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6가 손맛 좋은 ‘시골밥상’...한상 가득 밑반찬 넘치는 인심은 덤
청계천을 이루는 5대 물길인 백운동천, 삼청동천, 흥덕동천, 창동천, 남소문동천 등을 걷다가 마주치는 맛집에 대한 소개를 5회에 걸쳐 합니다. 물길 답사는 도시인문콘텐츠·디지털 헤리티지 아카이빙 전문단체 문화지평에서 기획하고 실행하며 서울시가 후원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도시인문콘텐츠·디지털헤리티지 아카이빙 전문단체 문화지평은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지원사업 일환으로 청계천을 이루는 주요 5대 물길 답사를 진행하고 있다. 백운동천을 비롯해 삼청동천, 흥덕동천, 창동천, 남소문동천 등 다섯 개의 주요 지류에 대한 답사와 물길 위 맛집을 찾는 ‘맛있는 동네산책’을 겸하고 있다. 이번은 백운동천(본지 제592호), 삼청동천(622호)에 이어 대학로 밑을 흐르는 흥덕동천을 걷고 물길 위에 있는 맛집을 소개한다.
이번 동네산책은 김태휘 역사문화해설사가 맡았다. 그는 창덕궁‧의릉 궁궐길라잡이, 한양도성 시민순성관으로 있으면서 역사와 조경생태 분야 전문가다. 문화유산아카데미, 전국역사지도사모임 대표로 있으며, 조선 왕릉과 골목길 해설 등으로 관심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그는 특히 표석과 관련된 역사 스토리텔링에 해박해 관련 책을 시리즈로 내고 있는데 곧 네 번째인 ‘표석을 따라 서울을 걷다’ 출간을 앞두고 있다.
동네산책은 성균관대학교 앞에서부터 시작했다. 흥덕동천 지류 중 하나인 동반수가 지나는 곳이다. 성균관은 제향공간인 대성전 일곽을 앞에 두고 뒤로 강학공간인 명륜당 일곽을 배치한 전묘후학(前廟後學)을 취하고 있다. 일반 서원은 반대로 전학후묘를 취한다. 조선의 문묘는 1397년(태조 6)에 96칸 규모로 출발했다. 개성으로 환도한 사이인 1400년(정종 2)에 대성전이 불에 탔다. 이후 1407년(태종 7)에 다시 지었다.
연산군 때 문묘는 한때 짐승을 기르는 놀이터로 변했다고 한다. 이를 1506년(중종 원년)부터 6년 동안 모두 정비했지만 임진왜란 때 전사청과 동·서재 일부를 남기고 대부분 소실됐다. 1601년(선조 34)부터 1605년 사이에 거의 원래 모습으로 중건했고 1869년(고종 6) 대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문묘는 대성전, 동무, 서무 등 제향공간과 명륜당, 동재, 서재 등 강학공간으로 크게 나뉜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해 증자, 맹자, 안자, 자사 등 5대 성인과 공자의 제자들인 10철, 송나라 6현, 우리나라 명현 18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전면 툇간은 개방된 전형적인 사당 평면을 취했다. 동무, 서무는 11칸으로 동일한 규모이며 내부는 트여 있다.
대성전 앞쪽 마당의 동서 쪽에는 유교의 덕목인 삼강오륜을 나타내는 삼강목과 오륜목이라 불리는 향나무가 있다. 향나무 가지가 3개, 5개로 갈라져서 붙은 이름이다. 동남 모서리에는 1칸 규모의 묘정비 비각이 자리 잡고 있다. 신문은 남향으로 3칸, 동삼문은 동무의 북쪽에 있어 동향으로 3칸 규모다. 성균관의 정단인 명륜당은 강당으로 쓰인 건물이다. 동재와 서재는 18칸으로 동일한 규모다. 성균관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양현고 앞을 지나 송시열의 집터로 향했다.
양현고는 현재 표석만 남아 있는데, 성균관 유생들의 식량, 물품 공급을 담당한 기관이다. 1392년(태조 1)에 고려의 제도를 계승해 호조의 부속기관으로 설치됐고 1894년 갑오개혁 때 과거제 폐지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물길을 거슬러 오르니 흥덕사지 표지석이 나온다. 이곳은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곳이다. 1401년(태종 1) 여름 이성계는 태상왕 태조의 신분이었는데, 예전에 자신이 살던 집 동쪽에 터를 정해 흥덕사를 창건하게 했다. 연산군 때 폐사가 됐다고 하니 부자지간의 사이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흥덕사는 정릉의 원찰 흥천사와 더불어 조선 초 왕실서 지은 사찰이다. 억불숭유를 건국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의 아이러니가 엿보인다.
