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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ul 05. 2024

깨달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가

개벽라키비움-수도공부모임 

[개벽통문24-31] 1. 개벽라키비움-동학천도교수도공부모임. '수도공부'는 동학의 수도/수련/수양의 원리와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공부하는 모임입니다. 격주로 진행하면서 한 번은 세계적 차원의 수련/영성/문명(외계) 등의 차원에서 한 번은 동학(천도교) 수련과 관련된 원리에 대하여 공부합니다.


2. 지난 3일(수)에는 최근 조현 전 한겨레신문 기자가 켄 윌버를 인터뷰한 동영상(20분)을 보고 토론을 진행하였습니다. 아마도 몇 차례에 걸쳐서 연재될 듯한 이 동영상의 첫 번째 편의 주제는 "깨달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켄 윌버는 단호하게 "깨달음은 출발점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당연히 '깨달음'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게 됩니다. 윌버는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깨달음, 깨우침, 깨어남을 위한 명상과 아울러 '미해결된 성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심리치료'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조현 기자'가 의문을 가졌던, 왜 고승 대덕이라고 하는 스님이나 성직자들이 인간적으로 (혹은 보통의 인간보도다 더 못한) 도덕적 결함들을 드러내곤 하는가, 혹은 그들이 미흡함을 노출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됩니다.


3. 이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조현 기자 기사 요지 인용) 다음과 같습니다; <<켄 윌버는 동양에서 (말하는) 깨달았다거나 영적 체험을 한다고 해서, 대부분의 경우 트라우마가 해결되고 인격적 성숙까지 동시에 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왜 그럴까? “성장하면서 억압된 것들은 의식 밖으로 밀려나 무의식으로 숨게 된다. 따라서 알아차림이 나아져도 마음 지하실에 숨어있는 것까지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 설사 깨달음의 경험을 가지고 있더라도 억압된 그림자가 여전히 신경증과 질병, 불편함을 야기하기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람조차 신경증(노이로제)과 그림자요소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완전히 깨어나 어른이 된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과 상호작용을 해보면 보다 분명해진다. 그들은 뭔가 좀 이상하거나 지금 여기에서 별로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적 체험을 했다는 이들이 돈 문제나 성적 욕망의 문제를 야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켄 윌버는 “깨달은 의식으로 무의식의 그림자까지 고치는데는 한계가 있다”면서 “특정한 훈련과 실습을 하고, 심리치료나 정신분석을 병행할 때 억압되고 감춰진 것들을 찾아내 치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윌버는 인간은 누구나 8단계 과정을 거쳐 성장하는데, 각 단계마다 다른 궁극의 관심을 가진다고 했다. 첫번째 태고단계엔 음식과 생존, 두번째 마법단계엔 섹스와 정서적 쾌락, 세번째 마법-신화단계엔 권력과 안전, 네번째 신화단계엔 사랑과 순응주의적 소속감, 다섯번째 합리 단계엔 성취와 탁월성, 여섯번째 다원 단계엔 감수성과 배려다. 여기까지가 1층이다. 7번째 단계는 2층이다. 7번째 단계는 애정이 깃든 수용과 포용, 3층은 통합의 단계인데, 순수한 자기 초월과 매 수준마다 증가하는 전체성을 다루는 신비적 일체성이다.>>


4. 동학(천도교)에서도 '수련/주문공부'를 통해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공부를 강조합니다. 그 깨달음은 '내가 곧 한울님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일 텐데, 이것을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켄 윌버에 따르면 그 '아는 것'을 넘어 '깨닫는' 데까지 나아간다고 해서, 그 사람이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해줍니다.


5. 이러한 깨달음-문제해결의 관계에 대해서는 사실 이미 오래 전부터 대부분의 선성(先聖)들이 이미 말해 두었다는 점도,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닦는 사람들' 수행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환상을 가지고(스스로도 사실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깨달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모든 지혜가 열리는 것으로 생각하며 "깨달음을 추구"하는 데서, 다시 말해 문제(목표) 설정을 잘못함으로 해서, '수행과 신앙'에서의 많은 문제가 야기됩니다. 가늠을 엉뚱한 곳으로 하고, 과녁에 화살이 가서 박히기를 기대하는 셈이지요.  


6. 이를 동학(천도교)의 경우로 비추어 보면, 수운 최제우 선생은 한울님과의 만남과 문답을 통해 '오심즉여심'의 깨달음을 얻기는 하였으나 그것으로써 "보통 사람들과 완벽히 다른 신적인 존재가 되거나 성자적 인격체가 된"(조현 기사)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현재의 '어떤' 천도교인들로부터는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으나, 아마도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켄윌버의 말, 그리고 그에 대한 조현 기자의 논평은 모두 이 사실을 지시하고 있다. 불교에서도 그리고 기독교에서도 이 점은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미 오래전에 '종교'에 대한 '믿음'(신뢰)를 회수한 대부분의 일반인들에게 이 사실은 '하나마나한 이야기'일 테지만, 여전히 수많은 사람이 전통적인 방식의 "깨달음"(=최후의 소식)을 추구하고 있음을 돌아본다면, 전혀 무의미한 췌언은 아니리라는 생각도 듭니다. 


7. 문제는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유효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미 100년 전에 야뢰 이돈화는 '위안'을 그 '이유'로 꼽았습니다. 위안은 켄 윌버의 용어로 하면 '심리 치료'가 그에 해당할 수 있다고, 이번에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늦었지만, 켄 윌버에 대해서 좀더 공부해 봐야겠습니다. 우리의 수도공부모임도 그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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