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했던 차를 타려고 차 문을 여는 순간, 돌아오던 트럭이 사람을 미처 못 보고 치어 버렸다.북미에 살면서 운전석이 왼쪽에 있어서 도로에 주차했다가 운전하기 위해 타려면 뒤에서 오는 차를 살피고 조심스레 타야 한다. 그것이 습관이 돼서 영국이나 일본, 인도등의 오른쪽 핸들 운전은 못 할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대형사고를 옆에서 겪고 나니 왼쪽 핸들이 정말 싫어졌다.
그 자리에서 병원에 실려간 후에 십여 년을 병상에서 거의 식물인간으로 연명하다 세상을 떠났다.
미국에서 상대차의 보험으로 병원비와 가족들의 생활비등을 커버해 주어서 크게 비용 걱정은 안 했다고 했다.
머리를 다쳐서 뇌 수술을 여러 번 했는데 뇌의 일부를 제거해서 점점 바보가 되어가더니
사고 전의 우람하고 호탕한 오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늙어갔다고.
식물인간이 돼도 오랜 기간이 지나면 외모도 그만큼 늙는다고 한다. 미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 친척들이 이따금씩 병문안을 가면 초창기에는 미국의 의료기술로 건장하게 일어날 줄 알았다고 한다.그래서 다시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빨리 집에 가자우'라고 할 줄 알았다는데.
그러나 수술을 받을수록 점점 상태가 안 좋아져서절망한 채로 병실 신세만 졌다고.
처음에도 밥숟가락을 들고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그 잘생겼던 얼굴이 점점 변해가는 모습에 다들 경악을 했다고 전해 주는데캐나다에 사는 나는 이민 생활에 적응하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가 볼 수 없는 사이에 그만 세상을 떠나가고 말았다.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의 극성맞은 생활력 때문에 다들 열심히 살고 특히 학구열이 높아서비록 시장통에서 장사를 해도 자식들은 일류 중, 고, 대학을 보내려는 특징이 있다. 나의 그 사촌 오빠는 맏아들이기도 하거니와 혼자된 모친의 든든한 기둥이라 결혼만큼은 보란 듯이 시킬 작정이었던 것 같다. 이북 출신들의 억척스러움으로 자수성가한 그들만의 네트워크가 있어서서로 도와주면서 사업들을 키워 나갔다.
너무나 사업이 잘 되어서 일본 적산가옥을 벗어나 1950년대 말, 근처에 '타이루'집(벽돌집이 나오기 전)을 짓고 마당에는 연못도 있고 커다란 쉐퍼드 개도 있었던 기억이 희미하게 난다.
지금은 부엌이나 화장실의 내장재인 타일이 그 당시에는 건물의 외벽 처리를 했던 것이 제일 웃겼다. 그래도 그것이 부촌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세상만사 뜻대로 안 되는 것이 그 멋진, 공부는 좀 안 됐던 오빠가 연애를 하게 된 일이다. 그 당시 중, 고나 대학교 입학에 보결(보궐) 학생이 있었다.기부금 형태의.
다들 순진해서 실력은 안 돼도 돈을 내고 들어 온 애들을 암암리에 알기도 했지만 따돌림, 그런 것도 잘 모르던 시절이었다.
어떤 학교는 강당을 짓기 위해 한 학년의 한 반을 그렇게 받았다는데 다들 재력가의 자제들, 공부가 안 되니 다들 대학은 미국으로 갔다는데 어떻게 영어로 공부했으려나.
죽어라 공부해 일류대학을 나와도 그저 평범한 회사원 된 사람들은 좀 억울하겠지만.위로 올라갈수록 다 오너 일가들이 포진하고 있으니 더욱더.
대학도 어찌어찌 갔지만 집안의 재력과 마당발인 모친의 영향력으로 어마어마한 집의 규수를 찾으려고 했을 텐데.
그냥 서민적인, 눈에 안 차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니 떼어 놓으려고도 했겠지.
