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파구 성내동 몽촌토성 안쪽 ‘참치의 味’ㆍ'김수환식당'
이번 칼럼은 서울의 동쪽 관문인 강동지역 송파와 지역 맛집을 소개한다. 송파구에는 퐁납토성과 몽촌토성, 석촌동고분군 등 백제초기의 중요 유적이 밀집해 있는 유서 깊은 도시다. 이 지역은 유적의 규모와 출토된 유구에 걸맞게 수도 서울의 기원을 가진 곳이다. 백제를 세운 온조왕이 서울 송파구 일대를 도읍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따지면 수도로서 서울의 역사는 2천 년에 이른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기원전 18년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하남위례성(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몽촌토성)에 도읍하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비류와 온조는 남행하여 마침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 지금의 북한산)에 올라 살 만한 곳을 살펴보았다. ……열 명의 신하들이 간하여 말하기를 ‘오직 이강 남쪽의 땅이 북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기름진 벌판을 바라보고 있고 서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어서, 하늘이 내린 험준함과 지리적 이점이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함이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이때 수도를 정한 백제의 역사는 660년까지 이어졌다. 백제 역사는 한성백제시대(BC 18~475), 웅진백제시대(475~538), 사비백제시대(538~660)로 구분된다. 오십 대 이상들에게 각인됐던 백제 역사는 185년(475~660) 동안 도읍지였던 웅진과 사비시대다. 반면 678년의 백제 역사 중 493년 동안 이어진 한성백제시대는 잘 모른다. 역사적 사실이 밝혀지지 않아 교육이 제대로 안됐기 때문이다.
백제의 전성기는 한성에 도읍했던 시대이다. 한성백제기인 고이왕대(234~286)에 이르러 백제는 고대국가로서 기틀을 세웠고 근초고왕이 집권(346~375)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정복군주로 평가받는 근초고왕은 남으로는 마한을 정복하고 북으로는 평양성을 공격(371)해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죽였다.
그러나 475년에 이르러 백제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고국원왕의 증손자인 장수왕이 3만 대군을 이끌고 한성을 침략했다. 장수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왕성을 장악하고 개로왕을 죽이는 한편 8000여 명의 백제군을 사로잡았다. 이때의 패배로 백제는 웅진(공주)으로 천도하면서 한성백제시대를 마감했다.
백제 첫 도읍지인 하남위례성 위치는 오랜 논쟁거리였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했는데, 사천(蛇川)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직산(稷山)이다”라는 기록에 따라 충남 천안시 직산면이 지목되기도 했고, 다산 정약용은 그의 저서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경기도 하남시 춘궁리 일대를 하남위례성이라고 비정(比定) 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1925년 을축년 대홍수는 하남위례성의 위치를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7월 기록적인 집중호우로 서울 이촌동을 비롯한 뚝섬, 잠실, 신천, 풍납동 일대가 물에 잠겼다. 이때 물난리로 400여 명이 사망하고, 가옥 1만2000 채가 유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홍수는 비극적 피해와 함께 뜻밖의 선물을 남겼다. 서울 암사동의 선사유적과 한성백제의 왕성이 있었던 풍납토성(사적 제11호)을 역사 밖으로 끄집어낸 것이다. 세찬 물살은 암사동 선사유적지에서 빗살무늬토기 조각과 석기들을 드러나게 했고 풍납토성에서는 청동초두, 금귀걸이, 유리옥 등이 세상 빛을 보게 했다.
