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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r 05. 2018

다시 개벽의 힘, 새로운 대한민국 100년의 꿈

-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회 박남수 대표

취재·글●신채원 | 미디어세림 대표·본지 편집위원 / 사진정찬웅

[개벽신문] 제62호, 2017년 3월호



당신이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걷는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오늘 아침에 처음 만난 바람이, 내가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내가 슬피 울 때 내 어깨에 머물다 간 햇살이 모두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이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저 바다보다 멀리, 저 산보다 오래 너를 사랑하겠다고 말하지 않아도 나는 알 것 같습니다. 


내 곁에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 

당신이니 나에게는 미움조차 사랑입니다.



“이곳 중앙대교당과 탑골공원은 3·1운동의 중심이었습니다. 중앙대교당은 3·1운동의 기본이 되는 곳입니다. 건물 설계를 일본사람이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일본사람이 설계하지 않았으면 허가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인을 시켜서 설계를 했고 현재 대교당의 설계 도면은 한양대 건축과에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 천도교중앙대교당은 천도교의 역사가 아니고 한국의 정치적 집회가 여기서 이루어졌던 민중의 역사입니다.”


신채원 : 반갑습니다. 개벽신문은 잘 받아보고 계시지요?


박남수 : 개벽신문을 늘 흥미롭게 보고 있었어요. 인터뷰는 어떤 분들이 실릴까 기대하기도 했고요. 동학뿐만 아니라 시민운동, 생명평화 운동 이야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더군요. 개벽신문의 취재기사나 청탁원고들을 보면 글을 쓰신 분들이 ‘개벽’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계시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신채원 : 개벽이라는 말은 늘 생각하는 말입니다. 1920년에 창간한 개벽지의 정신을 지금 이 시대의 개벽으로 잘 녹여내야 할텐데 늘 어렵고 조심스럽습니다. 우리가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개벽이라는 말은 무엇일까요?


박남수 : 종교에서 개벽이라는 말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는 누구든지 그 이름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개벽의 의미가 무얼까 생각해보는데, 개벽이 뭘까요. 천도교 안에서의 개벽이라는 말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후천개벽과 다시개벽입니다. 저는 학자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닌데요. 코흘리개 초등학교 4학년 때 묵암 선생님을 만나서 천도교를 알게 되었어요. 무려 70년이 가까워져 오는 이야기입니다.


신채원 :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개벽의 의미와 이시대의 동학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면 아주 오래 전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겠네요. 기대됩니다. 개벽신문의 따뜻한 인터뷰는 긴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매월 개벽신문을 통해 동학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천도교에 대한 깊은 이해의 기회가 없었습니다. 다시 새해를 맞이하며 요즘 시국도 그렇고 3·1운동을 많이 떠올립니다. 전 교령님이시기도 한 선생님께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회에 이야기도 듣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박남수 : 감사합니다. 이 중요한 시기에 적절한 이야기를 해야 할 텐데 여기서 나눈 대화를 잘 정리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새해를 맞이하면 송구영신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올해 정유년은 송구영신이라는 말만으로는 아쉬움이 남는 것 같아요. 올해는 어떻게 보면 작년에 일어난 수많은 일들에 대한 과제를 안고 출발하는 그런 새해가 아닐까 싶습니다. 


과연 우리가 어떻게 새해를 맞이해야할까.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촛불집회가 일어나는 현상을 보고 우리 국민들은 참담하다는 표현도 쓰고 나라가 있느냐는 말도 쓰는데 부정적인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여기서도 개벽이라는 말은 놓고 보면 중요한 화두가 되는 것 같아요.


신채원 :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회 상임대표로 분주하게 보내고 계시던데, 요즘 근황은 어떠신지요?


박남수 : 어느 날 퇴근 길에 누군가 저에게 

‘이제 퇴근하세요? 일흔이 넘으신 분이 아직도 9시에 출근하고 퇴근하세요?’ 

