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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an 23. 2018

인문학과 공공성

- 장자의 자유와 창조의 실천학을 중심으로

조성환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개벽신문] 제67호 (2016.9)


인문학과 공공성은 최근 몇 년 동안에 한국 사회에서 화두로 떠오른 두 개의 핵심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늘 인구에 회자되는 말일수록 정작 그 의미를 파헤쳐 들어가면 말문이 막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공공성’이라는 개념이 ‘가장 바람직한 상태’를 대변하는 일반명사로 쓰이고 있는 것처럼, ‘인문학’ 역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학’을 대신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인문학과 공공성이라는 말이 동시대에 회자되고 있다면, 양자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도 한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지난 반세기 동안의 우리의 인문학이 걸어온 역사를 간략히 돌아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문학의 본질과 공공성은 과연 어디에 있는지를, 고대 중국의 장자(莊子) 철학을 예로 들어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근대화 과정에서의 인문학


‘인문학’과 ‘공공성’은 아마도 우리가 근대화 과정에서 가장 소홀히 해 왔던, 그래서 지금 더더욱 절실히 요청되는 두 개의 영역이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에게 근대화는 곧 산업화를 의미하였고, 산업화는 바로 공업화의 다른 말이기 때문에, 당연히 인문학은 소외되기 마련이었다. 이것은 고등학교 커리큘럼에서 수학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미적분학과 같은 공업수학이 상당히 들어가 있는 것으로부터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산업화가 국가 주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공공’의 영역은 상대적으로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적 국민국가’건설이라는 지상 과제는 국익우선이라는 ‘공’의 가치와 사익추구라는 ‘사’의 가치로 양분되어, 그 사이에 존재하는 ‘공공’에 대한 배려는 등한시되었다. 그 결과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는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나’(私)만 잘 살면 된다는 각종 이기주의를 낳기에 이르렀고, 그것의 극단적인 결과를 우리는 세월호 침몰사고와 국정농단 사태를 통해 뼈저리게 경험하였다. 다행히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연대는 ‘공공’의 위력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고, 새 정부의 출범은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은 “패권주의 청산”과 “공공성 회복”에 거는 국민들의 기대가 적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근대화 과정에서의 ‘공공’에 대한 소홀은 자연히 인문학의 영역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가령 중고등학교 커리큘럼의 ‘국어’, ‘국사’, ‘국민윤리’라는 과목명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중심에는 언제나 ‘국가’라는 ‘공’이 자리 잡고 있었다. 국가를 넘어선 보편적 가치나 국가를 구성하는 시민들의 자율성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화 과정의 인문학은 ‘국가인문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거기에 유교식 교육방법이 가미되어 학생들은 일방적으로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서, 그것을 남김없이 받아 적어서, 가장 효율적으로 암기하여 시험에 대비하느라 ‘인문학적’으로 생각하거나 ‘자유롭게’토론할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외운 인문학적 지식은, 영어나 수학과 함께,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어서 자신의 출세를 보장해주는 수단으로 작용하였다. 말하자면 ‘수험인문학’인 셈이다. 


게다가 대학에 들어가면 이번에는 철저하게 서구 중심의 커리큘럼이 기다리고 있다. 거의 모든 개념과 시각 그리고 방법론이 서구적인 기준으로 도배질되어 있어서, 서구적 틀 자체를 비판적으로 보려는 시도는 기대하기 어렵고, 중국사상이나 한국문학도 서양식으로 분석하는 것이 좋은 평가를 받을 정도이다. 그래서 대학의 인문학 교육은 ‘서구인문학’을 습득하는 과정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편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80년대에는 ‘마르크시즘’이나 ‘주체사상’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대학가의 인문학을 점령하였다. 그래서 이 두 이념에서 벗어나는 논의를 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면 당장 보수나 반동으로 내몰리기 십상이었다. 순수문학보다는 실천문학이, 유심론보다는 유물론이 참다운 인문학으로 대접받는 시대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기의 대학가의 인문학은 ‘이념인문학’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근대화 과정에서의 인문학은 ‘국가인문학’, ‘유교인문학’, ‘시험인문학’, ‘서구인문학’, ‘이념인문학’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들을 하나로 대표한다면 역시 ‘이념인문학’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이건 ‘유교’이건 ‘서양’이건 ‘맑시즘’이건 할 것 없이 하나같이 위로부터, 또는 외부로부터 자의반 타의반으로 강요된 ‘이념’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에 한국 사회에 불고 있는 인문학 열풍은 이러한 이념적 인문학으로부터의 탈피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인문학의 주체가 국가 주도에서 시민 주도로 이동하고 있고, 그 내용도 동양이나 서양의 어느 한쪽에 한정되지 않고 다양화되고 있으며, 시험에서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직장인과 주부들이 자유롭게 인문학적 교양을 쌓고자 하는 바람이 인문학열풍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장자의 ‘도’의 인문학