이를 근거로 1937년 일본 학자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은 ‘풍납토성은 하남위례성’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반면 역사학자 이병도는 1939년 ‘진단학보’에 기고한 글을 통해 풍납토성은 백제 초기에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한 사성(蛇城)이란 주장으로 아유카이 후사노신의 주장을 반박한다. 그는 하남위례성은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 춘궁리 일대라고 주장했다. 이병도는 원래 사성(蛇城)으로 ‘배암들이’라 불리던 것이 변해 ‘바람들이’ 즉 풍납(風納)토성이 됐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풍납토성은 1963년 1월 사적 11호로 지정됐다. 이듬해인 1964년 서울대 김원룡 교수는 고고학과 개설과 함께 풍납토성을 발굴 조사한다. 이때의 발굴조사로 풍납토성은 백제 초기 유적으로 확증됐다. 그 후 1970년대에는 몽촌토성 일대가 하남위례성일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기되기도 했다.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터로 인정받게 된 계기는 우연한 사건에서 비롯됐다. 1997년 1월 1일 선문대 학술조사단을 이끌고 풍납토성을 찾은 이형구 교수가 터파기 작업이 한창이던 아파트공사장에 잠입해 수많은 백제 토기 파편이 박혀 있는 현장을 목격했다.
이 교수는 이 같은 사실을 언론에 제보했고 이를 계기로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이 즉각적인 현장검증과 긴급구제발굴에 들어갔다. 1500년 동안 땅 속에 묻혀 있던 한성백제의 실체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1997년 긴급구제발굴을 시작으로 풍납토성 일대에 대한 발굴은 여러 차례 진행됐다. 성벽 절개 발굴을 비롯, 왕성터로 추정되는 경당지구와 미래마을에 대한 발굴을 통해 수많은 유물들을 수습했다. 이를 토대로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터였다는 것이 입증됐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온조왕이 하남위례성에 도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9대 왕인 책계왕대에 이르면 위례성과 같은 의미로 도성을 지칭하는 한성이 등장한다. 비류왕 24년(327)에는 북한성(北漢城)이라는 명칭이 쓰이고, 392년 아신왕 원년에 다시 한성이 등장한다. 그 후 전지왕대와 한성백제의 마지막왕인 개로왕대에 이르기까지 한성이란 명칭이 지속적으로 사용된다.
이 같은 사료와 그동안 발굴된 유적과 유물을 토대로 학계에서는 백제의 첫 왕성인 위례성(慰禮城)은 한성(漢城)으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한성은 두 개의 성으로 이루어진 이성(二城) 체계였을 것이라는 추정이 학계의 지배적인 견해이다. 즉, 평상시에 왕이 거주하는 풍납토성과 유사시를 대비한 왕성이 몽촌토성이라는 것이다.
평지에 자리 잡은 풍납토성은 평상시 왕이 생활하는 왕궁이었고 외적이 침입할 경우 남성인 몽촌토성으로 이동해 전투를 치르는 성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런 연유로 2012년 4월 올림픽공원 안에 신축 개관한 박물관의 명칭은 한성백제박물관으로 명명됐다.
몽촌토성은 송파구 방이동 88번지 올림픽공원 내에 있다. 지하철 8호선 몽촌토성역 1번 출구로 나와 올림픽회관 앞 곰말다리를 건너면 몽촌토성에 다다른다. 지하철 5호선 올림픽공원역 3번 출구로 나와 동1문을 통해서도 접근할 수 있다.
몽촌토성은 사적 제297호로 지정돼 있다. 몽촌토성 지역은 88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체육시설 건립 예정지로 확정됐다. 이 때문에 1983년부터 1989년까지 모두 6차에 걸쳐 발굴이 이루어졌다. 다양한 형태의 백제 토기가 주로 발굴됐으며 고구려 토기도 섞여 나왔다. 이는 몽촌토성이 한성백제 멸망 후 한동안 고구려가 점령해 사용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몽촌토성 인근에는 대규모 식당밀집 지역이 발달해 있다. 대표적인 곳이 한미약품 빌딩 뒤쪽인 방이동먹자골목이다. 정식 명칭은 ‘방이 맛골’로 필자가 좋아하는 홍어집인 ‘호남집’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전통적인 외식 강호지대다. 이와 함께 송파구에는 석촌호수 카페거리, 신천동 먹자골목, 새마을전통시장, 방이재래시장, 석촌시장, 가락동농수산물도매시장 등이 외식업소 밀집지역이다.