이렇게 묻더군요. 나를 아직도 일을 하는 사람으로 봐 주는 게 참 행복하구나, 노인정에 앉아있거나 한다면 어땠을까 생각하게 되더군요. 우리가 일을 하고 나면 뭐가 생깁니까. 일의 댓가가 생기지 않습니까. 일과 밥은 하나이며 밥이 곧 하늘이라고 하는 말을 생각해 봅니다. 하늘이 뭘까, 생명은 뭘까 하고 복잡한 이야기를 하는데 ‘생명은 밥’이라는 한마디로 설명이 다 됩니다. 밥이라는 말은 우주만유가 다 포함되어 있는 말입니다. 밥이 곧 내 생명입니다. 내가 쉬지 않고 일을 한다는 것은 내 생명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만약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에 태어났다면 나 같은 성격에 틀림없이 이 나라에 있지 않고 만주 땅에 가 있었을 겁니다. 내가 100년 뒤에 태어났기 때문에 3·1운동을 다시 하라는 명을 주지 않았습니까.


신채원 : 2019년이면 3·1운동이 100주년이 됩니다. 가장 지금 말씀하신대로 많은 사람들이 3·1운동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촛불을 들고 나온 시민들, 그리고 광장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박남수 : 3·1운동의 진심이 무엇인지, 기본이 무엇인지, 삼쩜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화두는 셋이 하나가 된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셋이라고 하는 것은 3의 숫자를 놓고 하나, 둘, 셋이 아니고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의 목적을 향하는 것, 그것이 3·1운동이었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겪는 이 상황이 뭡니까. 우리는 함께하기 위해서 무엇을 했나요?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무력통일이 끝내 통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어요. 나당연합국이 백제를 치지 않았다면 또 다른 역사가 있었겠죠. 이번에 촛불집회가 지향한 것을 보면 많은 부분이 3·1운동과 닮아 있더군요. 


첫 번째, 한가지의 꿈, 독립입니다. 모두가 한가지의 목적을 향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대중화입니다. 함께하는 것의 가치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비폭력입니다. 우리는 매주 비폭력 평화 집회를 만들어 내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3·1운동의 세 가지 특징이었어요. 이것이 전 인류에 희망을 주는 위대한 정신이었어요. 국내에서 촛불집회가 일어난 이후에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회 일로 미국과 일본에 갔는데 그곳에서 만난 교민들이 속상해 죽겠다고 말합니다. 한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프다고요.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그 먼 곳에서도 희망을 보았다고 합니다. 해외 언론에서도 비폭력 시위에 대해 주목하고 있더군요. 어떻게 100만이 모이는데 한사람도 잡혀가지 않고, 난동을 부리지 않는가 하고요. 몽둥이를 든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단언컨대 그런 사람이 있었어도 시민들이 말렸을 겁니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그런 성숙한 시민의식을 생각을 갖는 시기가 바로 지금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3·1운동이 시기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채원 : 동학농민혁명부터 일제강점기에 천도교는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민족정신의 큰 물줄기가 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동학정신과 3·1정신으로 이어진 우리의 민족성에 대해서도 하실 말씀이 많으실 것 같은데요.


박남수 : 일본의 논문에서도 확인된 이야기입니다만 일본의 정치가들이나 학자들이 1905년 을사늑약의 명분은 조선은 그대로 놔두면 무너지는 나라이기 때문에 보호해야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렇게 을사보호조약이 한일합방까지 이어졌죠. 조선에는 희망이 없었어요. 그러나 일제가 조선을 점유하고 보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어요. 다 망했는데 망하지 않는 것도 있더라는 거였어요. 바로 천도교와 손병희였어요. 우리가 3·1운동을 이야기할 때 조선이라는 나라가 가진 정신의 위대함을 먼저 이야기합니다. 일본이 우리나라 통치를 할 때 처음에 무단통치를 합니다. 경찰, 헌병 등이 폭력을 가해서 조선의 항복을 받았고 이후로 모든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를 통치하며 빼앗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그들이 하나 빼앗지 못한 것이 있었어요. 바로 조선 사람들의 정신이었어요. 조선을 차지한 일제가 ‘이게 대관절 무엇인가. 영토와 권력을 다 빼앗았는데 왜 정신을 빼앗지 못했을까.’ 가만 보니 그 뒤에 바로 천도교가 있었더라는 겁니다. 천도교가 망국의 종교여야 하는데 아니더라는 겁니다. 나라를 빼앗았지만 조선 사람의 정신을 빼앗지 못한 일제는 그때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꿉니다.


