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만길 선생을 만나다
강물이었다.
그립다는 말 꽃잎에 써 띄워 보내고
별빛이 떠오르면 강물에 비친 그대의 얼굴
작별 없이 흐른 강물이었다.
여기 가장 먼저 피는 꽃이여,
물새가 날아가는 곳으로 깃발 없이 흘러가
여기도 동백꽃이 피어났다고
전해 주시려는가.
기자는 선생의 삶이 강물 같다고 말하고 싶다.
역사학자 강만길 선생을 만났다. 어렵게 모신 자리에서 만난 선생은 생각했던 만큼 묵직한 첫인상으로 기자를 맞아주셨다. 청명문화재단(서울시 종로구) 사무실에서 2시간 동안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선생의 자서전 『역사가의 시간』(창비)을 읽으며 인터뷰를 준비했던 글쓴이는 꾹꾹 눌러 썼을 이 책을 눈물로 읽었다. 선생을 만나고 돌아와 다시 책을 읽고 있으니 눈으로 읽는 책이 선생의 목소리로 들려왔다.
강릉에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난 겨울 날씨가 너무 추워서 선생님의 건강을 걱정했는데 뵙기에 생각보다 젊어 보이십니다.
서울 일 다 봤으니 곧 돌아가야죠. 거기 가야 책이라도 읽고 그러지. 자기 몸은 자기가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도 매일 1만보를 걸어요. 반드시 걸어요. 서울에 오면 4·19공원을 걷고 강릉에 가면 해변가를 걷지요. 오늘 무슨 이야기를 하나... (질문지를 읽으시고는) 그래요. 이야기해 봅시다.
2019년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합니다. 새로운 100년을 앞두고 근대 개화기 지식인, 선혈들이 세우려던 본래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요?
3·1운동은 우리의 독립운동인데,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나라 공화주의운동입니다. 그렇죠? 사실 우리가요, 임진왜란이 끝났을 때쯤 새로운 왕조가 섰어야 합니다. 그랬으면 한일합방이 되기 전에 우리의 공화주의가 정착이 되었을 거예요.
그랬다면, 예를 들어 독립협회의 개혁운동의 결과로 대한제국이 입헌군주국 정도는 되지 않았겠나. 그런데, 실제의 당시 시대상으로 봤을 때 전혀 이룰 수가 없었어요. 왜냐면 의회가 없었으니까. 대한제국은 왕을 황제로 바꿨을 뿐이지 공화제가 되지 못했잖아요. 그랬다가 결국은 망하게 되잖아요. 그리고 망한 지 19년 만에 3·1운동이 일어나지요. 3·1운동을 우리가 독립운동이라고 말하는데 역사적으로 보면 공화주의운동입니다. 임시정부였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거죠. 정식적으로는 아니지만 3·1운동을 통해 우리 역사가 비로소 공화주의로 넘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걸 역사에서는 설명을 안 해요. 독립운동으로만 설명하는데, 사실은 독립운동인 동시에 공화주의운동입니다. 그래서 대한제국임시정부가 아니고, 대한민국임시정부다, 이렇게 볼 수 있죠. 그에 앞서서 애국계몽운동이란 게 있었죠. 그 애국계몽운동이 사실, 공화주의운동이 되었어야 했어요. 애국계몽운동이 공화주의운동이 안 되었죠. 그러면서 한일합방당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3·1운동에 의해 비로소 역사적으로는 공화주의 시대에 들어가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임시정부였지만요.
3·1운동이 근대적 민중의 주체로서의 성장으로 볼 수 있을까요?
그렇게 되려면 조직이 있어야 했어요. 노동운동, 농민운동 조직 등의 조직 말이죠. 그런데 조직이 뒷받침이 되지 못했어요. 3·1운동은 조직적인 노농(勞農)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일어났어요. 임시정부는 정치인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이죠.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심으로요. 사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은 이승만입니다만, 국무총리 이동희는 한국사회당 당수였어요. 임시정부는 좌우합작 정부였어요. 그렇게 시작되었는데 중간에 여러 가지 고난이 있었지만 그 임시정부가 해방이 가까워질수록 다시 좌우 합작이 됩니다. 우리나라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들이 임시정부의 근무요원이 됩니다. 중국 공산군 근거지였던 연안에 우리나라 사람이 가서 조선독립동맹을 만들었죠.