몽촌토성과 올림픽공원을 가운데 두고 한글로 하면 같은 상호의 ‘참치의 미’란 참치 전문점 두 곳이 있다. 한 곳은 성내동에 있고 다른 한 곳은 방이동에 있다. 성내동이란 의미는 성의 안쪽이란 의미로 조선시대로 치면 사대문 안쪽을 의미한다. 몽촌토성의 북쪽이 성 안쪽이 되고 남쪽은 성 밖인 방이동이다.
이번에 소개할 식당은 성내동에 있는 ‘참치의 味’다. 한자로 쓰면 두 곳이 다른 상호란 것을 알 수 있지만 검색어를 입력할 때는 따질 겨를이 없다. 그래서 대부분 ‘참치의미’로 검색해서 찾는다. 때문에 성내동 ‘참치의 味’는 상대적으로 불리하지만 단골 위주 영업을 하기 때문에 큰 걱정을 하지 않는다.
이 식당은 가성비 좋은 가격대에 다양한 참치 부위를 풍성하게 맛볼 수 있는 곳이다. 20년 가까이 한자리서 단골을 일궈낸 노련한 대표님이 인상적이다. ‘U’자형 대형 테이블 가운데서 좌중을 훑어보고 적시에 접시를 채운다.
썬 모양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늘 목을 길게 빼고 좌중을 둘러보기 때문에 칼끝이 바쁘게 참치 살을 유린한다. 손님별, 테이블별로 다음에 채워 줄 참치 살 종류를 감안한다면 예쁘게 썰 겨를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맛이 받쳐주면 만사가 오케이다.
막썰기로 완급을 조절하며 손님 접시에 참치가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장사 포인트다. 참치는 해동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냉동 전 본연의 색을 찾을 수 있다. 필자는 냉동 참치를 주문해서 직접 해동을 해봤는데, 결과는 실패였다.
물론 참치 선도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해동이 참치전문점의 가장 큰 비장의 무기가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참치의 味’ 참치는 부위마다 제 색을 선명하고 영롱하게 낸다. 참치 마니아라면 한번쯤 가볼만한 성지다. 지하철 8호선 강동구청역 농협하나로마트 뒤쪽 골목에 위치해 있다.
‘참치의 味’를 지나 곧게 150여 미터 더 걸으면 ‘서울육개장짚불고기’란 쇠고기국물요리전문점이 나온다. 지금은 대표 이름을 앞세운 ‘김수환식당’으로 상호를 바꿨지만 검색은 여전히 ‘서울육개장짚불고기’로 돼 있다.
1세대 창업주는 서울식 육개장으로 이름을 날렸고 2세대가 이어받아 짚불고기, 볏짚숙성삼겹살을 얹어 메뉴를 진화시켰다. KBS 2TV 생생정보, MBC 찾아라 맛있는 TV에 짚불고기, 중앙일보 맛대맛에는 육개장편으로 소개된 이력이 있을 만큼 저력 있는 곳이다.
김 대표에 따르면 매장에서 조리하는 모든 육류와 양념은 국산이고 볏짚은 김 대표 고향인 전남 해남에서 친환경으로 재배된 것을 사용하고 있다. 김 대표는 “패스트푸드 퓨전음식 등 시류에 급변하는 음식이 아니라 진중하고 묵직하게 음식 본연의 자리를 지키는 그런 모습이고 싶다”는 음식 철학을 펼치고 있다.
서울육개장, 서울곰탕, 서울냉면, 도가니육개장 등 국물류 식사와 짚불고기, 25일 이상 된 볏짚숙성삼겹살, 치마살사시미 등이 주력이다. 아롱사태수육, 모둠 수육 등 삶은 고기도 있고 차돌매운탕, 곱창뚝배기 등 국물안주도 있어 육식파 주객들에게 최적화된 곳이다. 삼겹살 소스로 멜젓 대신 피시소스가 나오는 것이 독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