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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초하루 외식은 참으로 어렵고나!

성신여대 입구 서서갈비집 ‘마리채’...2차는 '찬양집' 칼국수로 입가심

원단 종각서 북촌 넘어 삼선교까지 ‘답후식(踏後食)’


[유성호의 맛있는 동네산책 / 서울] 설날 아침,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고자 했던 식당이 모두 문을 닫아 불가피하게 들어선 식당에서 의외의 맛있는 식사를 해서 기분이 좋아 글을 남기기로 했다. 이런 것을 두고 한자어로 ‘행운’, 우스갯소리로 ‘얻어걸렸다’고 하지 싶다. 원단 아침부터 식당을 찾아 헤맸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섣달그믐 밤이 이슥해질 무렵 진동으로 해둔 카톡이 ‘징징’ 울린다. 중앙일간지 의학전문 기자를 하다가 얼마 전 대학병원 홍보실로 자리를 옮긴 후배 이름이 뜬다. “형님 내일 둘이서 걸을까요”라며 대뜸 한마디 남긴다. 코로나19로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이 읽힌다. 나 역시도 이미 어른을 찾아뵌 후였기 때문에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음력으로 정월 초하루, 다행히 맑고 따뜻했다. 걷기 딱 좋은 날씨로 신축년이 열렸다. 종로 보신각 앞에서 후배와 만나 본격적으로 걸었다. 방향을 북쪽으로 잡고 우정국로를 따라 조계사 건너편으로 걸었다. 조계사 직전에 옛 건물에 전면부를 리모델링한 어색한 건축물이 보인다. 현재는 평화당인쇄가 소유하고 있는 이 건물은 여러 주인이 거쳐 간 유서 깊은 곳이다.        


1920년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건물의 사진은 1923년 1월 21일 자 동아일보에 ‘조선도서주식회사’가 광고를 내면서 사진으로 처음 등장한다. 조선도서는 1931년 무렵 경영난을 겪으면서 박문서관에 흡수된다. 이후 ‘중외일보’가 들어섰고 같은 해 11월 제호를 ‘중앙일보’로 변경해 자연스레 중알일보 사옥이 됐다. 1933년에는 여운형이 사들여 ‘조선중앙일보’로 제호를 또다시 바꾸고 사옥도 길 건너인 현 농협중앙회 견지동 지점으로 옮겼다.      


건물 뒤편에 붙어 있는 공장시설에는 1934년부터 평화당주식회사 인쇄소가 들어서 있었다. 그 사이 본 건물은 여러 업체들이 들고나갔으며 약 2년간 코리아레코드사가 입주해 사용하다가 1936년 폐업하면서 평화당에서 매입하게 된다. 평화당은 1920년 황해도 사리원 출신 이근택이 설립한 인쇄업체로 대서용지를 주력으로 만들어 팔았다. 당시 광고를 보면 제약업도 겸하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평화당은 한국전쟁 직후 제약업을 그만두고 평화당인쇄로 사명을 바꿨다. 지금도 건물 뒤편에는 인쇄공장이 돌아가고 있다. 1936년부터 한 주인이 계속 소유하고 있는 탓에 건물 외형이 크게 변하지 않다가 2006년경 전면부 리모델링을 하면서 일부 원형이 훼손됐다. 벽돌조 2층 구조에 좌우로 박공을 내 멋스러운 건물이 특색을 잃고 역사도 묻힌 듯해 지날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우정국로 주변에 남은 역사의 흔적

       

현재 평화당인쇄가 사용하고 있는 건축물은 1920년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지은 지 100년가량 된 귀중한 근대건축물이다.


도심 한가운데 들어서 있는 조계사 자리에는 원래 보성고보와 인쇄소인 보성사가 있었다. 보성고보는 민족종교로 교육운동을 펼쳤던 천도교가 경영하던 학교다. 보성사는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들 기관을 1924년 불교중앙 교무원에서 인수했다. 보성고보의 후문이 지금의 조계사 정문이 된다. 


1927년 보성고보가 혜화동으로 이전한 후 교사를 헐고 조계사 대웅전을 세웠다. 조계사 경내는 을사늑약 때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의 집터가 있었다. 그래서 우정총국 뒤에 민영환의 동상이 서 있는 이유다. 이밖에도 조선시대 전의감, 도화서 등이 있었던 역사적인 공간이다.     