그런 맥락에서 김구 주석이 해방 전에 조선 사람을 보내죠. 합작을 위해. 그러다 해방이 되어 버리죠. 김두봉이 김구를 만나러 가서 정식 합작 선언을 하려는데 해방이 된 거죠. 우리 국사가 아무도 그걸 가르치지 않아요. 안타까운 일이지요.
선생님께서는 동북아의 격랑을 헤쳐 나가려면 남북 화해·협력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반도 분단이 70해를 넘기고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이 있었습니다만, 분단에 대한 왜곡된 진실을 풀어내는 것도 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일본이 한반도를 강제 지배하지 않았다면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소련군과 미군이 우리 땅을 점령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면서 전승국 미·소가동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이루기 위해 분할한 겁니다. 38선은 영구 경계선이아니었어요. 38선이 생겨도 남북 공통의 임시정부만 성립되면 그 선이 무의미해지는 거였는데, 그걸 해내지 못했어요.
앞에서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이 청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다음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고 이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일본이 중국과 미국을 상대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으니까요. 누가 보더라도. 일본이 망한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일본이 망하면 우리는 당연히 해방이 된다고만 생각했지, 해방 이후 두 개의 국가가 생기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1943년 무렵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좌우 합작 정부가 되지만 해방이 되면서 38선이 생긴단 말예요. 분단이 됩니다. 김구가 김규식이랑 평양을 가죠. 통일정부를 만들기 위해. 통일정부가 되면 이승만이 집권할 가능성이 전혀 없죠. 이승만 중심으로 한민당이 남한 단독정부를 세우고 정권을 세우니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죠. 38선이 생기는 게 문젠데, 과거부터 한반도 전체가 대륙 세력권에 들어가면 일본의 심장부를 겨누는 칼처럼 되죠.
러일전쟁 때 러시아가 우리 임금을 공사관에 데려가고 마산에 군함을 만들려고 하죠. 그러니 일본이 야단이 난 겁니다. 일본이 망하면 러시아가 태평양을 지배하게 된다고 판단하고 그걸 막기 위해 어떻게 합디까? 미국과 영국이 러일전쟁 때 일본에 그 전쟁비용의 거의 대부분을 빌려줍니다. 일본 단독으로 전쟁을 할 수 없었어요. 전쟁 비용이 30억 엔인가 그랬는데 28억 엔인가를 빌려줍니다. 그래서 전쟁을 할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래서 일본이 이겼죠. 그러니 어떻게 됩디까. 한반도 전체가 대륙으로 진출하는다리가 된 겁니다. 나보고 너무 지정학적인 이야기를 한다고 하는데 사실이 그렇습니다.
통일에 대한 인식이 청년들에게 특히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기성세대들의 역할이 클 것 같습니다.
꽃다운 20대를 군대에 바치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이스라엘밖에 없어요. 군대 가면 어제까지의 일을 백지로 만들라고 말합니다. 바보가 되라는 말이야. 우리 민족만큼 군사비를 많이 쓰는 나라가 없어요. 또 전쟁이 끝나고 난 뒤 중공군은 다 물러갔지만 미군은 가지 않고 해마다 한미 공동 작전 연습을 하고 있어요. 지난번에는 한미 북한 상륙 작전까지 연습했더라는 거야.
그게 문제가 아닌가? 언제나 미국의 속국으로 살아야 합니까? 그런 생각 안 하나? 어때요? 그들이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무 살만 되면 한 학기 마치고 가야 하나, 두 학기 마치고 가야 하나 고민해야 하고, 엄청난 군사비를 대야 하고 동족을 늘 원수로 생각하고 살아야 하고요.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기성 지식인들의 잘못입니다. 도대체가 말이야 나이가 들고 다 겪어본 사람들 아니야. 젊은 사람들 교육을 다시 잘 시켜야죠. 나도 대학 때 군대를 1학년 마치고 가야 하나, 2학년 마치고 가야 하나를 고민했는데 내 손자들이 그 고민을 아직도 하고 있어요.
언제까지 이래야 해요? 이것은 문제가 아닌가요? 기성세대들이 말해줘야 하는데 기성세대들에게 역사의식이 없어요. 분단 체제에 빠져서 볼 수 없어요. 어떤 말을 접할 때, ‘좌익’이다, ‘빨갱이’다라고 하죠. 아직 멀었어요. 소위 극우들을 보면 친일 후손들이 대부분이더군요. 그대로 내려온 겁니다. 해방이 되었을 때 친일한 자들이 다 죽을 줄 알았어요. 그러나 이승만이 정권을 잡으면서 전부 다 살아남았죠. 도망간 경찰들이 돌아왔고요. 그게 대한민국의 뿌리야.
