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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r 05. 2018

풀뿌리 시민운동,하나가 되기 위해

AOK 정연진 대표

취재·글●신 채 원 | 미디어세림 대표·본지 편집위원 / 사진●정 찬 웅

[개벽신문] 제65호, 2017년 4월호


단 한번이었습니다. 그 순간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이라는 말이 슬픔뿐이었다면 세상에 그 많은 약속들은 존재하기나 하겠습니까. 나는 바보처럼 당신이 온다던 그 계절에, 바위처럼 앉아 당신의 마지막을 기억합니다. 내가 지킬 수 있는 가장 익숙한 약속, 당신이라는 그리움. 나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돌아오고 있을 당신.



1년만이었다. 작년 여름, 대학로 학림에서 만나 차를 한 잔 했고 이따금 메신저로 소식을 묻기도 했다. 다시 만났을 때는 계절이 4번 바뀌어 다시 그 자리라는 것 외에는 변함이 없었다.


별다른 계획을 세우지 않고 한국에 왔는데, 자꾸 일정이 생겼다. 대선일정에 맞춰 들어와 투표도 했다. 새로운 세상을 꿈꿔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연진 대표를 만나 새로운 세상, 새로운 통일운동에 대해 이야기했다.


◀ 평화협정체결만이 한반도를 넘어 세계평화로 가는 길 


글쓴이와 만난 날은 광화문 광장에서 ‘한미정상회담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출발점으로’ 가기를 염원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그녀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을 작성했다. 앞서 6월 24일에는 제주 강정에서 출발한 평화마라톤대회도 시청광장에 도착했다. 제주 강정에서 서울시청까지 19일간 663Km를 달려온 것이다.

정연진 대표가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는 평화협정행동연대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의 내용은 ‘평화를 위한 대화’가 주를 이루었다. 북한의 정상과 만나 햄버거 먹으며 대화하겠다고 했던 공약을 지켜달라고.


◀ 왜 미국으로 떠났을까


사람들은 그녀가 왜 통일운동을 하는지에 대해 궁금해 한다. 글쓴이는 조금 더 먼 이야기부터 물어야 했다. 왜, 미국으로 떠났는지.

81학번이었던 그녀의 스무 살 캠퍼스는 무엇도 꿈꿀 수 없는 어둠이었다. ‘80년 광주’ 이후 학생운동은 더없이 비장했고 시위는 일상이 되었고 학생회관도 폐쇄되었으며 최루탄 냄새로 가득했던 캠퍼스였다.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다니던 그녀는 그렇게 미국 유학을 선택했다.


“운동하던 학생들은 오로지 운동만 했고, 공부하던 학생들은 도서관에 줄을 서서 5분이라도 일찍 들어가려고 했어요. 그 와중에 놀기 좋아하던 학생들은 다 고고장에 가 있고 그랬죠. 나는 이것저것 다 하려고 하다보니까 놀아주질 않는거야. 외로웠어요. 그래서 그냥 미련 없이 떠났어요.”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먼 길을 떠나는 이십대의 그녀를 상상했다. 두려웠을까, 설레었을까.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그녀는 꿈을 이뤘을까?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할까?

글쓴이는 더 오랜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 사람들은 왜 내 생일에 태극기를 흔들어주지?


첫 아이를 사산한 어머니는 그녀를 뱃속에서부터 애지중지 귀하게 키우셨다. 예정일보다 꼭 한 달 일찍 세상에 태어났다. 8월 15일 광복절에. 어렵게 얻은 첫 자식이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열정적으로 사는지 물어 올 때마다 광복절에 태어나서,라고 말한다.

너는 살아야해, 너는 살아야해, 하고 집안의 모든 어른들이 그녀를 응원했다. 그리고 나는 살아야해, 나는 살아야해. 하고 살아냈다. 아버지는 ‘예쁜 딸, 보다 '장한 딸'이라는 말씀을 가장 많이 하셨다.

