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맛동산

전설의 서울 식당 노포는?

117년 이문설렁탕, 용금옥·잼배옥은 90년 역사 자랑

한국전쟁 직후 생긴 평양·함흥냉면 ‘선전’


외식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질문은 쉬운데 답은 어렵다. 음식점이 우리 사회에 언제부터 생겼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여러 가지 연구결과에 따르면 의식주 생활의 기틀이 잡힌 때부터라고 추정한다. 이때를 대략 삼국시대로 추정한다. 즉 이때부터 음식점이 있었을 것이란 추정이다. 삼국시대는 농경생활이 어느 정도 기반이 잡혀서 식생활이 안정되는 시기이다. 다만 불교 영향으로 육류와 생선을 식탁에 올리는 것은 금기시됐다. 따라서 식탁은 대부분 곡물과 채소로 채워졌을 것이다.


이런 식생활 습관은 농경의 발전을 가속화시켰고 주식과 부식이 나뉘어 발달했다. 식량자원에 따른 식생활 체계가 잡히고 식습관이 생겨나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쌀, 보리 등은 이미 이때부터 전통적인 주식으로 자리했고 부식으로는 콩을 이용한 장류가 등장했다. 또 젓갈과 짠지 형태의 김치 등 절임식품이 본격적으로 식탁에 오르기 시작했다. 김치박물관에 따르면 이 시기 본격적으로 정착을 통한 농경문화를 일구었던 문화적 환경과 한반도의 기후 요소 등으로 장이나 젓갈 절임을 통한 짠지 형태의 초기 김치가 탄생했다.


신라에 의해 삼국이 통일되면서 식탁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삼국의 음식문화가 교류하면서 발전을 거듭했다. 향토 음식의 발전과 지역 간 음식 교류 등을 통한 새로운 식탁문화가 형성됐다. 농경문화의 지속적인 발달로 쌀 생산이 늘면서 주식 자리를 확고히 했다. 외국과의 교류도 늘어나면서 우리 고유의 정체성을 갖는 음식문화가 정착되는 시기였고 이렇게 발달한 음식문화는 일본에 영향을 줬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의 채소 절임인 ‘나라쯔께’는 삼국시대 짠지가 일본 나라(奈良) 시대에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식생활의 발달은 자연스레 외식문화와도 궤를 같이 했다.


문헌에 따르면 신라 장군 김유신이 기생 천관의 집에 드나든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현대의 술집과 같은 개념으로 술과 음식이 제공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외식의 일종이란 해석이 있다. 또 농경사회의 각종 제례의식에서 재(齋)를 올리고 난 음식을 나누는 행위도 외식으로 보기도 한다. 시장이 형성되고 주막이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외식 문화가 발달했을 것이란 추정이 힘을 받는다.


조선시대 음식점·술집 늘면서 외식업 태동

조선시대 식당 모습. 가가(假家) 형태였다.

주점이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후기로 본다. 정치적 혼란으로 경제가 어려워지고 살림이 피폐해지자 너도나도 상업행위로 뛰어들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종로, 을지로, 청계천 등지에 상점과 식당이 집중적으로 늘어났다. 특히 음식점과 선술집의 증가세가 눈에 띄는 데 1930년대 들어 주막집들은 음식점으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선술집에서 팔던 ‘술국’이 큰 역할을 했다. 전날 마신 술 때문에 더부룩한 속을 달래는 탕국 문화가 발달하면서 용금옥, 곰보집, 형제추어탕, 이문설렁탕, 청진옥 등이 등장했다. 이문설렁탕(개업 당시 이문옥)은 1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지닌 식당으로 흔히 말하는 노포(老鋪)의 맏형 격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노포(老鋪)란 사전적으로는 오래된 점포지만 외식업에서는 메뉴와 서비스의 승계를 포함하는 의미다. 老鋪는 일본어로 ‘시니세’라고 읽는다. 시니세의 시(し)는 스루(する)가 어원으로 이는 ‘하다’라는 뜻이다. 니세(にせ)는 니세루(にせる)라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로 ‘닮게 함 또는 흉내 냄’의 의미다. 따라서 두 글자를 함께 해석하면 ‘본래의 것과 닮게 만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나라 외식업 역사의 시작은 어디서부터라고 단정하기 어렵지만 대략 구한말 일제에 의해 강제합병 되면서 부터로 본다. 이때가 궁에 있는 숙수들이 밖으로 나가 궁중요리를 앞세워 요릿집을 차릴 때다. 100여 년 정도의 역사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경우 100년 이상 된 가게만 1만 곳이 넘는다. 메밀국숫집 ‘오와이야’는 600년 간 대를 잇고 있다. 초밥집 ‘이요마타’는 400년의 전통을 자랑한다.