흥덕사는 명륜동1가 산 1번지에 자리하고 있어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흥덕동이라고 불렀다. 지적원도에 따르면 숭1동 2번지(현 종로구 명륜동1가 2-1번지 일대)로 지목은 社(廟(묘) 사당)로 북묘 터와 중복된다. 북묘는 1883년(고종 20)에 성균관 뒷산에 관성묘를 세우고 북묘라고 불렀다. 중국 촉나라 명장 관우를 모신 사당이다.
흥덕사가 폐사되고 북묘가 들어서기 전에는 우암 송시열의 집터로 추정된다. 빌라촌 관리실 옆에는 보일 듯 말 듯 ‘尤庵舊基’(우암구기)라는 비석이 서 있고 조금 더 오르면 집들에 둘러싸인 거대한 암벽에 ‘曾朱壁立’(증주벽립)이란 각자가 나온다. 증·주는 각각 공자의 제자 증자와 송나라 유학자 주희를 뜻한다. 이들은 자기 처신과 학문에 있어서 올바른 뜻을 굽히지 않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주희의 경우 조정에서 쫓겨난 뒤 재야에서 제자 양성을 하던 중 측근이 학생들을 보내 화를 피하라고 했지만 그는 “나를 깎아지른 절벽에 세울지라도 어찌 대가 가는 길에 방해가 되겠는가”라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송시열은 조선 후기 주자학의 대가이자 노론의 영수로서 독선적이고 강한 성품 때문에 여러 번 정치적 곤경을 겪었다. 그 역시 증자와 주희처럼 자신의 소신을 지키겠다는 뜻으로 ‘증주벽립’이란 각자를 남긴 것이다. 그는 충청도 옥천 생으로 만년에는 괴산에 머물렀다. 임금의 부름을 받거나 벼슬살이를 할 때에는 서울 숭교방 흥덕동에 거처했다는 기록이 남았다. 때문에 그가 살던 동네를 송동(宋洞)이라고도 불렀다. 이는 그의 정치적 입지뿐만 아니라 그의 집터 규모를 짐작케 하는 단서다.
‘증주벽립’ 외에도 근처에 있는 서울과학고등학교 교정에는 ‘今古一般’(금고일반,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과 ’詠磐‘(영반, 올라앉아 시를 읊는 바위)이라는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두루 남아 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충주로 피신했던 민비의 환궁 시기를 무녀 이성녀가 적중시켰다. 민비는 환궁 후 무녀 이 씨를 진령군으로 봉했고 그녀 말을 잘 들어줬다. 이 씨는 민비에게 흥덕사가 있던 곳에 북묘를 영건해 관우를 제향하면 자손이 번성하고 복운이 온다고 역설해 1885년 북묘를 설치했다.
1913년 동묘와 합쳤고 현재 동묘만 남아 있다. 빈터로 남았던 것을 1930년 동국대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가 불하받아 이들이 인수한 보성전문학교를 이곳으로 옮겼고 광복 후 한때 경기여자대학에서 사용했다. 1963년에 설립한 은석초등학교가 사용하다가 장안동으로 이전한 뒤 분할돼 주택가가 들어섰다. 송시열의 집터를 뒤로 하고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 앞으로 내려왔다.
흥덕동천은 여러 이름을 포함하고 있다. 주 물길은 현 서울국제고와 서울과학고에서 각각 발원해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 앞에서 합수해 흐르는 것이다. 두 물줄기는 쌍계동천이라고도 부른다, 합수된 물줄기는 지금의 혜화초등학교 앞을 흘러 혜화동로터리에서 대학로 큰길이 아닌 우리은행 뒷골목으로 빠져나간다. 혜화역 4번 출구에서 반수(泮水)와 합수해 대학로로 물길을 잡는다.
흥덕동천은 유난히 많은 학교를 지난다. 특히 성균관대학교, 서울대학교, 동국대 전신 불교중앙전문학원, 경기여대 등 대학을 많이 지난다. 그래서 대학천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서울대학교의 영향이 크다. 대학로란 거리 이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지어졌다. 해방 직후 11월 100명의 인사들로 구성된 ‘조선교육심의회’가 경성제국대학 건물을 활용해 국립 종합대학교를 설립할 것을 제안해 이듬해 10월에 국립서울대학교로 개교했다. 경성제대 본관 건물은 지금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가의 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설계는 1세대 건축가 박길룡 씨가 관여했다.
