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시는사람들-동경대전 강좌-002]
앞에서 [동경대전]<포덕문>의 “춘추질대 사시성쇠”는 진화의 순환이라 했다. 진화는 발전의 뜻이 아니라 생명의 전개라는 점도 밝혔다. 굳이 ‘진화적 순환’이라 한 것은 순환이 단순 반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해마다 진달래꽃이 피어도 그 꽃은 지난해의 그 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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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種)들은 장구한 시간의 생로병사를 겪으며 다른 것으로 전환한다. 그런 뜻에서 종말은 피할 수 없는 자연필연이다. 인간의 문명도 사시성쇠가 있어 종말은 불가피하다. 우리 한민족의 홍산문명, 중국의 황하문명, 수메르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나일강문명, 인더스문명, 잉카문명, 마야문명 모두 종말을 고했다. 하지만 끝이 아니고 새로운 다른 문명이 들어섰다. 종말은 새로운 시작이다.
이 종말은 순환의 한 마디의 종말이어서 겁먹을 일은 아니다. 서양에서는 봉건문명이 종말을 맞고 자본제문명을 전개했다. 아시아에서는 중앙집권 왕조국가가 종말을 고하고 자본제문명을 맞았다. 인간문명과 자연은 작은 국면 큰 국면 모두 한 사건의 종말에서 다른 한 사건의 생성이 시작된다. 문제는 문명의 사시성쇠가 폭력적인가, 평화로운가에 있다.
변증법론자들은 이를 절대이성의 궤적을 따른 정반합(正反合)의 진화(전개)라 할 것이다. 헤겔은 ‘이성의 간계’라는 표현으로 정반합의 진화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동학에서는 이 국면에서 저 국면으로 전환을 기화, 무위이화, 조화, 불연기연, 다시개벽 등으로 말한다. 하지만 변증법과 동학의 불연기연은 다르다. 변증법은 분리하고 적대해서 싸워 이겨 지배하라고 말한다. 윤노빈의 동학인 『신생철학』은 이런 관점으로 변증법을 비판한다. 동학의 불연기연은 분리하고 적대하는 게 아니라 담고 이어서 새로워진다. 동학은 이를 감쌀 포(包), 이을 접(接)을 써서 포접(包接)이라고 한다. 불연기연은 포접의 논리고 변증법은 투쟁의 논리다. 변증법에서 모순의 법칙은 ‘대립물의 투쟁과 통일’이라고도 한다.
물리학 복잡계 이론에서는 ‘창발’ 개념이 있다. 생명은 세포로 구성되었고 세포는 단백질로 이루어져 있다. 단백질은 생명의 요소이지만 생명과 단백질은 차원이 다르다. 새로운 것은 이전 요소로 환원할 수 없다. 어떤 요소들의 합은 단순 합이 아니라 새로운 그 무엇이다. 단백질로부터 세포로의 진화는 창발로서 일어난다. 창발은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불연기연(不然其然)이다. 이 논의는 앞으로 동경대전의 해당 글에서 반복 언급되거나 더 상세하게 논의될 것이다.
종말은 영원한 종말이 아니라 사건 국면의 종말이다. 동학의 시간관과 역사관은 늘 종말과 새로운 시작 즉 다시개벽의 진화•창발적 순환이다. 세포가 사시성쇠를 할 때 생명과학대사전에 따르면 “사람의 태아 유래 정상2배체 섬유아세포에서 약 50분열횟수, 짚신벌레에서 약 100분열 횟수를 갖는다.”고 한다. 즉 한 세포는 자기분열로 세포를 증식하고 자신은 종말을 가진다. 종말과 다시개벽은 동시적 사건이다.
동학의 시간과 역사는 기독교의 어떤 분파에서처럼 ‘하나님왕국’에서 멈추지는 않는다. 어떤 기독교파에서는 하나님왕국은 다가올 세상이 아니라 지금이어서 온갖 차별과 억압으로부터 지금 해방되어야 한다고 한다. 기독교 하나님왕국은 최종 목적지로 순환의 마디가 아니다. 속류마르크스주의는 공산제 사회를 인류 전사(前史)의 종말로 말한다. 이 전개 과정은 자연필연성을 역사필연성으로 대체한 것이다. 역사는 그 자체로 객관적 실체이며 자신의 법칙을 갖는다. 역사는 하나님왕국이나 공산사회를 향해서 간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는 기독교의 머리를 자르지 못했다. 이런 유의 역사관을 역사는 자체에 내장된 어떤 요인이 있어 방향과 목적을 가진다 하여 ‘정향진화설’이라고도 한다. 역사는 그 내재적 요인 때문에 어떤 단계를 거쳐서 필연적으로 계급투쟁을 거쳐 다음 사회로 이행한다고 한다. 원시공산제 - 고대노예제 - 봉건제 - 자본제 - 공산제…. 이를 역사주의 또는 사적 유물론이라고 한다.
