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맛동산

삼청동천 물길 따라 맛집도 따라 흐르네

이탈리아 식당 ‘수와래’ㆍ탕반 맛집 '부민옥'

청계천을 이루는 5대 물길인 백운동천, 삼청동천, 흥덕동천, 창동천, 남소문동천 등을 걷다가 마주치는 맛집에 대한 소개를 5회에 걸쳐 합니다. 물길 답사는 도시인문콘텐츠·디지털 헤리티지 아카이빙 전문단체 문화지평에서 기획하고 실행하며 서울시가 후원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옛 물길 따라 걷다가 마주치는 맛집②


주요 물길은 거의 모든 구간이 복개돼 눈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복개된 물길 위와 주변에는 조선시대와 근현대에 형성된 역사문화자원, 공간·자연유산, 산업관광유산 등이 무수히 들어서 있다. 이번 답사에서는 이들 자원을 ‘점·선·면’으로 이어 공간을 이해하는 시간이다.


전문 해설사의 해설이 없으면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는 것이 지금의 물길 상황이다. 이번 물길 답사는 전상봉 서울시민연대 대표가 맡았다. 전 대표는 서울시민연대와 발로품는서울이란 단체를 이끌면서 서울이란 도시를 역사문화적으로 재해석해 시민들과 널리 공유하고 있다. 2016년부터는 문화지평 해설사로도 활약하고 있다.

삼청공원서 발원된 삼청동천 물길

1.jpg 삼청공원 후문 쪽 삼청동천 발원지와 정문 삼청공원 표지석.

삼청동천 물길답사는 지난 5월 15일 진행했다. 물길이 시작되는 곳인 삼청공원에서 모여 일대를 둘러봤다. 삼청공원은 백악산(북악산) 동남쪽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물이 맑고 숲이 우거졌다. 그래서 지명이 깊은 골짜기 안에 도교의 삼청전(三淸殿)인 소격전이 있었다는 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삼청공원은 1934년 일제에 의해 만들어졌다. 1940년에 첫 도시공원으로 지정됐다.


당시 삼청공원은 140개의 계획공원 가운데 가장 먼저 도시공원으로 지정됐다. 처음 면적은 43만2000㎡이었으나 본격적으로 공원 조성 사업이 시작된 1984년엔 37만2418㎡으로 줄었다. 공원주변에는 수 백 년 묵은 소나무가 울창했던 곳이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궁궐 주변에 소나무를 주로 심었기 때문이다. 솔숲 위로는 산벚나무, 아래로는 진달래와 철쭉이 많이 자라 봄이면 화려한 꽃의 향연이 펼쳐지던 곳이었다. 그러다가 삼청터널이 뚫리면서 공원도 훼손됐다. 삼청터널은 종로구 삼청동과 성북구 성북동을 잇는 터널로 삼청공원 밑으로 뚫려 있다.


삼청공원은 서울 살이 반백년 동안 두 번째 방문이다. 올 설날 때 첫 발을 디뎠으니 여전히 처음이나 다름없다. 공원 내 숲속도서관 앞에서 물길 답사 해설이 시작됐다. 물길 발원지를 보기 위해 후문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공원 후문 쪽에는 영무정이란 정자가 있고 ‘영무정의 사계절’이란 글을 새긴 비석이 있다. 영무정 앞 계곡에서는 예전에 남성들이 모여 노천 냉수욕을 즐겼다고 한다. 영무정 앞을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오르면 삼청동천이 발원한 물줄기를 볼 수 있다.


인근에는 1974년 한국일보가 창간 20주년을 기념해 세운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와 그의 어머니 이 씨의 백로가가 새겨져 있는 시조비가 있다. 한글서예 대가 일중 김충현의 글을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다만 시비가 주변 경관 어울리지 않고 역사적 맥락을 알 수가 없어 생뚱맞았다.


삼청동천이 흘렀던 물길은 현재는 복개돼 삼청로로 변했다. 삼청공원을 벗어나 삼청동으로 내려오는 길은 물길답지 않게 가파르다. 옛날에도 그랬을까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감사원 뒷길로 해서 삼청동길로 접어들면 삼청동청사 쪽에서 흘러 내려온 물길과 만난다. 가수 전인권 씨가 사는 쪽 계곡에서 주택가를 관통해 흘러내려온다. 물길을 가운데 두고 양측에 집들이 마치 수상가옥처럼 들어선 동네다. 온전히 옛 물길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비라도 온 다음날이면 물소리가 제법 용맹하다.


