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글머리
2016년은 원불교 100주년의 해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다양한 행사가 기획되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원불교 교조 소태산 박중빈(少太山 朴重彬, 1891~1943)의 직접 가르침을 받은 11인의 제자('친견제자')들의 구술을 채록하는 작업이었다.
소태산 박중빈은 아명이 처화(處化)·진섭(鎭燮), 족보명이 희섭(喜燮)이다. 중빈은 법명이고 소태산은 법호이며, 원불교 교단의 존호는 대종사(大宗師)·원각성존(圓覺聖尊))이다.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 영촌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오랜 구도(求道) 고행 끝에 1916년 4월 28일 일원상 진리(一圓相眞理)를 깨닫고 원불교를 창립했다.1 이때를 원년으로 헤아리기 때문에 2016년이 원기(圓紀) 100년이었다.
박중빈의 친견제자는 11인 외에도 여러 분이 살아 계신다. 건강상의 문제로 인터뷰에 참여하지 못한 산타원 고현종, 순타원 김성주, 승타원 송영봉, 함타원 송영지, 징타원 이용진, 혜타원 장경안 종사 등 여성 제자들 6인, 윤산 김윤중, 흠산 모상준 대봉도, 민산 이중정 종사 등 남성 제자들 3인이 있다.
부득이 100주년에 즈음하여 인터뷰가 가능한 11인의 친견제자에 대한 구술·채록을 진행하였다. 이것을 책으로 엮은 것이『백년의 유산 - 소태산 11제자의 증언』(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16)이다.
친견제자 11인은 다음과 같다.
(01) 법산 이백철 종사 1927년생(남) 13세(1939년)
(02) 융산 송천은 종사 1935년생(남) 사위 주산 송도성의 장남
(03) 예타원 전이창 종사 1925년생(여) 17세(1941년) 교리강연대회에서 칭찬
(04) 로산 전성환 종사 1924년생(남) 제자 혜산 전음광의 장남
(05) 아타원 전팔근 종사 1929년생(여) 제자 혜산 전음광의 장녀
(06) 명타원 민성경 종사 1913년생(여) 1929년
(07) 승산 양제승 종사 1925년생(남?)
(08) 향타원 박은국 종사 1923년생(여) 1939년 영산학원 입학
(09) 건타원 김대관 종사 1933년생(여) 수제자 팔산 김광선의 손녀
(10) 숭타원 박성경 종사 1928년생(여) 13세(1940년)
(11) 인산 조정중 종사 1938년생(남) ‘어린이회’ 회원
소태산 대종사가 생애를 바쳐 ‘문명개벽을 통한 이상사회 건설’에 필요한 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을 실증하는 작업이기도 하다.2 그는 ‘후천개벽’의 새 사회 건설에 필요한 인재 양성에 있어서 남녀를 차별하지 않았다. 이것은 1920년 ‘남녀권리동일’을 선언하여 남녀차별을 철저히 극복하려 했던 점에서 알 수 있다.
이 책은 10여 차례에 걸친 구술을 채록한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일반적으로 보는 증언록과 비슷하다. 그래서 글의 구성을 제외하고 글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남은 과제와 대중을 위해 이 책을 보완할 방법에 대해
살짝 언급하고자 한다. 다만 독자들께서는 원불교나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에 관한 지식이 없는 필자의 상황을이해해 주길 바란다.
2. 친견제자들의 경험담
친견제자 11인이 갖고 있는 소태산 박중빈에 대한 경험은 각각이었다. 법산 이백철은 원불교 교단에서 “교단의 상머슴”이라고 불린다. 그의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에 대한 경험담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그는 13세 때 소태산 박중빈이 둘째 아들 광령의 병문안을 왔을 때 만났다. 그때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훌륭한 사람 돼라”고 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40년부터 1943년까지 약 4년간 이백철은 박중빈을 모셨다.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불을 때는 일이었고, 매일 저녁마다 16개 부엌의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그뿐만 아니라 나무 들여 주고, 물 길어 주고 설거지물(귀영물)을 데워주는 일까지 맡았다. 불 지피는 양을 알 수 없어 방이 너무 뜨겁게 해서 박중빈 대종사에게 꾸지람을 들었고, 그 꾸지람을 통해 물건을 아껴야 한다는 것(公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낫질을 잘해 칭찬들은 일화도 있었는데 풀 깎는데도 정성스레 잘 했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그 밖에 2시간씩 하던 좌선에 관한 일화와 전무출신3으로서 자부심, 그리고 1942년 원불교 총부 산업부에서 일하던 소와 말이죽어 원불교 총부에서 생활할 수 없어 남의 집에 깔담살이(머슴)를 했던 이야기도 있었다.
