관문각, 독립문, 손탁호텔 등 서울에 수많은 양관(洋館) 건축물을 남겼고 특히 개항장 인천에 최초의 세관청사인 인천세관, 세한양행 사택, 인천항 부두, 만국공원(현 자유공원) 등을 지었다. 그는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 시해를 목격한 2명의 외국인 중 한명으로도 유명하다.      


제물포구락부는 외교클럽으로 이용되다가 일제에 의해 1913년 조계제도가 완전히 철폐된 후에는 제국재향군인회 인천연합회에 이관돼 정방각으로 불렸고 일본여인회관 등 일본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됐다. 광복 후에는 미군들의 구락부로 사용되다가 1953년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박물관인 인천시립박물관으로 개관했다. 또 인천시협회와 인천시교육원 회의실과 청사로도 사용되는 등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졌다. 지금은 시 문화재이면서 공간을 적극 활용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제물포구락부는 제물포란 지명을 증거하는 하나의 랜드마크다. 지금의 인천역 지역이 과거 제물포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하는 소중한 근대 건축물이다. 근대건축물은 건축물 자체의 보존가치 뿐만 아니라 근대의 역사성과 시간성을 갖는다. 뿐만 아니라 지역의 문화적 자산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제물포구락부 역시 근대 인천 성립과정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특히 근대건축 문화재로써 활발하게 활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높은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제물포구락부를 위탁 운영하고 있는 문화재형 사회적기업 카툰캠퍼스 조희윤 대표는 “제물포구락부는 상상력이 마음껏 발휘될 수 있는 공간, 누구에게나 언제나 열린 공간, 시민이 큐레이션 하는 공간, 그리고 개항장에 사는 사람, 놀러오는 사람 등 모두가 만족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꾸미고 있다”고 말했다.      


제물포구락부는 연중 인문학 아카데미를 풍성하게 열고 있는데, 필자가 찾은 지난 6일에는 박찬희박물관연구소를 운영하는 박찬희 소장의 ‘익숙하지만 잘 모르는 역사적 유물이야기’란 주제의 강연이 있었다. 박물관 학예사 출신 박 소장은 틀에 박힌 교과서에서 벗어나  풍부한 상상력으로 유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는 방법을 충실한 시각자료를 활용해 흥미진진하게 풀어놨다.  


마침 국립산림과학원 강진택 연구관과 연락이 닿았는데, 한달음에 달려와 강연을 함께 들었다. 강 연구관은 인천 중구청의 의뢰를 받아 제물포구락부 옆에 보호수로 지정된 플라타너스의 수령을 측정한 인연이 있다. 그는 둘레 4m가 훌쩍 넘는 크고 단단한 나무라 수령 측정이 무척 힘들었다고 당시를 추억했다.      


화농 푸성귀전이 국제시장으로 발돋움


신포국제시장 어귀에 있는 신포우리만두의 쫄면. 면발이 굵고 비빔장의 간이 알맞다. 만두는 모둠을 시키면 다양하게 맛볼 수 있다. 신포닭강정, 40년전통중국식만두, 신포참숯김 전경.


강연이 끝나고 신포국제시장에 들러 간단한 점심식사를 했다. 1971년 문을 연 노포 ‘신포우리만두’에서 쫄면과 만두로 끼니를 때웠다. 다른 곳에 비해 면발이 굵어서 씹는 재미가 제법 있었다. 비빔을 하는 음식은 역시 장이 음식 맛을 크게 좌우한다. 신포우리만두 쫄면의 장은 맵거나 달고 시지 않은 매우 중립적인 맛을 지녔다. 그런 보편적인 맛이 여러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 지금의 성공이 되지 않았나 싶다.      


식사 후 신포국제시장을 거쳐 신월동, 차이나타운 등 응봉산 둘레를 한 바퀴 돌았다. 신포국제시장은 역사가 100년이 넘는 인천 최초의 근대적 상설시장이다. 19세기 말 신포동에 있던 푸성귀전이 신포시장의 전신이다. 푸성귀전 안에는 중국인 농부인 화농들이 하는 20여개의 채소가게가 있었고 고객은 대부분 일본조계 지역에 살던 일본인들이었다.      


화농들은 배추, 무, 양파, 토마토, 피망, 당근, 우엉, 마, 연근 등의 씨앗을 산둥성에서 가져와 지금의 남구 도화동과 숭의동 일대에서 농사를 지었다. 신포국제시장은 쫄면이 탄생한 곳이라고도 하고 닭강정, 오색 만두, 순대, 공갈빵 등 먹거리가 특화된 곳이다. 신포닭강정, 40년전통중국식만두, 신포참숯김 등엔 손님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다. 주말이면 늘 장사진을 이루는 곳이다.        