그런데 이념적 인문학이 위험한 것은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식민지 상태로 만들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하기보다는 항상 그 이념에 기대어 생각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신적 속박 상태에서는 진정한 창조를 기대하기 어렵다. 기껏해야 이념적으로 제시된 기존의 틀을 열심히 학습해서 현실에 적용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이념이라는 구속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는 바로 여기에 진정한 인문학의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즉 인문학이 부여한 구속을 인문학으로 벗어던지는 것이다.


고대 중국의 철학자 장자는 이 외부로부터 부여된 이념을 ‘교’(敎=가르침)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곡사들에게 ‘도’를 말할 수 없는 것은 ‘교’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曲士不可以於道, 束於敎也)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곡사’(曲士)는 직역하면 ‘구부러진(曲) 선비(士)’라는 뜻으로, 기존의 사고틀에 사로 잡혀 있는 편협한 지식

인을 말한다. 반면에 ‘도’(道)는 그것에서 자유로운 진리의 세계를 말한다.


그래서 장자는 ‘교’의 인문학을 거부하고 ‘도’의 인문학을 지향한다. 장자가 중국철학사에서, 노자와 더불어 도가(道家)로 분류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리고 그가 ‘도’의 인문학을 추구했다는 것은 우리가 근대화 과정에서 추구했던 이념적 인문학과는 정반대의 인문학을 지향했음을 의미한다.


장자의 ‘도’의 인문학은 누군가로부터 진리를 배우기보다는 스스로 그것을 찾아갈 것을 권유한다. 그리고 그 찾아가는 ‘길’(道)을 근본적인 ‘물음 던지기’로 제시한다. ‘물음 던지기’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당연시하고 있는 근본적인 전제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말한다. 그 전제들은 옳고 그름(是非), 좋고 나쁨(好惡), 아름다움과 추함(美醜)과 같은 우리의 모든 가치들을 근원에서 지배하고 있는 토대이다.


가령 유교에서는 ‘효도’를 해야 한다고 설파하지만, 정작 “왜 효도를 해야 하는가?”라고 물으면 “당연한 이치”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제사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정작 “왜 제사를 지내야 하는가?”라고 물으면 “당연히 지내야지”라는 답 이외에는 이렇다 할 설명이 없다. 이 ‘당연’의 너머에 대해서 묻게 되면 이상하게 여겨지거나 쓸데없는 질문으로 치부된다. 그래서 우리의 물음은 이 ‘당연’에서 멈추게 된다. 

마찬가지로 서양의 전통철학에서는 모든 논의를 ‘실체’(substance)를 전제로 시작한다. 여기에서 ‘실체’란 “외부의 도움 없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란 뜻으로, 이것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수(number)이다. ‘수’는 그 자체로 존재하지 다른 것에 의존해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만물에는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고유한 어떤 것(본질)이 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세계관을 깔고 시작하는 서양철학에서는 실체관을 회의하거나 본질을 부정하면 정통 철학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가령 불교와 같이 실체란 없고(空), 모든 존재는 독립적으로 ‘자존’(自存)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에 ‘의존’(依存)해 있다고 주장하면, 서양철학 전통에서는 철학이 아닌 신비주의나 비주류로 분류되게 된다.


근본적인 물음던지기


이에 대해 장자는 모든 철학이 깔고 있는 기본 전제까지 내려가서 다시 생각할 것을 권한다. 즉 모든 철학들이 전제하고 있는 공통가치까지 상대화시키자는 것이다. [장자]의 <제물론>에 나오는 제자 설결과 스승 왕예 사이의 대화는 이런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설결 : “선생님께서는 누구나 옳다고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

왕예 :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느냐?”

