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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r 05. 2018

돌파리 잔소리꾼이 전하는살림의 비결

- 이 시대는 중의보감이 필요할 때

취재·글●신채원 | 미디어세림 대표·본지 편집위원 / 사진 ●정찬웅

[개벽신문] 제63호, 2017년 4월호


다시는 피어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사월, 무엇으로든 피어나야 했던 사월에 그대가 있어서 덜 울었다. 함께 걷던 산길, 물 흐르던 소리로 울음을 대신했다. 내가 속울음을 울고 있을 때, 아프지 않다고 하여도 기어코 아픔을 찾아내는, 그래서 그 슬픈 기억들마저도 피어나고 있음을 눈뜰 때, 우리는 모두 비로소 사월을 앓는다.

꽃은 피어난 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


생명, 밥, 살림, 하늘, 땅을 키워드로 만난 사람들을 만날 때면 꼭 한번 찾아뵈라는 조언을 들어왔다. 여러 해 글쓴이의 마음속에 마치 언젠가 한 번쯤 뵈었던 기억이 있는 분처럼 느껴진 것도 그 이유였을 것이다. 돌팔이 잔소리꾼, 촌놈, 노인, 모두 당신 스스로 지은 별명이다. 10대 때부터 한평생을 나병 환자, 폐결핵 환자, 뇌성마비, 암 환자로 이어져 오는 질병의 역사와 함께 걸어온 선생을 만나 오랜 이야기를 들었다. 


겨울의 끝에서 봄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어느 날 오후였다. 시골교회 목사 임락경 선생과의 만남을 여러분과 함께 나눠 본다. 선생은 당신이 있어야 할 것 같은 자리에서, 당신이 해야 할 것 같은 일을 ‘그냥’ 하면서 살았다. 배우지 않고 배움을 이어 나갔다.



신채원 : 만나 뵙는 분마다 개벽신문 따뜻한 인터뷰에서 목사님을 꼭 만나야 한다고 하셨어요. 오늘은 많은 말씀을 들으러 왔습니다.


임락경 : 인터뷰가 뭐야? 안에서 하니까 인터뷰지. 밖에서 하면 아웃터뷰라니까. 여기까지 왔으니까 내가 이런 저런 얘길 좀 하지. 그동안 인터뷰 많이했을 텐데 훌륭한 사람만 나열하면 지루하니까 대충 나 같은 사람 하나씩 끼워 넣어야 해.


신채원 : 말씀 듣겠습니다. 굉장히 말씀을 재미있게 잘 하신다고 들었어요. 강연도 많이 다니시죠?


임락경 : 나는 학력이 없으니 대안교육의 표본 아닙니까? 대안학교 강연은 안간 데가 없어요. 나는 초등학교밖에 안 나와서 어려운 말을 몰라. 그래서 말을 쉽게 하는 거지. 학교를 왜 안 나왔냐고? 이유가 있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학교와 병원에 돈을 다 갖다 주고는 나중에 포도당 5%짜리 거꾸로 꽂고 죽어요. 나는 학교에 병원에 돈 갖다 주지 말고 유기농 포도를 먹다가 죽자, 이렇게 생각했어. 나는 원래 농부가 꿈이었거든. 그런데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나 같은 인생이 명문대에서 특강 제의도 들어오고 그랬어. 학력도, 돈도, 땅도 없는 나에게 말야. 


그 첫 강의 때, 앞에 서서는 스스로 직접 소개를 했어. “나는 14살에 버스 처음 탔고, 19살에 기차를 처음 탔다. 22살에 서울 구경을 처음 했고, 27살에 바다 구경을 처음 했다. 그리고 서른 살에 공중목욕탕을 처음 가 봤다.” 학생들이 막 박수 치고 웃더라고. “중학교를 안가니까 중학교 다닌 친구들이 놀아주지 않더라. 내 희망은 대학교 다닌 사람하고 머리 맞대고 토론해 보고 싶었다. 오늘 희망이 이루어지는 날이다.” 이렇게 말했더니 많은 박수를 받았어. 그 이후로 다른 대학에서도 많이 부르더라고.


신채원 : 유쾌한 시간이었겠군요. 이 사회는 배움의 전부가 학력으로만 포장되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그런 면에서 겪으신 어려움이나 설움도 크셨을 것 같은데요.


