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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Sep 10. 2021

천상과 지상 사이의 형상

[새책 소개] 김종삼 시의 내재적 신성

이 책은 그동안 현실을 부정하고 초월을 지향한 시 또는 한국 전통과 거리를 두고 기독교 등 서구 전통에 뿌리를 내린 시편들라고 여겨져 온 김종삼의 시를 한국 전통의 동학(천도교) 사상과의 연관성을 통해 접근하고 해부한 연구서이다. 저자는 [김종삼 정집(正集)](2018) 편찬에 깊이 관여하는 등 김종삼의 작품 전체를 섭렵하고 치열한 문헌 고증과 직접 발굴한 새 자료까지 망라하는 한편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이미지 이론에 근거하여 김종삼 시의 특징을 동학과 같은 한국 토착사상의 전통에서 재조명해 낸 것은 물론 시의 이미지와 한국 현대문학사를 새롭게 이해하는 지평을 개척하였다. 


김종삼은 1921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때 월남하여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창작 활동을 펼친 시인이다. 탄생 100주년을 맞은 그의 시 세계 전반을 참신하고 정밀하게 해석하여 문학 연구의 고정관념들에 도전하는 책이 나왔다.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인 홍승진(34세)의 첫 번째 연구서 [천상과 지상 사이의 형상―김종삼 시의 내재적 신성]이다. 1921년생 김종삼은 1921년생 김수영과 1922년생 김춘수과 더불어 해방 이후 한국 시를 대표하는 ‘3김’ 시인으로 불렸다. 많은 이들이 김수영과 김춘수는 익숙한 데 비해 김종삼은 다소 낯설다고 여길 것이다. 그 이유는 김종삼의 시에 담긴 경이로움이 그동안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탓임을 이 책에서 알 수 있다.


필자가 지은 이 책의 제목 "천상과 지상 사이의 형상"에서 '천상'과 '지상'은 각각 신성(神性)과 인간성(人間性)을 뜻하고, '사이'는 그 양자가 서로 부딪치고 이어지는 과정을 의미하며, '형상'은 이미지를 뜻한다. 김종삼의 시 <물통>에서 "머나 먼 광야(曠野)의 한복판 / 야튼 / 하늘 밑으로 / 영롱한 날빛으로 / 하여금 따우에서"라든지 <소리>에서 "어떠는 때엔 천상으로 / 어떤 때엔 지상으로"라는 구절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필자는 밝히고 있다. 이 책의 제목으로 다르게 염두에 두었던 "네 안의 하늘을 떠올리기"와 내용적으로 다르지 않다. 


저자는 이 책의 저본이 된 '박사논문' 집필 당시에 원문 자료를 철저히 검토하고 실체가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10여 편 넘게 찾아서 [김종삼 정집(正集)](2018)을 편찬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번 연구서에서는 그 치열한 문헌 고증과 자료 발굴의 성과를 전폭 반영하여 김종삼 시를 더 넓고 새롭게 해명한다. 김종삼이 죽기 전까지 자기 방에 붙여둔 월남화가 최영림과 장리석의 그림이 어떤 작품인지를 알아내어 책의 표지에 담은 것에서부터 저자의 치열함이 돋보인다. 다소 무리하다 싶을 만큼 참신한 이 책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이 책은 프랑스 철학자이자 미술사학자인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이미지 이론에 근거하여 김종삼의 시에 나타나는 이미지와 동학(천도교) 사상의 연관성을 해부한다. 이에 따르면, 김종삼은 이미지를 자기 시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 이미지는 감각할 수 있는 것과 감각할 수 없는 것 사이를 넘나드는 운동과 같다. 이미지의 운동은 한국전쟁과 장기 독재체제 같은 폭력의 역사에서 죄 없이 죽은 민중의 신성한 영혼을 감각할 수 있게 한다. 특히 이 책은 김종삼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라이너 마리아 릴케, 헬렌 켈러,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앙드레 롤랑 드 르네빌 등의 공통점이 인간에게 신성이 내재한다고 보는 신비주의임을 실증적으로 밝힌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종삼 시의 이미지는 감각적인 현실의 삶 속에 비감각적인 신성이 들어 있다는 동학의 인내천(사람이 곧 하늘) 사상과 맞닿는다.


지금까지 김종삼의 시는 현실을 부정하고 초월을 지향한 시, 또는 한국 전통과 거리를 두고 기독교 등의 서구 전통에 뿌리를 내린 시로 여겨지고는 했다. 이는 해방 이후 한국문학을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의 이분법으로 재단하거나 서구 문학의 모방으로 간주하던 통념과 같은 궤를 이룬다. 그러나 김종삼의 시는 현실적 인간의 삶에 초월적 신성이 내재함을 이미지로써 떠올린다. 이와 같은 특징은 현실과 초월의 이분법, 또는 인간성과 신성의 단절을 전제하는 플라톤주의와 기독교 등의 서구적 세계관보다도 동학과 같은 한국 토착사상의 전통에 더 가깝다. 그러므로 이 책은 김종삼의 시에 관심 있는 독자뿐만 아니라, 시의 이미지와 한국 현대문학사를 새롭게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에게 권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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