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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an 24. 2018

민주주의, 생각, 상식, 그리고 교육

심규한 | 천성산의 친구들 | 개벽신문 제66호, 2017년 8월호


우방의 환상


북한이 미국 본토를 위협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 실험발사에 성공하자, 남한은 사드 4기를 추가로 임시배치 하겠다고 선언하고,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할 수 있다고 위협을 하며, 8월 위기설이 나돌았다.


분단이 칠순을 넘겨도 한민족은 분열을 수습하지 못하고 제 민족의 운명을 미국과 중국 등의 강대국에 맡겨놓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야 안심이라는 듯 더욱 미국에 종속될 것을 요구하는 보수진영의 소위 우방 논리를 보면 정말 생각이 없음을 실감한다. 국가 간 우방은 선전용이지 실제로 존재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방의 환상에 빠진 국가는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못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함석헌

1958년 함석헌 선생은 6.25가 지난 5년 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을 발표하며, 주변강대국에 의존하지 말고 우리 민족 역사의 맥을 제대로 짚고 지금의 상황에서 바른 뜻을 가지고 하나 됨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함석헌 선생이 볼 때 우리 민족은 미국과 중국, 소련의 고래싸움에 등이 터진 새우였다. 그야말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생각을 정확히 해서 바른 판단과 행동을 해야 하지만 그러질 못하였다.


그런데 그 글이 발표된 지 환갑이 지난 지금 남북이 핵과 탄도미사일, 그리고 사드를 앞세우고 중국과 미국의 앞잡이 노릇만 하고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우리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민족인가?


생각의 의무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는 독일의 유태인 학살의 책임자 아이히만의 전범을 취재하며 아이히만의 평범함과 생각 없음에 놀랐다. 아이히만은 오직 명령에 따라 열심히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그녀는 아이히만의 무책임함에 대해 인류에 대한 범죄 앞에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은 책임을 물었다. 전쟁 상황이라는 특수성이 있지만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국가와 사회의 수많은 범죄가 명령의 이름으로 합리화되고 만다. 책임을 묻기 위해서라도 주체적 인간을 호명해야 한다. 그래서 최소한의 생각과 판단은 일종의 인간의 의무가 된다. 독재 권력에 대한 복종으로 야기된 생각 없음의 추궁은 오히려 논리의 빈곤과 억지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성의 위기를 적나라하게 직면하게 한다. 사실 평범한 우리들 대중의 일상은 위태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고 대중을 세뇌하는 각종 자극과 정보가 우리에게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 속에서 현상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양심에 따라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위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민주주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중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위 할 인간(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상기해야 한다.


생각의 어려움


작년 이후 한국사회를 뒤흔들었던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으로 우리는 관료사회와 기업에서 일상이 된 생각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히려 생각을 할 줄 알았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제외되고 도태되었던 것을 보면 생각함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실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생각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의 생명이 바로 인민의 살아 있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함석헌 선생의 언어로는 생각하는 씨(알)이어야 할 것이고, 아렌트의 언어로는 생각하는 시민이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고통스럽다. 피곤하다. 우리에게 생각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그저 욕설과 감탄이 인상과 파편의 구절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런 상황은 우리 시대의 유행어 몇 개만 떠올려도 쉽게 드러난다. 헐, 대박, 개좋아, 한남충, 김치녀, 검새, 기레기, 헬조선 등 하나같이 자극적이고 단편적인 말 일색이다. 사유가 불가능한 지극히 단정적이고 감정적인 단어들이다. 

이 이야기는 생각의 교류를 생명으로 하는 언론 또한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에가 실을 뽑듯 길고 질기게 생각을 이어가며 진실에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자기만의 문제의식과 생각을 물고 늘어지지 못한다. 그러기에 쏟아지는 외부의 정보와 자극이 너무나 많다. 촘스키의 지적처럼 권력의 프로파간다에 의해 여론이 조작되고 대중이 복종하고 있는 상황이다. 어쩌면 생각의 익사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다.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이 한미정상회담 차 미국에 갔을 때 생각이 난다. 문재인 대통령은 사드의 환경영향평가를 미국 의원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미국이 가르쳐준 민주주의를 실천하기 위해 절차적 민주주의를 따를 필요가 있다고 설득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미국 의원들은 약간은 우쭐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마치 선생이 학생의 발표를 듣는 것처럼.


