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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10. 2018

상호문화주의의 길

-내 마음 열리는 곳

심 규 한 | 성요셉상호문화고 교사 | [개벽신문] 2018년 1.2월합병호


2017년 현재 대한민국에는 210만의 외국인이 거주하고, 20만의 다문화(이주배경) 청소년들이 자라고 있다. 도시가 아닌 농촌에 살고 있는 나는 자연스레 농촌지역에 시집온 베트남과 필리핀 등 출신의 여성과 아이들, 그리고 소위 3D 업종에 종사하며 일하는 동남아 노동자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소외받고 있으며, 우리 사회에 기여하는 것만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소위 가난한 나라라는 국가적 인종적 편견이 낙인처럼 작용하고 차별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서양인에 대한 맹목적 열등의식과 호감만큼이나 비서양인에 대한 맹목적 우월의식과 혐오는 우리 자신이 깊은 병들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즈음 새롭게 거론되고 있는 상호문화주의에 대해 고찰하는 것은 비단 사회적 약자인 비서양 외국인만이 아니라 서양 외국인에 대한 우리의 왜곡된 의식도 개선해 평등한 다양성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단일문화, 다문화, 다문화주의, 중심과 주변


이 땅에서 ‘다문화’라는 말이 공식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2006년 이후로 아직 15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 배경에는 1990대의 산업연수제와 2004년부터 실시된 고용허가제로 들어온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한국사회의 차별, 착취, 폭력 등이 사회적 문제로 부각된 것과 관련이 깊다. 더불어 1995년 이후부터 결혼이민이 본격화되어 농어촌으로 시집온 아시아 여성들이 많아지면서 우리 사회도 점점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현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다문화라는 말의 호칭 대상은 여전히 우리가 아닌 그들, 즉 국경 밖에서 들어온 새로운 이주민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 자신이 배제되어 있다. 그럴 다문화는 우리로 지칭되는 단일민족 단일문화의 상대개념이 된다. 중심에 대해 주변이며, 주체에 대해 객체가 된다.

중심은 주변에 대해 지배하고, 혐오가 아니면 시혜적 동화주의로 포섭하려고 한다. 중국에서 들어온 조선족, 산업연수제로 포장해 저렴하게 들여 온 외국인 단순노무자들, 농촌으로 시집 온 필리핀, 베트남 등지의 여성들은 '우리'로 불리지만 좀처럼 우리가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여년 다문화 논의가 지속되면서 우리 사회가 재한 외국인의 인권과 복지 상황을 점차 개선해 나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편견과 차별에 의한 인권침해가 벌어지고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다문화 주의도 긍정과 부정 양면이 있다. 단일문화의 중심과 다문화의 주변은 단지 수평적 거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권력의 수직적 차이를 의미한다. 정상사회에의 적응을 문제 삼는 다문화주의는 이미 지배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몇 년간 꾸준히 방영되고 있는 다문화 가족을 대상으로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중심의 우월한 동정주의를 자극하고 유포해 권력의 차이에서 비롯된 문제를 은폐하고 미화하는 보수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타자인 다문화에 대한 동정과 시혜적 태도로 문화우월주의를 포장할 뿐이다. 보다 근본적인 평등에 요구, 즉 인권에 기반한 정치 경제적 요구를 배제하기 때문이다. 이는 제국시대 이후 유럽과 미국 등에서도 벌어졌던 다문화정책에서도 반복된 사실들이다. 다문화주의는 보수주의의 한계에 안주하는 경향이 있다.


상호문화주의와 민주주의


상호문화주의는 이러한 중심과 주변의 구분과 동화주의에 반대한다. 오히려 상호문화주의는 차별적 차이에 항거하며 차이의 존중을 요구한다. 인권과 평등에 대한 인식은 상호문화주의는 물론 국가와 사회 안에서 더욱 건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구체적인 원리이자 방법이 된다.


