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걸음 May 15. 2024

개벽라키비움-월보강독

사진은 글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1. 개벽라키비움-천도교회월보강독회가 14일에 진행되었습니다. 라명재 님이 <한울을 먹는 사람은 수명이 더해지고, 세상을 먹는 사람은 수명이 줄어든다>는 양한묵 선생의 글을, 박돈서 님이 <인내천 解>라는 백인옥 선생의 글을, 성강현 님이 <지공무사한 한울>이라는 이필우 선생의 글을 번역하여 함께 읽었습니다. 


2. 


이 시기(1911년)의 글들은 1905년에 천도교 선포 이후 집중적으로 간행되었던 천도교의 각종 교서들(cf. <현기문답>) 등을 학습한 당대의 필자들이 집중적으로 교리 담론을 발표하는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다시 말해, "현대 천도교 교리 성립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교의 경우 주자 이전까지의 유교와 주자 이후의 유교(성리학)가 철학적 사상적으로 달라지듯이, 동학-천도교의 역사와 철학도 천도교 선포(1905, 대고천하) 이후 확연한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당대의 저자들이나 현재의 천도교인들은 대체로 자신들이(그리고 자신들이 의거하는 의암 손병희의 가르침들이) 펼치는 교리 담론이 "신사(神師=수운 최제우 + 해월 최시형)"의 가르침의 "본의(本意)"라고 강변하지만,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3.


어제 쟁점이 되었던 것 중의 하나로, 제가 제기한 문제는 시(侍)의 풀이에서 '내유신령'과 '외유기화'를 각각 "'한울님'의 '내재성'과 '초월성'"으로 설명하는 것의 문제점이었습니다. 부지불식중에 천도교인은 물론이고 학자들가지 '초월성'을 "기독교적 초월신" 관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이 시기의 글(1910~1920년대)을 읽어보면, 이러한 '초월성' 이해는 확실히 "비(非) 천도교-동학"적인 이해입니다. '초월성'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수운의 초기 '신비체험'에 대한 선입견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공중에서 외는 소리~~"와 같은 말에서 유래한 관념이겠지요. 


그러나 수운 당대에 이미 "더 이상 한울의 가르침이 있지 않았다"는 고백으로 마무리된 사건이고, 해월 선생이 수운 선생의 사모님(박씨부인)에게 확인한 바로도 (공중의) 한울님과 문답하는 장면은 제3자가 보기에 "수운 선생이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답하는 것"이었다는 점이 증언으로 남아 있습니다. (물론 수운과 한울님 사이의 모종의 사건이 '제3자'가 보기로 자문자답의 형태로만 비춰졌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만) 


4. 


우선 이 대목(월보강독 - 초월성 이해) 핵심 쟁점은 교리는 원형 그대로여야 하는지, 그것에 대한 해석적 확장이나 변형은 '난법난도'라고 치부해야 하는지입니다. 진리불변이냐, 진리상변(常變)이냐가 쟁점입니다. 당연히 후자이겠지요.


5. 


그렇다면, 동학의 관점에서 '초월성'은 어떤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말인가. 다시 말해 외유기화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나'라는 존재가, 내가 생각하는 나, 즉 머리와 사지육신으로 이루어져, 약 100년 동안 살아 있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지금 여기에서의 (좁은 의미의) 나'보다는 훨씬 더 공간 점유면에서나, 시간적 연장의 면에서 크고 장구한 존재라는 점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동학에서 그러한 의미를 표현하는 말이 바로 동귀일체(同歸一體)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인오동포, 물오동포'라는 말도 나옵니다. 의암은 이를 일러서 '나는 이 우주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고, 이 우주가 소멸한 뒤에도 있는 존재이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어제 읽은 글 중에서 한울을 먹는 자는 수명이 늘어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나의 '초월성(동귀일체)'을 깨달으면 거의 영원히 살아가게 된다는 점을 의미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목숨은 한정이 지어져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한울 목숨'만이 본질이고 중요하며 '세상 목숨'은 비본적이고 덜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것도 편향된 것입니다. 한울은 세상을 통해서 드러나고 세상은 한울을 통해서 존립한다는 것이, 어제 읽은 '한울 먹음 세상 먹음' 글의 취지라고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이해라고 할 것입니다.


6. 


어제 제가 지나가는 말로 제기한 또다른 문제(의문, 질문) 중 하나는 이런 것입니다. 


지금 우리(개벽라키비움-월보강독)가 천도교회월보를 통해서, 그리고 그 밖에 해월문집연구나 개벽 지 강독, 또 동학천도교용어(철학)사전 작업 등을 통해서 천도교 교리를 깊이 있게 연구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종교신앙'의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깊이 있는(?) 교리연구는 사실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는 측면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서 '종교신앙'은 한 교단에 '신자'로 등록(입교)하여 (교단)종교활동을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영성적인 사람으로 거듭나서 그 자세를 유지(하려고 애쓰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이중적인 면이 있습니다. 달라지는 시대환경이나 사람들의 관심사, 심리, 사회적 태도 등에 따라 교리는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되고 계발되어 '현대적인 정서와 표현'을 가진 형태로 제공되어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 깊이 있는 교리 연구가 필요하지만, 한편으로 보면 그것은 그저 호사가들의 '먹물스런 논쟁'에 지나지 않는 측면도 많다는 거지요. 예컨대, 해월의 삼경 중 경물(敬物) 사상이나 이천식천, 향아설위의 경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도대체 어떻게 이러한 발상이 나올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깊은 종교적 감응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 만큼 이러한 교리사상을 접하는 일반인들도 그 말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도 김지하나 김용옥 같은 사상가(철학자, 학자)도 이런 대목에 이르러서는 거의 절규하듯이 이 사상(개념)의 우수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의 의미를 깊이 파고들고 장황(?)하게 설명하면 할수록 그것이 '종교신앙'의 심화, 강화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 이런 경우에 종교(철학), 신학(천도교학)의 심화와 강화, 그리고 다변화는 어느 수준에서 멈추는 것이 적절한지가 고민의 대상이 됩니다. 수백년 동안, 그리고 수많은 신학자들이 고담준론의 성과를 쌓아온 기독교나 불교, 유교 등의 종교(학)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천도교(동학)의 신학(천도교학, 동학)의 수준도 심화되어야 한다는 판단도 분명하지만, 살펴보건대, 그것은 대체로 학자들의 수준에 머물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일반 시민의 경우에도 학문적(공부적) 관심이 높은 분들의 경우 관심과 흥미, 경탄과 찬사를 보내기는 하지만, 그것이 '종교신앙'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그러한 강의나 공부를 거치고, 사뭇 영성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 이전에도 거의 그와 유사한 정도의 영성적인 삶의 태도를 유지해 온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착한 사람이었기에 '좋은 강의'를 듣고, '훌륭한 철학(사상, 교리)'를 접해서, 그것으로 자기 삶의 태도의 올바름을 재확인하는 사례가 일반적이라는 겁니다. ... 이것은 오래된 의문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후위기와 미래종교 전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