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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r 05. 2018

평화의 아리랑이 울려 퍼지는 그날을 꿈꾸며

- 바이올리니스트 원형준, 린덴바움 뮤직 대표

취재·글●신채원 | 미디어세림 대표·본지 편집위원 / 사진●정찬웅 

[개벽신문] 제64호, 2017년 5,6월 합병호


그대의 이름을 부르다가 잠든 날도 있었지. 어떤 날은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눈이 부셨지. 어제처럼 뒤 따라오는 그대의 이름을 차마 지우지도 못했지. 어둠을 걷어내야만 반쯤 눈을 뜨기 시작한, 저기 그대가 보고 있을 낮달이 희미하게 서 있었지. 우리에게 이별은 짧았으나 만남조차 반가울 틈 있었으랴. 그대가 다시 눈뜰 때,

스르륵 잠이 드네.



“2009년에 린덴바움을 만들고 남북오케스트라를 시작했는데 상황이 아주 좋지 않았어요. 금강산 피살사건이 터지면서 남북 관계가 경색되었고, 이어 천안함 사건도 터졌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오케스트라를 해야 한다고 하니 사람들이 많이 물어왔어요. 왜 그것을 하려고 하느냐고요”


◀ 바로 그걸 묻고 싶었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가 왜,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죠. 그 사람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청년들로 이루어진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로 화해와 공존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어요. 누군가 저에게 왜 남북오케스트라를 하려고 하냐고 물었을 때 바렌보임에 대해 이야기했죠. 그런데 바렌 보임이 하니까 저도 하고 싶다는 그 이유가 스스로도 잘 와 닿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저의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실향민이셨던 할아버지께서 평생 고향을, 어머니를 그리워하셨어요. 설에 증조할아버지 묘에 가면 세 잔의 술을 올렸어요. 한 잔은 북에 계신 증조할머니의 술잔이었죠. 저는 어릴 때부터 늘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그것이 특별한 가족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거예요.


◀ 남북오케스트라를 통해 가족사를 되돌아 본 계기가 되기도 했겠군요. 할아버지께서 실향민이셨으니 분단의 아픔에 대해 전해들은 이야기도 많았겠어요.


할아버지는 개성 분이셨어요. 증조할아버지와 함께 전쟁 때 내려오셨다더군요. 증조할머니는 북에서 돌아가셨고요.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어머니를 북에 두고 내려오신 거죠. 할아버지께서 늘 소중히 여겼던 한 켤레의 고무신이 제 가슴 속에도 깊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게 정말로 증조할머니의 고무신이었는지, 아니면 할아버지가 그렇게 여기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저는 태어날 때부터 남북 분단의 아픔을 DNA처럼 물려받은 것만 같아요. 정리하자면, 저 자신이 이산가족이면서 음악가니까, 음악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는 거예요. 제가 가진 바이올린으로요.


◀ 아주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을 하셨던데요, 콩쿨에서도 1등을 휩쓸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유명하셨더군요.


누구에게나 그렇듯 어릴 때의 감성은 평생을 안고 가는 것 같아요. 코리아헤럴드 사장이셨던 할아버지께서 LP판을 많이 사 오신 덕분에 바이올린을 시작하기 전부터 차이코프스키와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알았고, 이 멜로디를 연주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죠. 사실, 바이올린을 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옆집 누나의 연주였어요. 우연히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장면을 보고는 어머니께 저 나무로 된 악기를 사 달라고 했어요. 호기심이었죠. 그렇게 바이올린을 시작했고 우연히 콩쿨에 나가서 1등을 했어요. 그러다 유학도 가게 되었죠.


◀ 줄리어드 음대에 진학할 정도면 주위의 기대도 컸을 테고 스스로도 큰 꿈을 품고 성장했을 것 같은데요, 어떤 연주자가 되고 싶었나요?


저 같은 경우 학생 때부터 목표의식이 강했어요. 어떤 콩쿨에 서고, 어떤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는 것, 남들에게 주목받고 갈채를 받는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러다가 남북오케스트라 하면서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나는 이것을 왜 하는 것일까. 그러다가 앞서 말씀드린 가족사를 깊이 알게 된 거죠. 