어린 내 눈에는 깜찍하고 예뻐 보였는데.
다들 알겠지만 격렬한반대가 그렇게 더딘 부싯돌에 불을붙인 결과로 더 난리스럽게 연애를 하더니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혼을 승낙했다.
반대한 결혼은 끝이 안 좋다고 했던가
가뜩이나 반대한 결혼을 했는데
설상가상으로 그때부터 집안이 기울기 시작했다.
사업을 늘려서 부산에 공장을 지었는데
공장에 화재가 나서 막대한 손해를 보는 중에
오일쇼크가 터져서 엎친데 덮친 격이 되었다.
그전부터 조짐이 안 좋았다.
그 당시 시발자동차라는 것이 있었다.
아마 미국에서 불하한 자동차 부품으로 생산한 듯한 각진 지프차 모양이었다.
그 차를 굴리고 기사까지 둘 정도로 사업이 번창한 사모님에게 사업 정보와 곁들여 사기꾼들도 많이 꼬였으리라.
삶이 아니면 죽음을 주는 주식으로 점점 쭈그러드는 중이었다던데.
잘 되면 내가 뛰어나서, 못 되면 남의 탓.
맏아들에게 한 맺힌 시어머니의 실패는 고스란히 며느리 탓.
물론 예나 지금이나 남의 식구가 잘 들어와야 된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너 나 할 것 없이 결혼하면 다 남의 식구가 아닌가?
아이 둘을 낳고 잘 사는 줄 알았던 오빠네가
모두 미국으로 이민 간다는 말이 들렸다.
이민 보다 먼저 들린 소문이 그 부부가 이혼했단다.
결혼을 반대하던 엄마에게 대들고 죽는다고 난리 치더니 왜, 왜.
얼마 안 있어서 오빠가 재혼을 한다는데 결혼식도 한다고 해서 참석을 했다.
기절할 정도로 놀랐는데 그 새 올케가 전 올케랑 거의 판박이로 닮았다는 것 때문에.
분위기나 외모나.
모든 것이 개인취향이긴 해도 아, 자기가 좋아하고 끌리는 타입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주위의 돌싱이었다 재혼한 지인을 보면 전 남편과 반대되는 사람이 좋아 보여서 택하면 그 사람에게도 문제가 더 있어서 둘을 합쳐서 반으로 나눈 사람과 한 번 더, 삼세번을 해야 되나 고민된다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긴 하더라만.
전 부인도 아이들 데리고 미국 가서 현 부인과 그 아이들도 한 도시에 살다가
무시무시한 교통사고가 난 것이다.
캐나다에서 그 오빠네 놀러 갔을 때
마침 레스토랑을 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먹어본 클럽 샌드위치 맛을 잊지 못한다.
이북 출신 남자들은 대체로 실속도 없이 통이 크고
이북출신 여자들은 대책 없이 음식 손만 커서 가족들이 산더미 같은 음식에 질려서 있던 입맛까지 떨어뜨리는 이상한 재주가 있다.
그 오빠도 살던 도시를 떠나서 낯선 포틀랜드에서 통 크게 IGA라는 대형 슈퍼마켓을 운영하다 손 털고 작은 레스토랑을 열었을 때 방문해서 얼굴 본 것이 끝이었다.
항상 약간 뻥이 섞인 호탕함과 다 좋다 좋다 하며 나를 귀여워해서 뭐든 사주고 싶어 해서 한창 테니스에 꽂혔을 때 사주었던 Spalding 테니스 라켓을 잊지 못한다.
어두운 저녁, 밖에는 봄비를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니까 급 멜랑꼴리 해져서 사촌오빠에 대한 생각이 불현듯 떠올라
글을 쓰고 있는데 옆에서 철 지난 드라마 '빈센조'를 보던 늙은 남편이 전여빈 배우가 얼굴도 깨끗하고 예쁘며 연기를 잘한다며 화면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한결같은 남편 취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