임락경 : 아니, 그렇지 않아. 내가 상지대 교수야. 어떻게 되었냐면, 상지대학교에서 친환경농업과를 설립한다고 하더라고. 무식한 교수들이 친환경 농업을 어떻게 가르치겠냐고 학장한테 말했지. 그랬더니 그 자리에서 교수임용이 됐어. 총장이 교수임용을 하면 된다고 하더라고. 정식으로 임명장 수여식까지 했어. 이걸 가보로 보관하라고 하더라고. 명함도 찍어 줬지. 월급은 안 나오지만 출근한 날은 교수랑 똑같이 대우를 해 줘. 교수 돼서 좋은건 하나 있었어. 내가 비자가 안 나왔었는데 교수 재직증명서를 떼다 주니까 바로 나오더라고. 초등학교 졸업장 하나로 교수 된 사람은 나밖에 없을거야.


신채원 : 선생님께서는 평생을 ‘살림’만 하고 사셨던데요. 실제로 ‘살림’이라는 말이 지금이 시대 생명운동이 나아갈 방향을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아요. 살려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요. 그런 ‘살림’의 절실한 현실들이 눈에 보이셨던 거죠?


임락경 : 질병에도 역사가 있어. 나는 1960년대부터 결핵 환자들과 살았어. 1976년까지. 그 이후로 80년대부터는 해고된 근로자들, 뇌성마비, 정신지체 장애인들이 생겨나더라고. 장애인들이 몰려드니까 집이 모자라서 짓고, 또 짓고 그랬지. 그러다 보니 장애인 복지시설이 되더라고. 정부에서 80년대에 복지시설 신고를 받았어. 시설을 제대로 못 갖춘 곳들이 많았는데 지원을 해 주면서 시설에 대한 요구조건을 갖추라고 하더라고. 그런데 나는 그 돈을 받지 않았어. 지원을 받은 다른 복지시설들은 집을 조금씩 크게 지었지. 기왕 짓는 거 70명인데 100명 수용하겠다고 시설을 지었지. 그렇게 다 짓고 나니까 인원이 모자라. 100명 수용 하기로 했으면 100명을 수용해야 하거든. 안 하면 다 토해내야 하지. 결국 장애인이 모자라게 되는 일이 생기는 거야. 나는 그렇게 될 걸 알았거든. 이후로 어딜가나 노인도 모자라고, 장애인도 모자라기 시작했지. 내가 아픈 사람들하고 살아 온 것은 사명감이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어. 


솔직히 이 일을 하기 싫었어. 그런데 안 할 수 없었어. 집 한 칸, 한 칸 늘려서 살다 보니까 이렇게 된 거야. ‘왜’가 아니야. 그냥 환자가 있으니까 살게 된 거지. 목표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어.


신채원 : 스스로 ‘돌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임락경 : 의사가 아닌 사람이 병을 고치면 되겠냐고. 그래서 내가 방송 같은 델 안 나가는 거야. 그리고 어딜 가면 ‘돌파리’라는 말을 크게 써 달라고 해.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동양 사람이 서양 음식을 먹고 사는 것이 힘들다는 거야. 물론 현대의학을 무시하면 안 돼. 현대인의 수명이 긴 것은 병원이 있기 때문이에요. 내가 경로당에 가 보니까 병원이 없었으면 살아있을 사람이 별로 없더라고. 


그런데, 암환자들은 나를 한 번쯤 다 만났으면 좋겠어. 우리 집에서는 40년을 함께 사는동안 암 환자가 안 나왔거든. 내가 정농회 회장을 5년 동안 했는데 그 안에서도 죽은 사람이 아무도 없어. 비료, 농약 안하고. 내가 먹지 말라는 거 안 먹고. 그러면 암은 안 걸려. 내가 귀농학교를 20년간 했는데 전체 회원이 1,600명이고 교육 이수자는 2만5천 명이야. 본부에서 다 파악하기로 암에 걸려서 등록한 사람은 있어도, 암을 진단받아서 죽은 사람은 없다더라고. 내가 초청을 받아서 하는 것 말고 따로 하는 강연이 있어. 2박 3일씩 하는 ‘건강강좌’라고. 그 강좌를 18년째 하고 있는데 배에 복수 찬 사람을 비롯해서 상태가 안 좋은 사람들이 오거든. 그런 사람들이 나를 만나서 좋아지면 참 많은 용기를 얻지.


암 환자가 안 나오는 비결이 뭘까. 내가 소문내지 말고 죽으라고 말을 해. 그리고 금방 죽을 사람은 접수를 안 받아 버려.(이런 농담들이 선생에겐 참으로 익숙했다.) 아니 그런데, 안 받을 수가 없어. 다들 절실해 보이니까. 하루에도 평균 두세 명씩은 상담 요청이 와요. 암 환자들, 전이된 사람까지도 빨리 나를 만났으면 좋겠어.