두 번째 구술·채록한 인물은 융산 송천은 종사이다. 소태산 박중빈의 맏사위인 주산 송도성(1907~1946)의 장남이다. 즉, 박중빈의 외손이다. 송도성은 1946년 금강청년단을 발족하였는데, 뒷날 원불교청년회의 모체가 되어 원불교 청년운동의 선구자이다.4 그의 구술·채록 내용 가운데에는 외할아버지 박중빈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다.
그의 구술 가운데 주목되는 사례는 일본이 황도불교(皇道佛敎)를 만들려고 하는 것에 대응하여 청가사를 입고 아들인 숭산 박길진(崇山 朴吉眞, 1915~1986)5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이야기이다. 아들의 결혼식에 일본의 종교정책에 대항하는 모습을 의복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알뜰한 제자가 돌아가시면 대중 앞에서 눈물을 펑펑 흘리는 모습, 조선총독부나 경무국에서 자행한 탄압받은 이야기도 풀어놓았다. 송천은이 원광대학교 총장으로 있으면서 겪었던 도올 김용옥과 관련된 일화도 소개되어 있다.
세 번째 인물은 예타원 전이창 종사이다. 그는 도산 이동안(1892~1940)6의 처질녀인데, 이동안의 소개로 영산학원(선원)에서 3년간 공부하고 영산사무소에서 5년간 직원으로 일했다. 뿐만 아니라 원광대학교의 전신인 유일학림 2기로 공부를 마쳤다. 그녀가 박중빈을 만났을 때는 영산학원에 3년 동안 공부하고 있던시기였다.
16세 때 그녀는 법명이 마음에 들지 않아 했더니, 박중빈이 “두 가지로 다 완성하라고 그랬는데 어찌 두 가지 창성을 하라고 하는 것이 안 좋냐. 참 좋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17세 때 지방대항 강연7, 교리 강연에서 영산선원대표로 나갔는데, 특등을 하고 박중빈에게 칭찬받았다고 한다. 이 분의 구술은 원광대학교 역사에 필요한 증언들이었다.
네 번째와 다섯번째 구술한 인물은 로산 전성완 종사와 아타원 전팔근 종사 남매이다. 혜산 전음광이 아버지고, 어머니(동타원)는 박중빈에게서 ‘재가(在家)교무 제1호’라고 불리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소태산 대종사와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던 모양이다. 먼저 전성완 종사의 구술을 살펴보면, 4살 때 소태산 대종사를 만난 이야기와 6살 때 2주간 박중빈에게서 천자문을 배웠던 이야기, 15살 때 박중빈이 낸 문제와 관련해서 ‘불천노(不遷怒, 노한 것을 옮기지 않는다)’했던 사례, 사(私)가 전혀 없고 공심뿐이었던 박중빈에 관련된 사례, 도산 안창호와 만난 박중빈에 관한 이야기, 박중빈 장례에 관련된 이야기가 쭉 소개되어 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박중빈이 공심으로 똘똘 뭉친 인물임을 증명해 주었다.
다음으로 전팔근 종사의 구술을 살펴보면, “공심 있는 공인”이라는 제목과 “하여튼 그 공심이라는 것이 끝끝내 이렇게 남아 있어요.”라는 소제목으로 제시되어 있다. 박중빈도 영결식에서 슬피 울었다는 이야기, 전팔근이 통지표(성적표)를 박중빈에게 보여줘 칭찬을 받으려고 했는데 칭찬 대신 “너만 잘하려고 하지 말고 모르는 사람은 가르쳐 줘 가면서 해라.”고 한 말씀에서 공심을 깨달았다는 이야기, 박중빈 열반과 관련된 이야기와 창고에 있던 새끼줄을 가지고 가려 했을 때 “우리 교단이 아무리 없더라도 너에게 그 새끼줄 못 주겠냐? 그러나 이것은 개인 것이 아니여, 이 새끼줄은 공중(公衆)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공과 사를 구분한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박중빈 대종사의 열반 후 그녀가 원불교 해외 포교를 위해 한 일 등을 서술하였다.