우리나라서는 그만큼 오래된 곳은 없고 50년 이상 영업을 하면 상당한 역사로 친다. 서울의 노포 음식점으로는 이문설렁탕(1904년 개업), 형제추어탕(1926), 청진옥(1937), 열차집(1956), 용금옥(1932), 은호식당(1932), 잼배옥(1933), 하동관(1939), 조선옥(1948), 명동할매낙지(1950), 진주집(1950), 안동장(1950), 문화옥(1952), 안성집(1957), 전주중앙회관(1959), 고려삼계탕(1960), 진주회관(1962), 만수집(1930), 곰보추탕(1933), 옥천옥(1941), 무수옥(1942), 한일관(1939), 대중옥(1950), 송림원(1945), 옥돌집(1948), 태조감자국(1958), 부여집(1947), 삼거리먼지막순대국(1957), 덕원(1960), 창익집(1955), 할매복집(1949), 찰떡등심(1950), 평안도오부자(1950), 연남서식당(1953), 거구장(1953), 마포진짜원조최대포(1956), 역전회관(1962) 등을 손꼽는다.

냉면집으로는 우래옥(1946), 강서면옥(1948), 조함흥냉면(1952), 당고개냉면(1952), 오장동흥남집(1953), 을밀대(1954), 오장동함흥냉면(1958), 함흥곰보냉면(1960) 등이 있다.


여전히 전설을 써내려가는 식당들

사진 상단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이문설렁탕, 잼배옥, 문화옥의 설렁탕, 은호식당 꼬리곰탕과 하동관 곰탕. 청진옥 해장국.

1904년 문을 연 ‘이문설렁탕’은 서울 토박이 음식으로 설렁탕이 자리 잡게 한 장본인이다. 설렁탕은 조선 말기부터 일제 강점기 사이 서울 전역에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서울 대표 음식이 됐다. 100년이 넘은 '이문설렁탕', 70년이 넘은 '잼배옥', 문화옥은 사대문 안에서, ‘옥천옥’, ‘무수옥’ 등은 밖에서 개업해 지금도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다.


이문이란 이름은 돈의문을 고쳐 다시 자리 잡은 후 신문(新門), 새문, 이문 등으로 부르면서 유래됐다. 새문안이란 도로명은 새문의 안쪽을 일컫는 말이다. 잼배옥의 잼배는 염천교 동쪽 철도 옆에 자암이라는 붉은빛이 나는 바위가 있던 마을 이름에서 유래됐다. 설렁탕은 뽀얀 국물에 파와 소금을 넣고 소면과 함께 말아먹는 맛이 일품이다.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에도 앓아누운 아내가 먹고 싶은 것으로 설렁탕 국물이 등장할 정도로 대중성인 음식이었다. 설렁탕은 소뼈 곰탕은 고기를 주재료로 국물을 낸 것이다.


설렁탕의 국물 맛은 담백하고 가벼우며 색깔이 뽀얗고, 곰탕의 국물 맛은 진하고 무거우며 색깔이 약간 노리끼리하다. 설렁탕을 더욱 맛있게 먹으려면 담백한 국물 그대로 먹거나 깍두기 국물을 풀어서 먹는 것이 전통적인 서울 방식이다. ‘하동관’은 곰탕, ‘은호식당’은 꼬리곰탕과 꼬리찜이 일품이다.