신채원 : 우리나라 최초의 민중집회로 평가되는 보은취회는 그 다음해에 동학민중혁명으로 나아가는 발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혁명이 실패했습니다. 또다시 120년이 지나 광장의 촛불혁명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현실을 어떻게 해쳐나가야 할까요?


박남수 : 내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것이 3·1혁명 100주년에 우리가 가져야 할 교훈입니다. 30만 선열이 피를 흘리면서도 이루지 못했던 동학농민혁명을 거울삼아 3·1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할까요? 


3·1운동의 위대한 정신은 각기 자기 것을 내려놓는 정신입니다. 기독교와 천도교, 불교가 3·1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천도교는 실패한 혁명의 원인을 숙지하고 있었어요. 대중화가 안 되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다른 종교와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당시에 종교가 정치 행동을 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일이었음에도 기독교, 천도교, 불교 종교가 하나로 뭉쳐 큰 뜻을 품었다는 것입니다. 종교마다 각자의 이념이 있었음에도 자기 것을 다 버리고 왔어요. 선천의 시대가 끝나는 지금 우리는 내 것을 내려놓을 자신이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신채원 : 선생님 말씀처럼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지금 이 촛불혁명을 이룬다면 오늘의 혁명은 후에 어떻게 평가될까요?


박남수 : 3·1운동의 위대한 정신은 일원화, 대중화, 비폭력입니다. 이것이 세계 약소민족들의 독립을 가져올 수 있는 기회도 만들었고 동방의 등불이라는 칭호도 받았고 이것이 우리나라 헌법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이렇게 시작합니다. 대통령이 헌법을 한번 읽어 봤으면 좋겠어요. 또 지금 광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한쪽에서는 촛불을 들고 한쪽에서는 태극기를 듭니다. 이 자체가 3·1운동정신이 아닙니다.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 이 혁명이 희망이기도 합니다. 촛불의 욕심이 없거든요. 어린아이도 할아버지도 청년들도 내 것을 내려놓고 광장으로 나오지 않습니까.


신채원 : 선생님께서는 전 교령님이셨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았어요. 타 종교와 화합하시는 모습도 파격적이었고요.


박남수 : 제가 천도교령을 하면서 두 가지의 법을 어겼습니다. 한 가지는 천도교에서 법으로 되어 있는 동학혁명을 제가 교령으로 취임한 첫해 3월에 ‘동학농민혁명’으로 명명했습니다. 두 번째는 동학농민혁명기념일을 3월21일로 되어있는 것을 취소하고 내려놨습니다.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동학혁명은 지금으로부터 124년 전에 일어났습니다. 천도교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이라는 말을 안 썼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천도교인이 아닌 사람들이 농민이라는 말을 넣어서 쓴다고 이분법적으로 나눠 써 왔습니다. 동학이 위대한 혁명이 되려면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을 내려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채원 : 동학농면혁명기념일은 아직도 지정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박남수 : 동학농민혁명기념일은 1년 내내입니다. 기념하는 날이 지역마다 다르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1월 1일이었어요. 그러다 3월 21일로 바뀌었죠. 그 날은 제2세 교조 해월 신사님의 탄신일이었거든요. 그런데 동학농민혁명의 위대한 역사를 아전인수 격으로, 내 해석으로 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제가 교령을 할 때 동학농민혁명 국가 기념일을 재정하기 위한 일을 했었어요. 실질적으로 위원장 역할을 하면서요. 동학농민혁명재단이사장, 동학농민혁명 전국 유족회, 학계 대표가 모여서 결정을 지으려고 했어요. 내가 왜 동학혁명을 동학농민혁명이라고 하자고 했냐면, 그 당시 우리 국민은 모두 농민이었어요. 제가 교령이 된 첫 해에 모든 사업을 공동으로 하기 시작했어요. 공동사업. 국가 예산을 받아서 모든 동학관련 단체들과 공동행사를 하도록 요. 교단에서는 난리가 났죠. 아 교령 하나 잘못 뽑아서 이 난리가 났구나. 교단에서는 그쯤 되면 나를 출교시켜야 하는 겁니다.