하지만 보자 미국의 민주주의가 있는가? 미국 중심의 국가주의를 공유하는 보수적 민주당과 공화당의 핑퐁게임으로 인민의 민주주의는 선거 의례로 퇴화한 지 오래다. 흑인이 1960년대에야 비로소 투표권을 갖게 된 것을 생각하면 미국보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더 앞선 것이 아닌가? 더구나 우리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정확한 정체와 새 국가 건설에 대한 계획도 갖고 있었다. 미국의 점령으로 미국이 원하는 대로 국가의 형식이 갖춰졌다고 미국이 민주주의를 가르쳐줬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자기 비하다. 오히려 우리의 자생적 민주주의가 훼손당했다고 해야 맞다. 겸손과 설득을 위한 수사학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말을 들었다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의 말을 의문 없이 들었을 수많은 미국인과 한국인을 생각하면 섬뜩하다. 역사를 잊고 생각을 하지 않는 백성이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정신연령이 5살도 안 되는 어투로 취임식에서 내뱉은 ‘America first, America first’는 얼마나 충격적인 선언이었는가? 흔히 성인끼리 모인 식사 자리에서 ‘나 먼저, 나 먼저’를 외치는 몰상식한 욕심쟁이를 생각해 보라. 혐오스런 일이다. 그런데 일국의 대통령이 그런 말을 전 세계에 대놓고 외친다. 그것을 온 국민과 세계인이 들었다. 사람이라면 도무지 할 수 없는 말인데 가장 지위와 권력이 높은 사람이 저렇게 외친다. 히틀러보다 더 노골적인 미국 우선주의 선언을 듣는 우리가 미쳤다. 저런 말을 대통령이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미국의 수준이 비상식적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직 미국의 오직 미국에 의한 오직 미국을 위한 정치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이 현대 최대의 패권국인 미국이라는 제국의 실상이다.


상식과 도덕


그렇다. 상식(common sense) 말이 나왔으니 말하지만, 상식이 있어야 생각이라는 것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상식이 없으면 바르게 생각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상식이 곧 공동체(사회)의 판단 기준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상식이 없다면 독선과 아집 내지 망상이 되기 쉽다.

그런데 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은 각종 시험에 대비해 보는 소위 상식 지식이 아니다. 아마도 웬만한 나이 든 사람 중 ‘시사·일반 상식 문제집’ 구경해보지 않은 사람 없을 것이다. 옛날에는 상식을 이렇게 시험 봤다. 그런데 그게 과연 상식일까? 물론 아니다. 다만 이름만 상식인 단편 지식이다. 상식이 오용된 대표적 사례일 뿐이다. 시험용 상식은 절대로 민주주의 시민 곧 생각하는 씨(알)을 만들 수 없다.


그렇다면 참된 상식은 무엇일까? 또 어떻게 길러질까? 

상식은 공통감각에서 나온다. 그래서 영어로 둘은 같이 쓴다. 즉 상식은 저 혼자만의 지식이 아니다. 공감하고 상호 소통하면서 생생하게 생긴 공동체의 기준에 대한 감각이다. 상식이 윤리와 도덕의 바탕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사람은 어울려 살아야 상식이 생긴다. 그래서 인간(人間)이다. 윤리와 도덕이 사회적 판단과 행위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사회에서 상식을 지키고 경험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민주주의는 상식을 토대로 한 건강한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다시 말하지만 상식은 지식이 아니라 공통 경험에 의한 공통 감각의 문제다.