설결 : “그럼 선생님께서는 선생님이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왕예 :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느냐?”

설결 :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요?”

왕예 :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느냐? 하지만 한번 얘기해 보지. 내가 안다고 하는 것이 실은 모르는 것이 아닌지 어떻게 알겠느냐? 내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실은 아는 것이 아닌지 어떻게 알겠느냐?”


여기에서 장자는 “모두가 옳다고 생각하는 공통가치가 있다”는 주장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것은 기존의 철학이나 종교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거의 대부분의 사상체계는 거의 예외 없이 모두가 옳다고 생각하는, 또는 옳다고 생각해야 하는, 이른바 보편적 가치를 전제하고 있고, 그 전제 위에서 자기들의 논의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가령 유교에서는 “누구나 ‘인’(仁)이라고 하는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고 시작하고, 불교에서는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佛性)이 있다고 보고 있으며, 서양철학에서는 실체가 존재한다는 전제 위에서 사유를 전개하고 있고, 그리스도교는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믿음 위에 성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인(仁), 불성(佛性), 실체(substance), 신(God) 등은 유교, 불교, 서양철학, 그리스도교에서 “모두가 옳다고 생각하는 공통가치”에 해당한다. 그러나 장자는 묻는다.

“이 네 가지 신념체계 중에서 과연 어느 것이 진정으로 옳은가”라고-.


사람은 습기가 많은 곳에서 자면 요통으로 반신불수가 되지만 미꾸라지도 그러한가? 사람은 나무 위에서 살면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지만 원숭이도 그러한가? 사람·미꾸라지·원숭이, 이 세 부류 중에 과연 어느 것이 ‘올바른 거처’를 안다고할 수 있는가? 사람은 소나 돼지를 먹지만 사슴은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을 잘 먹지만 솔개는 쥐를 좋아한다. 사람·사슴·지네·솔개, 이 네 부류 중에서 과연 어느 것이 ‘올바른 맛’을 안다고할 수 있는가? (중략)

모장과 여희는 세상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여기지만, 물고기들이 이들을 보면 물속으로 숨어 버리고, 새들이 이들을 보면 하늘 높이 날아가 버리며, 사슴이 이들을 보면 쏜살같이 달아나 버린다. 인간·물고기·새·사슴, 이 네 부류 중에서 과연 어느 것이 ‘올바른 아름다움’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보기에 (세상에서 따지는) 인의(仁義)의 실마리(端)와 시비(是非)의 진흙탕(塗)은 어수선하게(樊然) 뒤엉켜 있는데(殽亂), 어느 것이 옳은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장자는 인간과 다른 동물들은 가치체계와 삶의 방식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이들 중 어느 하나만이 옳다고 확정할 수 없음을 보인 뒤에, 인간사회에서의 도덕(仁)과 정의(義) 그리고 옳고(是) 그름(非)에 대한 견해 역시 그와 유사하게 어느 한쪽이 맞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서 “어수선하게 뒤엉켜 있다”는 표현은 표면적으로는 도덕이나 시비 논쟁의 복잡한 전개 양상을 의미하지만, 그 이면에는 도덕이나 시비로 표현되는 인간의 가치체계 자체의 복잡한 존재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즉 “어수선하게 뒤엉킴”이라는 표현은 가치체계들이 따로 떨어져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복잡한 의존 관계에 있음을 함축한다. 그리고 “어느 것이 옳은지 알 방법이 없다”는 말은 가치체계들이 이렇게 얽히고설킨 의존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 중 어느 하나만을 따로 떼어서 그것만이 옳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모든 혼란과 갈등의 원인은 본래 분리할 수 없는 가치체계를 분리하려는 데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가치의 상호의존성


장자는 인간의 가치체계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논증하고 있다.


사물은 저것 아닌 것이 없고, 사물은 이것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저것에서 보면 보이지 않아도, 이것에서 보면 알게 된다.

그래서 말하기를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 또한 저것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저것과 이것이 동시에 생겨난다”는 학설이다.

