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니 풍경들이 장엄하다. 콘크리트 틈새에 핀 민들레꽃 한 송이만 봐도 눈물겹다. 이 풍경들마다 <포덕문>의 첫 문장을 떠올리고는 한다. [동경대전]에 실린 첫 글은 <포덕문>이다. 그 포덕문의 첫 문장은 장엄한 우주의 대서사다. 동영상과 여러 글들에서 읽어 상상 가능한 우주의 풍경이 절로 눈앞에 펼쳐진다. 이 풍경 앞에서 절로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 동경대전을 처음으로 읽는 이들은 포덕문 첫 문장을 그냥 지나친다. 필자도 그랬다. 그냥 그런갑다. 교육을 받은 덕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구와 태양의 관계 때문인 것을 모두 안다. 그 이상의 감흥이 없기 십상이다. 그러나 10여 년째 이 문장을 읊조리다 보니 수운이 왜 이 문장을 첫 문장으로 쓰게 되었는가 나름 알게 되었다.
【천도교경전 풀이 글】 저 옛적부터 봄과 가을이 갈아들고 사시가 성하고 쇠함이 옮기지도 아니하고 바뀌지도 아니하니 이 또한 한울님 조화의 자취가 천하에 뚜렷한 것이다.
천도교중앙총부에서 펴낸 천도교경전의 한글 풀이 글은 그저 밋밋하기만 하다. 다른 동학∙천도교인들이 풀이한 글도 외람되지만 밋밋하기만 하다. 겨울에 봄은 불연(不然 그렇지 않다)하고, 봄이 되어서야 기연(그렇다.其然)하다. ‘겨울을 지나 3월이 되니 봄답다’에는 불연기연한 우주창발의 논리가 있다. 겨울에서 봄으로 오는 생성 과정은 기화(氣化)를 거친다. 기화란 어떤 기운이 무엇으로 된다는 뜻이다. 이 과정은 동학 주문에 나오는 조화정(造化定)이다. ‘그렇지 않다’라는 불연은 혼원지일기(渾元之一氣)다.
들의 기운이 안개로 펴올랐을 때 그 안개 속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기화, 불연기연, 조화정은 우주 생성과 창발의 언어다. 생소한 한자라서 그렇지 현대 과학의 용어들과 다르지 않다. 실로 포덕문 첫 문장은 동경대전 전체의 개념어(논리어)를 아주 압축적인 시(詩)로 풀고 있다. 불천불역은 한마디로 우주 생성의 역동적인 장엄함과 근본 이치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봄과 여름은 상징 비유어이지 봄 뒤에는 여름이 온다는 말로 풀이하기보다는 우주생성과 변화 역동의 근본인 불연기연, 기화, 조화정의 이치를 말한 것이다.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 盖自上古以來(개자상고이래) : 이 표현은 우주의 시원에 관한 말이다. “처음의 한 힘이 아주 작은 덩어리로 뭉쳐서 크게 터진 때로부터”라고 풀 수 있다.(경전풀이 – 저 옛적부터) 동학(東學)의 글에서는 기(氣)가 자주 말해진다. 기는 기운, 숨, 목숨, 힘으로 생명의 바탕이고 우주적 진화순환의 원동력이다. 때문에 한국말 ‘힘’이라는 표현을 썼다. 영어로 말하면 에너지energy라고 할 수 있다. “아주 작은 덩어리로 뭉쳐서 크게 터진 때”는 현대과학으로 말하면 대폭발(빅뱅 Big-bang))이 있은 때를 말한다. 대폭발은 현대과학에서 우주생성의 정설로 인정되고 있다. 팽창하는 우주를 거꾸로 뒤집어 가면 처음의 한 점으로 간다.