돌파리 잔소리로 한 가지 보태서 말하자면, 유럽에는 눈 속에도 풀이 있더라고. 우리나라보다 추워도 풀이 있더라는 거야. 풀이 많으니까 소나 양이 건강하지. 서양 사람들은 고기나 우유를 많이 먹어서 열 체질로 태어나. 우리나라 의술이 유럽에서 미국을 거쳐 오니까 임상실험 같은 것을 백인을 상대로 했겠지. 애초에 열 체질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치료법이었다는 거야. 모든 병의 원인과 치료법이 다르겠지. 체질마다 치료법이 다르다는 거야. 한국 사람이 동의보감에 따라야지 서의보감에 따르고 있더라는 거야. 우리나라 음식의 절반이 서구화돼서 동의보감으로는 못 고칠 거야 이제. 중의보감이 나올 때가 온 거지.


신채원 : 선생님께서 쓰신 책이 중의보감 아닐까요? 책을 보니 한 말씀, 한 말씀이 참 쉽게 읽히더라고요.


임락경 : 그렇지. 그리고 나는 어려운 말을 잘 몰라서 그래. 많이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아픈 사람은 다 똑같아. 많이 배운 사람 하나가 그러더라고. 암에 걸리고 보니까 환갑 넘게 살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존경스럽더라는 거야. 배웠건 못 배웠건, 누구든지 환갑 지나면 존경받아야 하고 칠십 넘으면 경외를 받아야 한다고 그러더라고. 내가 쉰일곱에 늑막으로 쓰러졌는데 그때 든 생각이 환갑 지나면 존경받아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존경을 못 받겠구나 싶더라고. 환갑이 지나니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들었는데 칠십이 넘으니까 훨씬 더 줄

어들어. 아쉽지만 나는 지금 살 만큼 살았어요. 내가 어릴 때 돌이켜 보면 칠십이면 아주 고령이지, 내 아버지가 일흔 일곱에 돌아가셨거든. 그 당시면 오래 사신거야.


신채원 : 처음에 이런 길을 택해서 가시게 된 계기도 궁금합니다.


임락경 : 개천에서는 용이 나올 수가 없어. 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농사를 지으셨으니 우리 집안은 대대로 농사꾼의 집안인 거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논을 다 팔아서 농사를 못 짓게 되었대. 그러니 아버지는 농부였지만 땅이 없었고 농사일이 없었어. 그 당시에 못사는 집에서는 물려줄 농토는 없고 집은 좁고 그러니 자식이 집을 나가주길 바랐지. 나가면 농사꾼은 안 될 테니까. 이발이든 기술이든 나가서 배우길 바랐지. 그때야 뭐 자식이 집을 나가면 나갔나보다 할 때였어. 그렇게 집을 나와서는 동광원엘 갔어.가니까 거기 결핵 환자들이 살고 있더라고. 그래서 아픈 사람들과 살게 된 거야. 내 최초의 스승이셨던 최흥종 목사님을 만나 뵙고 내 인생이 결정된 거지. 


최흥종 목사님은 1880년생이시니 2세기의 역사를 다 들을 수 있었지. 최흥종 목사님은 의병을 살리기 위해 순경이 되신 분이셨어. 많은 의병을 살리셨대. 그러다 그만두시고 나병 환자들과 사셨다 하더라고. 여수요양원을 만드신 분이지. 소록도 한센인촌도 그분이 만드셨어. 내 평생을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그때 스승님을 만났기 때문이야. 나는 초등학교 때 농부가 되겠다고 생각했어. 그때 생각에 내가 앞으로 2만 날을 살 건데 뭘 하고 살까 생각했거든. 농부가 되는 게 가장 가치 있을 것 같았어.


신채원 : 그런데 왜 목사가 되셨어요?


임락경 : 장애인들과 살다 보니까 인가 없이 살면 불법이거든. 5천만 원 이하의 벌금, 5년 이하의 벌금형이야. 새마을운동에 앞장서고 유신체제를 옹호하면 되었겠지만 나는 그렇게 못 했지. 꼼짝없이 걸려 들어가게 생겼더라고. 그런데 그걸 교회에서 하면 된다는 거야. 그래서 목사가 되었어. 학력이 없어서 정규신학 대학은 못 들어갔고. 인가 없는 신학교를 갔어. 그래서 목사들이 나보고 돌파리라고 해. 그럼 나는 이렇게 말하지. ‘이치를 돌파한다. 그래서 돌파리’라고 잘 말하고 다녀. 교회에서 복지 선교 사업을 하면 되거든. 이 일을 하기 위해 목사가

된 거지.


신채원 : 우리는 해방 이후 70년 만에 굉장히 빠른 속도로 성장을 이뤄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죠. 복지는 어떨까요? 장애인들을 돌보면서 살아오셨으니 하실 말씀이 있을 것 같은데요.