태어나는 것은 곧 죽음이고, 죽는 것은 곧 태어남이며,

가(可)한 것은 곧 불가(不可)한 것이고, 불가(不可)한 것은 곧 가(可)함이다.

옳음으로 말미암는 것은 그름으로 말미암는 것이고,

그름으로 말미암는 것은 옳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래서 성인은 (어느 하나로) 말미암지 않고 (모두를) 하늘(天)에 비춘다.


여기에서 ‘이것’(是)과 ‘저것’(彼)은 각각 하나의 가치체계(是非)를 의미한다. 나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나의가치체계’를 말하고, ‘저것’은 내가 바라본 ‘상대방의 가치체계’를 가리킨다. 그러나 반대로 상대방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상대방의 가치체계’를 말하고, ‘저것’은 상대방에 의해 평가된 ‘나의 가치체계’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것’(是)에는 ‘옳다’나 ‘맞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바로 이것이야!”라고 할 때의 ‘이것’에는 ‘this’와 ‘right’라는 의미가 동시에 들어 있다(앵거스 그라함의 학설). 그래서 ‘이것’이라는 말에는 나에게 옳은 것으로 인식되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실체를 전제로 하는 서양철학이 ‘이것’(是)이 되면, 그것은 ‘맞는’(是) 것이 되고, 그로 인해 실체를 부정하는 동양철학은 ‘저것’(彼)이 되고 ‘그른’(非) 것이 된다. 반대로 실체를 부정하는 동양철학이 ‘이것’이 되면, 그것은 ‘옳은’것이 되고, 실체를 부정하는 서양철학은 ‘ 저것’이 되며 ‘그른’것이 된다.


그런데 장자는 이것이 없으면 애초에 저것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가령 신이 있다는 관념은 신이 없다는 관념을 전제로 해야 가능하고, 반대로 신이 없다는 관념 역시 신이 있다는 관념을 전제로 해야 성립한다는 것이다. 결국 무신론과 유신론은 상호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있게 된다. 여기에서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두 가치체계는 동등한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따라서 이 두 주장 중에서 과연 어느 것이 진정으로 옳은 것인지 절대적인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 그것은 단지 각자의 관점에 따라 다를 뿐이다. 그래서 성인은 어느 하나의 관점에 말미암는(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하늘(天)에 비추어 놓고 상황에 따라 판단할 뿐이다. 여기에서 ‘하늘’이란 ‘공공성’의 영역을 말할 것이다. 마음을 비운(虛心) 상태에서 변화하는 상황에 가장 올바르고(正) 현명한(明)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장자에 나오는 “조삼모사”의 이야기는 이러한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영혼의 자유와 가치의 창조


장자는 ‘물음던지기’라는 형식을 통해 복수의 가치체계와 변화무상한 현실을 대하는(應物) 이상적인 삶의 태도를 제안한다. 그런 점에서 장자의 사상은 단순한 ‘이론철학’이 아니라 ‘인문학’내지는 ‘실천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진리가 무엇인가?”라는 이론적 탐구뿐만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실천적 영역까지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장자의 물음던지기 기법은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물음을 던질 것을 간접적으로 권하고 있다. 즉 근본적인 물음을 던짐으로써 하나의 가치체계에 규범적으로 속박되지 말고, 여러 가치체계들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새로운 가치를 생성하는 ‘길’(道)을 개척하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장자의 인문학은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해 주는 ‘자유의 인문학’이자 동시에 새로운 가치를 생성해 내는 ‘창조의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자]의 첫머리에 나오는 ‘대붕의 소요’는 이러한 자유로운 정신적 경지를 상징하고 있고, 거대한 박을 쓸모없다고 버리지 말고 바다에 띄워 뱃놀이를 하면 큰 쓸모가 생긴다는 ‘무용지대용’(無用之大用)의 이야기는 ‘가치의 창조’를 예시하고있다. 장자의 인문학이 지니는 공공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장자는 오늘날과 같이 가치가 다양하고 변화가 급변하는 사회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를, 논리나 설교의 방식이 아닌 질문과 우화를 통해서 우회적으로 깨우쳐 주고 있다.


* 이 글은《 월간 공공정책》2017년 8월호에 실린 글을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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