서울대는 1970년부터 흩어져 있던 캠퍼스를 통합하기 위해 관악캠퍼스 조성에 착수했다. 당시 학교는 동숭동(문리대·법과대·예술대 미술부), 연건동(의과대학), 공릉동(공과대학), 경기도 수원(농과대학), 종암동(상과대학), 을지로(사범대학), 소공동(치과대학), 남산동(예술대 음악부) 등지에 쪼개져 있었다. 관악캠퍼스 조성 5년 만인 1975년부터 대학본부와 단과대학들이 이전하기 시작했다. 2003년 수원 상록캠퍼스에 있던 농대와 수의과대도 관악으로 이전했다. 연건캠퍼스에는 의대·간호대·치의학대학원이 존속하고 있다.
물길은 종로5가역 쪽을 향하다가 서울사대부속초등학교 앞에서 좌측으로 살짝 꺾어져 흐른다. 서울사대부속초 는 고풍스러운 교문을 가지고 있다. 이는 원래 탑골공원 정문 기둥이었다. 탑골공원은 원각사란 절이 있던 자리에 1897년 탑과 대문을 세우고 파고다공원으로 문을 열었다. 기둥은 1969년 3.1절 50주년을 기념해 서울시가 서울대 법대 교문기둥으로 기증했다.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양시키기 위해서였다. 1975년 법대가 관악으로 이전하면서 남기고 간 것을 부속초등학교가 사용한 것이다.
부속초 정문 좌측 골목으로 물길이 살짝 휜다. 도로명으로는 율곡로14길이 옛 흥덕동천 물길이다. 지금도 도로에는 커다란 정방형 철판이 곳곳에 덮여 있다. 길 아래로 물이 흐른다는 의미다. 종로6가로 넘어와서는 종로39길 아래로 흐른 흥덕동천은 곧 청계천에 이르러 합수된다. 합수 직전 대학천상가가 물길을 증명하듯 서 있다. 합수 지점은 지금의 전태일 동상이 서 있는 마전교 아래다.
무려 4시간 가까운 흥덕동천 물길 따라 동네산책이 끝났다. 10시 반부터 시작해 오후 2시20분에 끝났으니 어지간히 시장들 하겠다. 근처서 요기를 할 곳은 인근 대학천상가 뒤편으로 닭한마리와 생선구이가 유명한 골목이 있고 종로6가에는 전라도 손맛을 맛볼 수 있는 보리밥 숨은 맛집인 ‘시골밥상’이 있는데, 두 곳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더니 죄다 보리밥집을 가자며 길을 재촉했다.
‘시골밥상’ 간판을 찾으려면 눈을 크게 떠야 한다. 입구가 매우 작고 좁다. 그래서 간판도 주변 점포보다 작다. 전면이 그리 크지 않은 건물에 간판 네 개가 걸렸으니 작을 수밖에 없겠단 생각을 하면서 입구에 들어서니 ‘시골밥상’ 이외에 ‘호성갈비’란 상호도 크게 붙여 놨다.
전남 곡성 생 이영숙 대표에게 연유를 물어 사연이 깊다. 이 대표는 여수로 시집을 가면서 경찰공무원을 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내륙 곡성과 여수 바다의 손맛을 두루 익힌 후 서울로 상경해 창신동에 돼지갈비집을 차렸고 장사가 잘 됐다. 6년 동안 영업을 하다가 조물주보다 세다는 건물주의 압박으로 인해 일찍이 젠트리피케이션을 체험하고 지금의 종로 6가로 자리로 옮겼다. 지금도 같이 일하고 있는 황금실 실장은 재개업 3일 만에 한 식구가 돼 20년을 동고동락했다.
대략 아홉 가지 밑반찬을 모두 직접 손으로 조물조물 만들어 낸다. 몽땅 채소일 때도 있지만 멸치볶음 등 육해공 제철 반찬이 제공된다고 보면 된다. 하루는 여수서 올라와야 할 조기가 떨어졌다며 민어찌개를 내놓는다. 씨알은 작지만 한번 구워서 찌개에 넣으니 그 또한 별미로 먹을 만했다. 그러고 보니 민어 제철이 시작됐다. 건새우와 디포리, 대파, 청양은 때가 되면 따로 넣어준다. 마무리 열무김치는 새콤달콤을 기대하면 오산이다. 처음 접해보는 묘한 맛으로 쉽게 설명하기 어렵다.
역시 시골밥상의 대표 메뉴는 보리비빔밥에 청국장이다. 쿰쿰한 냄새는 약한 청국장이지만 여러 채소 반찬과 어울러 보리밥과 비비면 한 끼 끼니로 거뜬하다. 공깃밥을 계속 가져다주면서 더 먹으란 소리가 정겹다 못해 눈물겹다. 유쾌한 할머니 사장님의 입심과 손맛이 주는 푸근함이 좋은 곳이다. “담에는 삼겹살 먹어봐. 고기가 좋아!”. 또 갈 이유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