◀ 운명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남북오케스트라 공연이 남북 통일로 이뤄지기를 기대하기에는 조금 먼 길일 거라는 우려도 있었을 텐데요. 


한반도 평화와 남북 통일 전에 음악을 통한 하모니가 실현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하면서 음악의 가치를 떠올렸어요. 예를 들어 오케스트라는 수많은 악기가 모인 조직이죠. 다른 음의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모여 하모니를 이뤄내는 조직입니다. 다른 소리를 내는 수많은 악기가 하모니를 이뤄내는 그것 자체가 미라클, 기적입니다.

우리의 이야기로 바꿔보면 남북 간 소통이 안 되는 것에 대해 언어가 다른 주변 국가들 어디에서든 한반도 평화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평화가 무엇일까요? 소통의 문제 아닐까요? 오케스트라에서는 바로 그 평화가 이루어지고 있더라는 겁니다.


◀ 평화를 음악으로, 음악을 평화로 이야기한다는 말씀이군요. 그게 하모니라는 것이고요.


그 첫 번째 단계가 튜닝입니다. 연주자들은 연주하기 전에 오보에의 A 소리에 맞춰서 각자의 악기를 튜닝합니다. 옆 파트에서 뭘 하는지 들어야합니다. 그래야 하모니가 되죠. 음악가들이 하고 있는 하모니의 가치가 바로 거기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그냥 연주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게 바로 평화입니다. 이것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 유학 생활은 어땠나요? 그 어린 나이에 낯선 미국에 가 보니 어떻던가요? 한국에서 자라 온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미국에서 자란 셈인데요. 가족들과 떨어져 지낸다는 게 얼마나 낯설고 겁이 났을까요.


저희 어머니가 어떤 분이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어요. 미국으로 처음 유학을 갔을 때, 맨하탄에 있는 호텔에 열 세 살이었던 저를 혼자 두고 그 다음날 한국으로 가셨어요. 한인 타운에 감미옥이라는 설렁탕집이 있던 스탠포드 호텔에 있었는데, 이틀간 설렁탕만 먹으면서 누군가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렸죠. 어머니께서 저를 가르칠 선생님께 부탁을 하고 가신 거예요. 그 분이 지금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악장인 데이비드 킴입니다. 데이비드 킴은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쿨에 입상해서 그 당시 한국에선 스타였어요. 그 분이 이틀 뒤에 저를 보러 오셨어요. 당시 스물여섯 살의 데이비드 킴은 저를 그냥 보러 왔다가, 애가 혼자 있는 것을 보고 집으로 데리고 갔어요. 미국에서는 어린이가 혼자 있으면 큰일 나거든요. 우리어머니는 그걸 모르셨던 거죠. 그렇게 제가 브루클린에 있던 그 분의 신혼집에서 한 달간 같이 살았어요. 가끔 어머니와 그때 이야기를 하면 그만큼 널 믿었다는 거다. 이렇게 말씀하시죠.


◀ 열세 살에 혼자 남겨진 소년이 이후에 어떻게 성장했을지 궁금해지네요. 스스로를 굳건히 다져왔을 것 같아요. 외롭기도 했겠지요. 그런데, 미국에서 한국에 돌아오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제게 바이올린을 하면서 두 번의 큰 위기가 왔는데, 첫 번째가 98년도에 겪었던 IMF 였어요. 많은 유학생들이 휴학을 했어요. 환율이 2배가 되니까 견딜 수가 없는 거죠. 저도 예외는 아니었죠. 갑자기 휴학을 하고 그때 방황을 했죠. 돈이 없으면 음악도 못하는 거구나, 그 생각이 들면서 그때 사춘기가 온 거죠. 돈이 없으면 음악도 못하는데, 이 사회에 음악이 무슨 필요가 있나, 의사, 엔지니어가 필요하지 음악이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만 들었죠.