“8.15에 태어나서 인지 유관순 위인전을 보면서 ‘나는 꼭 유관순 언니처럼 될거야’ 하고 다짐하기도 했어요.”




◀ 미국에서 시작된 사회운동의 시작


혼자 공부하러 미국에 가서는 어렴풋이 한국의 통일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처음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에 뛰어든 계기는 통일운동이 아니었다. 대학원생일 때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유엔에 탄원하는 운동이 있었다. 탄원서에 서명을 받으러 뛰어 다녔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인식 자체가 낮았을 때다.

많은 사람들이 뭐 이런 걸 서명하라고 하냐고 말했다. 사회문제에 뛰어든 첫 번째 계기였다. 대학원생의 봉사활동정도였다고 말하는 그녀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1999년에 벌어질 거대한 물결 속으로 뛰어들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캘리포니아 법정에 나치 및 나치 동맹국에 징용된 사람들이 징용시킨 기업에 소송할 수 있다는 한시적인 법이 통과되었는데 그걸 안 기자가 LA한인 사회에도 징용에 갔다 오신 분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이야길 하더군요. 그 때 4명이 의기투합을 했어요. 나는 사학을 공부했으니까 리서치를 하기 시작했고요. 자료를 조사하러 USC 대학 도서관에 갔는데 재야 사학자들이 쓴 자료들을 보니 조선에서 수백만 명이 징용에 끌려갔는데 우리가 몰랐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역사책에서도 못 배운 이야기였다. 자료 조사를 통해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되면서 점점 이 문제에 빠져들게 되었다. 국제적 소송이었다. 홀로코스트 소송이라고 말하는 독일 기업을 상대로 소송이 집단소송으로 커지면서 여러 개의 소송이 미국법정에 걸리면서 독일정부가 긴장했다.


“집단소송은 굉장히 큰 소송입니다. 소송당한 기업의 사활이 흔들릴 정도로 큰 금액을 지급해야 합니다.”

독일 과거사를 처리하려는 입장이었다. 독일정부가 나서서 소송당한 기업과 정부가 절반씩 99년도에 70억불이 배상된다. 그 소송에 참여했던 주요 변호사 중에 한 명이 한인 징용자 소송에 합류하게 된다. 처음에는 큰 배상을 받으니 큰 돈을 번 변호사도 있었다. 나치가 아닌 일본 피해자에게 변호사가 접근하기도 했다. 그 무렵 한국까지 나와서 징용자 소송이 가능하다고 설명회까지 했던 그런 분위기였다.


“징용자 소송을 시작하고 나는 활동가 역할을 하게 된 거죠. 소송은 변호사들이 하지만 이런 소송이 미국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시민사회단체, 정계, 학계 등 각계에 도움을 이끌어 내야 하는 사람이 필요했어요.”


◀ 한일청구권협정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모든 게 끝났다는 게 일본정부의 입장이었다. 한일청구권협정이 도대체 뭐냐고 물었다. 그녀가 일일이 답변을 했다.

한일청구권협정과 같은 중요한 국가조약을 체결할 때는 한국어, 일본어 그리고 영어, 3개 국어로 만드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한일청구권협정은 아무리 찾아봐도 영어로 된 서류가 없었다. 만들지 않았다. 가까스로 찾은 서류는 주일미국대사가 한일 간의 조약을 체결했다고 보고한 문서였다. 그런 걸 찾아내서 변호사에게 주는 등 오랜 기간 일을 하면서 변호사와 친해지기도 했다.

“그 일을 계속하면서 얼마나 우리정부에 문제가 심각했나를 깨달았어요. 우리는 일본군 ‘위안부’만 불쌍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징용 피해자들도 그랬어요. 한일청구권을 맺으면서 일본이 징용자 명단을 줬어요. 징용 희생자의 유해를 주면서 징용자 명부를 준 거죠. 향후 몇 년 간 한국정부가 그걸 방치했고요. 그분들의 가족들은 한 평생을 기다렸어요.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일본정부가 한국정부에 알려줬는데 막상 가족에게는 알리지 않았던 거예요. 그분들이 얼마나 불행하게 살았는지. 말이 안되는 게 너무 많아요.”


