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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an 22. 2018

해월문집 지상강독 (4)

-  [해월문집]을 통해 본 최시형의 동학 재건 운동(4)

동학의 사상과 한국의 근대 다시 보기

- [해월문집]을 통해 본 최시형의 동학 재건 운동(4)


기록/정리 : 조성환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개벽신문] 제67호 (2017.9)


(지난호에 이어)


祝文

奉道弟子, 忝處薰陶之列, 荷蒙傳鉢之恩, 歸眞心學, 幾至修煉. 庚夏之運, 合成有年, 甲春之事, 痛深無地. 无極大道, 先生降靈之日, 誠心一片, 弟子追遠之感, 今當忌辰,

도를 받드는 제자가 외람되게 남을 가르치는 대열에 참여하여 의발을 전해주는 은혜를 입어 참된 심학에 귀의하여 수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경신년 여름의 운수가 이루어진지 몇 해만에 갑자년 봄에 일어난 일은 몹시 통탄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무극대도가 선생에게 강령하신 날에 정성스런 마음 한 조각을 담아 제자가추모하는 뜻에서 제사에 임합니다.


[말풀이] ▸添(첨) : 외람되다 |▸薰陶(훈도) : 남을 가르치다 |▸荷(하)·蒙(몽) : 입다 |▸鉢(발) : 바리때(승려의 공양그릇).예) “의발(衣鉢)을 전수 받다.” |▸庚夏(경하) : ‘경신년 여름’의 준말. ‘경신년’은 1860년. 이 해 4월 5일에 최제우가 ‘천어’ 체험을 통해 득도하였다. |▸合成有年(합성유년) : [동학도종역사]와 [해월신사]에는 “受命自天”으로 되어 있다. |▸甲春(갑춘) : ‘갑자년 봄’의 준말. ‘갑자년’은 1864년으로, 이 해 3월 10일에 최제우가 처형당했다. |▸無地(무지) : 직역하면 “땅이 없다”는 뜻으로, “여지가 없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강조의 표현. 가령 “원통무지(寃痛無地)”는 “원통한 마음을 호소할 곳(地)이 없다(無)”는 뜻이고, “감격무지(感激無地)”는 “무한한 마음을 이루 헤아릴 수 없다”는 뜻이다. |▸追遠(추원) : 직역하면 “먼 사람을 추모하다”는 뜻으로 “조상을 추모하다”는 말이다. [논어]의 “신종추원”에서 연원하는 말. |▸忌辰(기신) : 죽은 이의 제삿날. [동학도종역사]에는 ‘良辰(양신)’으로 되어 있고, 이어서 “淨潔道場, 謹以淸酌庶需, 奉請尙饗饗已”라는 말이 이어지고 있다.

[교감] 이 축문은 [동학도종역사] 제10장 <리기대전 및 대인접물장>(理氣大全及待人接物章)에 거의 그대로 실려 있다.1 |▸奉道弟子 『: 동학도종역사』에는 없다. |▸幾至『: 동학도종역사』에는 없다. |▸痛深無地 『: 동학도종역사』에는 “痛心無地”로 되어 있다.


一. 餠米, 七舂精一斗, 白以蒸, 量入一斗器盛用.

一. 白米, 七舂精一斗, 如右一斗器盛用.

一. 菜蔬, 以三色合爲盛具, 如一斗器用.

一. 飯米, 七舂精擇, 去絶米惡米造飯. 小鐺, 安排於鼎內, 湯中自可成飯. 而進用前, 愼勿啓盖.

一. 果品, 只以三色時果中, 而無過一器.

一. 祭需烹飪時, 炊柴, 勿用自枯草, 自腐草, 以生木生草, 豫爲刈取精乾, 以入用

一. 祭需烹飪時, 內人別般齋沐, 而小便後, 只以洗手. 大便後則必換服他衣. 便後更爲還着齋服而行之.

一. 烹飪時, 必口愼, 勿雜談.

一. 行祭, 祭宇必灑掃. 若土室則更爲泥塗, 必至極精潔, 可也.

하나. 떡쌀은 일곱 번 찧은 정미 한 말을 하얗게 쪄서, 양을 재서 한 말들이 그릇에 담아서 쓴다.