임락경 : 우리집에 30명의 장애인이 함께 살았던 적이 있어. 정부에서 돈을 하나도 안 받았지. 예컨대 캐나다에서 장애인이 태어나면 온 가족이 먹고 산다는 거야. 부모가 다 안 벌어도 되거든. 그런데 말이지,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하면 술먹고 도끼로 발등 찍는 사람 한둘이 아닐 거야. 그 말은 아직 우리에겐 빠르다는거야. 내가 환경농업연합회 이사, 감사를 했어. 정농회 전국단위 회장도 했고. 내가 환경 쪽 연합회 회장까지 했다니까.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내가 말이야. 나 어릴 때 양반, 상민이 존재했고 종들은 시집, 장가가는 날 하루만 평민의 ‘행세’를 할 수 있었어.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냐면 유럽에서는 한 가지를 해결하는데 100년씩 걸렸어. 독립 한번 하는 데 100년씩 걸렸다고. 지금의 유럽이 되기까지 700년이 걸렸더라고. 민주화도 엄청 오래 걸렸지. 우리나라는 빨리빨리 민족이라 다른 나라에서 100년씩 걸릴 일을 10년 만에 이뤘더라고. 불과 70년 만에 양반, 상민이 없어진 거지. 그런데 문제가 해결되진 않았어요. 아직 양반과 상민의 차이가 조금은 남아 있고 근검절약이 덜 되어 있다는 뜻이야. 다 되어 있는데 전부70%정도더라고. 30년 후면 다 되지 않을까 싶어요.


신채원 : 차별과 불평등, 이 사회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일에 대한 고통의 무게에 대해서 비장애인들이 바른 인식을 해야 하는 것도 큰 과제일 것 같은데요.


임락경 : 내 10대 때는 폐결핵 환자들과 살았는데 그때는 못살 때니까 결핵 환자들이 그렇게 많더라고. 70년대 이후에 없어졌지요. 결핵은 잘 먹으면 없어지거든. 우리나라가 대략 조선 시대 때는 태어날 때부터 장애인이 없었어. 바보온달이 있지 않았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공주가 바보에게 시집갈 수 있었던 것이 민주주의 아니었을까?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였어. 왕에게는 권리가 없었거든. 누가 사극을 제대로 한 번 썼으면 좋겠어. 우리나라가 유럽보다 민주주의가 먼저였다는 것을. 여성이 왕을 했었잖아. 말의 차이가 있으면 민주주의가 아니

야. 그런 말의 차이를 양반들이 만들었어. 임금이 신하에게 하는 말이 다르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말이 다르고. 신라 표준어를 보면 말이 다르지 않았거든. 외국 사람은 나이를 묻지 않지만 우리는 나이를 알아야 말을 할 수 있잖아. ‘애비야 밥 묵자,’ 하고 말하지.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였다는 거야.


신채원 : 민주화를 이야기하시니까 촛불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네요. 이번 촛불광장, 어떻게 바라보셨나요? 또 이후에 기대하시는 바도 있을 것 같은데요.


강원도 사내면 광덕리에 위치한 시골교회 풍경. 십자가는 없다.


임락경 : 지금 일단 민주화는 충분히 됐다고 생각해. 내가 살면서 해야 할 것 같은 일은 다 했어. 뭐 그렇게 살다 보니까 다 하고 사는 거야. 환경운동 했지, 근검절약 했지, 민주화, 복지 문제 다 연결이 안 되는 곳이 없더라고. 지금도 시국이 이러니까 사방에서 연락이 와. 왜 촛불 들러 안 오냐고, 종교 쪽에서도 그렇고 사방으로 연락이 와.


그런데 말이지, 돌이켜 봅시다. 양반에게 매 맞아 죽은 사람 얼마 안 돼요. 독립운동 하다 죽은 사람도 얼마 안 돼요. 배고파 죽은 사람도 얼마 안 되고, 민주화 운동하다 죽은 사람도 얼마 안 돼요. 그런데, 환경 쪽으로 죽은 사람은 본인도 의사도 몰라요. 하지만 나는 알아요. 다시 말해서, 사방에서 나에게 오라고 하지만 우선권을 정해요. 제안이 왔을 때 내 몸은 환경 쪽으로 가요. 지금 환경운동연합회를 갔더니 다들 70년대 민주화운동 하던 사람들이었어요. 내가 일제 땐 안 태어났지만 그때 태어났으면 상하이에서 만났을 사람들이었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만나는 사람들은 다 그 사람들이었어. 지금도 그래. 어딜 가면 그때 그 사람들을 다 만난다는 거야.