모든 것이 하나의 목적을 향하는 것,

그것이 3·1운동이었습니다.

선천의 시대가 끝나는 지금

우리는 내 것을 내려놓을 자신이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신채원 : 교단 내에서도 반발이 심했고, 전국의 지자체에서도 끊임없이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죠?


박남수 : 지역의 군수님들을 찾아가서 만났습니다. 나는 국가기념일이 언제여도 좋은데, 다수가 옳다고 하는 날로 합시다. 하고 설득을 하니 반대하는 분이 없었어요. 심지어 어느 군수님은, 천도교 수장이 이 먼 데까지 오셔서 설득하는 이유가 뭡니까. 하고 묻기도 합니다. 적어도 우리 선조들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혁명을 했고 그 혁명이 보은취회로부터 이 땅에 민중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한 궐기가 동학이었습니다. 만약에 그 선조들이 살아계신다면, 고부사람, 정읍사람, 천도교 사람들이 각각 줄다리기 하는 모습을 보고 과연 뭐라고 할 것 같습니까. 답변할 수 없죠. 제가 문체부에 가서 이야기했어요. 지방자치단체장들과 합의를 이뤘으니 문체부가 결정하면 따르겠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문체부에서 고의적 방해를 하더군요. 그때 장관이 말 자체가 안 통하던 분이었어요, 지금 논란의 중심인 그 문화체육관광부였습니다.


신채원 : 동학농민혁명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였군요.


박남수 : 말하자면 그렇죠.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이 광주 민주화운동까지 갔다고 보는 시각, 우리 민족 정신의 뿌리로 바라보는 그 시각 때문입니다. 나는 호남의 눈으로 볼 수밖에 없었죠. 고(故)김대중 전(前) 대통령도 저를 참 불쌍히 여겼던 것 같아요. 나는 경상도에 태어났지만 동학에 뛰어들어서 전라도에 내가 존경하는 분들이 많아요. 동학혁명과 3·1운동의 위대한 혁명정신을 지역주의가 망가뜨렸어요. 전라도혁명으로 규정지었거든요. 동학이 전라도 정읍에서 일어났나고 하는데, 전국적으로 일어났어요. 제일 먼저 일어난 곳은 충청도였어요. 정신을 이어 나가는 데 지역이 뭐가 중요합니까. 동학이 태어난 곳은 경상도 경주 아닙니까. 동에서 태어나 펼치려다 보니 서로 간 것입니다.


신채원 : 이야기가 조금 무거워지는 것 같아서 조금 돌려볼까 합니다. 종교인으로서의 선생님의 삶도 궁금합니다. 아주 어릴 때 천도교에 입교를 하셨는데, 어떤 계기였나요?


박남수 :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 덕에 우연히 천도교에 입교했습니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께서 방과 후에 어딜 좀 가자고 하시더군요. 담임선생님이 우리 외삼촌 되시는 분이었어요. 그래서 심부름시키시기가 좀 편안하셨나 봐요. 지금 생각해도 눈에 선 합니다. 감이 노랗게 익어갈 가을 무렵 초가집에서의 그 날이요. 마을에 어떤 어른이 오신다고 해서 기다리는데, 그 날이 제가 평생을 모신 선생님을 처음 만난 날입니다. 묵암 신용구 선생님이셨어요. 그 때 저는 ‘아 저런 분이 신선이구나.’ 싶었어요. 어린 저에게도 그런 느낌이 왔어요. 초가집 마루에 앉아 묵암 선생님과 어르신들의 공부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죠.