하나. 흰쌀은 일곱 번 찧은 정미 한 말을 위와 같이 한 말들이 그릇에 담아서 쓴다.

하나. 채소는 세 가지 색을 함께 담아서 위와 같이 한 말들이 그릇에 담아서 쓴다.

하나. 밥하는 쌀은 일곱 번 찧은 정미는 택하고, 쌀알이 없거나 나쁜 쌀은 버린다. 밥을 할 때에는 작은 솥을 큰 솥단지 속에 넣어 끊는 물에 저절로 밥이 되게 한다. 제사 에 쓰기 전에는 뚜껑을 열지 않도록 조심한다.

하나. 과일 종류는 삼색의 제철 과일로만 하되 한 그릇을 넘지 않는다.

하나. 제수를 삶고 익힐 때에는 땔나무를 때고 마른 풀이나 썩은 풀을 쓰지 않는다. 생목이나 생초를 미리 베어 모아서 정갈하게 말려 쓴다.

하나. 제수를 삶고 익힐 때에는 부녀자들이 별도로 목욕재계한다. 소변을 본 뒤에는 단지 손만 씻고, 대변을 본 뒤에는[보기 전에는?] 반드시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대변을 본 뒤에는 다시 재계하는 옷으로 갈아입고 제사를 지낸다.

하나. 삶아서 익힐 때에는 반드시 입을 조심하고 잡담하지 않는다.

하나. 제사를 지낼 때 제실은 반드시 물 뿌리고 쓴다. 흙집인 경우에는 다시 진흙을 발라서 반드시 지극히 정결하게 하면 된다.


[말풀이] ▸舂(용) : 찧다. |▸量(양) : 재다, 되질하다. |▸絶米(절미) : 껍데기만 남은 쌀. |▸惡米(악미) : 조잡한 쌀. 쌀에 섞여 있는 빛깔이 붉고 질이 낮은 쌀. |▸鐺(당) : 솥. ‘小鐺(소당)’은 ‘작은 솥’ ▸|▸盖(개) : 뚜껑. |▸祭需(제수) : 제사에 쓰는 물건이나 음식. |▸烹(팽) : 삶다. |▸飪(임) : 익히다. |▸炊(취) : 불 때다. |▸柴(시) : 땔나무, 섶. |▸刈(예) : 베다. |▸內人(내인) : 부녀자. |▸別般(별반) : 보통과 달리, 별도로. |▸灑掃(쇄소) : 물 뿌리고 쓸어내다. |▸祭宇(제우) : 제사지내는 방.

[교감] “大便後則必換服他衣”의 “大便後”는 의미상 “大便前”이 맞는 것 같다.


設饌圖  설찬도

飯 匙箸 飯 玄酒 麵  밥 수저 밥 물 면

   乾魚 醴酒 白米     건어 술 백미

   甘藿 菜蔬 造菓     미역 채소 과자

   大棗 生栗 乾柿      대추 생밤 곶감


[말풀이] ▸玄酒(현주) : 제사 때에 술 대신 쓰는 맑은 찬물. |▸造菓(조과) : 과자. |▸甘藿(감곽) : 미역. ‘藿’(곽)은 ‘미역’. 


국담 : 제사를 지내는데 위패는 안 쓰는 것 같네요.

박맹수 :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최은희 : 고기나 부침개도 안 쓰는 것 같네요. 나물도 생것을 올리는 건가요? ‘채소’라고 되어 있어서요.

국담 : 예, 원래 소금간만 해서 올립니다.

김봉곤 : 서원 제사에서도 생채소를 올립니다.

허남진 : 전체적으로 제사음식이 간소한 느낌인데, 아마도 정성 자체를 중시해서 그런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사 절차보다는 제사음식 얘기가 중심이네요.

박맹수 : [동경대전]에도 <축문>이 들어있는데, 이것과 내용이 다르고 간단합니다. 제사의례와 관련된 구체적인 설명은 없습니다. 가령 “조선에 태어나서 인륜 속에 살면서 천지가 덮어주고 실어주는 은혜를 느끼고”로 시작해서 “이제 좋은 날을 가려서 도량을 깨끗이 하고 삼가 맑은 술과 여러 제물을 받들어 청하오니 흠향하시기 바랍니다.”로 끝나고 있습니다.