동학은 역사주의가 없다. 당연히 내세도 없다. 지금이 중요하다. 동학은 탈역사주의다. 역사와 역사주의는 다른 말이다. 역사주의란 결국 사회는 그 자체로 다음 사회로 이행하는 필연적 요소를 가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의 의지와는 독립된 객관적 사회이행의 법칙 내에서 움직여야 한다. 결국 다음 사회의 이행을 촉진하는 혁명적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이 속류 사적 유물론의 시간관, 인간관이다. 동학은 사회 이행의 법칙 때문이 아니라 성경신으로 수심정기하면 조화정(造化定)하고 개벽하는 신인간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사적 유물론은 ‘자본제는 그 스스로 멸망할 조건을 가진다’고 단언한다. 동학의 역사관에서 보면, 자본제는 언제인가는 종말을 맞겠지만 그 종말은 내장된 요인 그 스스로 붕괴를 일으켜 멸망하지는 않는다. 모든 종말은 자체적 요인만이 아닌 우주적 상호 연관성의 복잡성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미래는 예측할 수 없는 비선형적 특성을 가진다. 예측하더라도 확률적 예측이다. 같은 원인에서도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이 비선형적 특성이다. 하여 혁명의 객관적 조건을 예비하여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비자본제적 대안사회를 구현하는 국지적인 지역창발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창발한 지역의 연합의 연합으로 사회를 재구성하자고 생각한다. 그것이 동학의 ‘다시개벽’이라 생각한다.
종말의 기호들은 파멸의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새로운 시작이다. 시간의 누적이 역사라고 한다면 ‘지금’은 역사의 누적물이다. 만일 시간이 뉴턴의 운동법칙처럼 단선이고 직선이라면 종말은 예언이 아니고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고맙게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불확실성과 중첩성 이론 덕분에 시간은 단선이 아니라 복선이며 직선이 아니고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동학까지 포함하여 고등종교들은 시간은 앞으로만 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 기독교의 하나님왕국은 종말로의 질주이고 그 종말은 곧 구원이라는 단선적 시간이라고 말해져 왔다. 하지만 지구정치신학을 주창하는 캐서린 켈러는 [묵시적 종말에 맞서서]에서 종말은 파멸적 대체가 아니고 희망적 갱신이라며 다른 시각을 보인다. 마르크스를 속류화한 이들이 제시한 공산주의 역시 시간의 단선, 직선 개념이었다. 최근에는 실리콘벨리가 주창하는 [완전히 자동화한 화려한 공산주의](아론 바스타니)가 진보의 시간을 찬미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이라고 하지만 호모사피엔스 종은 몇 번을 혁명했을까? 호모사피엔스가 역사인류라면 종래의 모든 학들은 호모사피엔스가 진보의 방향으로 혁명을 했다고 말하는 셈이다. 이것처럼 명백한 거짓은 없다. 호모사피엔스라는 생물종 그 자체는 결코 진보한 적이 없다. 다만 종이 축적한 방대한 지식이 도서관과 컴퓨터에 있을 뿐이다. 갓 태어난 아이는 1만 년 전 아이와 자금 아이가 전혀 다르지 않다. 그가 아마존의 원시부족에서 태어났다면 그는 신석기시대 생활을 할 것이다. 어느 문명에서는 몇 년의 시간이 어떤 문명에서는 단 며칠이기도 하다. 한국은 자본제로의 제트기 같은 초고속 압축시간을 지나왔다. 하지만 파프아뉴기니 부족은 몇 천 년 전 시간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같지 않은데 같다고 주장한다.
[향모를 땋으며](로빈 월 키머러)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시간은 영영 바다로 흘러가버리는 강물이 아니라 바다 자체다. 바다에서 들고 나는 미세기요, 땅에서 솟아나 빗물이 되어 강에 떨어지는 안개다. 예전에 있던 만물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발전의 속도로 진보의 시간을 말하기도 한다. 과연 그런가? 시간은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시간은 시골에서 서울로 가는 것도 아니다. 분배만 다르지 사실 진보라고 하는 이들도 시간은 후진에서 선진 사회주의로 시골에서 서울로 간다고 믿는다. 그래서 지역소멸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우주가 무한 팽창한다지만 우주의 국지적인 곳에서는 별들의 생로병사가 있고 지구의 인류문명도 생로병사가 있다. 한 국면의 생로병사는 분명한 것이지만 그 종말이 반드시 파국적 결말인 것은 아니다. 종말은 반드시 새로운 씨앗을 잉태하고 있다. 언제인가 다가올 자본제 문명의 종말은 비극이 아니라 희극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현생 문명의 종말을 기쁘게 예비하여야 한다. 자본제 문명의 종말을 인류문명의 종말이라고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 지금 역사의 종말을 두려워한다면 역설적이게도 그 두려움은 자본제 문명의 영속을 바라는 일밖에 안 된다.
