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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Nov 13. 2023

기후위기와 미래종교 전망




오늘 21세기의 20년째를 지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종교는 확실히 ‘사양산업’입니다. 탈종교화 경향은 급속도로 진행되어서, 2014년을 기점으로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의 비율이 50% 이하로 떨어지고, 2021년 40% 선이 무너져 현재는 40% 미만의 사람들만이 스스로를 종교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종교인에 대해서만 조사를 해 보면, 기독교(천주교, 개신교)와 불교가 99%인 것으로 나타나고 그 밖의 수백 개의 군소종교가 1% 점유율을 분점하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는 존재감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른바 ‘4대종교론’을 내세우며, 개신교, 천주교, 불교의 다음 자리를 차지하고자 애쓰는 원불교의 경우가 거의 유일한 예외일 수는 있지만, 지금 현재 도달한 지위가 최고의 위치가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이제 ‘종교’라고 하는 거대한 구대륙 자체가 가라앉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신대륙의 발견이 필요하다는 증좌이기도 합니다.)


종교 이후의 종교, 종교의 신대륙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거나 떠오를까요? 이 글은 거기에 대한 시론(試論, 이라기보다는 현재까지 입안된 보편적인 가설)입니다. 동아시아에는 애초에 ‘Religion’으로서의 ‘宗敎(종교)’ 개념은 없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종교’라는 단어는 쓰였지만, 그것은 ‘으뜸이 되는 가르침(으로서의 佛敎)’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런 佛敎(불교)는 ‘부처님을 신앙하는 Religion’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배우는 사람들)’의 의미, 마찬가지로 儒敎(유교)는 ‘공자를 신앙하는 Religion’이 아니라 ‘유자(儒者=儒生)들이 배우고 익히는 (공자님의) 가르침’이라는 의미, 道敎(도교)는 ‘道(도)를 신앙하는 Religion’이 아니라 ‘道(도)를 따르고 닮으라는 가르침’의 의미였습니다. 