이 <축문>에서 제가 흥미로웠던 것은 ‘대소변’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말에서 동학과 근대와의 접점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과정](한길사, 1999. 전3권)이라는 책이 있는데, 서구의 근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읽어야할 대작입니다. 중세의 유럽이 어떻게 근대로 바뀌는지를 사람들의 삶의 양식의 변화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는 대단히 흥미로운 저서로, 이 책에 의하면 근대의 핵심은 다름 아닌 ‘위생(衛生)사상’입니다. 쓰레기 잘 버리고, 똥오줌 잘 가리는 데서 근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축문>의 5년 뒤에 나온 최시형의 <내수도문(內修道文)>에서 “먹던 밥 새 밥에 섞지 말고, 먹던 국 새 국에 섞지 말고, 먹던 반찬 새 반찬에 섞지 말고”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근대적 위생 관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갑오년에 동학이 그렇게 널리 퍼지게 된 원인에는, 유무상자(有無相資) 사상도 있고 평등사상도 있고 정감록 사상도 있지만, 치병(治病)과 위생사상도 대단히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아마 이곳에서 대소변을 보고 와서는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으라고 하는 것도, 기본적으로는 제사지낼 때의 정성과 경건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동학적 위생사상의 반영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최시형이 동학을 널리 퍼트려 나갈 때 민중들 사이에서는 “동학에 뛰어들면 죽지 않는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고 합니다. 위생관념이 철저한 동학교도들은 전염병이 안 걸렸으니까요.

반면에 당시의 조선은 그리 위생적이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사료를 하나 소개해드리면, 동학농민군을 토벌한 일본군 후비보병(後備步兵) 독립 제19대대 병사들의 출신지는 대부분 시코쿠(四國)입니다. 시코쿠는 혼슈(本州)와 큐슈(九州) 사이에 끼어있는 작은 섬으로, 코치현(高知県)·에이메현(愛媛県)·카가와현(香川県)·토쿠시마현(徳島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9대대 병사들 800명 중 대부분 이 지역 출신입니다. 제 지도교수이신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의 이노우에 카츠오(井上勝生. 1945~) 명예교수님은 이 네 개 현을 답사하면서 동학농민군의 흔적을 지금도 찾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2012년에 제19대대 제1중대에 소속되었던 쿠스노키 비요키치(楠美代吉) 상등병의 종군일기를 찾아내게 됩니다. 저는 이 문서의 복사본을 교토에서 선생님으로부터 받아와서 3일 밤낮을 번역했습니다. 내용은 마츠야마시(松山市)에서 부대가 편성돼서 배를 타고 히로시마(広島), 시모노세키(下関)를 거쳐서 인천으로 들어와서 용산에 있다가 남하해서 전라남도 해남·장흥·강진까지 내려갔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마지막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약 2년간에 걸친 여정들을 매일 매일 기록한, 폭이 약 35센티이고 길이가 약 9미터 30센티에 달하는 대단한문서입니다.2

이 일기의 맨 앞부분을 보면, 인천에서 용산에 들어 왔을 때에, 자기가 주둔하고 있는 용산 일대의 광경을 묘사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어떤 내용인지 아세요? 위의 <축문>과 관련 있습니다. “똥, 똥, 똥, 똥…” 똥천지라는 것입니다. 1894년의 한양의 모습입니다.

반면에 그 이전에 동학 내부에서는 이미, 비록 소박하고 거친 형태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위생관념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자생적 근대’의 한 장면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 안에 싹트기 시작한 주체적 근대의 모습이지요. 지금까지 서구적 근대에 가려서 놓친 부분입니다. 우리가 동학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조성환 : 본문에 ‘내인(內人)’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여성도 제사에 참여했던 것 같습니다. 유학이나 가톨릭에서는 원칙적으로 의례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원불교는 어땠나요?