통일에 대한 인식 부재는 분단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통일 이전에 분단을 이야기해야 하고 분단 이전에 식민시 시대를 이야기해야 하고요.
첫째 6·25전쟁이 잘못 되었죠. 전쟁이 없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겠죠. 김일성이 그때 서른 몇 살이었어요. 당시 러시아가 뒷배가 되어 줬어요. 미국으로서는 절박했어요. 한반도가 넘어가면 일본도 넘어가게 되니까 참전을 안 할 수 없었던 거예요. 신탁통치는 3년만 받고 총선거를 해서 독립하게 되었는데, 이승만과 친일파들이 막은 겁니다. 한반도 전체를 미국도 소련도 차지하지 않도록 미국이 38선을 긋지 않았으면 한반도 전체를 소련이 갖습니다. 점령합니다.
그렇게 한반도 절반을 양보하고 일본의 북해도로 상륙할 생각, 그리고 태평양으로 진출할 생각이었거든요. 태평양은 언제나 아메리칸 레이크, 미국의 호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강력히 막아냅니다. 소련의 북해도 점령을요. 소련은 겨우 북방 4개의 섬만 점령했죠. 원래 일본 땅이었어요. 미국으로서는 한반도 전체가 소련 점령 하에 들어가면 일본이 넘어간다고 생각했어요. 일본이 폭격으로 엉망진창이 일어났는데 이대로 가면 일본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니까 항복한 거고요. 한반도의 절반은 일본을 지키는 방파제 노릇을 한 거예요. 38선은 어떤 의미에서는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두 전승국의 세력 균형선이요, 세력 경계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 고향 마산은 최전방이었어요. 밤이면 인민군 게릴라가 들어옵니다. 내가 중학교 5학년 때 다 봤어요. 마산은 지켜야 합니다. 마산을 지키지 못하면 대구, 부산이 점령되니까요. 대구를 지켜야 부산이 유지되니까요. 그걸 지키는 또 하나의 방파제가 마산이었어요. 결국 미국이 참전해서 인천상륙을 해서 올라가잖아요. 6월 25일에 전쟁이 일어나고 28일에 서울이 함락됩니다. 모택동이 전쟁 준비를 시키죠. 6월 28일에 미국이 참전 선언을 하면 38선에서 머무르지 않는다고요. 전쟁을 준비시키면서 만주에 부대를 보내죠. 그러니 중국이 참전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서울 수복됐죠. 과거 김일성 부대처럼 부산까지 가지 않고 휴전선 긋고 전쟁 끝내 버리죠. 우리 역사가 이런 걸 가르치지 않고 통일 이야기만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통일을 해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통일 안 하고 살 수는 없잖아요. 세계사가 말이죠. 20세기는 불행합니다. 제국주의 전쟁을 두 번이나 겪고 냉전을 겪습니다. 그 기간 동안 국경의 벽을 높이 쌓았죠. 그런데 20세기가 다 가기도 전에 노비자(No Visa) 지역이 생겨납디다. 냉전이 지나고 나서 노비자 지역이 생기는 걸 보니 참 재밌어요. 과거엔 어림없었죠. 그러다가 독일이 통일을 합니다. 프랑스는 독일의 통일을 싫어했겠죠. 그러나 용인합니다. EU가 생깁니다. 지역공동체가 생겼으니까요. 독일과 프랑스는 적이 아니라 동맹국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유럽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데도 번져 나갑니다. 아세안, 조금 성격은 다르지만 남미공동체, 심지어 아프리카공동체까지 나오고 있어요. 동아시아는 한중일 공동체를 못 만들고 있어요. 지난 세기에 일본이 저지른 죄 때문입니다. 지금 아세안 플러스 3국이라고 말하는데, 제대로 되려면 북쪽도 넣어서 아세안 플러스 4국이 되어야죠. 그러면서 앞으로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어서 세계사 흐름에 발맞춰 아시아 지역도 평화롭게 살아야겠죠. 이런 교육을 넓혔으면 좋겠어요. 다른 역사학자들이 이런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어요. 나 혼자 떠들어.