‘청진옥’은 해장국 전문점으로 3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피맛골 주변 해장국 골목에서 상호도 없이 천막(탄막)을 치고 장사를 시작했다. 나중에 평화옥이란 이름으로 영업을 이어가다가 6·25 전쟁 후 청진옥으로 바꿨다. 대표 메뉴인 해장국은 소 내장과 우골, 배추와 쪽파 등 채소를 듬뿍 넣고 24시간을 고아낸 국물에다 선지와 콩나물, 우거지 등을 섞어 끓여냈다. 생전의 백범 김구 선생과 윤보선 전 대통령 등이 단골이었다.

용금옥, 형제추어탕, 곰보추탕은 추어탕 노포들이다. 용금옥은 3대째 이어가고 있는 서울식 추어탕 전문점이다. 1932년 창업주 신석숭 씨가 중구 무교동에서 문을 열었다. 용금옥 추어탕은 서울식으로 된장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호남식과는 사뭇 다르다. 소 내장과 양지머리로 낸 육수에 유부, 두부, 버섯, 호박, 대파, 양파 등을 넣고 끓인다. 시인 변영로, 정지용, 박종화(朴鍾和), 언론인이자 소설가인 선우휘 등을 비롯해 문화예술인들과 언론인들이 즐겨 찾았다. 형제추어탕과 곰보추탕은 백년가게에 닿지 못하고 아쉽게도 문을 닫았다.


평양과 함흥식으로 나뉜 냉면 입맛

사진 상단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오장동흥남집, 오장동함흥냉면의 함흥냉면과 우래옥, 강서면옥, 을밀대의 평양냉면.

중구 오장동은 함흥냉면집들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오장동흥남집’은 1.4 후퇴 때 피란 온 노용언 할머니가 호구지책을 좌판을 펴고 장사를 하면서부터 역사가 시작됐다. 1960년대 오장동을 옮겨 ‘오장동함흥냉면’과 함께 양대산맥을 이룬다. ‘오장동함흥냉면’은 한혜선 할머니가 창업해서 가업을 물려줬다. 지금은 이들 할머니 모두 작고하셨다. 함흥냉면은 평양냉면과 함께 냉면의 쌍두마차로 식객들을 양분하고 있다.


평양냉면 노포로는 ‘우래옥’, ‘강서면옥’, ‘을밀대’ 등이 있다. 우래옥은 3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창업주 장원일 씨가 평양에서 음식점 명월관을 경영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광복 이듬해에 을지로4가 로터리 근처에서 서북관(西北館)을 개업해 오늘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래옥의 역사가 곧 서울 평양냉면의 역사라고 할 만큼 유서 깊다. 한우 암소 우둔과 다리살 등을 통째로 넣고 4~5시간 끓여 만든 육수에 일체 다른 것 없이 메밀면 만을 넣어 손님들에게 제공한다. 육수가 농후하고 육향이 진하다는 평이다. 냉면 외에도 불고기와 갈비 등도 손님들이 즐겨 찾는 메뉴다.


‘강서면옥’은 평양 윗동네인 평남 강서에서 1948년부터 영업을 했다. ‘이북진미’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면서 전통 이북식 냉면 맛을 인정받아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 장기간 납품하기도 했다. 특히 남북적십자회담 대 북측 대표단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전쟁이 나자 남한으로 피난해 1953년 평택에서 문을 열었다가 68년 서소문 75번지로 이전했고 84년에 지금 자리에 자리 잡았다.


100년 이상 또는 7·80년 된 노포들에게는 분명 강력한 ‘한방’이 있다. 그것은 맛뿐 아니라 향수를 달래주는 분위기와 서비스 등 여러 요소일 것이다. 노포들이 쉬 사라지지 않고 전설을 계속 써 내려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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