신채원 : 동학을 공부하는 모임이었나 봐요?


박남수 : 그렇죠. 그날 밤 전국을 순회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때 그런 계기로 오셨을 겁니다. 늦도록 집에 돌아가지 않았어요. 저를 데려가셨던 담임선생님이 제 별명을 부르시면서 “노랭아, 이리 와 봐라.” 해서 갔는데 “너 천도교 해 볼래?” 하시길래 하겠다고 했죠. 무조건 선생님 곁에 있고 싶었어요. 선생님은 의암성사, 춘암상사 이후에 가장 훌륭하신 분이었어요.


처음부터 저에게는 천도교가 신앙이 아니었고 그 선생님 자체가 신앙이었어요. 그때 경상도 지역의 제자만 60만이었어요. 그 가운데에서 어린 아이일 뿐이었던 저에게 입교식을 해 주셨어요. 저 한 사람을요. 참 행운아였어요.


신채원 : 어린 나이에 알게 된 묵암 선생님은 부모님 같은 존재였을 것 같아요.


박남수 :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이후로 묵암 선생님이 순회를 오셨을 때는 학교를 결석했어요. 선생님께서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최초로 문화 훈장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분의 재산이 손가방 하나 외에 없었습니다. 과연 지금까지도 성직자로서 그렇게 청렴결백한 사람이 있었을까 싶습니다. 어릴 적에 선생님의 말씀 한 말씀이 다가왔는데 그중에서도 “야 이놈아,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잘 모른다고, 제일 잘 묻는 놈이 제일 똑똑한 놈이다.” 70년이 다 되도록 나는 그 신념으로 삽니다. 오늘도 내가 만나는 이 세상 모든 분이 나에게는 선생님입니다. 아들도, 동생도 다 선생님입니다. 내가 모르는 것, 필요한 것을 알게 해 주니까요.


신채원 : 연세가 지긋하신 넘으신 선생님께서 어릴 적 이야기를 하시니 재미있습니다. 묵암 선생님 이야기 좀 더 들려주세요.



박남수 : 저는 선생님 자랑을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정말 고생을 많이 하신 분이셨어요. 그 시절에 일제의 말살정책에서 천도교를 지켜 내시느라고요. 탑골공원에 가면 손병희선생님의 동상이 있습니다. 그 동상도 선생님이 세우셨어요. 정읍 황토현에 가면 동학혁명기념탑이 있고 대구 달성공원에 가면 수운최제우 선생의 동상이 있습니다. 청원군 손병희 선생 생가에 탑이 있고요. 교령을 5번을 지내면서 그 일을 다 해내신 분입니다. 종단의 분열, 일제의 탄압은 말로 표현 못했을 일이었을 겁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선생님은 박정희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으셨습니다. 


“한강을 건너올 때 전봉준 장군이 죽창을 구하는 심정으로 단지 호미 대신 총을 들었을 뿐이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이 혁명을 일으킨다.”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혁명 첫 발언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선친이 동학혁명에 참여했거든요. 유심히 살펴보니 선생님이 대단했거든요. 이분이 일제로부터 신구파 분열을 막고 천도교를 지켜왔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훈장을 줬겠죠. 그런데 참으로 이해할 수 없게도 선생님이 친일반민족행위자 안에 들어가 계셨어요.


신채원 :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 거죠?