박맹수 : 원불교는 당연히 여성도 의례에 참여합니다. 실은 유학의 경우에도 조선초기에는 여성들도 제사권과 상속권이 다 있었습니다. 제사에 직접 참여했습니다. 여성의 제사권이 제한된 것은 중종 이후에 약 150~200년 정도입니다. 중종 이후에 소격서를 폐지하고 [주자가례]와 [소학] 등이 보급되고 집집마다 가묘가 생기면서 가부장적 질서가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임진·병자 양란 이후에는 다시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유교 자체가 인기가 없어진 것이지요. 그래서 서민들 차원에서는 ‘미륵신앙’으로 간달지, [정감록]으로 간달지, 아니면 서학, 즉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참고로 한 10여년 전에 경상도 지역에서 조선시대 묘에서 부인이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 나오는 남편에 대한 호칭은 ‘자네’였습니다.

조성환 : 그러면 동학에서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게 된 것은 원래 우리의 전통을 회복했다고 볼 수 있겠네요.

국담 : 제가 본 지방의 공식적인 유교 제사의 경우에도 손을 씻는 곳이 있었습니다. 계단에 오르기 전에 손을 씻고 올라갑니다. 그런데 이 <축문> 제사에는 향과 촉이 없네요.

박맹수 : 그러네요… 그것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국담 : 그런데 이 의식은 혹시 ‘제사’가 아니라 ‘제례’가 아닐까요?

박맹수 : 이 의례가 기일에 지내는 ‘제사’인지, 아니면 스승을 기리는 추모의 ‘제례’인지도 따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느낌으로는 ‘제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보통 ‘득도제(得道祭)’라고 하지요.

조성환 : 맨 첫 부분에 “강령지일(降靈之日)”이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하늘님의 기운이 최제우에게 내려온 날, 즉 최제우가 득도한 날을 의미하니까 제례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김태훈 : 이 제례가 ‘향아설위(向我設位)’하고는 관계가 없나요? 최시형이 제사를 지낼 때 벽을 향해 신위를 세우지 말고 “나(我)를 향해(向) 신위(位)를 세우라”고(設) 했다는…

박맹수 : ‘향아설위’ 법설은 1896년에 나옵니다. 이보다 10년 뒤의 일이지요. 사실 천도교 신자들에게 물어보아도 실제로 초기에 ‘향아설위’를 하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은 아직 못 만났습니다. 다만 동학의 초기 제사는 최제우가 득도한 4월 5일, 태어난 10월 28일, 처형당한 3월 10일을 중심으로 시작됩니다. 그 뒤에 인등제나 구성제 등으로 발전되고 ‘향아설위’도 나오게 되는데, 이런 것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아직 없는 상태입니다.

조성환 : 이 <축문>이 [동학도종역사]와 [해월신사]에도 실려 있는데3, 거기에는 <축문>이 끝나고 다음과 같은 말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신사(=최시형)는 갑신년(1884)에 대성인(=최제우)이 탄생한 원인과 경신년(1860)에 도를 받은 창운(昌運)과 갑자년(1864)에 재난을 당한 액장과 장차 도운의 형통에 대해서 설법하셨다.” 이에 의하면 위의 의례는 득도·탄신·기일의 모두에 적용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박맹수 : 한 가지 덧붙여 말씀드리면, 일본에 가서 공부를 해 보니까, 일본의 민중사상이나 민중운동, 또는 민중종교와 관련된 연구에서는 ‘통속도덕’(通俗道德)이라는 개념이 일반화되어 있더군요. 1997년에 일본에 유학을 갔는데, 그때까지 우리 학계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조선시대에는 ‘교화’(敎化)라는 말을 씁니다. 양반이나 지방수령들이 중앙에서 배운 통치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민초들을 가르칩니다. 서원이나 향교 등을 통해서 -. 서민들은 이런 식으로 지배 계급의 사상이나 통치 이데올로기를 수용합니다. 이것을 생활 속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통속도덕’입니다. 가령 “고진감래”(苦盡甘來)랄지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지식이 필요 없고 학문이 필요 없잖아요? 서민들은 이런 윤리를 일상생활 속에서 대대로 계승해서 실천해 온 것입니다.

