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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향연

방향을 잃은 감각들이 조용히 모여드는 시간에 대하여

by 구시안

밤에 대해 말할 때, 나는 늘 도착이라는 단어를 경계하게 된다.

밤은 준비된 얼굴로 오지 않는다. 예고도, 예절도 없이 스며든다. 낮의 연장선이 아니라, 낮이 미처 정리하지 못한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시간. 그래서 밤은 종종 향연처럼 느껴진다. 축제라기엔 조용하고, 의식이라기엔 난잡한 향연. 각자의 테이블 위에 서로 다른 기억과 피로와 욕망이 차려진 채, 아무런 사회자도 없이 시작되는 연회. 우리는 초대받지 않았지만, 빠져나갈 수도 없다.



밤의 향연에서는 순서가 없다.

먼저 오는 감정도 없고, 나중에 정리되는 생각도 없다. 낮 동안 얌전히 접어두었던 것들이 제멋대로 자리를 차지한다. 어떤 기억은 과도하게 밝고, 어떤 후회는 필요 이상으로 무겁다. 웃음과 자책이 같은 접시에 담겨 나오고, 희망과 체념이 서로의 맛을 망치지 않은 채 공존한다. 밤은 균형을 맞추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균형이 무너진 상태를 자연스럽게 만든다.



이 시간에 사람은 가장 솔직해진다.

정확히 말하면, 가장 변명할 힘을 잃는다. 낮에는 설명이 있었고, 이유가 있었고, 합리화라는 보호막이 있었다. 그러나 밤의 향연에서는 그런 것들이 하나씩 벗겨진다. 피곤하다는 말조차 사치처럼 느껴질 만큼, 몸과 마음은 이미 한계선 위에 서 있다. 그래서 밤에 떠오르는 생각들은 늘 조금 과장되고, 조금 잔인하다. 하지만 그 잔인함은 거짓이 아니다. 다만 낮 동안 억눌렸을 뿐이다.



밤이 향연인 이유는, 그 자리에 혼자 앉아 있으면서도 혼자가 아니라는 착각을 주기 때문이다.

불 꺼진 창문들, 꺼지지 않는 가로등, 어딘가에서 아직 깨어 있을 이름 모를 타인들. 그 존재들만으로도 우리는 묘한 연대감을 느낀다. 지금 이 시간, 누군가는 나처럼 생각을 씹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 그 믿음은 위로라기보다는 공모에 가깝다. 각자의 삶이 어긋나 있다는 사실을, 서로 모른 척 공유하는 공모.



밤의 향연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음식은 후회다.

다 식어버린 선택들, 다시 데워도 맛이 돌아오지 않는 말들. 우리는 그것을 천천히 씹는다. 낮에는 삼키지 못했던 감정이 밤에는 의외로 목을 잘 넘어간다. 아프지만, 익숙하기 때문이다. 고통조차 반복되면 하나의 리듬이 된다. 밤은 그 리듬을 허락한다. 아무도 박자를 재촉하지 않고, 끝을 묻지 않는다.



문제는 이 향연이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밤은 언제나 새벽을 데리고 오지만, 새벽은 정리자가 아니다. 남은 접시를 치우지도 않고, 흘린 말을 주워 담지도 않는다. 다만 조명을 바꿀 뿐이다. 조금 더 차갑고, 조금 더 현실적인 빛으로. 그 빛 아래에서 우리는 방금까지의 향연이 과했는지, 적당했는지 판단받는다. 그래서 밤은 위험하다. 너무 솔직해질 수 있고, 너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사람은 다시 밤으로 돌아온다.

낮이 해결해주지 못한 질문들이 밤에만 자리를 얻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였는지,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여전히 돌아갈 수 있는지. 이런 질문들은 낮의 질서 속에서는 민폐다. 생산적이지 않고, 결론이 없으며, 분위기를 망친다. 그러나 밤의 향연에서는 환영받는다. 질문은 접시 위에 올려지고, 답이 없어도 괜찮은 상태로 존중된다.



밤은 삶을 개선하지 않는다. 방향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다만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앉혀둔다. 거꾸로든, 비스듬히든, 무너진 자세든 상관없이. 밤은 묻지 않는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언제까지 이럴 건지. 대신 말한다. 오늘은 여기까지라고. 숨이 붙어 있고, 생각이 떠오르고, 아직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그래서 나는 밤의 향연을 두려워하면서도 기다린다.

이 시간이 있어야 낮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밤은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지 않지만, 더 솔직한 상태로 돌려보낸다. 그 솔직함은 때로 초라하고, 때로는 부끄럽지만, 적어도 거짓은 아니다. 삶은 아마 그 정도의 진실만으로도 계속될 수 있다.



밤이 끝날 무렵, 향연은 조용히 흩어진다. 박수도, 작별 인사도 없이.

남는 것은 약간의 피로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잔향. 하지만 그 잔향이 있기에 우리는 다시 하루를 시작한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 척하는 아침 속에서, 밤에만 알았던 사실 하나를 숨겨둔 채.



오늘도 밤은 올 것이다. 또 다른 향연을 준비한 채, 방향을 잃은 얼굴로.

그리고 나는 아마 다시 그 자리에 앉아, 말 대신 숨을 고르며, 나만의 몫을 천천히 소화할 것이다. 그것이 이 삶에서 내가 밤과 맺은 유일한 약속이니까. 여긴 어둠도 끝까지 써 내려갈 수 있는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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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못한 감정과 쉽게 합의된 문장들 사이를 기록합니다. 빠른 공감보다 오래 남는 문장을 쓰고자 합니다. 내면을 중요시 여기며 글을 씁니다. 브런치 61일째 거주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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