동아시아 공동체와 평화에 대해 아시아태평양 국가로 남길 원하는 미국의 영향력을 원인 중 하나로 지적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계사가 이제 지역공동체를 만들어 평화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도 그 흐름에 따라가야 할 것 아닙니까. 몇 년 전, 책을 하나 썼어요.『 분단고통과 통일전망의 역사』라는 책입니다. 문 대통령에게도 한 권 보내 줬어요. 통일은 남이 해 주지 않아. 남북이 해야 해. 세계사의 흐름에 발맞춰서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게되면 한반도가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을 연결하는 평화 가교가 되어야 합니다. 일본도 일본이 근대화하면서 탈아입구한다고 했지. 그러다 탈아입미했고. 21세기 일본은 탈미입아해야 한다고 해요. 동아시아 공동체 일본이 중심이 되어도 안
되고 중국이 중심이 되어도 안 됩니다. 대동아 공영권과 중화주의 때문이에요.
그래서 한반도가 통일되면서 아세안과 합쳐 광범위한 공동체를 만들어 유럽의 EU처럼 되어야 해요. 그런 면에서 통일된 한반도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겠죠.
미국도 세계 전략을 바꿔야 해요. 무엇 때문에 세계의 경찰노릇을 합니까. 먼로주의는 어디가고 윌슨의 자결주의는 어디 갔어요? 왜 온 세계를 이기려고 합니까. 그걸 가만히 놔두는 것도 문제예요. 힘을 못 당하기는 하지만 이제는 세계사가 힘만 가지고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내부에서 그런 운동이 일어나야죠. 미국의 지성이 일어나 반전운동을 해야 한다고 봐요. 베트남전쟁 보세요.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국내에서 엄청난 반전운동이 일어났거든요. 19세기 세계를 지배했던 게 영국이었어요. 중국의 공업생산력이 미국을 능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이 제2의 미국이 되느냐? 절대 안 됩니다. 미국처럼 패권주의로 세계를 지배하는 일은 오지 않을 겁니다. 지역공동체가 되면 민족 문제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는 식민 지배를 받아서 그렇죠. 국경이 자꾸 없어지잖아. 통일 전의 한반도, 만주에 조선족이 많이 살아요. 한반도와 시베리아까지 한민족의 베이스가 깔리는데 민족 문제, 국경이 중요하지 않아요. 지역공동체가 중요하죠. 민족성보다 인간성이 앞서야 합니다. 민족성이 남겨 놓은 게 득이 될 게 없습니다.
통일 문제를 왜 말해야 하는가. 지역공동체, 평화공동체가 중요합니다. 민족을 내세우지 않아도 통일문제 이야기할 수 있고요. 중국이 통일국가가 된 적이 별로 없어요. 지금 사회주의 정권이 오래 가지 못한다고 봐요. 앞으로 상당히 분권화 될 것입니다. 저 거대한 나라가 하나의 권력으로 움직일까요? 민족으로 말하면 중국이 얼마나 많은 민족이 어울려 살고 있습니까? 미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역사에서 결정적인 장면들을 꼽아보아 주신다면 어떤 순간일까요? 한국사의 주요 장면 또는 안타까운 장면 또는 결정적인 장면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많죠. 독재정권 무너뜨린 것 참 자랑스럽죠. 일본의 지배를 우리 힘으로 벗지 못한 것은 유감이고. 사실은 국내 게릴라가 있어야 해방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두 사람이 했더라고요.
김구, 여운형. 게릴라 활동을 하다가 해방이 되어야 국제적으로 할 말이 있다고 말했어요. 김구는 장준하 등을 비행기로 실어서 게릴라 활동을 시도했죠. 들어오지도 못했죠. 일본이 패망하는 바람에. 김준엽 선생 이야기를 들었어요. 기가 찼지. 망명해서 임시정부하고 있던 노인네들은 국내 젊은이들은 왜놈이 다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어.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서 일본 교육을 받고 자랐으니까. 아 그런데 이들이 목숨 걸고 탈출해서 임시정부로 찾아왔다는 말이야. 밤새도록 울었대.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 망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여운형은 만주 군관학교 출신의 장교들과 비밀조직을 만들었어요. 연안에 사람을 파견하지만 그때 해방을 맞이하죠.
통일을 이루기 위한 과제가 많습니다만 가장 먼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 게 내왕을 해야 해요. 내가 그동안 700여 명을 데리고 북을 다녀왔어요. 될 수 있으면 많이 가고 오게 하고 그래야 합니다. 만나게 되면 달라지니까. 그런 노력을 해야 해요. 남북 간에도 한일 간에도. 젊은 사람들이 달라져야 합니다. 기성세대보다도요. 6·25을 아는 사람이 다 죽어야 세상이 달라질겁니다.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자꾸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게 문제입니다. 누군가 북핵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니까 아들이 그런 말을 했데. “우리는 미국 때문에 못 가졌지만 북이라도 가져야 할 것 아닙니까” 얼마나 놀랐겠어요. 이렇게 시대가, 세대가 달라지고 있어요. 우리는 그걸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합니다.