여섯 번째 구술한 인물은 명타원 민성경 종사이다. 2016년 당시 103세의 나이였기에, 딸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구술이 시작되었다. “이름값”이라는 제목과 “별 세상을 다 살았어요. 참 별 세상을”이라는 소제목이 붙어있는데, 소태산박중빈이 민성경에게 법명을 내리면서 “이름 값 해라.”라고 했기 때문이다. 민성경은 박중빈이 남녀 구분 없이 교육시킨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또 남편 직산 송봉환의 사망 후, 장남 월산 송정호의 도움으로 다섯 자식을 교육시켰다. 박중빈은 열반을 앞두고 민성경의 자식들 앞에서 “너희 어머니가 너희들 낳아 가지고 내가 호강한다.”고 하셨다는 이야기도 남아 있다. 그리고 원불교 법으로 자녀가 되는 것이 “은녀”와 “은족”인데, 명타원 민성경이 맞이한 은녀는 은타원 김상중이다.
일곱 번째 구술한 인물은 승산 양제승 종사이다. “바가 없는 마음”이라는 제목과 “네 마음이다. 네 마음 알고 사냐”라는 소제목으로 구술되어 있다. 이 말은 박중빈 생전에 양제승에게 한 말로,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이것이 네 마음이다. 너는 너 마음 알고 사냐?”라는 말에서 딴 것이다. 양제승의 구술은 “바가 없는 마음”을 설명하는 것에 집중되었고 그 설명 과정에서 “일원상의 진리”에 대해 풀기도 하였다. 진리란 가장 소중한 것으로, “생명”과 같은 것이다. “아는 것이 생명”이다. 또 아는 것이 마음이니, 종교는 마음을 밝혀주는 것이다. 즉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다. 우주와 만물은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닌 것이나 그 중에서 그 있는 것이 무위이화(無爲而化) 자동적으로 생겨난다.” 등 교리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여덟 번째 구술한 인물은 향타원 박은국 종사이다. 그 구술 내용은 “그래프 일기”라는 제목과 “제일로 무서운 것이 탐진치보담도 시기심, 질투심이여”라는 소제목으로 정리하였다. 17세에 영산학원에서 소태산 박중빈을 친견한 후, 계속 원불교에 몸 담은 인물이다. 박중빈 열반 후 박은국은 유일학림 1기생으로 공부하였고, 30대 초반부터 “그래프 일기”를 그리면서 자신의 공부를 체크하기 시작하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제일 무서운 것이 시기심과 질투심이었다고 한다. 남보다 잘하고 싶은 마음에 스스로를 매질하면서 공부에 집중한 때도 있었다고한다. 그래서 제일 무서운 것이 시기심과 질투심이라고 하였다.
아홉 번째 구술한 인물은 건타원 김대관 종사이다. “전무출신할 아이”라는 제목과 “내가 하는 일은 사(私)가 있을 수가 없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할아버지는 팔산 김광선, 아버지는 형산 김, 어머니는 온타원 이보응화이다. “쟈는 크면 전무출신할 애”라는 이야기를 듣고 컸던 인물로 다른 길을 생각해 본적도 없는 인물이다. 원불교와 원광대학교의 과거 모습을 경험한 것을 구술로 풀어놓았다. 그녀의 구술에는 정산 종사와의 관련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열 번째 구술한 인물은 숭타원 박성경 종사이다. “침 한 번 꼴딱!”이라는 제목과 “그렇게 검소하게 살아도 아무도 없는 사람으로 안 봐”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원불교 총부의 재정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점심 종을 치면 “밥 먹는 종이냐? 안 먹는 종이냐?”고 웃을 정도였다. 이 이야기는 교심이 있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면모를 살필 수 있게 해 준다. 또 “침을 한 번 꿀떡 삼키고 나면 또 기운이 납디다.”라는 이야기에서 출가 후 고생한 이야기를 추억 삼아 들려주는 면모도 살필 수 있다.