바로 그러한 전통 하에서 수운이 동학을 창도하던 1860년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의 선비들은 서양의 종교를 西學(서학)과 天主學(천주학)으로 먼저 인식하였던 것이며,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도 스스로 깨달은 바를 ‘東學(동학)’ ‘無極大道(무극대도)’ ‘天道(敎)’라고 한 것입니다. 즉 ‘道(도)’, ‘學(학)’, ‘敎(교, 가르침, teaching)’가 동아시아 전통에서, 西勢東漸(서세동점)하는 ‘종교(Religion)’에 대응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서양의 ‘Religion’이 한국 사회에 자리 잡고 나서는 그것은 부지불식중에 마치 오래전부터 그러한 개념으로 존재했던 것처럼 행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 민족에게 “개국시(開國時) 국초일(國初日, 檀君 시대 이전)부터 ‘경천(敬天)’ ‘숭천(崇天)’ ‘앙천(仰天)’ 하는 심성(心性)이 내재해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배경과 전망 하에서 1905년 동학은 ‘天道敎(천도교)’라는 이름으로 대고천하(大告天下)를 합니다. 확실히 이때 ‘천도교’는 ‘天道Religion(천도교)’의 의미가 강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일반적인 서양의 ‘Religion’의 개념에 여합부절(如合符節, 딱 맞아떨어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天道’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遵行의 法度임). 즉 ‘천도를 신앙함’이라는 의미는 형용모순이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동학이 ‘천도교(천도ligion)’라는 근대적인 종교 체제를 표방한 것은 당시 일제 강점기에 식민당국이 신도(神道, 일본), 불교(佛敎), 기독교(基督敎; 개신교, 천주교)만을 ‘종교’로서 인정하여 ‘종교자유’의 대상으로 간주하던 종교 정책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천도교는 이러한 근대적 의미에서의 ‘종교’임을 선언함과 동시에, 바로 천도교는 ‘구(舊)종교’ ‘기성(期成)종교’ ‘구태(舊態)종교’가 아니라 ‘신종교(新宗敎)’임을 표방합니다.(cf. 義菴聖師法說, <천도교와 신종교>) 이때 ‘신종교’라는 말은 ① 불교, 도교, 유교 등의 동양 전통종교가 아니라는 의미, ② (서양에서 동점해 들어온, 그러면서 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기독교(天主敎)가 아니라는 의미 ③ 기존의 종교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종교’라는 의미의 셋을 포괄합니다. 이를 다시 한마디로 바꾸어 말하면, 천도교를 신종교라고 할 때 ‘신(新)’은 “새 하늘 새 땅에 사람과 만물이 또한 새로워질 것이니라(‘新’天 ‘新’地 ‘新’人 ‘新’物 = 해월신사법설, 開闢運數)의 의미로서, ‘개벽(開闢)’의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종교’는 곧 ‘개벽종교’라는 말이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천도교가 자기 규정한 ‘신종교’는 근대 이래의 ‘유사종교’ ‘신흥종교’ ‘사이비종교’라는 왜곡된 인식, 폄훼와 비하의 의미가 가득 담긴 종교 명칭이나 흐름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개벽종교는 이후에 천도교 지식인들에 의해 ‘장래(將來)종교’, ‘미래(未來)종교’ ‘초(超)종교’라는 말로도 통용되었습니다.(1910~1920년대, ≪天道敎會月報≫ 등에 散見됨) 즉 천도교는 ‘종교임’을 선언한 직후부터 ‘종교(=Religion)’임을 부정하고, ‘비(非)종교임’을 표방한 것입니다. 이를 오늘날의 말로 하면 ‘脫종교’요 ‘종교 이후 종교(=포스트-릴리전; Post-Religion)’이라는 말이 됩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동학, 천도교를 위시한 개벽종교(원불교, 증산도, 대종교) 등은 기후 변화 위기 시대에 새로운 대안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한국에서의 ‘미래종교 운동’은 이미 (최소한) 100여 년 전, 길게 보아 160년 전 동학(천도교) 창도 당시부터 시작, 예고, 준비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오래된 미래’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과연, 오늘날 우리 사회는 불과 10여 년 사이에 “종교인구 > 비종교인구”에서 “비종교인구 > 종교인구”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비종교인구가 60%를 상회하고, 종교인구가 40%를 하회하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경향은 가속화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가나안 신도(교회에 나가지 않으며, 홀로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신자)’가 늘어난 점도 있고, 인구 고령화, 저출생 등으로 말미암은 자연 감소도 있지만, 그보다 더 주된 요인은 ‘종교로부터의 탈출’ 러시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직한 진단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향은 젊은이들일수록 더 심합니다. 


그렇다면, “그 많은 종교인은 어디로 갔을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종교인은 ‘종교(Religion)’를 떠나 ‘종교(宗敎, Sacred Teaching)’로 나아갔습니다. (구)종교라는 대륙이 가라앉았다면 (신)종교의 대륙이 떠오른 것입니다. 다시 말해, ‘넓은 의미의 종교인구’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단지 전통적인 ‘제도종교 인구’가 줄어들었을 뿐입니다. 한편으로는 ‘新유사종교’로 이동한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영성적 종교’ 혹은 ‘미래종교’로 이동한 경우가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즉, 오늘날 ‘종교인’은 전통적인 제도종교에 머물지 않고, ‘종교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명상이나 ‘덕후(연예인이나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심취하는 일)되기’ 등을 통해서 내면의 영성을 키워 나가는 ‘종교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 전통적인 제도 종교 신앙을 계속하면서도 ‘영성 추구’의 방향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것도 하나의 추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제도종교, 근대(꼰대)종교, 권력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이 또한 ‘탈종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 스스로는 잘 인지하고 있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기후위기 시대의 미래종교’는 이미 우리 곁에 오래전에 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미래종교’의 주인(공)이 오랫동안 종교인으로서 군림(?)해 온 ‘종교인’은 아닐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이 글은 <모들카페 - 개벽학포럼>에도 게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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