그렇다면 빅뱅 이전에는 어떤 우주가 있을까? 엄청난 힘을 가진 아주 작은 덩어리의 힘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알려진 대로 약 140억 년 전에 빅뱅이 있었다고 처음 제시한 사람은 1927년 벨기에 뢰번 가톨릭 대학교의 조르주 르메트로(Georges Lemaitre)라는 물리학자 겸 신부다. 그는 이렇게 썼다고 한다. “모든 것의 최초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불꽃놀이가 있었습니다. 그 후에 폭발이 있었고, 그 후에는 하늘이 연기로 가득 찼습니다.”(나무위키에서 인용) 이 표현은 그리스도교 성경의 창세기 “빛이 있으라”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은 빅뱅이론이 과학의 정설로 여겨지지만 그렇다고 하여 빅뱅이론이 ‘신’의 조화(造化)를 거부하는 것만은 아니다. 과학은 ‘처음의 힘’을 밝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덕문 문장에서도 ‘천주조화지적天主造化之迹’ 한울님 조화의 자취라고 하고 있다.
이 풀이는 수운이 빅뱅이론을 알고 썼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때에서 우리는 과학적 사고와 철학적 사고를 현실적으로 통합해서 옛 글을 풀어야 한다.
■ 春秋迭代 四時盛衰(춘추질대 사시성쇠) : 춘추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고, 사시는 생로병사로 풀 수 있다. 사시를 사계절로 풀면 춘추와 겹쳐서 글맛이 덜하다. 이는 우주의 순환과 역동성을 말한다. 순환이되 단순하게 이전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고 진화-순환한다. 우주는 팽창하고, 때가 되면 초신성이 되어 사라진다. 사라진 별의 힘은 또 다른 별이 되어 탄생한다. 우주자연의 에너지 총량은 같고, 이 형태에서 저 형태로 바뀐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순환이다.
지구는 지질학적으로 선캄브리아누대(Precambrian eon),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 여러 시기를 지났고 지금은 신생대의 홀로세(Holocene Epooch 충적세-沖積世)다. 지구는 그동안 5차례 생물대멸종을 겪었고 지금은 6차 생물대멸종이 진행되고 있다. 사람들은 문명을 진화시켰다. 춘추질대 사시성쇠는 참으로 역동적이고 장엄한 표현이다. 눈보라, 해일, 폭풍, 비, 빙하, 바다, 별, 태양, 진달래, 토끼, 사자, 호랑이, 봄, 여름, 가을, 겨울,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 얽혀서 펼쳐는 거대한 풍경(파노라마panorama)을 생각해 보라. 얼마나 장엄한가? 춘추질대 사시성쇠는 거대한 이야기(빅히스토리 Big History)다.
여기서 ‘진화’는 단순에서 복잡으로, 하등에서 고등으로, 야만에서 문명으로와 같은 발전의 개념이 아니라 ‘생명의 자기 전개’를 말한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생명의 나무(Tree of life)에 따르면 원숭이는 원숭이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iopithecus) 종(種)이 호모사피엔스(Homosapiens)가 된 것은 아니다. 그 각각은 별개의 종이다. 호모사피엔스는 호모사피엔스로부터 진화했다. [종의기원]에서 진화를 가장 정확히 말하는 것은 아래 대목이다.