한편 청국조계지는 인천항 노동자들이 중국 요리를 먹기 위해 많이 찾으면서 차이나타운으로 변모했다. 이때 싸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다가 개발된 것이 짜장면이다. 짜장면은 중국된장인 미옌장(甛麵醬)을 비벼 먹는 작장면(炸醬麵)과 달리 달달한 맛의 캐러멜이 들어가고 물기가 자박한 음식으로 변신했다. 짜장면을 가장 먼저 개발한 곳은 ‘공화춘’이다. 공화춘은 1908년 중국 산동지역 출신인 우희광이 22살 때 ‘산동회관’(山東會館)이란 상호로 개업하면서부터 역사가 시작됐다.      


당시 산동회관은 단순한 청요리점이 아니라 개항장이었던 인천항을 오가는 각국의 무역상들이 먹고 잤던 중국의 객잔 형태였다. 청나라가 아시아 최초로 공화국인 중화민국으로 바뀌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공화춘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그 후 공화춘은 차이나타운을 대표하는 중국요리집으로 호황을 누렸으나 박정희 정권의 재산권을 제한하는 화교정책 때문에 1983년 폐업했다.      


옛 공화춘을 인천시 중구에서 2010년 매입해 짜장면을 주제로 한 ‘짜장면박물관’으로 2012년  개관했다. 짜장면과 공화춘에 관련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과거 공화춘 주방과 접객실을 그대로 재현해 놨다. 2층 규모인 공화춘은 중국 산동지방 건설업자가 지은 중정형의 전형적인 중국식 건축물이다. 외부는 벽돌로 마감하고 내부는 다양한 문양과 붉은색을 사용해 화려하게 장식한 것이 특징이다. 인천시 등록문화재 제246호로 지정돼 있다.      


인천 시민들이 쉬쉬 숨겨 놓은 ‘찐맛집’     

연안부두 ‘원조밴댕이’는 인천의 ‘찐맛집’이다. 45년 역사를 가진 노포로 밴댕이외와 물메기탕이 전문이다.


짜장면박물관을 나와 연안부두로 향했다, 지역에서 30여 년간 공직생활을 하고 지금은 인천산림조합 자문위원으로 있는 최태식 선생이 안내한 저녁식사 장소로 가기 위해서다. 최 자문위원은 인천시 공원녹지과장, 서부공원사업소장 등을 거친 산림분야 전문가다. 그는 여전히 월미공원 관광자원화에 심혈을 쏟고 있는 등 인천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다.      


최 자문위원이 소개한 ‘머글랭가이드’ 인천 맛집은 ‘원조밴댕이’란 직관적인 이름을 가진 밴댕이와 물메기탕 전문점이다. 연안부두 건너편 그린장여관 골목 끝 막다른 골목에 위치한 ‘원조밴댕이’는 인천 토박이들이나 찾아갈 수 있을듯하게 숨어 있었다.                


밑반찬이 깔리고 주문한 모둠회가 나왔다. 밑반찬은 무생채, 신김치, 파래무침, 오징어젓, 콩나물무침, 멸치 등 균형 잡힌 구성이다. 다진 마늘과 참기름을 더한 쌈장과 초장, 간장은 기호에 맞게 회를 찍어 먹으라는 섬세한 배려다. 상추, 깻잎, 마늘, 청양고추는 쌈을 좋아하는 이들을 위한 알맞은 구성이다.      

  

모둠회는 밴댕이, 병어, 광어의 조합이다. 밴댕이는 우리나라 서‧남해안 연안 모래바닥에 서식하는 어종이다. 부화 후 1년이면 성어가 되고 10cm 정도까지 자란다. 밴댕이 말리 것을 뒤포리라고 하는데, 이는 원래 밴댕이의 전라남도 사투리다. 흔히들 디포리라고도 한다.       


이날 ‘원조밴댕이’서 접한 밴댕이, 병어, 광어는 그동안 먹었던 이들 회의 기억을 모조리 갈아엎는 신박한 맛이었다. '어쩌다 한번 오는 저 배'가 가지런히 정박해 있는 연안부두 막다른  골목을 45년 동안 지킨 노포의 저력을 아무런 가미가 되지 않은 회에서 접하다니!      


차이나타운 옆에도 밴댕이골목이 있고 연안부두에도 밴댕이회무침거리가 있지만 인천 사람들은 이 집을 많이 찾는다. 잡내 하나 없이 손질한 밴댕이와 병어는 그렇다 치고 광어는 세상없는 맛이다. 생선회가 거기서 거기 아니겠냐고 한다면 꼭 드셔보시라 권하고 싶다. 연안에서 저인망으로 잡아 올린 광어라는데 양식과 천양지차의 맛을 자랑한다.      


물메기탕은 또한 웅숭깊은 육수와 김치의 어울림이 좋다. 집안 일가서 직접 재배한 배추와 고춧가루를 사용해 담근 김치와 흐물흐물한 물메기가 구수하고 진한 육수와 만나 대체불가의 시원한 맛을 선사한다. 한쪽 테이블에서 지역 유지들과 식사를 하던 유정복 전 인천시장이 나가며 악수를 청한다. 인천 ‘찐맛집’이란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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