이 통속도덕이 근대에 들어오면 새로운 종교나 사상이 탄생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가령 일본의 경우에는 니노미야 손토크(二宮尊德)나 안도 쇼에키(安藤昌益)와 같은 사상이 그런 예에 속합니다. 그런데 일본 연구자들이 조선 후기사상사를 보니까 이 통속도덕을 제일 잘 풍부하게 간직하고 있고 활용하고 있는 것이 동학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동학뿐만 아니라 증산교도 그렇고 원불교도 그렇습니다.

원불교의 경우에는 창시자인 소태산 대종사가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 [성계명시독(誠誡名時讀)]이라고 하는 방편적으로 사용한 임시 교재가 있습니다. 그 내용이 뭐냐 하면 믿음이 깊어지면 청, 얕아지면 흑, 또는 좋은 일을 하면 청, 나쁜 일을 하면 흑, 보통이면 황….이런 식으로 자신의 마음작용과 행동의 좋고 나쁨을 체크하는 것입니다. 이것의 기원은 조선후기에 널리 퍼진『 공과격(功過格)』의 한글풀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도 원불교에서는 ‘신분검사’의 형태로 남아 있지요. 이런 것이 통속적 수준의 도덕입니다.

따라서 구한말에 조선에서도 통속도덕을 활용한 새로운 종교와 사상이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위의 제사에서 향과 촉이 없는 것도 민초들이 위로부터 배웠던 것을 일상생활 속에서 통속화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降訣 강결

分蛤無頭, 當日寺矢口  벌려진 조개 머리가 없으니 햇빛을 쪼고 있네, 절시구.

弓弓矢口, 乙乙鳥也.  궁궁시구 을을새야,

執鳥頭以八角, 寔無冠苛逢秋.  새 머리를 잡아서 팔각을 만드니 진실로 관이 없이 가혹하게 가을을 만나는구나. 

聖諱加八亂, 山不利水不利.  성인의 이름을 피한 글자에 팔난을 더하였으니, 산도 이롭지 않고 물도 이롭지 않네.

利在晝夜彎弓之間, 晝修儒道夜修佛道佛爲寺.  이로움은 주야로 활을 당기는 사이에 있으니, 낮에는 유도를 닦고 밤에는 불도를 닦으세.

少來墳典靑春日, 老去徑輪白馬時. 젊어서는 경전 공부로 청춘이 가고, 늙어서는 경륜하며 백마 타고 가네.

時有時時, 處處山之鳥也, 爾其知. 때에는 시시가 있고 곳곳에 산의 새니, 그대는 알리라.

世俗誰云河聽狐. 세속에서 누가 물속에서 여우소리를 듣는다고 하는가!

他日能濟池殃魚. 훗날 연못 속 물고기의 재앙을 구할 수 있다.


[말풀이] ▸蛤(합) : 조개 |▸寔(식) : 진실로 |▸彎(만) : (활을) 당기다, 굽다. |▸墳典(분전) : ‘삼분오전’(三墳五典)의 준말. 삼황(三皇)의 글이 삼분(三墳)이고, 오제(五帝)의 글이 오전(五典)이다. |▸池殃魚(지앙어) : “池魚之殃”(지어지앙), 즉 “연못에 사는 물고기의 재앙”의 준말로,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재앙을 입는다”는 뜻.

[교감] 이 <강결>은 [동학도종역사] 제10장 <리기대전 및 대인접물장>(理氣大全及待人接物章)에도 실려 있는데, 문장의 순서가 많이 다르고 글자의 이동도 심하다:4 “己丑春,  <降書>. 日去月來新日來, 天地精神令我曉, 蘇星之氣新運濟人, 不再甲申歲, 弓乙回文明. 分蛤無頭當日寺, 矢口弓弓鳥也. 乙乙, 聖諱加八亂執鳥頭, 以入刻苛逢秋寔無冠. 山不利水不利, 利在晝夜彎弓之間. 少來墳典靑春日, 老去經綸白馬嘶. 時有其時時處處, 山之鳥也爾其知. 世▣誰云何聽狐, 他日能濟池殃魚.” 참고로 ‘기축년’은 ‘1889년’이다.


김봉곤 : 전체적으로 의미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동학도종역사]와 대조해 보면 글자의 이동도 심하고요.