인사동 로터리에서 계속 북쪽으로 가기 위해 감고당길(정식명칭은 율곡로)로 접어들었다. 한창 마무리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서울공예박물관(옛 풍문여고) 자리는 안동별궁이 있었다. 그래서 주변에 안동교회, 안동의원 등 옛 지명이 담긴 흔적이 남아있다. 안동별궁은 고종황제는 황태자 순종의 혼례를 위한 세운 별궁이다. 이 땅은 세종이 민가를 구입해 아들 영응대군의 집을 지으면서 이 씨 왕가의 땅으로 내려오다가 1930년 대 민간에게 팔렸다.         


새해 첫날이라 감고당길은 한적했다. 코로나19 이전에는 주말이면 플리마켓이 서고 거리공연이 펼쳐졌던 시끌벅적한 곳이 한없이 고즈넉해서 오히려 가슴 한쪽이 시렸다. 언제쯤 우리 일상이 코로나19 이전으로 회복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뒤따랐다. 감고당길 끝에서 골목으로 접어들어 북촌 한옥지구로 올라섰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코리아목욕탕 굴뚝. 전국에 오래된 목욕탕 굴뚝이 남아 있는 이유는 철거가 어렵고 비용이 비싼 이유 때문이란 소리를 들은 기억이 났다.  


북촌길 난간에 기대니 가까이는 삼청동과 청와대 춘추관이, 멀리로는 인왕산이 웅장한 바윗덩이를 드러내고 단단히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수 없이 다니던 길이지만 이날처럼 인적이 드물었던 적이 없어서 북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북촌로5나길 끝에서 삼청동으로 내려왔다. 유명한 ‘삼청동수제비’, ‘순남시래기’ 등이 보인다. 주차장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온 걸 보니 이들 식당은 영업을 하는 모양이다.          


삼청동 끝에서 좌측으로 길을 잡으면 한미사진미술관이 나오고 주택가에 들어서 있는 사찰 칠보사를 만날 수 있다. 칠보사는 조계종단 원로인 석주 스님이 머물렀던 사찰로 1960년대 창건됐다. 석주 큰스님은 불경 한글화를 주창한 것으로 유명하다. 스님 뜻에 따라 칠보사 현판과 주련은 모두 한글로 돼 있다. 보물 제2004호인 


서울칠보사 목조석가여래좌상이 있다.           

   

전인권 씨 자택 옆에는  기천석 바위 두 개가 남아있고 재단으로 사용됐던 장대석은 전 씨 집 입구 계단으로 사용되고 있다(푸른 점선 안).

칠보사를 지나면 가수 전인권 씨 자택이 나온다. 최근 이웃과 시비 끝에 대문에 기왓장을 던진 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는 그다. 옆집이 지붕을 1m 가량 높이는 공사를 하면서 조망권이 침해된 데 따른 마찰로 빚어진 일이다. 전 씨 집 대문 옆에는 각자가 새겨진 바위덩이가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은 글자가 새겨져 있다.  

    

‘祈天石 康日菴 徐月堂 咸豊三年癸丑仲春書(기천석 강일암 서월당 함풍삼년계축중춘서)’. 여기서 함풍 삼년 계축 중춘은 철종 3년인 1852년 2월을 뜻한다. 철종은 한 해 전인 1851년(21세) 장동 김씨(서울 장동에 터를 잡은 신 안동김씨) 김문근의 딸(15세)을 왕비로 맞는 데 그녀가 바로 지난 주말 종영한 ‘철인왕후’ 김 씨다. 그녀는 김조순의 7촌 조카다. 따라서 김조순의 딸인 순원왕후(순조의 비) 김 씨와는 6촌간이다. 1852년은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철종이 친정을 시작한 해다. 이듬해는 순원왕후 김 씨의 동생 김좌근이 영의정에 오른다.      


