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는 달리, 아이는 오자마자 바로 시차 적응을 한다. 월요일 아침에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좋아하는 옷을 갈아입고, 친구들에게 줄 선물을 챙긴다. 하지만 나는 아이보다 훨씬 적응이 늦었다. 도착한 지 일주일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새벽에 홀로 깨 있다. 어쩌면 시차 적응을 핑계 삼아 <미스터 선샤인>을 모두 본 탓일 테고, 그것은 또 어쩌면 여행 뒤에 찾아오는 어떤 감정을 제대로 맞이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른다.
도착해서 처음 이틀은 몸도 마음도 퍽 가벼웠었다. 한 달 동안 외국을 떠돌며 마음을 짓눌렀던 묵은 감정을 그곳에 두고 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반복되는 집안일도, 냉장고를 채우고 있는 시어머니의 반찬도, 또 보내주시려고 반찬을 싸고 있다는 소식도 전혀 짜증 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튿날 나의 마음은 무겁게 내려앉았고 낮에는 깊은 잠을 자버렸다. 캐나다와 유럽에 있는 동안에는 집에서 머물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매일 어딘가를 다녔다. 하지만 한국에서 난 특별히 나갈 이유가 없으면 주로 집에 머문다. 여행 중 봐왔던, 목적 없이 거리를 쏘 다니는 그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왜 그들이 그토록 여행에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돌아온 지 이틀 만에 나의 마음은 인근 바다로 향하고 있었다. 그래 주말엔 가까운 바다에라도 가보자. 이것은 여행을 마치고 비로소 내게 찾아온 소중한 감정일 거다.
장을 봤다. 그리고 굴을 샀다. 내가 굴을 집으려고 하면 남편은 옆에서 '당신 먹어. 난 굴 안 좋아해'라고 하는 바람에 집으려던 걸 대부분 놓고 그냥 돌아섰다. 캐나다에서 맛봤던 것처럼 싱그러운 맛은 나지 않았지만 홈플러스에서 사 온 굴도 꽤나 맛이 좋았다. 그래서 깨닫게 되었다. 내게 행복이란 게 가족 중 누구도 먹지 않는 굴을 사고, 재미없는 일일 드라마와 주말 드라마를 끄고, 출연자들이 시끄럽게 껄껄대는 예능을 끄는 것이라는 걸. 대신 긴 서사가 담긴 드라마를 켜고 그곳에 담긴 명대사들을 한 번씩 읊어보는 것이라는 걸. 목적도 효용도 없이 그저 집 밖을 나가 얼마동안 걷고, 사사로운 풍경과 사사로운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이라는 걸.
그리고 술술 써지는 글. 번아웃이 심했을 때에는, 마감을 치기 위해 컴퓨터에 앉으면 온몸이 바짝 긴장이 되어 심장이 아프기도 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번 여행에서 나는 적어도 이틀에 한 번은 일기를 적었다. 물론 일기를 적는 것도 이 여행의 일정에 처음부터 포함되어 있었지만,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이기에, 그날의 일정이 너무 고되었다면 굳이 기록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었다. 하지만 아이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의젓하고 강했고, 저녁에 숙소로 돌아오면 놀랍게도 삶의 여유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의 집을 며칠 빌려 쓰는 처지라 집안에서 달리 할 것도 없었고, 티브이에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흘러나오니 켜둘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빈둥거리며 쉬다가 심심하면 뭔가를 끄적였다. 그러니 여기 실린 글들은 오로지 나를 위해 쉽게 쉽게 써 내려간 글들이다.
앞으로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본래부터 나의 것이었다면 하나하나 되찾기를. 혹여 주변 사람들의 반갑지 않은 침입이 들어온다 하더라도 나 스스로를 크게 상하지 않고 그저 바다나 전시회, 공원을 둘러보며 털어낼 수 있는 내가 되기를 바라본다.
2025.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