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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ysbook Dec 24. 2022

나는 왜 비건과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고기를 좋아하고 자주 먹던 사람이었다가 기후위기에 관한 기사나 뉴스레터를 통해 비건지향 삶을 실천하면서 <지구연대기> 라는 글을 통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생업에 치이다보니 비건 지향하던 삶과 논 비건 삶의 경계가 흐려지기 시작하다 다시 비건과 먼삶을 살았다. 어쩌다 비건 삶을 지향해보려 했지만 개인의 의지만으론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글모임에서 만난 분이 비건 지향을 하시고 관심이 많은 분임을 알게되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직접 실천하는 분을 오랜만에 뵙게되니 동기부여가 되는 것 같았다.(내적 동지가 생겨 반가운 마음이 매우 컸다.)


비건 동지가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고 외롭지 않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비건지향을 실천한 지 두 달이 조금 넘었다. 잦은 육식으로 몸이 좋지 않았고, 기후 위기는 급속화되는데다 고기나 소젖 물살이가 어떻게 착취당하는 지 미디어에서 다뤄지는 걸 보며 충격을 받은 뒤 고기를 먹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어제 저녁, 카페에서 그와 만나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보통 사람들처럼 살아가도 되는데 비건과 페미니즘이나 동물권에 관심을 갖고 사는 것에 이유가 있으신가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 질문이 하루종일 멤돌아 왜 관심을 기울였는지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권력자의 폭력이 싫었던 것 같다.


나의 학창시절은 폭력으로 점철된 기억들로 가득했던 것 같다. 학교에서 권력자는 둘로 나뉜다. 최우등생 아니면 힘이 센 학생.


최우등생들은 나의 노력에 비해 원치 않게 나오는 성적을 보고 조롱했고 동정의 눈빛만 보냈다. 힘 센 학생들에게선 나의 소심하고 왜소한 몸뚱이를 향해 ‘장애인’ 이라고 놀리고 필통을 커터칼로 도려내기도 했다. 혹은 mp3를 뺏거나 나의 행동을 조롱하고 희화화하는 데 급급했다. 때론 왕따를 당하던 친구와 밥을 먹었다고 해서 꼬투리잡고 괴롭히기도 했다. 하지 말라 해도 주먹이나 조롱은 그칠 줄 몰랐다.


권력자의 입맛대로 놀아나는 폭력이 싫었다. 나는 일방적인 폭력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도망치지 못한 채 대학에 들어왔고 여전히 폭력은 다른 형태로 나를 향해 찾아왔다.


군대에서 외박을 다녀온 후 여자들을 성적 대상으로 취급한 것을 영웅담마냥 자랑하는 선임.


장애인 비하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 것(말 끝마다 병신새끼, 또라이, 하자있냐, 눈깔이 삐었나 등등 이와 같은 말을 쓰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페미니스트는 탈출이 지능순이라는 온라인 댓글.


여성이 겪는 차별에 남자도 차별 받는다고 맞불을 놓거나 되려 여성을 혐오하거나 같은 여성들끼리도 페미니즘을 멀리하는 사람도 있었다.

돼지, 소, 닭을 개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사람들 .

비건을 풀떼기 먹는 사람들로 격하하고 이미지 소비하기 급급한 미디어.

비거니즘을 마케팅으로만 여기고 마는 기업들의 모습이 내겐 폭력적으로 다가왔다.


교회에서 감사히도 괴롭힘으로 잃었던 사회 교류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부족한 사람들끼리 기도하고 이야기를 들으며 때론 행사에 함께 하면서 선과 올바른 마음이 무엇인지를 배워나갔다. 따스한 연대를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교회도 나를 따라다니던 폭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만은 않았다.


일기장을 들춰보니 2년 전 나는 권력자들의 폭력을 끔찍하게 싫어했던 것 같다. 왜 교회는 아가페 사랑을 강조하는데 성소수자는 혐오하는가라는 의문을 지울 수 없어 고민을 했다. 기독교가 세상을 걱정하는 설교는 가득한데 막상 세상에 나오니 세상이 오히려 기독교를 걱정하는 입장이었다. 세상을 포용하지 못하고 고여서 그들만의 생각에 갇혀 배척하는 태도를 무척 싫어했기 때문이다.