30년 후엔 다 된다고 했잖아. 그런데 30년 후에 내가 없어. 아 100살까지 살면 뭐하겠어. 벌써 초상집 가서 문상객을 보면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아. 내가 영정에 있을 나이더라고.


중국 문헌에 나온 얘긴데, 어떤 나무꾼이 산에 가서 곰을 만났더래. 나무 뒤로 숨었는데 곰이 나무를 껴안으면서 잡힌 거야. 그래서 곰의 발목을 잡았대. 발목을 꼭 잡고 있는데 힘은 점점 빠져. 그걸 놓치면 죽는 거지. 그때 마침 또 다른 나무꾼이 올라오더래. 그래서 같이 곰을 잡자고 했대. 발목을 좀 잡으라고 그럼 자기가 정수리를 내려치겠다고. 그 말을 듣고는 그 사람이 곰의 발목을 잡기에 얼른 도망치면서 다음 사람이오면 이렇게 넘겨주고 가라고 하더라는 거야. 나도 똑같아. 젊은 나무꾼이 오면 넘겨주려고 해.


지금은 암 환자가 갈 데가 없어. 갈 데가 있어도 너무 비싸거든. 특히 돈 없는 사람들은 더 갈 데가 없는 거야. 이제 젊은 사람이 암 환자를 돌봐야 할 때야. 내가 질병의 역사를 말했죠. 조선시대는 태어나서부터 장애인이 없었어요. 나병, 폐결핵, 뇌성마비...지금은 병명 모르는 것들이 나와.


신채원 : 가난이 가난을 부르고, 부가 부를 부르는 불평등의 역사는 불과 어제 오늘 일이 아니죠. 또 이 병든 사회는 갈수록 고통 받는 사람이 많아졌고요.


임락경 : 어느 사회나 계급이 존재했죠. 문관은 무관이 못되었고, 무관은 문관이 못 되었어요. 양반이라는 계급이 생겨나고 평생 종을 부려먹었어요. 그게 좋으니까 어떻게든 그쪽으로 가죠. 사람들이 농사를 짓지 않으니 생산을 못해요. 백성들은 힘쓴 사람에게만 세금을 내는 것이 아니고 머리 쓴 사람한테 세금을 또 내요. 아, 그런데 머리 쓰는 사람이 너무 많아졌거든. 그러다 바다 건너 칼 쓰는 사람이 와서 양반이 조직해 온 그물망을 거머쥐었지. 


우리는 그렇게 홀로 서지 못했지. 독립이 되었어도 자주독립이 안 되었거든. 타주독립이지 뭐야 이게. 조선이 독립되면 과거제도가 살아날 줄 알았지. 그런데 살아나지 않더라는 거야. 살아날 리가 있나. 천민들이 나서

서 과거에 응시 할 수 있게 될 텐데. 과거제도가 살아날 줄 알고 글방, 서당으로 들어간 사람도 있었지. 머리가 빠른 사람은 알았지. 내가 기독교를 하니까 사람들이 왜 서양 교회를 다니느냐고 하더라고. 옛날에는 유교였으니 한문 잘 해야 하고, 일제 땐 일본말 잘해야 출세하지 않았냐고. 그런데 지금은 아니라고 말했지. 너도나도 학교를 가더라는 거야. 천민도 고등고시에 응시할 수 있었으니까. 과거에는 아무리 머리가 빨라도 못했어. 신분의 장벽 때문에. 학교를 너도나도 다니니까 힘쓴 사람이 대접받는 사회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 지금은 글씨를 줄줄 외우는 사람보다 삽질을 빨리 하고 일을 거드는 사람이 대접받는 세상이 오고 있다는 거야.


우리나라, 과거의 조선은 못된 양반 때문에 망했어. 양반이 다 나쁘진 않았지만 그 이전에 삼국은 불교 때문에 망했고, 조선은 유교 때문에 망했다는 거야. 종교라는 게 그래. 우리나라에 종교를 가진 사람들 중에 불교가 많은가, 유교가 많은가, 기독교가 많은가? 통계를 내 보니 우리나라 인구보다 종교인이 더 많아. 불교는 절 크게 짓고 싶어 하고 욕심내는 스님들 있지, 사판승들 때문에 불교가 망했어. 선승들이 불교를 지켰지. 찾아가서 집

터 봐주고, 물자리 봐주고, 장독대 자리 봐주고. 무식한 사람 대필해주고 그런 훌륭한 스님들이 나라를 살린 거야. 물론 어려울 때 쌀독을 내다 두고 없는 사람 가져다 먹으라고 했던 양반들도 있었다고 했어. 유교를 못된 양반들이 탐욕스럽게 지킨 것도 있었지만 망하지 않았거든. 장례식장에 가 봐. 제사상 차리는 사람이 제일 많아. 찬송가 부르는 집, 목탁 두드리는 집보다 더 많지. 유교가 없어지지 않은 이유는 선비들 덕이었어. 집 자리 봐주고, 궁합도 봐주고 그런 일을 해주던 선비들이 있었지. ‘요람에서 무덤까지’가 아니고 ‘궁합부터 묫자리까지’야. 길선비라고 있었어. 양반의 부조리를 벌하고 도술을 쓰는 그런 길선비 이야기 있지. 조선시대에 훌륭한 사람은 양반과 천민을 없앤 사람이었어. 동학에서 그걸 했지. 그런 면에서 동학은 정말 그때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들을 해내려고 한거야.


