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깨물어 먹는 사람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관하여

by 구시안


무(無)속에서 두 손을 완전히 잠그는 것을 배우고 나면 내일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

권태가 기적을 일으키는 일은 없겠지만,

무(無)에서 유(有)로 바꾸는 일은 늘 마음먹기 달렸다.


어떻게 보면 권태는 그 자체가 무언가를 주는 무(無)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흥미로웠던 일이 재미없어진 건 사실이다.

주변의 모든 것이 무미건조해질 어떻게 이성을 잃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흥미진진한 일이 되고 있는지 알게 된다.

무력감의 공허에서 후회의 활력으로 마음대로 옮겨 갈 수 있다면

뭔들 못 하겠는가.


구토를 할 것인가?

기도를 할 것인가?

입안에 인공감미료의 뒷맛만 남은 저녁, 잠시 생각해 보다가

어차피 이 두 가지 다 안 하기로 한 지 오래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피곤이 몰려올 때마다 하품을 하며 시간의 뿌리까지 내려가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하품 속에서도 무언가를 얻을 때가 있다.

싱겁거나 짠 것이기도 하지만,

그 몇 마디가 비릿한 글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이제는 천국이라고 생각했던 다락방은 존재하지 않지만,

여차피

하루.

한 주.

한 달.

일 년.

일생처럼 범위가 정해진 시간 속에서만 행동할 수 있는 노릇이다.


시간과 행위가 증발해 버린 공허 속의 모험 정도라고

생각해 버린 지도 오래됐다.


이르든

늦든

지쳐 버리게 되어 있는 어떤 욕망들의 진실은 생각보다 얕다.


지루해하는 것은 시간을 사탕처럼 깨물어 먹고 있는 것이다.

안락의자는 영원할 수가 없다고 노동은 이야기해 주고 있고

서거나 눕거나

두 가지로 진행되는 시간 속의 모습은 여전할 것이다.


일상 속의 연기가 끝나는 날이 오면

더 이상 가면도 없게 되는 것일지를 생각해 본다.

그것을 지켜볼 관객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만,

비밀과

비참한 인생의 생명력을 너무 과대평가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도 생각한다.

매일 내 자신과 밀담을 나누며 살아가면서도

기쁨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매우 허술하기 때문에

가끔 나 스스로에게도 독설을 퍼붓기도 하지만,

내 자신을 논리적으로 비교해 보지는 않는다.


이유 없이 슬펐던 적이 있다면,

그것을 펼쳐 놓고 들여다봐 주는 일을 게을리하진 않는다.

마음을 다해서 실컷 지껄일 무언가가 있다면 마음껏 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 좋았다.


얼굴은 얼굴 뒤에 늘 숨어 있다.

늘 그 얼굴이 내 자신을 보여 준다.

드러내고 밝히고

불안을 공개하고

내밀고

비밀을 드러낸다.


경솔한 행동은 짜증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것을 묶어서 고립시키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후회하기를 좋아해서

무감각해서인지

여전히 결말이 없는 심한 고통에도 익숙해져 있는 것을 보면

쾌락과 반대로 고통으로는 포만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일지도 모른다.


어떤 불행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 같은 것이 슬픔이니까.


내가 더 퇴폐적인 사람이 될 수는 없겠지만,

문학청년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기에.

시간은 그만큼 흘러

많은 것들이 변해 있고

마음은 늘 그렇게 고요를 울부짖고 있다.


밤바람에 휘날려 오는

마치 봄이라는 이름의 꽃이 휘날려

그 꽃들과 체념이 기울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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