합수지점에서 몇 발짝 더 내려가면 ‘지청천장군집터’라는 표석을 만날 수 있다. 지 장군은 삼청동 30번지(현재 30-1번지)에서 태어나 만주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항일 독립투사다. 주요 활동으로는 1935년 김원봉 등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가 1937년 탈퇴해 조선혁명당을 재조직했다. 김구와 함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고 임정 총사령을 거쳐 광복 후에는 대동청년단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하였으며 이듬해 제헌국회의원에 선출됐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됐다.


양반은 북촌 언덕에 하층민은 물가에 거주

2.jpg 북촌한옥마을에서 내려다본 삼청동 한옥. 1930년도에 지어진 20평 안팎의 중정이 있는 도심 한옥형태가 잘 드러나 있다. 아래는 양반들이 몰려 살았다는 북촌한옥마을

이 지역부터 소위 말하는 양반들 동네인 북촌한옥마을 일대로 불린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 가회동과 삼청동을 비롯해 계동, 재동, 화동, 소격동, 사간동, 안국동, 원서동 등 넓은 범위를 포괄한다. ‘북촌’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이기 때문이다. 옛 부터 권문세가들이 모여 살았다.


조선시대 삼청동천 주변은 신분에 따라 주거지가 나뉘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고 하는데 이곳에는 노론들이 살았으며, 종각 이남을 남촌이라 하는데 소론 이하 삼색당이 살았다’고 적었다. 조선시대에 계층별 거주 지역이 달랐던 이유는 풍수지리적 측면에 따른 선택도 있지만 사실상 한양(서울)이 계획도시였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조선 왕조는 도성 건설공사를 추진하면서 도성 내 대로와 중로를 다 닦기도 전에 개경에 살던 고관대작을 이주시키면서 택지를 나눠줬다. 택지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풍수지리적인 조건과 궁궐에 가까운 지리적 여건을 감안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경복궁 동쪽 마을인 북촌 지역에 몰려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남촌을 내려다보는 높은 언덕 위를 선호했다. 조선시대 주거지에는 골목길 양편에 하수로가 존재했다. 골목길 하수로는 하천을 거쳐 한강으로 이어졌다. 때문에 하천의 중심 기능은 처음부터 하수도일 수밖에 없었다. 즉 북촌의 중심부를 흐르는 삼청동천도 오물을 옮기는 하수로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오수가 흐르는 하천 주변은 열악한 주거지였다. 그래서 양반 대신 노비를 포함한 하층민들이 주로 몰려 살았다. 북촌 마을 높은 지대는 양반들의 대형 필지가 있지만 물길 옆에는 작은 필지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북촌에 아직 남아있는 몇 채의 한옥들은 조선시대 명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1930년대를 전후로 급격히 인구가 유입되자 부족한 주택을 공급하기 위하여 한옥들은 조각조각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지어진 20평 안팎의 도심 한옥군들은 중정을 갖는 전통배치를 유지하면서도 좁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을 하는 방식으로 설계됐다.


중부학당 앞으로 흘러 중학천으로 불려


3.jpg 삼청동천은 중부학당 앞을 흘러서 중학천이라고도 부른다. 중부학당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뒤편에 있었다.

삼청동천 길 가에는 화기도감 터, 삼청동문 바위 각자, 소격서 터, 종친부, 경복궁 건춘문, 동십자각, 사복시 터, 중학천, 혜정교 터 등 조선시대 유적이 표석이나 실제 모습으로 많이 남아 있다. 건춘문은 종신(宗臣) 즉 왕족의 친척과 궁 안에서 일하는 상궁들만 드나들던 문이었다. 종부시와 종친부가 건춘문 쪽에 위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건춘문의 담장 남쪽 끝에는 동십자각이 맞닿아 있었지만 일제시기에 잘려나가 현재는 동십자각만 도로 가운데에 떨어져 있다. 길을 지나다가 꼭 한번 보길 권한다.


삼청동천은 중학천이라고도 불렀는데, 조선시대 중등교육기관인 중부학당, 즉 중학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중학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뒤편 중학동 88번지 일대에 있었다. 서울시는 2009년 중학천 복원 공사를 추진했다. 도심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회복하고 광화문광장에서 피맛골과 인사동을 연결하는 문화관광벨트로 조성하는 동시에 시민들을 위한 쉼터를 마련한다는 취지였다.