신채원 : 지금 말씀 하시는 훌륭한 스님들이나 선비의 모습이 선생님의 삶과 겹쳐서 보이기도합니다.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 목사님은 어떻게 살아가셨을까요?


임락경 : 나는 임꺽정의 후손이거든. 천민이었겠지. 내가 어릴 적에 숙제를 하는데 그게 우리 시조가 누군지를 찾는 거였어. 그런데 내 선조들이 백정이라 족보가 없어서 몇 대 손인지도 모른다고 했어. 지금도 임가들을 만나면 족보 못 따져. 항렬이라든지 이런 게 없거든. 선산에 가 봤더니 무덤이 가 무덤이더라고. 백정들이 절에 들어가서 법사가 된 경우도 있었어. 나 어릴 적만 해도 종이 있었거든. 양반과 상놈의 구분을 없애기가 개화기 전에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지. 일제 때 독립운동 한 사람이었겠지. 그런데 말이야, 8.15이후에 우리가 독립이 되었지만 나는 독립 해방소리 안 써. 아직 해방은 안 되었거든. 일제치하에서만 해방되었을 뿐이지.


신채원 : 요즘 일본의 역사수정주의나 소녀상 문제, 독도 문제 아직도 우리는 일제의 잔재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임락경 : 일본에서 학생들이 여기로 수학여행을 오는데, 일본이 잘 살고 한국이 못 사는 이유가 뭐냐고 학생들에게 물었는데, 학생들의 대답이 일본 민족은 근검절약하고 부지런해서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아니라고 말해줬어. 30년간 아시아의 쌀을 다 가져가서 잘 사는 거라고. 흑인이 못사는 이유는 뭐지? 그랬더니 게을러서라고 해. 아니라고 말해줬어. 똑같은 말이야. 일본이 잘 살게 된 이유는 아시아에 있는 쇠붙이를 다 가져갔기 때문이라고. 그것이라도 돌려줬다면 같이 잘살았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고. 우리가 해방이 되고 빈손이 되니 근검절약운동을 했어. 우리는 다시 근검절약 운동을 해야 해. 지금 우리 사회가 어떠냐고? 우리에게 양반, 천민이 없어졌을까? 아직도 있어. 그러면 민주화가 되었나? 민주화가 될 듯하다가 역주행 했지. 우리나라가 70년대엔 참 건강했어. 아마도 단군이래로 70년대처럼 건강할 때가 없었을 거야. 앞으로도 그 시절은 안 돌아올 거고.


신채원 : 종교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장애인 시설 인가 문제로 목사가 되셨다고 하셨는데, 목회 활동이라는 게 꼭 십자가 앞에서만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임락경 : 불교는 어느 나라를 가든 그 나라의 집을 짓고 그 나라 옷을 입고 그 나라 악기를 사용해. 일본도 중국도 마찬가지야. 원래 부처님은 홑이불 하나 두르고 다녔지만 우리나라에 와서 저고리를 입었지. 여기 이렇게 교회를 지어 놓으니 절간 같대. 기독교는 가는 데마다 뾰족한 집을 짓는데 여기 와서 본 사람들은 교회 같지 않다고들 해. 일본에 있는 절에 갔더니 스님들을 못 찾겠어. 스님들이 일본식 정장을 입었더라고. 절에서는 집 한 칸 짓고 예불 드리고 잠도 자고 밥 먹고 교육하고 다 이루어지지. 그런데 기독교는 예배당 따로, 숙소 따로, 식당 따

로. 다 따로 지어야해. 낭비가 따로 없지. 나는 그래서 여기서 예배도 보고 잠도 자고 그래. 전략적으로 얼마나 좋아. 그러고 보면 절에서 배울 게 참 많아. 