개인적인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한평생 역사 공부를 하셨는데, 역사가로서의 길을 걸어오게 되신 데에는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나는 상당히 평화주의자인데 처음 역사 공부를 하면서 일본 사람들이 잘못한 걸 바로잡는 일로 시작하게 된 겁니다. 그러다 보니 남북의 현실 문제가 드러났고요. 역사는 현실을 바탕으로 한 과거니까. 역사 공부 하면서 터득해 나간 것 같아요. 내 이야기를 말하기 어렵지만 언젠가 잡혀갔을 때 묻더라고. 조상이 누가 좌익이 있냐고 그랬어. 내가 공부하다 보니 그랬다고. 그런거 없다고 말했지. 민주화운동, 평화운동만 해도 잡혀가던 시절이었어. 더구나 잡혀가면 우리 세대는 6·25 때 뭐했냐가 가장 중요했어. 나는 학도의용대에 있었거든. 얼마나 떳떳해. 내 주변에는 거의 농민들 이었으니 빨치산이나 뭐 전혀 없어. 역사 공부를 옳게 하면 내가 진보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을 앞서 가게 돼.
뭐를 해야 하느냐,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젊을 때 생각을 안 바꾸는 사람들이 있고. 생각은 있는데 행동은 겉으로 내 놓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요. 열렬히 하다가 완전히 우익이 된 사람들도 있고요. 세 번째가 많죠. 내가 대공분실에 잡혀갔는데, “역사학자 아무개와 얼마나 친하냐” 묻더라고. 한두 해 선배라고, 가까이 지낸다고 말했어. 그 선배가 감시대상이라는 거야. 내가 보기엔 완전히 우익으로 돌았는데. 아직도 감시한다는 거야. 대한민국 경찰 참 대단해요. 역사 공부 하는 사람이 진보고 퇴보고 뭐가 있어. 역사 공부 하면 그래돼. 한걸음이라도 앞서 나가야지 나는 좌익 조직에 들어간 일도 없어. 석사 때는 일본 사람들이 해 놓은 잘못한 것 바로잡았고 박사과정에서는 그때 한참 자본주의 맹아론이 많이 나왔을 때였는데 백남운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그렇게 박사 논문 썼고요. 그렇게 일본 사람들이 해 놓은 걸 바로잡고 그 다음은 민족 문제, 분단 문제를 다루게 된 것이죠.
역사가에게 역사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또 역사가로 산다는 것에 대해 후학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역사는 과거라고 말합니다. 지나간 과거를 알아서 뭐해? 미래를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한 과거 공부입니다. 그런데 잘못하면 과거를 아는 것으로만 끝납니다. 앞으로를 잘 되게 하기 위해 지나간 일에서 교훈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옛일을 아는 것은 그것을 바탕으로 앞으로의 삶, 개인의 삶이든 인류의 삶이든 보다 민주적이고 평화적으로 만들기 위해 역사 공부를 합니다. 그래서 역사학자의 책임이 큽니다. 과거에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잘 되었는지 앞으로 더 나은 미래여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지나간 일을 알려고 하는 이유는 닥쳐올 일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예요.
저는 선생님의 자서전을 읽으며 많이 울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며 기본적으로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포기하셨을 것 같아요. 연구와 저서를 통해 다음 세대들에게 길을 제시해 주시고 할과제들을 만들어 주신 것 같아서요. 역사를 공부하는 후학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공부는 미래를 낫게 하기 위해 합니다. 항상 비판의식을 가지고 공부해야 합니다. 쉽게 되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공부해야 새로운 것을 개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만들어야 하니까요. 책 속에서 비판의식을 길러야 하고요. 잘 가려내야겠죠. 나는 책을 다독주의로 생각하지 않고 선택적으로 읽는 것. 비판의식을 갖고 볼 만한 책을 잘 고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나도 그랬던 셈이고요. 내가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중이에요.
