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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ch Mar 11. 2019

벳푸프로젝트, 온천도시에서 현대미술로 휴양하다

아트인컬처 2018년 11월호 'Report'

온천으로 유명한 휴양도시 벳푸가 ‘미술도시’로 거듭나고자 야심 찬 기획을 선보였다. ‘벳푸 예술의 달’을 맞이해 아니쉬 카푸어의 개인전 <아니쉬 카푸어 in Beppu>(10. 6~11. 25 벳푸공원)를 개최했다. 올해로 3회째를 맞이한 이 프로젝트는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작가 1명(팀)을 선정해 도시 곳곳에서 지리적 특성과 공명하는 신작을 선보이는 연례행사다. 2016년 첫 회에 일본 아트 콜렉티브 메(目), 이듬해 타츠 니시에 이어 이번에는 참여작가의 인지도를 대폭 키워 아니쉬 카푸어를 초대했다. 작가는 이번 개인전에 대규모 신작 2점을 포함한 12점의 회화, 조각을 출품했다. 과연 카푸어의 조각은 벳푸라는 환경과 어떻게 조응할 것인가? <아니쉬 카푸어 in Beppu>전 개막식과 인근 지역 미술행사를 엮어 취재를 다녀왔다. / 한지희 기자



벳푸와 공명하는 카푸어의 조각 세계


이번 행사를 기획한 벳푸프로젝트는 2005년 출범한 특정 비영리활동 법인이다. 예술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미래세대에게 이 가치의 다양성을 전하는 것이 이 단체의 지향점이다. 도시의 문화적 부흥을 위해 전시기획부터 레지던시, 워크숍 운영, 관광안내책자 발간사업에 힘쓴다. 2009~15년까지는 3년에 1회 종합예술제 ‘혼욕온천세계’를 개최해 100여 명 씩 작가를 초청했으나, 제한된 예산 탓에 각자의 작품세계를 제대로 보여줄 수 없었다. 그래서 2016년부터 연 1회, 1명(팀)에게 개인전 기회를 주는 ‘in Beppu 프로젝트’로 형식을 재정비했다. 출품 요건이 있다면 벳푸시라는 지리적 조건에 물리적, 개념적으로 최대한 부합하는 작업이어야 한다는 점. 장소 특정적이라기보다는 작품이 장소와 교감하고, 관객이 장소에 대해 배우고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하는 ‘장소 지향적’ 작품을 표방한다.

올해는 벳푸시가 가진 상징성에 더욱 중점을 두고 초청작가와 전시장소를 선정했다. 이미지를 반사, 왜곡, 전환하여 영적이고 근본적인 영역을 가시화하는 데 천착해온 인도태생의 조각가 아니쉬 카푸어가 그 주인공. 단체의 대표이자 행사 기획자인 야마이데 준야는 그를 초청한 이유를 묻자, “벳푸는 세계 2위의 온천지대다. 땅 속 깊숙한 곳에서 용암이 물을 데우고, 온천을 내뿜는데 이 과정을 떠올리면 나는 대지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또 온천 증기는 하늘로, 더 멀리는 우주로까지 가닿을 수 있잖나. 이처럼 벳푸를 통해 대지와 우주라는 거대한 스케일을 상상하게 하는 작업이 필요했고 이에 카푸어의 조각이 적격이라고 생각했다”라고 운을 뗐다. 이어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거대한 스케일, 불교 교리나 영성을 다루는 태도에서 보이는 아시아적 정신성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그는 형상 자체보다는 그 이면이나 내부 세계에 집중하게 하는 조형어법을 구사한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상상하게 하고, 다른 세계로 가는 출입구가 되는 그의 작품이 벳푸가 가진 지리적 특징, 즉 온천 증기의 출구이자 지구 내부로 통하는 입구라는 점과 일맥상통한다고 느꼈다”라고 덧붙였다.