◀ 많은 예술가들이 겪었던 현실적인 벽에 맞닥뜨리는 순간이었겠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포기하지는 않으셨나 봐요. 


결정적인 순간이 또 한 번 왔죠. 군대에 가서 두 번째 방황을 합니다. 제가 그 오랜 시간 유학생활을 하다가 한국에 돌아와서 군대에 갑니다. 그것도 현역을 갑니다. 서른 살에요. 현실적으로, 물리적으로 연주를 할 수 없었으니 더욱 돌이킬 수 없게 되었죠. 그때 저는 음악을 못하게 되는 것으로 알았어요. 설상가상으로

훈련 받다가 어깨 연골 부상을 입어요. 그 후유증으로 지금도 한쪽 어깨가 올라가질 않아요. 그때 의병제대를 합니다. 수술하고요. 군대에 있을 때 연주를 할 수 없었고, 다쳐서 수술을 하고, 제 심경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죠.


◀ 하마터면 다시는 악기를 잡을 수 없을 뻔 했네요. 지금 연주는 가능한가요?


재활치료를 받고 다시 악기를 잡을 수 있었죠. 남북오케스트라를 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득해야 했는데, 어느 분이 열 마디 말보다 차라리 연주를 하라고 하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듣고 연주를 했는데, 연주를 들은 사람이 ‘저 사람 말뿐이 아니라 진짜로 음악을 하는 사람이었네’ 하고 새롭게 봐 주시더군요.


◀ 대한민국에서 청년 예술가의 꿈을 가로막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역시나 그때도 큰 장벽이었군요. 그래도 그런 과정들을 극복하셨으니까 여전히 음악도 하고 계시고 더 큰 꿈도 펼치고 계신것 같습니다. 남북오케스트라를 처음 시작하게 된 과정도 말씀해주세요.


두 번의 방황, 그리고 좌절 끝에 ‘린덴바움 뮤직’이라는 회사를 만들었어요. 일본 삿포로에서 열리는 퍼시픽 뮤직페스티벌을 다녀와서 새로운 도전에 대해,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어요. 퍼시픽 뮤직페스티벌은 젊은 연주자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세계 27개국에서 젊은 연주자를 선발해 연습도 하고 연주투어도 합니다. 그래서 저도 ‘린덴바움 페스티벌’을 만들었고 2009년 린덴바움 첫 페스티벌에 영국 로열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 샤를 뒤투아를 초빙했어요. 그리고 2010년 두 번째 페스티벌에서 북한에 남북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제안했죠. 


그때, 지휘자께서 “Excellent! I Will Do Everything with my power”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온 힘을 다해 저를 돕겠다고요. 그러면서 작곡가 윤이상 선생님 이야기를 하셨어요. 윤이상 선생님과 친분이 있었고, 평양에 2번이나 다녀오셨다고요. 페스티발 하면서 주한 스위스 대사, 벨기에 대사 등 많은 분들을 만났고 스위스

대사가 평양에 가서 이야기를 하겠다고 했어요. 그렇게 일이 잘 진행되는 듯 했어요.


◀ 그런데, 안타깝게도 잘 안 되었죠?


그때가 금강산 피살사건 뒤였거든요. 북측에서 남한 정부에서 허가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더군요. 그 이후엔 닥치는 대로 사람을 만났어요. 그런데 어딜 가도 협조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어요. 2010년 두 번째 린덴바움 페스티발 때 협연자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였어요. 말씀드렸더니 좋아하시더군요. 납치당할 뻔한 이야기도 해 주시면서요. 방송에서도 찍었어요. 그 이후에, 2011년 2월이었어요. 미국에서 연락이 왔어요. 유엔 북한대표부를 통해 평양공연을 허가 한다는 연락이었어요. 북측에서 샤를뒤투아 지휘자와 함께 초대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일주일 만에 초청장이 왔는데, 통일부 관계자가 저를 만나주지 않았어요. 북에 가려면 허가가 필요했거든요. 그 이후로도 계속 시도를 했죠.