징용소송은 오노다시멘트, 미쯔히, 미쯔비씨,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했다.

일본군 ‘위안부’는 한국, 중국, 필리핀, 대만 4개국에서 소송을 제기했다. 순수한 법률적 업무가 아니라 하나의 사회 운동이었다

“특히 집단소송은 여론에 재판부가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냥 소송만 제기하는 게 아니라 학술대회, 컨퍼런스 등에 많이 참석하면서 지속적으로 여론형성에 기여해야하는 작업이에요. 비용도 많이 들고요. 여기저기 많이 다녀야하니까요.”



◀ 미국에서 대한민국의 남북 통일운동을 한다는 것


“소송을 함께 진행했던 베리피셔 변호사는 상해에서 열린 과거사 컨퍼런스에서 북한의 관계자를 만나게 되었데요. 여기에 관심을 갖고 있던 차에 우리 소송팀은 한인 변호사 2명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렇게 대외 과거사 문제를 하면서 남북이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운동이 바로 통일운동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

미국에서 대한민국의 남북통일에 대한 인식은 어떤지 궁금했다. 또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 교민들에게 통일된 조국이란 어떤 의미인지도 궁금했다. 동포들은 한국을 떠나온 지 오래된 분들이기에 과거의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미국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남북통일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분단된 것처럼 전쟁에서 진 패전국 일본이 분단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도 많았다. 많은 공감을 받았다. 트럼프 정권에 들어서 운동의 방향이 바뀌었는지도 물었다.


“미국의 집권세력이 나쁜 거지, 미국의 많은 시민들은 선량해요. 이 운동은 지금 현재 북한 정권에 찬성이냐, 반대냐의 운동이 아니에요. 전쟁에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거예요. 북한이 왜 핵을 개발하기 시작했나요? 왜 였을까요? 현상만보면 안 되고 왜 핵을 개발해야 했을까가 중요합니다. 노태우정권 때 우리나라가 중국과 외교를 텄죠. 러시아와 외교를 하면서 한국이 러시아와 중국과 외교를 하면서 당연히 북한이 불안해했을 거 아니에요. 그 때 노태우가 7.7선언을 하면서 한국이 북방외교를 하는 만큼 북한이 일본과 미국이 수교하도록 돕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때 북한이 일본과 미국이 수교했고 사람과 물자가 교류되었다면 어땠을까요? 현상만 바라보면 안 되고 미국이 어떤 정치적 조건이든 간에 우리의 이 운동은 사회운동이고 문화운동이고 경제공동체운동이고 정치는 가장 나중이라고 생각해요.”


6월 27일 광화문 광장에서 ‘한미정상회담에 즈음하여 긴급 기자회견’


◀ 지금 이 시대의 통일운동


운동에도 트렌드가 있지 않나. 시대가 바뀌어 가면서 특히 젊은 세대들은 통일이라는 말이 와 닿지 않는다. 조금 새로운 방식의 공감이 필요하지 않을까? 국내에서 통일운동을 펼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생각을 나눈 그녀에게 글쓴이가 물었다. 이 운동의 방향이 조금 젊어질 수는 없는지를.


