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켓에서 설 세기 11
인천 공항에 거의 다 왔을 때 재인이가 찍은 상공이다. 구름이 유난히 뭉게뭉게 예쁘다. 눈구름이라서 그런가 보다. 저 아래에서는 폭설이 한창이었다.
얼마 전 큰 비행기 사고가 있었던 터라 다들 말은 안 해도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평소 사고와 질병에 무척 예민하신 시어머니의 진두지휘 아래 '안전제일'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곤 하는 우리 가족이다. 그런데 우리 가족이 푸켓 여행을 하고 있을 때 한국에서는 폭설로 인한 교통사고, 철도사고 등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사건 사고가 많은 이 시기에 다 같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는 게 신기하다.
새해가 찾아왔고 각자에게도 앞으로 크고 작은 변화가 찾아올 것이다. 어쩌면 지금까지는 최고의 것으로 여겨왔던 가치들도 조금씩 방향을 바꾸기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파리, 캐나다 여행, 이사와 더불어 올해 계획하고 있던 이동 프로젝트 중 한 가지를 해냈다. 시댁 식구와 함께 하는 장거리 여행이라 걱정도 많았지만 그래도 다녀오길 잘한 것 같다. 오랜 침체로 몸과 마음이 무거웠었는데 여행을 다녀온 후 많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이렇게 여행 후기도 재밌게 쓰고 있다.
당연한 얘기일 수도 지만 여행을 다녀온 후 예정된 캐나다, 프랑스 여행보다 태국에 대한 생각을 훨씬 많이 하고 있다. 어느 날에는 EBS 세계테마기행에서 태국 편을 방영해 주어 눈을 떼지 못하고 봤었다. 푸켓이 아닌 방콕과 파타야를 다루고 있었지만 길거리와 먹거리 풍경은 비슷했다. 늘 친절한 미소를 띠고 있고 동물을 다정하게 대하는 태국인들도 똑같았다.
한 번은 재인이가 팟타이가 먹고 싶다고 몸살을 냈다. 그래서 근처 태국 음식점을 찾아가서 똠양꿍과 팟타이를 시켜 먹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맛은 아니었다. 태국 음식은 자극적이지 않아 먹고 나면 뒤끝이 참 좋았는데, 이곳에서 먹은 음식은 기름졌고 매운 음식을 먹었을 때의 고약한 뒤끝이 찾아왔다. 난 배탈이 자주 나는 편인데, 이번에도 고생을 좀 했다. 아무래도 우리 가족 조만간 태국을 다시 가야 할 것 같다.
칭얼대는 아이에게 시달려 진이 다 빠졌던 과거의 여행과는 달랐다. 어찌나 여행이 즐거웠는지,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자 밀려오는 익숙한 공기에 약간 서운해질 정도였다.
재인이는 7시간의 비행시간을 지루해하는 기색 1도 없이 재밌게 즐겼다. 헤드셋을 끼고 좋아하는 아이돌의 음악을 내내 들었다. 자기는 헤드셋만 있으면 몇 시간 더 비행기를 탈 수 있다고 했다. 저 헤드셋은 어린이 승객들에게만 나누어 줬던 것인데 아무래도 캐나다에 갈 때에는 하나 장만해야 할 것 같다.
재인이는 비행기 창문 블라인드로 핸드폰을 끼워놓고 사진과 영상도 많이 찍었다.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자긴 창가 자리에 꼭 앉아야 한다고 신신당부했었던 재인이다. 우리가 좌석지정을 늦게 하는 바람에 창가 자리는 떨어진 한자리밖에 안 남았었는데 혼자 앉아도 좋으니 꼭 창가 자리여야 고 한다. 다행히 옆자리 계신 분이 자리를 바꿔줘서 우리는 같이 앉을 수 있었다.
재인이는 유튜브를 보고 사진과 영상 예쁘게 찍는 법을 배웠나 보다. 덕분에 비행기 안에서는 미처 보지 못했던 예쁜 밤하늘을 볼 수 있었다.
여행 마지막 날 사실 난관이 있었다. 기상악화로 이륙 시간이 두 번이나 지연된 것이다. 안 그래도 밤 11시 비행기라 탑승을 기다리며 지칠까 봐 걱정이 됐었는데 비행기가 세 시간이나 연착되었다. 체크인 부스에서 알아보니 우리 노선이 직접적으로 기상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고 한국에서 출발했어야 할 비행기가 늦게 이륙하는 바람에 늦어진 거라 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조카는 차멀미를 호소했고 시어머니는 조금 맛보았던 양고기가 탈이 난 것 같다고 하셨다. 침을 늘 들고 다니시는 시어머니 덕분에 그 자리에서 손도 따고 약도 먹어서 조카는 컨디션을 금방 회복했다.
푸켓 공항은 인천 공항보다 훨씬 복잡했지만 다행히 2층에는 한산한 벤치가 여러 개 있어서 장소를 옮겨 쉬기로 했다. 시어머니는 그중 한 벤치에 누우셔서 잠이 드셨다. 나중에 회고하시기를 살면서 비행기 노숙도 다 해봤다며 껄껄 웃으셨다. 시어머니가 주무시는 동안 아이들을 위해 공항 맥도널드에서 감자튀김과 너깃을 시켰다. 가장 작은 사이즈를 시켰는데도 불구하고 양은 두 배, 값도 두 배였다.
남편은 공항을 둘러본다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려 시누이와 나는 대충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주문했다. 그곳에는 모닝글로리가 있었다! 시누가 그토록 먹고 싶어 했지만 그토록 만나지지 않았던 메뉴를 이렇게 마지막 날 마지막 식당에서 먹을 수 있었다. 내가 더 기뻤다. 나는 국물만 좀 뜨고 싶어서 똠양꿍을 골랐고 신랑 것으로 볶음 야채와 곁들인 밥을 시켰다.
식사를 마치고 시누와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겠으나 이번 여행에서 조카와 자주 투닥거린 듯했고, 더위로도 지쳤던 것 같다. 수술 후 완전히 회복을 했지만 남모르게 컨디션 난조를 겪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시누이를 옆에 앉혀 놓고 나는 잠이 쏟아져 세 시간 동안 푹 잠이 들어있었다. 그 사이 시누는 아이들을 보고 있었을 거다. 미안해. 아가씨. 힘들었겠지만, 나는 함께여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