◀ 참 어렵고도 먼 길입니다. 그냥 연주를 하자는 거잖아요? 이 아름다운 음악을 함께 연주한다면, 함께 듣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맞습니다. 저는 음악으로 소통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말보다도요. 저는 어디를 가든 남북오케스트라를 이야기할 때 바이올린 연주를 합니다. 제가 음악을 통해 양국 오케스트라를 구성하고 평화와 통일에 어떤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또 이것을 함으로써 한반도 평화와 남북통일을 이뤄갈 수 있다고 말 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음악을 통해 하려고 하는 것.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2009년부터 북쪽에 메시지를 전달했어요.


2015년 광복 70주년 평화음악회, 8월 13일 독립문 연주


◀ 여러 가지 시도들을 많이 하셨더군요. 함께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데 70년의 세월로도 부족하다는 것이 참 슬픈 일이네요.


교류는 남북의 정부가 승인을 해 줘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2011년은 평양에서 하려고 했는데 못했고 2013년에는 중립국인 스위스에서 하려다가 안 됐어요. 2014년에는 독일이 통일한 지 25주년이 되던 해였고 독일에서하려고 했는데 그때도 못했어요. 한반도에서도, 중립국에서도, 통일을 이룬 독일에서도 안 되었어요. 


그러다가 2015년 광복70주년 때였어요. 그때 북측은 합창단을 구성하고 우리는 오케스트라를 구성해서 중간에서 만나자,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만나자. 거기서 연주를 하자고 했어요. 2015년 8.15때 판문점에서 아리랑을 부르자고요. 그런데, 결론적으로 못 들어갔어요. 8월 4일 목함지뢰 사건이 터졌거든요. 남북관계는 긴장으로 치달으며 약속한 날짜는 다가왔어요. 우리는 독립문에서 1차 공원을 했고 단원들과 버스를 타고 판문점으로 향했어요. 통일대교 앞에서 2시간을 기다리는데, 우리가 70년 전에 독립을 했던 그날이잖아요. 우리가 광복을 찾았던 그날엔 위아래가 없던 조선이었을 텐데, 이 생각이 들더군요.


‘위아래가 없었던 조선’이라는 말씀에 우리 민족이 겪었던 아픔의 세월이 마치 어제 겪은 일처럼 전해져오는 것을 느낍니다. 


70년이 지난 2015년 8월 15일, 대한민국 국민이 왜 우리나라 영토에 못 들어가나. 상식적인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다 나온 생각이 아, 우리가 70년 전에 광복을 우리의 손으로 못했구나. 수많은 분들이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일제로부터 광복을 우리 손으로 못 이뤄냈기 때문에 우리는 분단의 비극을 마주하고있는 겁니다. 저는 이 남북오케스트라를 이루려는 시도를 8년이 지나 9년째 하고 있지만 추진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역사를 알아가고 있어요. 


2015년 광복 70주년 평화음악회, 민통선 석장리 미술관 연주


◀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고 수십 년을 불러왔음에도 통일이라는 말 자체가 현실적으로 와 닿지 않는 것도 큰 장벽입니다.


“통일은 대박입니다.” 라는 말부터 시작해서, 통일 이야기 많이 들 했죠. 정치인이든 일반인이든 통일보다도 먼저 분단을 말해야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분단이 되었는지 알아야 해요. 우리가 독일을 예로 들어 말하지만, 그들은 동서 전쟁이 없었어요. 그러나 우리에겐 남북 전쟁이 있었잖아요. 우리는 통일을 말하기 전에 분단을 말해야하고 그 전에 전쟁을 말해야하고 그 전에 일제침략을 말해야 해요. 그 말을 다 하고 공감을 얻어야 통일을 말할 수 있어요. 저는 그 시점에서 음악을 통해 통일을 이루려는 하모니의 진정한 가치를 보여주고 싶은 거고요.


◀ 통일이전에 분단, 분단 이전에 전쟁, 전쟁 이전에 일제강점기를 말해야 한다는 말씀 듣고 보니 우리가 감당해야 할 통일에 대한 무게가 조금 명료해지는 것도 같습니다. 또 풀어내지 못한 민족의 아픔이 조금도 아물지 않은 것 같아 슬퍼지기도 하고요.