그리고 여기서 획득된 상식을 가진 다음에라야 양심과 도덕에 따르는 바른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상식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생각은 자칫 공동체를 파괴하는 이기적으로 미친 생각이 될 수 있다.


교육과 민주주의


그렇다면 사회 안에서 공통감각을 갖고 상식을 갖고 도덕과 양심에 의해 바르게 판단하고 행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더구나 이것이 민주주의 사회의 요건이라면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교육은 어떠해야 하는가? 존 듀이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교육이 담당해야 할 역할을 쉽게 그릴 수 있다.

최근 언론을 보면 서울시교육청에서 중고교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정치와 사회 현안을 다루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학교에서 아직 이런 것도 하지 않으면서 민주주의를 교육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말도 되지 않는 일이지만 이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었다. ‘시사·일반 상식 문제집’을 보고 있는 취업준비생이나 차이가 없는 풍경이다. 지식 따로 현실 따로였다. 그러니 생각할 수 없고, 생각을 해도 지식과 같이 단편적이고, 생각을 싫어하고, 현실 추수적인 사람이 많아지고, 위계의 명령에 복종하는 사회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학교에서 유통된 지식은 권력의 프로파간다에 가까운 지식이었다. 그것은 교과가 다루는 지식이 무오류의 정답으로 간주되고 그것의 습득을 평가하는 과정을 통해 쉽게 확인된다. 지식이 자유를 위해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와 복종을 위해 기여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생각하는 사람이 자라기 위해서는 지식에대한 독점과 권위주의를 먼저 탈피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 때문에 민주주의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사회와 교실 자체가 민주주의 원리에 의해 운영되어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는 민주적 사회로 가능해지며, 민주적 사회는 민주적 삶에 의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민주주의가 삶의 공기가 되게 해야 한다. 민주주의로 숨 쉬지 않고 민주주의에 대한 감각과 태도가 길러질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학교가 사회 안에 있는 상황에서 현안에 대해 토론하고 참여하는 것은 민주주의 교육을 위해 원래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권력의 명령에 의해 그렇게 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 그 동안 학교는 무엇을 했을까? 자나 깨나 입시 준비였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머리로 암기하고 몸은 권위적 위계에 복종하는 식이었다. 

이렇게 민주적 방식으로 학교생활이 이루어질 때 학생들은 상식을 터득하고 생각하는 힘을 길러나갈 수 있다. 민주주의의 원리는 프랑스혁명의 정신인 자유, 평등, 연대로 정의할 수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갈 시민은 자연 자유와 평등과 연대의 감각이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 원리인 경쟁과 승자 독식은 절대로 민주주의 원리와 병존할 수 없다. 미국 민주주의가 실패한 이유는 바로 자본주의 원리로 사회를 운영했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 원리에 정치의 원리가 종속되었기 때문이다.

노암 촘스키

촘스키에 의하면 미국과 같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야말로 교육과 언론에 의해 지배권력의 프로파간다가 가장 막강하게 작동하는 사회이다. 이것은 현대 민주주의의 특징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이다. 왜냐하면 자본권력이 교육과 언론에 의해 대중의 의식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미국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이유다. 하지만이런 문제는 비단 미국에 제한되지 않은 전 세계 보편적 현상이기도 하다. 우리의 세계화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세계화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를 지키기 위해 이에 대해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학교가 현실 문제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제 학교는 평등의 원리에 의해 교사와 학생이 동등해야 한다. 학생을 존중해야 한다. 교사는 조력자지 권위 있는 지식의 전파자가 아니다. 무엇에 대한 조력자일까? 바로 상식의 감각을 기르고 양심과 도덕의 감각을 기르고 생각의 힘이 길러지고, 민주주의 원리에 의해 학교와 사회가 운영될 수 있도록, 적절한 자극을 주고 동기가 활성화되고 유지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교과서와 평가 등 권위의 지배를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문화의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상식을 갖춘 생각하는 백성이 자랄 수 있다. 상식을 갖추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개인과 나라를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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