박남수 : 심지어 그 기록은 천도교의 기록입니다. 일제강점기의 기록 중에 가장 정확한 기록은 천도교의 기록입니다. 2008년에 친일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자 4700명을 선정했는데 놀랍게도 선생님이 그 명단 안에 계셨어요. 천도교 교령이 일제와 타협했다, 그러니 친일파다, 라고요. 제가 투쟁을 해서 그 명단을 추려냈죠. 그런데 선생님의 기록은 삭제가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의신청을 했습니다. 108명이 이의신청을 했는데 단 한사람, 신용구 선생님만 이의신청에 대해 인정했습니다. 


기막힌 대목이 선생님의 업적, 어디도 본인이 스스로 친일한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단지 그 당시 천도교 도령(그 당시는 교령을 도령이라고 했어요.)으로서 서명 하라고 해서 했을 뿐이었으며 친일을 했다고 해서 돈과 권력을 취한 바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그분의 가진 것이 망태기 하나가 다였거든요. ‘모두 국가의 공익을 위한 일이었다. 어디에도 친일파라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 라는 것이었어요.


신채원 : 묵암 신용구 선생님께서 어떤 분이셨을지 상상이 갑니다. 그런데, 연세를 생각해 보면 거의 마지막 제자였겠습니다.


박남수 : 그렇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가장 막둥이 제자입니다. 열세 살에 만나 선생님께 13년간 지도를 받았는데 의아해 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제 나이만 보고 선생님을 잘 모르면서 제자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요. 저에겐 부모님 같은 분이었어요.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몰라요. 


곧 선생님께서 돌아가신지 50주기가 돌아옵니다. 요즘도 가끔 꿈에도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호통을 치십니다. 

“야, 노랭이 이놈아, 세상이 이런데 잠만 자느냐” 하곤 하십니다. 이 나이가 돼서 느끼는 것은 누구에게나 간섭해주고 잔소리를 해주는 멘토가 있어야합니다. 만약에 내가 뭘 몰라서 기자님한테 물었는데, 기자님이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했다면. 그리고 내가 아! 하고 내가 무릎을 쳤다면, 그것이 훌륭한 논문도 아니고 전문지식이 아닐지라도 나에게는 그게 ‘천어’입니다. 저 높은 하늘에서 한울님이 보낸 소리입니다. 내 마음에 울림으로 와 그 소리를 듣는 것이지, 기자님이 하는 말이 내가 알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인데, 한울님이 기자님 입을 통해 나에게 듣게 해 준 겁니다.


신채원 : 그런 평생의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이 계셨다는 것은 선생님의 인생에서 큰 보물과도 같은 가치였을 텐데요, 우리사회의 큰 담론이기도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생명담론까지도 생각하게 합니다.


박남수 : 천도교에서서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는 말을 합니다.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 ‘생명이 생명을 먹는다.’는 말인데, 이것을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약육강식이라고도 하겠죠. 이 말의 참된 의미는 큰 것도 생명이 있고 작은 것도 생명이 있으니 생명이 생명을 먹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늘은 곧 생명입니다. 김지하 선생도 좋아하는 말 이죠. ‘밥 한 그릇의 세상’입니다. 생명이 생명을 먹는다고 한다면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환경운동 하시는 분이 그런 진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이 생명을 먹는다고 하는데, 그 무엇이든 함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신채원 : 사람이 하늘이라는 큰 명제는 지금 이 시대 동학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를 또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박남수 : 천도교 진리가 158년이 되었습니다. 천도교는 158년 동안 수많은 역사를 만들어냈거든요. 다른 종교와 비교해 보면 그 짧은 시간에 경전을 완성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동학을 연구하고 있는데 개벽이 앞으로 이 인류를 살릴 수 있는 중요한 화두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독교의 훌륭한 목사들에게 개신교가 이러이러하니까 좀 고칩시다. 하고 말씀드리면 “아, 종교를 어떻게 고칩니까. 종교는 그 역할을 다 했으니 물러나야 합니다.” 라고 하시더군요. “아버지가 잘못 되었다고 어떻게 아버지를 바꿉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면 자식이 나와야죠.” 그러더니 끝에 가서 “종교가 힘을 잃는 것은 천도교 탓도 있습니다. 천도교가 아들 노릇을 했어야죠. 천도교는 그런 역할과 사명을 가지고 태어나서 제 역할을 못하지 않습니까. 왜 남의 탓을 하십니까.” 하시더군요. 그래서 “죄송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신채원 : 3·1운동이 가진 현대적 의미,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우리는 이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박남수 : 독립선언서를 읽어보면 그 안에 미래가 다 있습니다. 그대로 하면 됩니다. 3·1운동이 뭡니까.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2·8독립선언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지만 동학이 있었기 때문에 펼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혼자 할 수 없고 모두가 함께 또 민족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친 것입니다. 3·1운동100주년이 동시에 성과를 다 낼 수는 없겠죠. 