한일 관계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들의 인권이 유린되고 학살된 사건들에 대해 충분히 공감되어야 충분한 사과를 받고, 그랬을 때 통일을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서로 간의 입장에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제 침략, 6.25, 분단을 통해 한민족이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는 통일이 될 수 없어요. 


◀ 다시 남북오케스트라 이야길 하죠. 공연이 허가가 안 된다고 했을 때, 조금만 더 가면 만날 수 있는데, 2시간만 기다리면 만날 수 있는데, 여기서 지금 연주를 하면 저기서 들을 것 같은데, 이런 생각 들었을 것 같아요. 어떠셨어요?


허탈했어요. 그때 판문점에 못 들어가게 돼서 차선으로 민통선에 있는 석장리 미술관을 선택해서 그 쪽으로 향했어요. 아이러니하게도 그 장소는 과거에 대북 확성기가 있던 곳이었어요. 거기서 아리랑을 연주했죠. 우리가 공동경비구역까지 가지 못했고, 북측에서 내려온 사람들과 연주를 못했어요. 북한에서는 왔거든요. 통일부에서 확인해줬어요.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가 아리랑을 연주하는 걸 들었겠구나, 하고 위안을 얻었어요.


◀ 남과 북의 동포들이 함께 만나서 노래 한 곡 부르는 것조차, 그것을 꿈꿔야만 하는 나라에 사는 우리는 아직 갈 길이 너무도 멀다는 생각을 합니다. 


남과 북이 만나서 무엇인가 함께 한다는 것은 기존의 것과는 다른 시도가 필요해요. 개벽이라는 말과 비슷해요. 저는 우리가 그 룰을 깨야한다고 봐요. 룰을 깨는 것을 어떻게 보면 잘못하고 있는 것, 규칙을 어긴다고 생각하는 게 있는데 사실 그게 아니거든요. 어떻게 보면 일제침략과 70년이 넘는 정전상태에 있는 우리의 아픔을 치유하는 시도를 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늘 실패하고 좌절할 때마다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일어서는 이야기를 하고 계신데, 과정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 같아요. 


저에게 왜 통일을 해야 하냐고 묻는 사람들도 많아요. 저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우리에게 통일은 ‘어떻게’가 중요한 것 같아요. 그것이 전 세계에 희망을 보여줄 수 있을 테니까요. 언젠가는 오겠죠. 통일에 대한 굉장히 많은 시나리오가 있겠죠. 그리고 그것이 결국 역사에 기록이 되지 않겠습니까. 한반도의 통일 문제에 대해 결국은 이 문제를 평화적으로 매듭지었을 때 우리가 희망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 외람된 질문입니다만, 오랜 유학생활 하시고 한국에 돌아와서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많이 겪으셨을 것 같아요.


나이 서른에 군대를 갔고 첫 조직생활을 하게 되었어요. 나이도 많았고 유학도 다녀온 제가 화제가 되었어요. 나이가 많아서 삼촌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죠. 그런데 군 생활이 참 낯설었어요. 예를 들어 제가 청소를 참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누가 나를 불러요. “삼촌, 상병도 면장갑 끼고 낙엽만 줍고 있어요. 빗자루는 병장만 들 수 있는 거예요.” 그들 사이에 그런 약속이 다 있는 거예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군 생활이 큰 도움이 됐더군요. 이 일을 할 때마다 만나는 군 관계자들이 저에게 물으시더군요. ‘자네 군대는 갔다 왔나?’ 클래식연주자들이 콩쿨 1등하면 면제받기도 하고, 미국 국적인 사람들도 더러 있거든요. 그런데 제가 “몇 사단 어느 부대 나왔습니다.” 말하면 깜짝 놀라시더군요. 그런 부분들이 긍정적인 결과로 끌어준 것 같기도 합니다.


◀ 이쯤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이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왜 판문점이었나요?