박맹수 : 작년에 돌아가신 일본의 야스마루 요시오(安丸良夫) 선생 같으면 해석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일본 민중사상, 민중종교 연구의 대가이신데, 오오모토교(大本敎)를 창시한 여성교주 데구치 나오(出口なお)의 방언을 평생 연구해서 풀어내셨습니다.


虹橋消息無人道  홍교의 소식 말하는 사람 없어

回首南天幾望餘  남쪽 하늘에 고개 돌리고 몇 번이나 바랐던가?

非無義理大運中  의리는 대운 중에 없는 것은 아닌데

白日無光獨醒眼  대낮에 빛이 없어 홀로 잠깨어 있네.

不聞他日不聞事  훗날을 듣지 못했고 일도 듣지 못했는데

非月非日時時來  한 달도 아니고 하루도 아니고 때때로 오네.


[뜻풀이] ▸虹橋(홍교) : 편지.

[교감] [동학도종역사] 제10장 <리기대전 및 대인접물장>(理氣大全及待人接物章)에서는 다음과 같이 문장의 순서가 바뀌어 있다: “非無義理大運中, 白日無光獨醒眼. 虹橋消息無人到, 回首南天幾望餘. 不聞他日不聞事, 非月非日時時來.”


夢詩 몽시

不意四月四月來. 金士玉士又玉士,  4월을 생각 못했는데 4월이 왔네. 금선비 옥선비, 또 옥선비.

何何知知又何知, 今日明日又明日  어찌 무엇을 알겠으며 또 어찌 알겠는가. 오늘 내일 또 내일.


[뜻풀이] ▸不意(불의) : 뜻하지 않게

[교감]  [동학도종역사] 제10장 <리기대전 및 대인접물장>(理氣大全及待人接物章)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丙戌作. 不意四月四月來. 金士玉士又玉士. 无極大運作心誠, 圓通峯下又通通. 今日明日又明日. 何何知知又何知.” 참고로 병술년은 1886년이다.


박맹수 : 4월은 동학에서는 가장 중요한 달입니다. 4월 5일에 최제우가 득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우주적인 달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이 시는 스승 최제우의 득도를 찬미하는 시라고 생각됩니다.


訣 결

於南臥龍捲霖雨  남쪽에서 와룡이 장마비를 말아가고

也東大風傾濁波  동쪽 큰 바람은 탁한 물결에 기우네.

西雲歸醒萬物夢  서쪽 구름은 돌아와 만물의 꿈을 깨우고,

北岐先發虎豹縱  북쪽 산이 먼저 일어나니 호랑이와 표범이 뛰어노네.

虛明月色先去岳  텅 빈 밝은 달빛은 앞서서 언덕을 지나가고

晴淡地氣應高天  맑고 담백한 땅 기운은 높은 하늘에 응하니,

靑嶂屹立爲誰節  청청한 봉우리 우뚝 솟은 것은 누구의 절개인가?

後知世間君子亭  훗날에 세간은 알리라 군자의 정자임을.


[뜻풀이] ▸捲(권) : 말다, 거두다. |▸霖(림) : 장마. |▸嶂(장) : 산봉우리, 높고 험한 산.


通文 통문 _ 乙酉(1885)

一無通諭之事. 而二有不然之端. 故三有不得已之情. 四有不忍情之書, 無一失之行如何. 不佞奉事不誠, 天降警罰, 悚惶之地, 無所禱也. 此況不及自己, 延于次接. 其在主人, 更何造辭! 然而有厄有通, 運之自然, 有否有泰, 時之本然.

첫째 통유할 일은 없으나, 둘째 그렇지 아니한 단서가 있다. 그러므로 셋째 부득이한 심정이 있어서, 넷째 차마 참을 수 없는 글을 쓰니, 하나라도 잘못한 행실이 없는 것이 어떻겠는가? 내가 일을 받들어 행할 때 성실하지 않으면 하늘이 경계하고 벌을 내리니 황공한 처지에 빌 데가 없다. 이것은 나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접에도 미치니 그 주인에게 다시 어찌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액운이 있으면 형통이 있는 것은 운수의 저절로 그러함이고, 막힘이 있으면 통함이 있는 것은 때의 본래 그러함이다.