각자를 한 1852년은 장동 김 씨 집안 김좌근, 김재근, 김수근 등이 정권의 실세로 있으면서 세도가 하늘을 찌르던 시기다. 이들 김 씨 세력은 기천석을 만들고 계속 권력이 이어지길 하늘에 빌었던 것이다. 장동 김 씨의 권력에 대한 욕망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각자다. 당시 재단(齋壇)으로 쓰였던 장대석은 전 씨 집으로 들어서는 계단으로 쓰이고 있다. 장대석 규모를 보니 기천의식에 쓰인 재물의 규모가 대단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늘 풀이 우거졌을 때 와서 보지 못했는데 뒤편으로 또 하나의 기천석이 있다. ‘祈天石 張喜榮

辛酉生 本仁同 同治元年 壬戌仲春(기천석 장희영 신유생 본인동 동치원년 임술중춘)’. 이는 철종 13년(1862) 음력 2월에 새긴 각자다. 앞의 기천석으로부터 정확히 10년 후에 새긴 것이다. 내용은 영원토록 기쁘고 영화로운 장생불사를 염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역시도 장동 김문에서 새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10년 주기로 큰 행사를 치르지 않았을까 싶다.      


전 씨 집은 가장 높은 곳이자 막다른 곳에 위치해 있다. 내려갈 때는 백악에서 흘러나오는 삼청동천의 물길이 시작되는 주택가로 길을 잡았다. 물길을 가운데 두고 양측에 집들이 마치 수상가옥처럼 들어선 조용한 곳이다. 좁은 골목길을 호젓하게 걸으면 물소리가 들리고 집집마다 골목을 예쁘게 꾸미려는 노력과 흔적들을 만날 수 있다. 이 길을 지날 때면 늘 기분이 좋아지는 마법 같은 공간이다.      


도심의 허파 도시공원 1호 삼청공원

삼청공원 후문 쪽에는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와 그의 어머니 이 씨의 백로가가 새겨진 시조비가 서 있다. 공원 입구에는 힘찬 서체의 삼청공원 표지석이 있다.


삼청공원 쪽으로 올랐다. 삼청공원은 1934년 조성되고 1940년에 도시공원 1호로 지정된 유서 깊은 곳이다. 서울 살이 반백년이 넘었지만 처음 오는 곳이다. 공원 후문 입구에는 ‘영무정의 사계절’이란 글을 새긴 비석이 있다. 근처에 영무정이란 정자가 있다. 예전엔 남성 전용 노천 냉수욕을 했던 곳이다. 물론 지금은 알몸 목욕은 금하고 있고 비누 사용도 안 된다.      


근처에는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와 그의 어머니 이 씨의 백로가가 새겨져 있는 시조비가 서 있다. 뒷면을 보니 한글서예 대가 일중 김충현이 글을 썼다. 1974년 한국일보가 창간 20주년을 기념해 세웠다. 주변 경관 어울리지 않고 역사적 맥락을 알 수가 없어 이질감이 느껴졌다. 다만 이곳에서 발원한 삼청동천 물줄기가 경복궁 건춘문을 지나 옛 한국일보가 있던 중학천으로 흘렀던 까닭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삼청공원 정문으로 빠져나오니 감사원 앞에는 베트남대사관 공사가 한창이다. 작지 않은 규모의 독립 건물을 짓는 걸 보니 그들의 국력 신장이 느껴졌다. 와룡공원길을 따라 조금 더 오르니 지은 통일부 산하 남북회담본부가 나온다.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 사무국으로 출발해  남북대화사무국, 남북회담사무국으로 개편된 후 2006년 남북회담본부로 바뀌었다. 이 곳을 지나자 성균관대학 후문이 나왔다. 처음 마주한 후문 옆 숲 속에는 재래식 화장실 한 채가 덩그마니 있다. 왜 그곳에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나 알 수가 없다.           


멀리 와룡공원이란 간판 글자가 보이고 한양도성이 지나고 있다. 백악산 자락 산길 정상이다. 이곳은 종로구와 성북구의 경계다. 와룡공원을 통해 북정마을로 접어들면서 성북구에 들어섰다. 북정마을은 시간이 멈춘 듯한 곳이다. 만해 한용운의 기거했던 심우장 옆은 낡은 폐가가 으스러질 듯 기대 있다. 반대편에는 성북동 고급빌라와 주택이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많이 걸었다. 슬슬 식당을 수배할 시간이다. 머릿속에 담아둔 곳이 있어서 선잠단지 쪽으로 내려와 한성대입구역 복개를 걷어낸 성북천이 시작되는 곳에 위치한 ‘소문난순대국’에 닿았지만 문이 닫혔다. 각오는 돼 있었지만 따끈한 소머리국밥에 수육 한 접시 먹으려던 계획이 틀어져 배가 더 고파졌다. 성신여대입구역에 후보지를 염두해뒀기 때문에 지하철 한 정거장을 또 걸었다.      