물길 옆 식당 손님도 물 흐르듯 들어와


4.jpg '수와래’는 ‘물(水) 흐르듯 자연스레 손님이 찾아오는(來) 집’이란 의미를 담은 이태리 음식 식당이다. [사진=수와래]

물길 답사는 청계천에서 마무리됐다. 코로나19 이전 같았으면 “함께 밥 먹으러 갑시다”를 외쳤지만 지금은 “각자 알아서 하세요”로 바뀌었다. 두세 시간 함께 걸었던 소회도 나누면서 식사를 하면 밥맛도 좋았는데, 요즘은 그런 ‘사치’가 어려운 세상이다. 백신 접종률이 점차 높아지고 있으니 겨울이 오기 전엔 ‘호사’가 기대된다.

삼청동천 물길 옆에는 수많은 맛집이 늘어서 있다. 열 손가락으로 손꼽기 어려울 정도로 유명 음식점이 많은데, 이는 삼청동이 핫 플레이스란 의미다. 대형 음식점이던 ‘용수산’은 폐업한 뒤 오랫동안 비어있다가 지금은 ‘길운구락부’라는 중식당이 들어섰다. 삼청동 하면 ‘삼청동수제비’, ‘청수장’ 등이 식객들 줄을 세웠지만 지금은 시들하다.


파스타와 피자, 스테이크 등 이태리 요리와 와인을 즐길 수 있는 ‘수와래’도 물길 옆에서 잘 견디고 있었다. 지난 2018년 기독교방송(CBS) 권영철 선배가 소개해 준 곳으로 이후 같이 몇 번을 다녔던 기억이 난다. 삼청동이란 고즈넉한 공간감과 이태리 음식이라는 이국적 맛이 어우러져 만족도가 높은 곳이다. 2000년 3월에 문을 열어 21년간 자리를 지킨 중견 식당이다. 옛 사진을 사용하자니 플레이팅 변화가 있을 듯 해 수와래 페이스북 사진을 가져왔다.


‘수와래’란 상호는 선뜻 이해하기 어렵지만 ‘물(水) 흐르듯 자연스레 손님이 찾아오는(來) 집’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상호가 담은 뜻도 좋지만 삼청동천 물길 옆이라 물의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업력 20년을 넘겼으니 30년, 40년 이상 가는 노포로 발전하길 기원한다.


한 갑자 업력의 탕반 노포


5.jpg ‘부민옥’은 을지로 일대에서 약 65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곳이다. 육개장, 선지해장국, 양곰탕 등 탕반이 깊은 맛을 자랑한다.

이날 답사가 끝나고 달려간 곳은 필자가 사랑하는 곳 중구 다동에 있는 노포 ‘부민옥’이다. 함께 물길 답사를 한 일행 중 전동휠체어를 탄 이동장애인 때문에 선택한 식당이다. ‘부민옥’은 몸집이 제법 큰 전동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문턱이 없어서 일전에도 함께 갔었던 곳이다. 메뉴 역시 좋아하는 탕반류가 많아서 시청 언저리에 약속이 있으면 웬만하면 ‘부민옥’을 간다. 고인이 된 영화배우 신성일 씨도 부민옥 예찬론자다. 그에게는 특별히 선지 많은 해장국이 제공됐다는 후문이다.


‘부민옥’은 을지로 일대에서 약 65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곳이다. 결대로 찢은 살코기를 듬뿍 얹은 육개장이 대표메뉴다. 6~7시간 동안 푹 고아낸 사골 육수에 큼지막하게 대파를 썰어 넣고 소금, 고춧가루로만 간을 맞춘 게 특징이다. 대파와 양지고기 길이가 어른 중지만큼 길어서 숟가락으로 뜨면 걸쳐 늘어질 정도다.


최소한의 양념만 사용해 파의 단맛과 고기의 육향이 국물에 진하게 담겨있다. 투박하게 썰어낸 양과 미나리, 고추, 양파 등 채소를 참기름 소스로 무쳐낸 ‘양무침’도 인기 메뉴다. 쫄깃쫄깃한 식감과 푸짐한 양 덕에 애주가들이 술안주로 즐겨 찾는다. 1956년에 창업, 2대째 이어가고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