기후위기가 촉발하는 지리적, 환경적 변화(해안선 변화, 작물생태계 변동, 폭염과 혹한…)는 피할 수 없다. 지리적 변화 그 자체보다는 그것이 초래하는 사회, 문화, 정치, 식량 등의 위기가 부르는 격렬한 계급투쟁이, 전쟁 같은 살육전이 더 두려운 일이다. 불행한 일은 가난한 나라들이 더 불행해지고 기후 식민지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불평등한 자본제문명을 더 지속할 이유가 없다. 기후위기가 온실가스 때문만이겠는가? 1~5차 생물대멸종이 화산, 대홍수, 대가뭄, 유성 충돌, 바이러스, 지구핵 운동에 의한 지각변동 때문이든지 그 무엇 때문이든지 6차 대멸종은 피할 수 없는 진행 중인 사건이다. 기후위기는 화석연료 같은 인위적인 것에 의한 것만은 아니고 간빙기처럼 자연 자체의 기후변동도 있다. 말하자면 지구 자체의 순환에 의한 여름이다.
하지만 6차 생물대멸종이 특별히 더 문제가 되는 것은 1~5차 대멸종과 달리 호모사피엔스가 제공한 인위적인 요인이 더 크게 작동했다는 데에 있다. 기후위기보다 더 불행한 것은 핵이다. 인류는 히로시마와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사태를 겪고도 극히 일부 나라에서만 핵을 없애고 있다. 기후위기는 고통스럽더라도 진화를 통해서 적응될 수 있지만 핵은 그렇지 못하다. 아직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핵 방사능에 맞게 진화할 수 있는 생명은 없다. 핵은 진정한 파멸이다.
또 하나의 파멸은 지구적 자본제에 의한 문명의 단일화 표준화이다. 종의 기원에 따르면 진화는 종들의 변이에 따른 대물림에 의한다고 한다. 문명의 다양성 변이가 없다면 문명의 진화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진화의 대립어는 정체나 퇴보가 아니라 파멸이다. 고고인류지리학과 역사학 등이 밝힌 바에 따르면 문명의 성쇠는 마르크스가 말한 대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사적 소유와 사회적 노동 간의 모순에 따른 계급투쟁에 의할 수도 있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이미 1915년에 엘스워스 헌팅턴이 쓴 『문명과 기후』가 있었지만 진보에 취한 사람들은 무시했다. 지구가 끓기 시작해서야 사람들은 “아차!” 하고 있다.
[동경대전]<포덕문>의 춘추질대와 사시성쇠는 예언자적이다. 이와 관련된 시간관, 역사관, 문명관을 살펴봤다. 춘추질대와 사시성쇠가 그 자체로 어떤 답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포덕문> 첫 문장은 앞서 말한 것처럼 [동경대전] 전편의 동학 논리의 압축시여서 동학의 시간관, 역사관, 문명관을 살펴본 것이다. 아울러 필자는 <포덕문> 첫 문장을 통해서 근대인들의 생각과 동학의 생각을 비교해 봤다. 지금의 문제를 해결할 암시를 얻지 못하다면 글을 무엇 때문에 읽겠는가?
도올은 그의 [동경대전]에서 노자와 공자의 시간으로 「포덕문」을 읽는다. 수운이 개벽 창발한 동학을 두고, 노자와 공자로 수운을 읽는 것은 단백질로 생명을, 벽돌로 집을 읽는 것은 아닐까? 도올이 동원한 방대한 참고 지식이 서 있는 시간은 어디일까? 그래서 도올은 동학의 시간이 가야 할 이정표를 어디라고 하는가? 도올은 개벽을 승인하지만 그 개벽의 시간이 지시하는 곳은 그의 [동경대전] 전편을 통해서 ‘노자’와 ‘공자’의 시간이다. 필자는 계속하여 도올의 견해를 검토할 것이다. 노자와 공자가 옳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면 수운이 무엇 때문에 노자와 공자를 개벽했을까? 도올은 이 점을 전혀 말하지 않고 있다.
필자가 시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우주적 사건의 생성 속에 천주조화지적(天主造化之迹)이 있어서다. 다음 글에서는 “사건을 내는 천주조화지적”이란 제목으로 이야기를 풀어 보겠다.
※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Entropy 무질서한 에너지)와 동학의 혼원지일기(渾元之一氣)와 시간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다. 기회가 닿으면 언급할 것이다. 엔트로피의 증가는 시간의 진화(전개)를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