그러나 바다를 봅시다. 밀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갯벌이 만조에 이릅니다. 온 국민이 3·1운동100주년을 인식한다면 당장에 기념관을 짓고 대대적인 사업을 하는 것을 다 떠나서 3·1운동이 적어도 이 나라의 정신이라면, 이 나라가 다시개벽의 길로 간다면 무엇을 가지고 갈 까요. 다시 개벽이 아니고는 이 세상 자체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신채원 : 새로운 대한민국 100년 여러 가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새로운 대한민국 100년은 어떻게 펼쳐질까요?


박남수 : 대한민국 미래 100년은 선진국을 뛰어 넘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세계1등지도국이 될 것입니다. 꿈이 아닙니다. 서세동점의 지금까지의 시대가 그 역할을 다 했습니다. 기계가, 경제가 사람을 살리는 역할은 다 했습니다. 이제 동세서점의 시대가 옵니다. 예부터 철학가들이 동양에 무엇인가 있다고 했습니다. 일본입니까, 중국입니까, 한국입니까. 바로 여기 있습니다. 한국의 개벽정신에 있습니다.


어둠이 짙게 깔리지 않고는 새로운 빛을 볼 수 없거든요. 대한민국이 이렇게 어두웠던 적이 있었나요?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참담할까 생각하지만, 현재진행형으로 가면 지금보다 더 어려워지겠지만 이 정도에서 다시 개벽이라는 과제를 주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어려움을 만나면 피해가려는 노력을 하는데 세상 진리는 어려움을 피해가라고 준 게 아닙니다. 그 어려움을 통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라고 주는 기회입니다.


신념의 마력이라고 아십니까? 나는 천어를 매일 듣습니다. 궁사멱득(窮思覓得)이라는 말과 격치만물(格致萬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매일 듣고 답을 찾고 있습니다. 믿고 생각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됩니다 이것이 다시 개벽의 힘입니다.


신채원 : 다시 개벽의 힘이 종교의 벽을 넘어서 온 나라와 온 민족에게 깊은 울림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광장에 나갈 때마다 장군님께 죄송하다고 속으로 말했어요. 오늘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제 안에 이순신 장군이, 또 애국선열들의 뜨거운 열망이 피어났음을 깨달았습니다. 어제의 당신이 오늘 우리가 광장으로 나가는 용기를 주지 않았습니까.


박남수 : 얼마나 대견하다고 하시겠습니까. 과거에는 다 목숨을 걸었습니다. 지금은 평화적 희망적인 혁명을 이룰 것입니다.


신채원 : 3·1운동100주년 기념사업회에서 앞두고 있는 올해의 계획에 대해 말씀바랍니다.