판문점이 마이클잭슨의 버킷리스트였어요. 故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때 왔었죠. 1953년 정전협정 이후로 누구도 거기서 연주를 한 적이 없어요. 전세계 단 하나밖에 없는 곳이잖아요. 우리나라 주권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에요. 그걸 아는 사람이 드물어요. 저는 거기서 평화음악회가 열려야한다고 생각해요. 누가 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끊임없이 시도해야죠. 정주영회장의 어록 있죠. “이봐, 해 봤어?” 그분들은 그런 사고방식을 가졌기 때문에 조선소도 만들고 자동차도 만든 것 아닐까요. 마이클잭슨이라는 유명한 팝가수는 거기서 공연을 하고 싶었는데

못했어요. 그런데, 그 누군가는 하지 않겠습니까. 저 역시 한 번에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계속 시도를 하면 기회가 오지 않을까요? 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니까요.


◀ 이 이야기로 다큐멘터리도 찍었죠?


지금 제작중입니다. 2015년 광복70주년 때 평화음악회를 하려고 했을 때 미국의 다큐멘터리 팀이 찍고 싶다고 해서 그 모든 과정을 찍었어요. 오케스트라 연주, 독립문에서 연주하고 대화하는 것, 싸우는 것, 통일대교에서 기다리는 것, 석장리에서 연주하는 것, 실패한 다음날이 8월 16일, 일요일이었어요. 교회에 가서 접시 400개를 닦는 장면까지요. 음악회에 실패해서 실망하고 주저앉는 게 아니라 접시를 닦았거든요. 저는 실망하지 않아요. 다 과정이잖아요.


◀ 강연하시는 장면, 인터뷰하시는 장면들 유튜브에서 영상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말씀도 굉장히 잘 하시는 것 같아요. 음악을 안했다면 무슨 일을 했을까요?


누군가 저에게 그 정신으로 영업을 하면 잘 할 것 같다고 하더군요. 누군가를 설득하는 일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것 같다고 들 하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았어요. 만화를 보다보면 전투기 뒤에 엔진에서 불이 나오잖아요. 종이비행기에 불을 붙이면 더 잘 날아갈 것 같았어요. 종이비행기를 접어서 뒤에 불을 붙여서 창문으로 날렸는데 집에 불이 났어요. 소방차가 오고 난리가 났죠. 호기심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어요. 기자님이 보시기에 음악을 안했다면 뭘 했을 것 같아요? 저는 기자가 되었어도 잘 했을 것 같은데.


◀ 그보다도… 배우가 됐을 것 같아요. 유랑극단있죠. 천막치고 다니면서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닌, 그런 유랑극단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지만, 나쁘지 않은데요? 제가 어떤 음악가가 되고 싶으냐고 물으면 이런 말을 합니다. 장이 열리는 시골장터에서 바이올린을 보신 적도, 클래식을 들어 본 적도 없는 분들 앞에서 연주를 했을 때, 그분들이 그냥 그 자리에서 제 연주를 들어주는 거예요. 그런 내공을 가진 음악가가 되고 싶었어요. 또 지금까지 상상만 해 왔는데, 북에서 김정은을 만났을 때, 남북 오케스트라를 왜 하려고 하냐고 물으면, 그냥 제 연주를 보여주는 거예요.


◀ 음악이라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울림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기적과도 같은 거겠죠.


음악을 통해 남북을 화합하고 싶은 것이 화두였어요. 재작년에 프로젝트를 하면서 뉴욕타임즈에 소개되었어요. 한국의 바이올리니스트가 판문점에서 연주를 한다고요. 얼마나 임팩트가 컸던지 세계10대뉴스에 들어갔어요.

하버드 초청 강연 전날 질문지를 받았는데, 마지막 질문이 ‘그래서 우리 하버드가 당신을 어떻게 도와주면 좋을까’라는 질문이 있더군요. 밤새도록 고민을 많이 하다가 솔직하게 말했어요. “오바마, 빌게이츠, 페이스북 창업자 등 많은 유명한 사람들이 하버드 출신이더라. 너희 선배들이 나를 도울 수 있도록 말을 좀 전해 달라.” 하고 말했어요. 내가 생각해 낸 가장 솔직한 답이었어요. 끝나고 나서 몇몇 학생들이 저에게 와서 하는 말이, “그걸 왜 그들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우리도 할 수 있는데.” 라고 하더군요. 