문득 2018년 제주도 새별오름에서 열린 CCC 여름 수련회가 생각났다. 비 오는 저냑, 나는 그 곳에서 예배를 드렸고, 제주도의 한 교회의 목사가 나와  이런 기도문을 올린 기억이 났다.


 ‘이 땅과 영이 깨끗해질 수 있도록 동성애와 이슬람 각종 이단으로부터 거룩함을 지킬 수 있길 바랍니다.’


소수자, 이교도로부터 멀어져 이 땅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으로 바뀌는 것이 거룩하다 믿었다. 그런 마음을 담아 비바람 불던 오름에서 고백을 드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된 건, 그 때 드린 기도는 교회가 무너질 것이란 두려움에서 터져나온 배척과 혐오였다.


만약 그 때 일찍 깨달았더라면 어땠을까.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서라면 타인을 배척해도 되는 게 과연 기독교의 교리가 맞는 것일까. 동성애와 이슬람은 그들의 입장에선 적그리스도이자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주체라도 되는 것일까. 그들이 우리 삶을 위협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는가. 세상이 아무리 말세라도 말세는 혐오를 하는 자들에게서 먼저 나오지 않던가. 상대방에게 먼저 시비건 사람이 잘못 아닌가.


결국, 교회를 떠났다.

폭력이 지나간 자리엔 외로움이 어김없이 서렸다.


그 사이 나는 많은 생각들이 자리잡았다. 상처가 아물지 않고 곪다가 끝끝내 좌절 속에 살다 삶을 놓아버린 존재들을 미디어에서, 책에서 접했다.


변희수 하사, 기후위기를 막기위해 미술관에서 으깬 감자를 던지는 활동가, 전장연 시위, 데이트 폭력, 강남역 살인사건, 신당동 살인사건, 산천어 축제, 기후위기 등…  심지어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에서조차 이들을 조롱하고 희화하기 시작했다. 폭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내 주변 가까이 스며들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나와 다른 삶을 지향하는 존재에 대해서 틀렸다고 단정지어버리는 태도가 나에겐 불편했다. 혹은 대상을 전리품처럼 여기는 태도는 갈수록 공고해졌다. 폭력의 덩치는 커져 나의 어깨와 마음은 움츠러들게 했다.


그러면서 나는 비장애인이고 남자인데 이런 고통을 내뱉는 건 기만이지 않을까. 이보다 더 끔찍한 고통을 안은 사람들도 많지 않던가. 장애인, 동물, 성소수자,여성, 노인 등… 이들은 세상에 빛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편견에 둘러싸인채 오프라인이건 온라인에서건 조리돌림과 폭력을 당한다. 남자들 (특히 군대) 이 모인 곳에서는 차마 해선 안될 말을 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그들은 역겹거나 혹은 전리물처럼 취하며 내뱉는 배설같은 말에 나는 역겨움을 느끼기도 했다.


폭력과 무시받는 삶이 익숙해지다 못해 폭발하면 그 폭력을 답습할 수 있다는 생각에 불현듯 불안이 엄습했다. 누군가 혹은 언젠간 그 굴레를 끊어야만 했다. 나는 끊어보려 애를 썼던 것 같다. 비록 스스로의 태도에 한정된 말이고 괴롭힘을 겪거나 혹은 힘든 순간을 겪는 사람들이 있으면 고민을 듣고 도와야겠다는 생각만 남았을 뿐이다. 악을 악으로 이겨봤자 분노만 남는 것.


폭력은 나날이 커져만 가는데 혹시 이런 고통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지점에 공감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교회를 떠났지만 내가 배운 한 가지 의미있는 가치는, 연약한 자들에게 친구가 되어주는 일이었다. 폭력과 자극이 넘쳐나는 시대에서 여전히 괴로워하는 이들이 있다면 시간과 마음을 내어주고 싶었다. 귀를 기울여 들으려 노력하고,(아직도 쉽지 않지만) 모든 이들의 말은 흩어져서 잊혀지기 쉬운 것들이기에 기록으로 주워담아 기억하고 싶었다.


아울러 내가 받은 사랑을 갚기 위해 기록하기를 멈추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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