역사학자가 제일 마지막에 해야 할 일은 자기 나름대로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쓰는 일입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요. 그래서 그 작업을 마지막 작업으로 해야 한다고 배웠어요. 역사는 이상의 현실화 과정입니다. 고대에서 중세로, 중세에서 근대로, 근대에서 미래로. 가면서 나름대로 인간사회가 가진 이상이 있단 말이야. 조금씩 현실화해 가는 것이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이 선거권을 가진 지 얼마 안되어요. 이상의 현실화라고 할 수 있죠. 인간이 동물과 달리 가진 것이 이상입니다. 조금씩 현실과 해 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화해 가는 과정이 투쟁적일 수도, 봉건적일 수 있으나 인간의 이상은 10세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상과 12~13세기의 사람들이 가진 이상이 달라요.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 계속되는겁니다. 인간의 이상은 계속 높아지고 현실화 하는 것, 그것을 역사학이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인용할 수도 없어요. 온전히 자기의 생각으로 말해야 하거든요. 어렵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하는데, 잘못된 말이에요. 현재와 과거의 대화입니다. 언제가 현재가 중심이어야 합니다. 자기 인상은 자기가 만드는 것입니다. 나는 항상 청년이라는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 모양이 그렇게 안 나와도 생각을 그렇게 갖고 살면 따라간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흐른다. 백두산 위에 떨어진 빗방울이 어디로 흘러가는 그이치를 아느냐”는 시 한 구절이 마치 ‘역사의 진리’ 그것을 말하는 것 같아서 좋아한다. 지형에 따라 한때는 고이기도 하고 또 왼편으로 흐르거나 오른편으로 흐르기도 하지만 모든 강물이 결국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것처럼, 인류의 역사도 독재체제를 만나 정체할 때도 있고 또 때에 따라 좌편향하거나 우편향 할 때도 있지만 결국에는 넓고도 넓은 민주주의의 바다, 평화주의의 바다로 흘러가게 마련이라는생각이다.
-『역사가의 시간』(창비), p.279-
역사서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세상일의 진실을 후인들에게 숨김없이 전하는 일일 것이다. 역사 서술이란 어떤 상황에도, 그리고 어떤 조건에도 구애됨 없이 있었던 사실 그대로를 진실되게 전하는 일일 것이다. 한때 잘못 갔던 길이라 해도 결과가 좋으면 그 길 자체가 마치 옳았던 것처럼 해석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결과와 상관없이 잘못 갔던 길은 잘못 갔던 길 그것으로 분명히 밝혀내는 것이 곧 역사가 추구하는 진실이라 할 것이다.
-『역사가의 시간』(창비), p. 469-
왼편으로, 그리고 오른편으로 흐르는 강물이 평화의 바다에 이를 때까지 진심이 담긴 진실의 강물로 누군가 남긴 말들을 싣고 기꺼이 흘러 온 역사학자 강만길 선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글쓴이가 전할 수 있는 선생의 말은 한 장의 꽃잎을 채우지도 못할 작은 점 하나였으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강만길]
1933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 일제강점 말기와 해방정국을 경험하며 역사 공부에 뜻을 두게되어 고려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원에 다니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일하다 1967년 고려대 사학과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1972년 ‘유신’후 군사정권을 비판하는 각종 논설문을 쓰면서 행동하는 지성인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광주항쟁 직후 항의집회 성명서 작성과 김대중으로부터 학생선동자금을 받았다는 혐의 등으로 한 달 동안 경찰에 유치되었다. 그해 7월 고려대에서 해직되었고, 1983년 4년 만에 복직하여 강단으로 돌아온다. 이후 정년퇴임하는 1999년까지 한국근현대사 연구와 저술 활동을 통해 진보적 민족사학의 발전에 힘을 쏟았으며, 2001년 상지대학교 총장을 맡아 학교 운영 정상화와 학원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다. 김대중 정권부터 노무현 정권까지 약 10년간 통일고문을 역임했고,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위원회 위원장,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광복 6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2007년부터 재단법인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을 설립해 젊은 한국 근현대사 전공자들의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 또한 <청명문화재단>이사장으로서 임창순상을 제정해 민족공동체의 민주적 평화적 발전에 공헌한 사회실천가들의 업적을 기리며 한국학 분야의 연구를 장려하고, 청명평화포럼을 통해 우리 사회의 새로운 지향을 모색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현재 고려대 한국사학과 명예교수이며 대표 저서로는『 조선후기상업자본의 발달』,『 분단시대의 역사인』,
『일제시대 빈민 생활사연구』,『 통일운동시대의 역사인식』,『 고쳐 쓴 한국근대사』,『 고쳐 쓴 한국현대사』,『 한국민족운동사론』『, 20세기 우리 역사』『, 역사는 이상의 현실화 과정이다』『, 역사가의 시간』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