어느 목사님한테 들은 이야긴데 무당이 5천년 동안 한 번도 후퇴를 안했대. 불교가 들어오면 그냥 그 안으로 들어가. 애초에 불교에 없는 제사상을 절에 차렸지. 산신각을 짓고 칠성각을 짓고. 절에 가서 정신을 빼앗은 거야. 유교에도 그랬지. 공자 정신과 무당들은 다른데, 유교다, 불교다 하게 놔뒀지. 기독교에도 마찬가지였어. 원래 부처님은 가정도 필요 없고 나라도 필요 없어. 자기완성이거든. 이유가 있어. 더운 나라에서는 가족이 필요 없거든. 흩어져야지. 부처님이 집을 나간 건 참 잘한 거지. 오래 앉아서 수행을 하지, 살생하지 않는 것? 더운 나라에서 고기 잘 안 먹거든. 공자는 가족주의였어. 중국은 한 사람이라도 더 모여야 해. 불을 피워야하니까. 많이 모일수록 유리했겠지.


이제 예수를 보자고. 하나님을 이스라엘에서 독점했지. 그래서 만인의 하나님이라고 해. 그런데 예수가 미국을 가니까 국가주의가 되어 버렸어. 기도하면 복 받는 것. 그게 무속이 점령해 버린 것 아닐까.


신채원 : 말씀을 듣고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가족을 위한 헌신이 종교를 뛰어 넘는 가장 큰 신앙인 것 같아요.


임락경 : 우리나라의 가족 정신, 개인을 희생해서 가족을 살리겠다는 정신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 앞서 있어.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장한 어머니냐. 콩나물 장사하며 동상이 걸려도 자식 대학을 가르치지. 버스 안내양 해서 동생 대학 보냈고. 모든 것이 가족 위주로 다 되어 있었지. 외국 사람은 이해 못했지. 우리는 모든 것을 가족을 위해 희생하거든. 내 가정을 잘 길러내면 부조리가 있어도 어느 정도 알아줬지. 우리는 부모가 없으면, 자녀가 없으면 슬프지. 가족이 모든 것을 책임지니까. 미국이나 일본은 국가관이 먼저야. 그래서 국가가 모든 것을 해 주니까. 영주권이 없으면 슬프지만 나라가 있어서 행복한 거야.


내가 정부보조 없이 이렇게 장애인을 돌보고 산다고 하면 일본에서는 아직도 그걸 이해 못하더라고. 그 인식이라는 것을 일본이나 미국은 나라만 있으면 되지만 우리는 가족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거든. 팔이 안으로 굽는 다는 말은 없어져야해. 가족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이 용서되거든.


최근에 들어서야 우리나라에도 공동체라는 의식의 차이가 조금씩 좁혀져 가고있어.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게 의료비 지원을 하고 있거든. 그게 70%정도 완성되어 간다는 뜻이야. 옛날엔 우리나라 마을 공동체가 참 잘 되어 있었어. 그 마을에서 살면 굶어죽지 않았거든. 결혼식 해주고, 장례도 치러주고 집도 같이 지어줬지. 집터가 없어서 집을 못 짓지 않았고, 산소 자리가 없어서 상을 못 치르는 일이 없었다고. 마을에 누가 병이 나면 놔두지 않았고, 글방에 못 가는 사람들도 글을 가르쳐 줬어. 그렇게 마을 공동체는 참 잘 되어 있었지. 이 마을 저 마을 싸

움이 있어서 그렇지.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서 마을 공동체가 잘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가족 중심이 되어 버렸고 이제는 핵가족화 되었지. 국가관을 초월해야 하는데 가족중심이다 보니 가족 중 누구하나만이라도 잘 되면 그 가정은 살아남더라는 거야. 논 팔아, 땅 팔아, 소 팔아 자식 대학 가르치는 것이 가족중심이 되어간 거지.


신채원 : 마을 공동체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국가관을 뛰어 넘는 공동체의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까요?


임락경 : 국가관이라는 게 그런 거야. 밀림의 추장 이야기를 좀 하죠. 밀림에서는 창을 잘 써야 군주가 돼요. 활도 소용없고 칼도 소용없어. 창을 잘 써서 추장이 되지. 밀림에서는 큰 전쟁도 없거든. 그 촌락만 잘 지키면 되거든. 밀림에서 말을 탈 수도 없으니 활이 무슨 필요가 있겠냐고. 밀림에서 추장이 경제학을 안했어도 얼굴이 반지르르 하면 우리가 사냥해 온 고기를 조금 더 먹었구나, 라는 것을 알겠지. 추장을 뽑을 때 여성들이 뽑는대. 어릴 때부터 추장감을 고른다는 거야. 네 새끼 내 새끼 따질 것 없이. 어느 사회나 계급은 존재하는데, 추장보다 더

높은 계급이 고추장, 더 높은 계급은 초고추장, 그 위에 태양초고추장…(선생은 이런 농담을 중간에 감초처럼 등장시키며 대화를 이어가셨다.)