“만일 어떤 개체들에게 유용한 변이들이 실제로 발생한다면, 그로 인해 그 개체들은 생존 투쟁에서 살아남을 좋은 기회를 가질 것이 분명하다. 또한 대물림의 강력한 원리를 통해 그것들은 유사한 특징을 가진 자손들을 생산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보존의 원리를 간략히 자연 선택이라고 불렀다.”([종의 기원], 찰스 다윈, 장대익 옮김, 198~199쪽, 사이언스북스, 2019)
진화의 핵심인 자연 선택은 ‘변이’, ‘생존 투쟁’, ‘대물림’, ‘번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 ‘생명의 자기 전개’라는 뜻은 종종 ‘사회 진보’와 혼돈을 일으킨다. 다윈의 생명의 나무 개념에서는 우월하거나 열등한 종 따위는 없다. 다윈보다 앞선 라마르크는 ‘단순한 생명체가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점점 더 복잡한 개체로 진보’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라마르크 식으로 말한다면 사람은 진화의 맨 꼭대기에 있다. 이러한 논리는 정치적으로 제국주의와 식민지, 야만과 문명이라는 억압을 정당화하는 기반이 되었다. 자연 선택에서는 어떤 방향으로의 발전도 예견할 수 없다.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역사필연론’이라고 한다. 또는 방향이 정해졌다고 해서 ‘정향진화설’이라고도 한다. 국가가 존재하는 고전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 자본주의, 사회주의(공산주의)라는 역사 발전 단계설은 속류 마르크스주의의 견해이다. 지금 현재에도 존재하는 어느 국가인가에 속해 있지만 사실은 국가가 영향력을 거의 미치지 못하는 유목 부족들은 봉건제, 자본제를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도 아닌 그 어떤 체제를 자연 선택할지 모른다. 자본주의가 반드시 사회주의로 가야하는 것도 아니다. 자본제가 아닌 그 무엇인가로 진화할 수 있다. 역사는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다. 진화-순환할 뿐이다.
이 진화를 중국에서는 펼 ‘연(演)’ 될 ‘화(化)’를 쓴 연화(演化)를 진화와 함께 쓰는데 지금은 진화론을 더 많이 쓴다고 한다. 한국에서 ‘진화’와 ‘연화’는 느낌도 맥락도 다르다. 장대익은 [종의 기원] 역자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놀라운 사실은 진화(evolution)라는 용어 자체도 다윈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펼쳐짐(unfolding)의 뜻을 담은 evolution이라는 단어가 진보(progress)를 함축한다고 생각해 사용하지 않고 줄곧 ‘변화를 동반한 계승(descent with modification)’이라는 용어를 쓰다가 1871년 『인간의 유래와 성 선택』을 펴내면서 ‘진화’라는 단어를 처음 쓴다. [종의 기원]의 경우에는 1872년에 출간된 6판에 가서야 ‘진화’로 대체한다. 이 또한 스펜서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였다.”(위의 책 26쪽)
필자의 글에서 쓰는 ‘진화’는 ‘생명의 펼쳐짐(전개)’이라는 뜻이지 발전이라는 뜻을 가지는 진보라는 뜻이 아니다. 필자는 춘추질대와 사시성쇠에서 140억 년 우주자연의 역동적인 장엄한 ‘진화순환’의 풍경이 떠오른다. 여기에서 다윈의 [종의기원]에서 마지막에 쓴 아름다운 문장을 읽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처음에 몇몇 또는 하나의 형태로 숨결이 불어 넣어진 생명이 불변의 중력 법칙에 따라 이 행성이 회전하는 동안 여러 가지 힘을 통해 그토록 단순한 시작에서부터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우며 한계가 없는 형태로 전개되어 왔고 지금도 전개되고 있다는, 생명에 대한 이런 시각에는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위의 책 650쪽)
[동경대전] <포덕문>(1861)의 첫 문장과 [종의 기원](1859) 마지막 문장은 서로 대비되고, 우주자연 역사의 장엄한 드라마와 생명의 경이로움을 감동으로 떠올리게 하면서 고단한 삶의 희망으로 빛난다. 누군가는 역사의 별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생명이라는 별은 영원히 빛난다. 앞으로의 어느 시점에서는 호모사피엔스가 아닌 다른 종이 현생 인류를 대체해도 좋으리라. 다만 평화롭게 말이다. 호모사피엔스는 20만 년이라는 시간 동안 잘 살았다. 평화롭게만 사라진들 무엇이 억울하겠는가?
그런데 수운은 이 모든 생성 변화 과정이 천주의 조화라고 한다. 질대, 성쇠, 불천불역이라는 역동적인 생성과정에 있는 천주는 어떤 존재일까? 차차 글을 더해 가면서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