하지만 상호문화주의도 스스로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문화주의가 표방하는 보수주의의 함정이 있기 때문이다. 흔히 사회에서 벌어지는 보수적 문화담론은 정치 경제를 배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사회의 골격을 형성하는 것은 정치와 경제다. 문화는 그에 비하면 살과 같다. 뼈 없이 살만으로 온전한 몸 곧 형체를 지닐 수 없는 것처럼, 건강한 사회의 몸도 마찬가지다. 사회를 통합하고 작동하게 하는 골격 즉 정치와 경제의 구조가 필요하고 그 안에 풍요롭게 길러진 살로서 문화가 자리해야 한다. 정치와 경제의 건강한 골격은 인권과 평등의 원리에 의해 구축되어야 한다. 그런 바탕 위에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가 유기적으로 통합되게 된다. 


정치와 경제를 배제한 문화담론이 자칫 정치와 경제에 작동하는 권력의 지배와 차별을 은폐하고 미화하는 보수주의로 귀결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때문상호문화주의는 무엇보다 평등한 민주주의의 원리를 관철하고 실천하는 일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야말로 사회의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를 건강하게 통합하는 원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우리는 현대의 소위 민주주의 국가의 모순을 먼저 포착해야 한다. 왜냐하면 많은 민주주의 국가가 사실은 민주주의 원형인 인민의 평등하고 직접적 참여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거대국가가 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관료제에 의한 통치와 대의민주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교과서와 언론은 이를 합리화하고, 문제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의민주주의는 이미 위기에 봉착했다. 많은 나라에서 대의민주주의가 선거를 통한 대의 과정이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적 권력을 장악한 권력의 욕구대로 작동하며 권력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 안에 완성된 시혜적 복지국가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기보다 민주주의 저주이다. 왜냐하면 권력에 의

해 인민이 수동적 대상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 대신 배부른 돼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돼지이기보다 소크라테스이기를 먼저 요구한다. 권력의 집중 대신 분산과 참여를 원리로 하기 때문이다.


다양성과 상호주의, 불화와 대화


개인은 다양하고 그 다양함은 충돌하게 마련이다. 다양성이 분출하고 충돌하는 모습은 혼란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은 질서를 향해가는 상호작용과 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악셀 호네트의 말처럼 인정욕구는 사회 안의 모든 개개인이 가진 것이다. 각자가 사회 안에서 차별받지 않고 인정받기 위해 분쟁하고 조정하는 것은 민주주의 필수적 과정이다. 


자크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를 공론의 장에서 다투는 계쟁이라고 말했다. 다투며 대화하고 상호 인정 속에 조화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곧 민주주의다. 그러므로 불화야말로 민주주의가 태어나는 토대가 되기도 한다. 불화하고 분쟁하자는 말이 아니다. 사회 안에 벌어지는 다양한 차이와 갈등을 회피하지 말고, 표면화하고 대화하며 해결해나가자는 말이다. 그럴 때 민주주의 사회는 더욱 깊어지고 넓어지고 견고해질 것이다.


이러한 민주주의 실현이 곧 상호문화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화를 정치와 경제로부터 고립시키지 않을 것, 그리고 권력 관계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평등의 원리 위에서 기꺼이 차이와 갈등을 표면화하고 대화를 통해 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상호문화주의가 아름다울 수만은 없다. 상호문화주의는 공평무사한 객관주의와도 다르다. 당파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권력으로 이미 구분된 사회 안에서 상호문화주의는 요구, 즉 소수자의 요구(등록)이기 때문이다. 상호문화주의는 이미 상호적일 수 없는 사회의 토대를 인식해야 한다. 우선 소수자 및 약자의 편에 서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상호문화주의의 원리는 상호적이다. 상호적이기 위해 서로 보고 귀를 기울일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문제를 함께 해결해간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 유행했던 비폭력 대화와 비슷한 점이 있다. 동일하게 정치와 경제를 도외시한 문화주의-보수주의이기도 한-에 함몰될 염려도 있다. 그래서 우선 상호성을 확보하기 위한 소수자와 약자의 당파성이 요구되기도 한 것이다.


기꺼이 새로운 불화를 맞이할 것, 하지만 그것을 넘어 더 큰 이해와 화합이라는 전망을 견지할 것! 

어쩌면 상호문화주의는 인류가 지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따라가고자 했던 사회(공동체)와 문화의 원리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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