[뜻풀이] ▸不佞(불녕) : 자신을 낮춰 부르는 말. |▸主人(주인) : 앞에 ‘접’이 나오고 있으니까 ‘접주’(접의 지도자)를 가리킴.

[교감] 一無通諭之事. 而二有不然之端. 故三有不得已之情. 四有不忍情之書, 無一失之行如何: [동경대전] <통유(通諭)>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壹無通諭之事, 而二有不然之端. 故三有不得已之行. 四有不忍情之書, 千萬深量無書中一失, 施行如何.”


嗟夫! 道源出天, 天不變, 道亦不變, 道不變, 人亦不變, 人不變, 心亦不變, 天道不變, 人心不變. 何患有厄之運, 有否之時乎! 方今事勢, 有物然後, 可以無事, 無事然後, 可見通泰, 惟望諸接, 特恕不寧不誠之咎, 隨力鳩財, 期圖無事天報之時, 千萬幸甚.

아! 도의 근원은 하늘에서 나오는 것이니 하늘이 변하지 않으면 도가 변하지 않고, 도가 변하지 않으면 사람도 변하지 않고,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마음도 변화지 않고, 천도가 변하지 않으면 인심도 변하지 않으니, 어찌 액운이 있는 운수와 막힘이 있는 시기를 근심하겠는가! 현재의 형세는 재물이 있은 연후에 일이 없을 수 있고, 일이 없은 연후에 형통하고 트일 수 있으니, 오직 바라건대 여러 접들은 편안하지 않고 성실하지 않은 허물을 특별히 용서하시고, 힘닿는 대로 재물을 모아서 일이 없이 하늘에 보답하는 때를 도모한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뜻풀이] ▸鳩(구) : 비둘기, 모으다.


박맹수 : 이 통문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1880년대에 동학 포덕이 활발해지자, 정부의 탄압이 심해져 1885년에 충청감사 심상훈과 단양군수 최희진이 최시형의 오른팔인 도차주(道次主) 강시원을 비롯하여 이경교, 김성집 등을 체포하게 됩니다. 이때 잡혀간 도인들의 석방 자금을 모으자는 취지의 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동학이 우리 근대사에서 최초의 민주화유가족협회라는 점입니다. 동학의 특징은, 일찍이 1980년대에 김지하가 [남녘땅 뱃노래]에서 지적했듯이, 도인이 붙잡히면 접주는 그의 가족과 친구들을 다른 도로 피신시킵니다. 즉 도인들에 대해서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도와주는 자금은 근검절약, 금주 등을 통해서 확보합니다. 원불교로 말하면 저축조합 같은 식이지요. 최시형도 비단 옷 입지 말고 그 돈을 절약해서 도인과 스승을 석방하고 도우라는 “유무상자(有無相資)”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有物然後”라고 할 때의 ‘物’은 ‘물건’이 아니라 ‘재물’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석방자금을 가리킵니다.

참고로 우리나라가 70년대에 민주화운동을 할 때, 감옥에 간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민가협’은 모두 그리스도교 계통이었습니다. 사실은 이미 동학이 모범을 보였는데, 이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때 고독하게 나타난 선구자가 김지하 시인입니다. 김지하는 감옥에서 동학을 발견하여, 왜 멀리서만 사상을 찾으려 하느냐, 우리 안에도 그런 전통과 역사가 얼마든지 있지 않느냐, 라고 한국 사회에 계속 발신을 했습니다. 그 덕분에 70년대 후반~80년대 초에 진보적인 목사와 신부들이 동학과 최시형에 눈을 뜨게 됩