모든 일에는 진정성이 중요한 것 같아요. 하버드 학생들이 움직여준 이유도 솔직함이었어요. 자존심 상했지만 솔직했어요. 그래서 마음이 움직였던 것 같아요.


◀ 모두가 Impossible 이라고 말할 때, Why not? 이라고 했어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런 용기를 내실 건가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질문이네요. 바렌보임은 하고 있는데, 우리는 왜 못하고 있을까요? 거긴 사람이 죽어가고 있어요. 우린 그런 환경이 아닌데도 못하고 있어요. 저는 몇 년 전에 군함도에서 연주를 하고 나서 희망을 봤어요. 군함도에 갔는데 그 아픈 역사의 현장에서 아리랑을 연주했어요. 우리가 분단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분단을 말해야하는 거죠. 제가 실패를 하면 할수록 스스로 묻죠. 왜 이것을 하는가. 도전하고 깨지면서 본질적으로 접근하고 스스로 질문하고 깨닫고. 더 커지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확신이 생기고요. 아직 성공한 것은 아니니까.


◀ 성공이 뭘까요? 평양에 가는 것? 판문점에 가는 것? 그게 의미가 있을까요. 지금 하고 있잖아요. 평양에 가지 못했다고, 판문점에 못 갔다고 실패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의미 있는 질문인지는 모르겠는데, 원형준의 버킷리스트는? 평양이나 판문점만은 아닌 것 같아요.


저는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평범하게 산다는 것이 그냥 가족이랑 집에서 밥 먹고 가끔 여행가고요. 이 일을 하면서 가정에도 집중 못했고, 외국도 많이 나갔고 위험한 일을 하니까 걱정도 많이 하게했고요. 요즘에는 어떻게 보면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굉장히 행복한 거라는 것을 느껴요. 어느 순간에 그것이 행복하다는 것. 연주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그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었다. 당장 남북통일이 가까워졌다고 말할 수 없지만 누군가는 지금 또다른 원형준을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남과 북이 만나 아리랑을 부르는 순간을 상상한다. 아니,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아리랑을 부르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분단의 아픔에서 희망을 노래할 수 있지 않을까? 오보에가 내는 A음에 귀 기울여서 각자의 소리를 맞추듯이 그렇게 통일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어느 봄날 오후 브람스 이야기로 시작된 인터뷰는 아리랑으로 끝이 났다. 그대의 이름이 너무도 길어 이름 대신 아리랑을 부른다. 그의 손끝에서 울려 퍼져나갈 아리랑은 70년째 튜닝을 기다리는 순간에 멈춰져 있다. 평화의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는 그날을 기다리며.



바이올리니스트 원형준

1976년생. 예원학교, 줄리어드 예비학교, 줄리어드 음대, Tibo Varga 아카데미 수학, 한국일보 콩쿠르 1등, 경향이화콩쿠르 1등, 킹스빌 국제 콩쿠르 1등, 10세 때 서울시향과 협연, 홍콩판 아시아오케스트라, KBS교향악단, 메서피쿠아 필하모닉, 줄리어드 오케스트라등과 협연

동서독 통일 주제로 다보스 세계경제포럼 초청 연주, 뉴욕인권네트워크, 파리정치대학 TEDx 초청, 영국 옥스퍼드 유니온, 프린스톤 대학 컨퍼런스, 하버드 대학 Kirkland House, 죠지타운 대학, 사라큐스 대학, 제네바국제대학원에서 ‘음악을 통한 한반도 하모니’ 특강, 린덴바움 페스티벌, 유로아시아페스티벌, 광복70년 판문점 평화 음악회, 현재 린덴바움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하버드 대학 Kirkland House 명예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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