박남수 : 3·1운동의 위대한 정신을 어떻게 계승 발전시킬 것인가. 그것이 기본입니다. 그 사업을 하려니 문화사업, 조형물 사업도 필요한 것이고요. 3·1운동100주년 기념사업회 일로 중국과 일본, 미국을 다녀왔고 해외 교민들도 공동대표로 추대했는데 해외 동포사회를 비롯한 국내 각 지역의 3·1운동에 대한 기록을 찾는 것 또한 3·1운동100주년 기념사업회의 큰 과제입니다. 모든 지역에서 3·1운동을 했거든요. 문화홍보사업과 맞물려서 돌아갑니다. 조형물사업은 정부가 쉽게 허락을 안 해주는데 이해는 갑니다.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사업이 이루어지면 천안 독립기념관과 많은 부분에서 겹칩니다. 우리가 만들면 더 많은 전시자료들이 이쪽으로 와야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초가삼간 같은 기념관을 짓고싶습니다. 국민모금을 해서 라도요. 일본에 가면 히비아공원이라는 예사롭지 않은 역사공원이 있습니다. 우리의 탑골공원도 역사공원인데 지금 그 역할을 못하고 있어서 저는 이 사업을 있는 힘을 다해 하려고 합니다. 문체부와 보훈처 등에서 계속 미룬다면 100주년이 아니더라도 조성될 수 있도록 할 것이고요. 그 다음으로 조형물인데, 저는 기념탑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남산 신궁터든 용산의 미군 철수 자리, 서대문 로터리든. 다 의미가 있는 땅입니다. 남산 신궁터는 일제가 점유했던 곳이고, 서대문 형무소는 선열들의 피가 서려있는 곳입니다. 또 용산은 외국 군대가 제일 먼저 들어와 제일 늦게까지 있던 곳입니다. 문화사업 역시 다양하게 계획하고 있습니다. 저는 정부, 이웃종교와 타협하여 하나된 3·1정신을 계승시키는 데 온 힘을 쏟을 계획입니다.


신채원 : 처음에 말씀 드렸던 바와 같이 저는 개벽신문 인터뷰를 진행하며 동학이 꿈꿨던 세상, 이 시대의 동학에 대해 늘 생각합니다. 종교인으로서 개벽신문 독자분들에게 마음을 수련하는 비결을 조언해주신다면 어떤 말씀을 해주실까요?


박남수 : 지금 종교인의 숫자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종교는 아닐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어떤 신앙이든 합니다. 종교가 없어도 제사는 지내지 않습니까. 제사는 유교의 예법입니다. 신앙이 줄어든다는 것 보다는 마음을 다스릴 기회가 줄어드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대성인의 가르침을 지금도 받으니까요. 다시개벽의 종교에 살고 있으니. 나는 배운 것도 없고 천도교 외에는 아는 것이 별로 없어요. 공자도 예수도 잘 몰라요. 그러나 천도교는 알아요. 스승님 말씀이 오늘 이 시간에도 저를 움직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묻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 공중에서 말씀으로 들려주시지 않지만 출근길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으로, 근무 중에 부하직원을 통해, 답을 줍니다. 내 스스로 갈고 수련하는 신앙인으로서 즐거운 삶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가 이기는 것은 지는 것뿐입니다. 지는 것 같지만 절대 아닙니다. 내 선생님은 제게 목계가 되라고 합니다. 나무로 된 닭 말입니다. 상대가 나를 나무인 줄 모르고 공격하다가 지쳐버립니다. 종교인은 참회와 반성을 할 줄 안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입니다. 참회와 반성을 다시 개벽으로 후천개벽과 다시개벽으로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이 개벽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부터 개벽을 이루는 것이 진짜 개벽입니다.


모든 것은 마음속에 있다.

소중하지 않은 생명은 없다고 말했다. 어둠이 짙어야 빛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내가 가진 것을 내려놓는 것만이 하나가 되는 길이라고 말했다.

거룩함을 만날 때면 눈을 감는다. 두 눈으로 다 담을 수 없어서 마음의 눈을 뜨기 위해.

선생을 만나는 동안 그렇게 마음의 눈을 뜨기 위해 수없이 두 눈을 감았다.

실눈을 뜨고 바라본다. 글쓴이에게 다가 온 선생의 삶이 빛을 두르고 날아든다. 다시 두 눈을 감는다.

모든 것은 마음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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