니다. 이것이 마침내 1986년의 한살림운동으로 꽃을 피게 됩니다. 이처럼 김지하는 70~80년대 한국사상사에 엄청난 공헌을 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이 당시에 그리스도교의 토착화, 한국화를 고민한 목사님이나 신부님들은 거의 다 김지하를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은 저도 놀란 게 [남녘땅 뱃노래]를 보니까 이『 해월문집』 원문은 안 봤더라고요. 이 문헌은 제가 발굴했으니까요. 그런데 김시인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하도 궁금해서 직접 찾아가서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김시인이 서울 시청 앞에서 한살림운동 할 때였습니다. 그랬더니 씨익~ 웃으면서 하는 말이 “박선생, 그게 시인의 상상력이야~”라고 하더군요. 한국의 역사학계는 오로지 사료로만 말해야 하기 때문에 상상력을 발동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선생님, 스스로 이 생각을 한 것입니까?”라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하더군요. 스승이 있었대요. 영남대 정석종 선생님이라고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전설적인 연구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이야기, 민담, 설화가 갖고 있는 사상적 의미에 최초로 주목한 분입니다. 이 분의 [조선후기 사회변동연구](일조각, 1983)는 역사가는 물론이고, 종교학자, 철학, 문화운동가들의 필독서 중의 하나입니다. 한국학을 어떤 식으로 해야 되는가를 최초로 이론화하고 체계화한 탁월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조언해준 것이 “아니다-그렇다”는 논리로 접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부정할수록 뒤집어서 생각해보라는 것이지요. 그것을 제가 실감한 것은 1980년대에 김지하 시인이 임진택, 송기원 등 몇몇 시인등과 함께 사상기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봉고차 한 대를 빌려서 조선후기의 사상사에서 중요한 지역을 찾아가고, 그 지역에 사는 분들과 밤새 술 마시면서 얘기하고, 그것을 전부 녹음해서 실천문학사에서 두 권짜리 책으로 간행했습니다([김지하의 사상기행]). 이때 남원에 갔는데, 가서 보니까 동학 흔적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실은 저도 [남녁땅 뱃노래](1985)에 수록된 <은적암 기행>을 읽고 박사과정 때 혼자서 남원에 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관계자들을 만나보니까 “남원에 동학 흔적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모릅니다,” “없습니다,” 이런 말만 하더군요. 그래서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린 쿠스노키 상등병의 일기를 보면 남원에서 엄청나게 격렬한 전쟁이 있었다고 나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00년 동안 침묵하고 있었다는 거지요.

김지하 시인의 말이 맞았던 것입니다. “아니다라고 부정할수록 뒤집어서 보아라. 이것이 특히 민중운동, 민중사상, 민중종교를 연구하는데 유념해야 할 사항이다”라는 얘기를 1987~8년 무렵에 서울에서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김시인은 원 사료를 보지도 않고 시인의 통찰력과 상상력으로 동학이 뻗어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 중의 하나가 다름 아닌 끈끈한 동지애와 공동체 정신에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습니다. 나중에 저는 이것을 박사논문에서 “유무상자(有無相資)”라는 개념으로 이론적으로 밝혔습니다만, 이런 전통의 가장 이른 시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료가 바로 1885년의 이 통문입니다. 흥미롭게도 김지하 시인이 이런 전통을 예측한 [남녘땅 뱃노래]는 이 통문이 쓰여진 100년 뒤에 나왔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주석


1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prd&types=&synonym=off&chinessChar=on&levelId=prd_164_0020_0100&position=-1

2  이 일기에 소개된 당시 동학농민군 포로에 대한 제19대대 병사들의 학살 행위에 대해서는, 나카츠카 아키라·이노우에 가쓰오·박맹수 지음, 한혜인 옮김, [또 하나의 청일전쟁 - 동학농민전쟁과 일본](모시는사람들, 2014)에 수록된 이노우에 가츠오, <일본군 최초의 제노사이드 작전>의 "6. 어느 일본군 병사의 '진중일지' 중에서"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이 외에도 이 문서를 소개한 신문 기사로는, 박철환, <동학과 나주, 그 슬픈 역사를 보듬다 - 동학군 학살부대 일본군인 종군일지 공개>, [나주신문],  2013.08.26.과 <동학농민군 학살 일지 공개 관심>, [무안신문], 2013.09.02.이 있다. 참고로 [나주신문]에 나오는 ‘쿠스노키 마사하루’는 종군일지의 주인공이 아니라 그 일기를 필사한 주인공의 친척이다.

3  둘 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동학농민혁명자료총서>에 실려 있다.

4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prd&types=&synonym=off&chinessChar=on&levelId=prd_164_0020_0100&position=-1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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