도시 한가운데, 온천의 증기가 새어 나오는 벳푸공원은 이번 전시의 기획의도를 부각하기에 최적인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대규모 신작 <보이드 파빌리온 5번>과 <하늘 거울>, 작은 조각과 드로잉을 모은 특별전 <행복의 개념>을 위한 팝업 전시장이 공원 입구 쪽에 설치됐다. 세계 최초 공개작인 <보이드 파빌리온 5번>은 우주처럼 무한한 어둠과 심연에서 오는 겸허함을 표상한 작업. 직사각형 파빌리온 가운데 벽을 세우고 매트한 질감의 검정 안료로 칠한 원을 전면에, 여기서 확장된 듯한 볼록한 구 형상을 후면에 설치해 한 작업의 앞뒤를 보여주듯 연출했다. 파빌리온 맞은편에 위치한 <행복의 개념>전은 작년 가을 도쿄에서 열렸던 동명의 개인전을 확장한 것으로, 땅 속 깊숙한 곳에서 캐낸 용암 덩이 혹은 인체의 내부처럼 생긴 추상조각 5점과 이를 원색의 강렬한 붓 터치로 표현한 드로잉 5점을 선보였다. 전시장에서 나와 오른편을 바라보면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새로 제작한 <하늘 거울>을 만나볼 수 있다. 낮과 밤 조도의 차이와 대기의 상태에 따라 다른 느낌을 자아내며 하늘을 관찰하게 하는 이 작업은, 대지에 발붙인 인간(특별전)과 무한한 우주(파빌리온) 사이를 연결한다. 이러한 큐레이팅 방식은 작품이 위치한 벳푸라는 공간이 가진 상징성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벳푸 근교 미술여행


벳푸프로젝트는 아니쉬 카푸어 개인전 외에도 벳푸가 위치한 오이타현에서 열리는 제33회 오이타국민문화제 & 제18회 전국 장애인예술문화제에도 2개의 전시를 기획했다. 국민문화제는 현 전역을 5개로 나누어 각 구역이 대표하는 테마를 바탕으로 문화예술 행사를 개최한다. 단체는 이중 ‘물의 숲’ 구역에 속하는 히타, 나카츠시 행사에 참여했다.

예부터 ‘물의 고향’이라 불리는 히타에는 오마키 신지의 작품 2점으로 구성한 개인전 <Suikyo>(10. 6~11. 25 AOSE 외)를 열었다. 작가는 공기, 바람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가시화해 신체의 감각을 일깨운다. 히타시 복합 문화공간 AOSE에는 지난 3월 홍콩아트바젤 인카운터 섹션에 출품해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경계공간-시간> 연작의 최신작을 공개했다. 불빛 하나 없이 어두운 공간에서 거대한 크기의 반투명 천이 쏟아지듯 부유하는 모습은 파도가 넘실대는 밤바다를 닮았다. 다른 한 점은 1933년 개업해 매일 연회를 벌였던 옛 요리점 ‘분지’ 건물 전체를 작품으로 탈바꿈한 것. 점점 어두운 곳으로 안내하는 동선을 따라, 조도를 낮춰가며 미니멀한 조각 및 설치작품을 배치했다. 히타시에서 찾은 화석화된 나무, 돌, 물방울, 연기를 재료로 한 조각들은 시의 유구한 역사와 자연환경을 레퍼런스로 삼은 것이며, 영화를 누리다 지금은 사라진 장소와 대비를 이루며 관객의 ‘현존’을 사유하도록 이끈다.

북쪽으로 향하면 나카츠 시에서는 빛과 영상을 주 매체로 작업하는 설치작가 타카하시 쿄타의 관객 참여형 신작 <문 리버>를 만나볼 수 있다. 시가지의 상점가 히노데마치를 약 4천 여 개의 푸른 조명으로 밝혀 마치 물이 흐르는 듯 꾸민 작업이다. LED조명이 담긴 유리병 안에는 돌돌 말린 종이가 함께 들어있는데, 이는 나카츠시의 초등학생들이 ‘미래의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다. 현장에서 누구나 편지를 남길 수 있으며 작성 후에는 병에 들어 있는 다른 편지와 맞바꾸게 된다. 상점가 곳곳에는 타니가와 슈운타를 비롯한 일본의 저명한 시인 10명이 미래의 친구에게 남긴 편지를 전시했다.

일본은 오랜 세월 문화와 예술분야 발전에 힘써왔지만 여전히 문화행사의 대도시 쏠림현상을 겪고 있다. 특히 아니쉬 카푸어와 같은 톱스타급 작가의 작업을 인구 12만 명의 소도시에서 직접 감상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벳푸프로젝트가 마련한 일련의 전시는 이러한 문화 불평등 현상을 해소하는 한편, 벳푸 외 지역에서 더 많은 관광객을 유입시켜 이 도시가 ‘또 하나의 문화 중심지’로 도약하게 할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올해를 기점으로 벳푸의 문화적 지형도에 어떤 변화가 나타날까? 이들의 작지만 힘찬 날갯짓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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