좁은 나라에서는 칼을 잘 쓰겠지. 나무가 많으면 칼을 못 쓰지만 땀 흘리는 사람이 많아야 잘 사는 사회가 되지. 머리만 쓰는 사람이 많아지면 백성들이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되지. 바다 건너에서 칼 쓰는 사람이 왔지. 와서는 양반 위에 군림을 했지. 그러니 백성들 착취하는 세력들만 있는 거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바람직한 사회는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 대우받는 사회다. 이제 그런 사회가 온다.” 이거야. 머리 쓰는 사람이 많을수록 나라는 어지럽게 되어 있어. 슬프게도 과거에 나라를 위해 힘쓴 사람들은 다들 못 살았어요. 개벽신문에서 오셨으니 생각이 난 일화가 있는데, 내가 여러해 전에 동학농민혁명 하신 분의 후손을 만난 일이 있는데, 그냥 가서 말씀 듣고 담배나 한 보루 사 드리고 왔어. 생각을 해 보니 너무도 당연하게 그분은 그 당시 역적의 자손이었을 거 아냐. 글이라도 한 자 배우길 했겠어요? 그 분들이 좀 배우고 그랬으면 달라졌겠지. 또 우리같이 무식하면 주눅 들어서 말을 잘 못하지. 배운 사람들이 쓰는 단어를 배워야 하니까 더 어려운 거야. 나는 그걸 많이 깨려고 했어. 무식해도 떳떳하게 지식인들하고 맞설 수 있어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걸 못하더라고.


신채원 : 배움이 짧다고 말씀하셨는데, 배우지 않음이 틀에 갇히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목사님께서 주로 하시는 기도가 있을 것 같은데요, 목사님께 성찰과 기도하는 삶이란 어떤 삶인가요?


임락경 : 나는 가능하면 꿈이란 것을 접으려고 해.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를 났는데 한쪽 팔 들어 올리는 데 2천만 원 들어가더래. 나는 팔, 다리를 잘 움직이니까 1억은 벌고 살더라고, 그런 점에서 바라보면 기도라는 게 그래. 강구하지 말고 감사를 해야지.


신채원 : 연세가 일흔이 넘으셨는데 이제 남을 돌보기 보다는 돌봄을 받으셔야 하는 연세가 아닌가 싶습니다. 조심스럽게 여쭙습니다. 선생님께서 선택하신 이 삶이 행복했는지요, 또 이 삶이 선생님께 무엇을 남겼을까요?


임락경 : 뭐를 꼭 남겨야 되는 것은 아니잖어. 난 평생 헌옷만 입겠다고 했어. 그런데 나이 칠십이 되니까 제대로 안 입으면 추하더라고. 그래서 이젠 누가 사주면 입어. 전에는 나를 소개할 때 촌놈이라고 소개를 했는데 이제 노인이 되니까 no人이라고 해. 지금 시설에 갈 노인들이 얼마나 많아. 아 내 나이가 어때서, 노망오기 딱 좋은 나이고 요양원 가기 딱 좋은 나인데. 언제 한번 또 와. 여기 할렐루(교회 뒤편에 마련한 마루)가 전망이 참 좋아.

언젠가 한 번쯤 뵈었던 기억이 있던 것처럼 시작된 대화는 이 날을 시작으로 또 언젠가 한번쯤 이어질 것처럼 끝났다. 아니, 끝난 것이 아니고 책장 속 책갈피처럼 아직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어느 부분에 머무르고 있는지는 다시 펴 보아야 알 터, 꽃소식을 전하러 선생을 찾아 간다. 이미 선생께도 피어났을 꽃소식도 들려주시기를.



임락경 목사

1945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1958년 유등초등학교 졸업했다. 북한강 유기농업 운동연합회 초대회장, 정농회 이사, 화천 친환경 농업인 연합회 초대회장, 사단법인 정농회 회장, 상지대학교 초빙교수, 춘천 친환경 농업인 연합회 고문 등으로 활동하면서 본래 직업인 농사일을 하고 있으며 감리교 교육원과 상주, 대전 등 국내와 해외 교포를 대상으로 여러 국가에서 건강교실을 2000년대 부터 운영하고 있다.

강원도 화천 ‘시골집(교회)’은 계절을 쫓아 벌을 치고 꿀을 따며 콩을 비롯해 갖은 채소와 집짐승을 기르는 농장이요, 시골 간장-된장을 생산하는 공장이면서 몸과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의쉼터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돌파리 잔소리』,『 먹기싫은 음식이 병을 고친다』,『 시골집 이야기』,『 흥부처럼 먹어라 그래야 병 안난다』『. 그 시절 그 노래 그 사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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