마지막 열한 번째 구술한 인물은 인산 조정중 종사이다. “내가 있는 자리”라는 제목과 “수양을 떠난 복, 그것은 의미가 없어요”라는 소제목으로 구술을 정리하였다. 조정중은 불교연구회부락에서 태어났고 어린이회(코모도카이)에서도 계문 지키기, 청소하기 등의 활동을 했다. 그의 박중빈에 대한 기억은 눈 마주친 것, 원숭이에 긁혀 울다가 눈물 그친 것, 열반한 것이었다.
3. 보완할 점
원불교나 소태산 박중빈 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이 글을 쓰는 필자다. 그래서 남은 과제 혹은 보완점은 아마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후 필자와 대중들이 읽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방향이라도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구술·채록으로 완성한 이 책의 용어나 인명을 정리할 수 있었으면 한다. 원불교교단에 있는 사람이라면 책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겠지만 필자처럼 이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이는 읽기 쉽지 않은 내용이다. 물론『원불교대사전』과 같이 정리된 것이 있어서 참고할 수 있겠지만 많은 이들은 그냥 책의 글만을 읽어갈 것이기 때문에 대중을 위해 약간의 수고를 더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다음으로, 구술자의 연혁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역시나 원불교 교단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술자의 연혁을 소개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인물일 것이다. 하지만 필자와 같이 원불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구술자의 구술·채록을 읽으면 따로 정리하면서 읽지 않는 한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인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생존한 친견제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바탕으로 원불교 역사에 접근할 필요도 있다. 솔직히 원불교의 역사가 어느 정도로 정리되어 있는지 알지 못하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친견제자의 구술·채록은 곧 원불교 역사와 관련된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원불교 역사 가운데 비어있는 부분을 채우는 역할을 하기에 충분할 것이고, 앞으로 원불교 연구에 기여하는 바가 클 것으로 보인다.
향타원 박은국 종사의 경우, 공부하면서 쓴 일기와 30대 초반부터 쓴 그래프 일기가 남아 있다. 이것을 보존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정서를 한다면 이후 원불교에 입교할 사람이나 혹은 과거 인물들의 공부법을 살피는 자료로 이용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아마 다른 친견제자들도 이것을 가지고 있을 것이므로, 이를 집대성하여 초기 원불교 종사자의 역사를 잇는 것도 큰 업적일 것이다.
마지막에 참고문헌을 실어서 11인의 제자와 관련된 책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좀 더 차분하게 이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끄집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친견제자 11인 외에 원불교에 몸 담았던 이들의 이야기도 구술·채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원불교를 잘 알지 못하는 대중들에게 친견제자 11인의 경험도 중요하지만 그 외에 인물들의 이야기도 간접경험으로 제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주석
1 『 원불교대사전』.
2 김형수,『 소태산평전』, 문학동네, 2016(박맹수·유동종·이가현,『 백년의 유산, 소태산 11제자의 증언』, 모시는 사람들, 2016, 9쪽 재인용).
3 원불교 교단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헌신 노력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 원불교의 출가 교역자를 총
칭하는 개념인 ‘전무출신’은 원불교의 개교 초기부터 사용한 ‘전무주력자(專務主力者)’, ‘전무노력자(專務努力者)’라는 용어에서 유래하여 ‘전무출신’이라는 개념으로 발전되었다. 그 의미는 ‘오롯이 공도에 힘써 일하기 위해 원불교에 출가하여 헌신한다.’는 의미이다.〈 원불교교헌〉에는 “출가교도로서 교규의 정한 바에 따라 본교에 공헌한 이를 전무출신이라 한다”(제3장), “출가교도로서 정신과 육신을 오로지 본교에 공헌한 자를 전무출신이라 한다〈”(전무출신규정〉 제2조)고 명시하고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원불교대사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7 본 책 98쪽에 나와 있는데 지방 대항 강연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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