기본이 단단한 서서갈비 전문점 ‘마리채’

 

성신여대입구에 있는 서서갈비 전문점 ‘마리채’. 선입견과 달리 의외로 준수한 서서갈비를 구현하는 곳이다.

성북천을 따라 성신여대 방향으로 가다가 돈암제일시장을 관통해 족발과 아귀찜 전문점인 ‘오백집’에 닿았으나 역시 실내조명이 꺼져 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을 밀어 보지만 굳게 잠겨있다. 다음 후보지인 ‘태조감자국’ 역시 오후 4시 이후에나 문을 연다는 안내문만 덩그렇게 내 걸려 있다. 설날 당일이라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점지해 뒀던 세 곳이 모두 문을 닫는 바람에 소위 ‘멘붕’이 왔다.  

                      

하는 수 없이 눈에 보이는 데로 들어가기로 했는데 마침 서서갈비 간판이 크게 보였다. 코로나 이전 같았으면 사람이 없는 식당엔 들어갈 마음이 없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사람 없는 곳을 일부러 찾아다닌 세상이 됐다. ‘마리채’란 상호를 가진 서서갈비 전문점에 들어섰다. 홀이 비교적 넓고 창이 넓어 채광이 잘됐다.      


필자는 주문을 할 때 가급적 메뉴판 가장 상단의 것을 선택한다. 식당에서 가장 자신 있는 메뉴를 앞세우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모르는 식당에 왔을 때 가장 실패를 줄이고 만족할 만한 식사를 할 확률이 높다. 그래서 이번에도 서서갈비를 선택했다. 이 집은 갈빗살 대신 안창살을 사용한다고 메뉴판에 적어 놨다.      


안창살은 갈비에 포함된 부분육으로 돼지의 갈매기살과 같은 역할을 하는 소의 횡격막 부분이다. 소 한 마리에서 1.2~1.7kg가량 나오는 특수 부위로 지방이 없고 담백한 맛이 특징이다. 색상은 비교적 짙고 굵은 근섬유 결이 나있어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안창살이란 이름 유래는 정형 후 모양이 신발 안창처럼 생겼다고 해서 지어졌다는 설과 창문 안쪽 커튼 주름 모양이란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영어로는 인사이드 스커트(Outside skirt)라고 하는걸 보니 후자가 맞지 싶다.         


‘마리채’의 서서갈비는 기본양념이 탄탄하다. 잘하기로 소문난 몇몇 서서갈비 노포 식당의 양념을 정교하게 벤치마킹해 최적의 맛을 찾은 듯하다. 밑반찬도 깔끔하고 맛이 준수하다. 명이나물, 쌈무, 파채, 양파장아찌, 상추 등 쌈채와 된장국, 계란찜이 기본적으로 제공된다. 계란찜은 메뉴판에 있어서 주문했더니 기본으로 제공된다고 친절하게 알려줘서 고마웠다.      


숯도 성형탄이 아닌 목탄을 사용해 고기 맛을 더했다. 솔직히 말하면 대학가 앞이라 몇 번 지나면서 다소 만만하게 봤다. 그러나 고기 다루는 기술과 잘 손질된 고기를 제공하는 마음, 준수한 음식 맛이 그런 선입견을 일소시켰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염도가 조금 세다는 것인데, 이는 미각의 편차가 크기 때문에 염도계를 통해 조절해 보길 권해본다. 2차는 종로까지 걸어가 해물 칼국수 전문인 ‘찬양집’에서 시원한 칼국수와 만두로 입가심했다. 도시 답사로, 식당을 찾기 위해 원단 아침 이래저래 약 12km를 기분 좋게 걸었다.    


입가심은 종로 해물칼국수 '찬양집'       

2차 시원한 해물 조개국물로 입가심을 하기 위해 찾은 칼국수 전문점 ‘찬양집’의 칼국수와 만두. 칼국수 메뉴는 해물칼국수 단일 메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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