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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ysbook Dec 27. 2022

나는 피를 마시고 자랐다.

어쩌다 비건을 생각하게 되었나.


나는 피를 마시고 자랐다. 어머니의 말로는 7개월 만에 제왕절개로 태어나 인큐베이터에서 자랐고 몸은 또래보다 매우 허약했다고 한다.


언제였을 지 모르지만 1999년 어느 겨울 즈음으로 기억한다. 기차를 타고 갔는지 버스를 타고 갔는 지 모르지만 제법 먼 길을 돌아 용인이라는 곳에 다다랐다. 모부의 말로는 용인에 계신 사슴 농장 하시는 ‘이모’ 네에 왔다고 한다. (지금도 그들과 어떤 관계였는지 지금도 모르지만.)

 

그 때는 모부와 누이 둘과 함께 놀러 왔다고 생각했다.

부산에는 구경하기 힘든 눈이 내렸고, 일어나면 처마 밑에 고드름으로 칼싸움을 할 수도 있었다.  원없이 눈을 구경하다 어쩌다 시간이 나면 용인 에버랜드(구 자연농원)에서 쇼를 보고 놀이기구를 탔고 축제를 즐겼다.


그러나 어른들의 시선까지 다다르기엔 나는 아직도 ‘알라’(경상도 사투리로 아이) 였다.  그 모습을 보기 전까진.


구체적으로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만 어느 오후 -점심 무렵으로 기억한다- 어떤 창고에 들어섰다. 콘테이너로 만든 공장에 여러 기기가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다 창문이 보였는데 내 키보다 조금 높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창가에는 올라갈 수 있도록 발판같은 것이 있었는데 호기심에 거기에 올라가서 창밖의 풍경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두 눈으로 사슴뿔을 톱으로 썰던 사람들이 보였다.  뿔이 잘린 사슴은 피를 뿜은 채로 있었다. 뿔이 잘린 단면은 나이테처럼 붉고 원형이 선명했다.


아주 찰나의 순간 바라본 풍경은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난생 처음으로 녹용 ‘착취’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모부가 용인에 데리고 온 이유는 연약한 나를 걱정해서 사슴농장에 찾아가 녹용을 사서 내게 먹이기 위함이었다. 그 끔찍한 기억은 에버랜드와 함께 추억으로 ‘미화‘ 가 되었지만..


용인에서 부산으로 복귀한 나는 그 다음 날부터 녹용을 원치 않아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엔 토해냈다. 너무 쓰고 이상했기에. 하지만 모부의 강력한 의지로 나는 녹용을 먹었다. 정확히는 사슴이 흘린 피의 일부를 먹었다.  그렇게 식욕을 회복하고 나아가 체력을 회복했다.


20여 년이 흘러서 이 사실을 복기하여 부끄럽기도 하지만분명 회복하지 못한 건 사슴의 뿔이다. 누군가의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을까. 착취와 피착취. 어쩌면 어릴 적 깊숙이 자리잡은 그 날의 기억이 떠올랐던 건 동물에게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지만은 않아라고 알려주고 싶어서는 아니었을까.


녹용 뿐만 아니라 동물 착취로 얻은 양분을 시간이 흐르면서 ’무심코‘ 먹어왔고 ’무의식적‘으로 찾았고, ’맛있다‘ 고 먹었고,  ’즐겁다’ 고 먹으며 나는 숱한 존재들의 고통에 무감하기만 했다. 무감함이 익숙해지니 무덤해지는 것이다. 내가 쌓아올린 ‘동물의 무덤’ 을 무덤덤하게 잊어버린 것이다.


그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비건을 시작해야할 지도 모른다. 아니 해야만 한다. 죄를 지었다면 예수께 나아가 회개하라는 기독교 교리처럼, 교회를 떠나와서도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인가보다.


한 편으론 비건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도, 동물권도, 기후위기도 나 좋아라고 하는 것도 없는 건 아니지만 복잡한 감정이 들 때가 있다. 내가 과연 이런 것을 하는 게 코스프레처럼 비춰지면 어쩌나 싶고.. 실천을 하지 못하고 책임도 못지면 어쩌나 두려울 때도 있다.

나의 요지는 글쓰기가 사랑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방어나 증오심에서 나온 글, 남에게 명령하거나 반박하기 위한 글, 남을 공격하거나 남에게 사과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온 글을 써야 한다.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 내기 위한 글 역시 곤란하다. 독자가 그 부정적인 감정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기 때문이다. 내 말은 세상을 너그럽게 바라보자는 것이 아니다. 솔직한 분노가 담긴 글도 얼마든지 사랑에서 나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감정을 원천으로 세상을 바라보느냐다. -이라영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 중


이 글을 천천히 되네어볼 때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가 단지 나의 이익만을 위함인지 아니면 모두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인지.. 결국 이 모든 걸 덮는 건 사랑이구나 싶다.


비거니즘을 사랑해야할 이유를 떠올려본다. 그 뒤에 수 많은 착취에 대한 잠잠한 분노가 깔려있어서다. 말로는 차마 표현하기 힘든 나도 반작용으로 다가오는 성장지상주의와 무분별한 소비에 피로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미디어에서 다루는 먹방은 포르노처럼 자극적이다. 동물이 먹방 BJ의 손에 쥐어지기 까지 거친 과정은 생략된 채, 그저 원초적인 식욕만을 자극한다. 어떨 때는 소리로, 시각으로 미각과 촉감으로.. 맛을 위해 또 다른 동물들로부터 얻은 착취물을 끼얹을 때면 무감하게 대했던 나의 감각들이 부끄러워질 때가 많다..배고파서 혼밥하기 외로워서 봤던 이 영상도 실은 죄의 연장이로구나.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폭력이 싫어서, 약한 것은 약한 채로 공존하길 바라서 가부장과 남성 집단 사회로부터 도망쳐 나온 것이지만. 사랑을 떠올리지 못하고 도망친 것에 그친 것 같아 보였다.


사랑을 생각해본다. 학교나 직장에서 괴롭힘을 겪고 동료와 잘 어울리지 못해 겉돌 때에도 나를 지켜봐주고 응원해준 사람, 힘든 시기에도 나의 과정을 오롯이 지켜보고 고맙다는 표현을 아낌없이 해준 사람들이 준 다정함을..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음을 기억한다면. 나는 사랑 없이는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할 용기를 가지고 더 써봐야지.. 죽음으로부터 두려움에 떨고 있는 동물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비건 라이프를 사랑하고 비건 지향을 하는 이들의 연대를 사랑하고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알고 자신의 자리에서 실천하는 자들의 모습을 사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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