“우리 세대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자랐어요. 내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통일은 우리 민족의 소원이라고 머릿속에 입력이 되어 있어요. 요즘 자라는 세대들은 그 노래가 와 닿지 않을 거예요. 왜 통일을 해야 하지? 같은 민족이라서? 지구상에 같은 민족이어도 같이 살지 않는 민족도 많아요. 전혀 와 닿지 않죠. 원래 한나라였으니까 통일을 해야 한다는 말도 그렇고요. 내가 생각하는 통일은 개벽의 정신과 비슷해요. 지금의 인류문명은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미국을 예를 들어서 한쪽은 전쟁을 계속 벌여야하고 한쪽은 헐리우드 군수사업이 경제를 지탱하는 두 개의 축입니다. 그런 구조는 계속 지속될 수가 없어요. 누군가 피해보고 많은 사람이 죽어야하는 시스템은 오래 갈 수가 없어요. 지금 전세계에 리더십을 발휘하는 최고의 지도자국가인 미국이 더 이상의 다른 비전이 없다는 겁니다. 나는 우리 민족의 사상인 홍익인간과 동학의 사람이 하늘이라는 사상이 이 지구촌에 큰 희망을 줄 수 있는 새로운 문명으로 갈 수 있는 큰 디딤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을 제대로 실현하려면 우리가 통일을 해야 합니다. 그 사상의 실현과 실천을 위해서.”


전쟁으로부터 지구를 구하고 인류의 평화를 위해 우리는 통일을 해야 하는거다. 통일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이 시대의 전설처럼 히어로, 영웅이 된 듯한 느낌이 들어 심장이 쿵쿵 뛰었다.


◀ 북한은 아직 우리에게 가장 먼 나라


북한은 지구상에서 가장 먼 나라가 되어버렸다. 마침 그 날 남북 태권도단의 만남이 있었다. 정치를 빼 버리면 통일이 어렵지 않다고 그녀가 말했다. 지금 이 시대는 국경이 점점 낮아지는 시대라고. 그런데 분단된 이 나라는 과도하게 국민을 옥죄는 시스템이 되어 버렸다고. “반공”이라는 말에 대해 물었다. 무엇에 반대한다는 것이 국시였던 말도 안되는 시대를 살았던 시절도 있었다고.

“분단은 과도기체제예요. 그래서 이 체제는 영구히 지속될 수 없어요. 민초들의 뜻에 반하는 체제이기 때문이에요. 분단체제의 종말을 우리가 준비해야합니다. 계속 지속될 수는 없어요.”


◀ 정연진 개인의 삶


이쯤에서 그녀 개인의 삶이 궁금해졌다. 사회운동가로서의 삶을 지탱해주고 있는 그녀의 일상들에 대해 물었다.


“지금은 통일운동만 하고 있는데, 제 개인 회사가 있어요. 회사를 유지할 정도의 수익만 내고 있어요. IT와 엔터테인먼트를 결합한 사업이죠. 여러 나라 말로 통역과 번역도 하고 예전에는 국내의 국제행사가 있을 때 기조연사 섭외해서 오기도 한 일을 해왔어요. 미국에서 디지털할리우드라는 IT업계와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방향을 논의하는 미국의 정상급 컨퍼런스에 코리아 프로그램을 6차례 진행한 적이 있어요.”

미디어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그녀는 한미 간에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협력의 기회를 창출해 내는 것이 목표로 다양한 컨퍼런스를 했다.

한때 한국의 IT업계가 전세계를 주목하게 했던 적 시절도 있었다. 그런 한국의 IT와 엔터테인먼트의 융합이 엄청난 잠재력과 가능성을 기대했다. 그런데 IT나 미디어를 움직였던 중소기업들이 침체되면서 하향 선을 탔다.


내가 항상 관심 있는 분야는 미디어였고 한국과 미국 간에 좋은 뜻을 가진 인재들을 결합해서 한미 간에 좋은 점을 결합시키는 것에도 관심이 많아요. 통일운동을 시작하고 보니 사회운동은 미디어를 등한시하더라고요. 내가 미디어 콘텐츠 쪽으로 쌓아 온 것들이 없어진 느낌도 들지만 저는 사회운동도 미디어와 결합시켜서 그쪽을 끌어들여서 같이 해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기반이 잡혀가면 다시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렇다. 이 업계에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까지 등장하던 그 시절, 국내 미디어들이 지난 정권에서 어떠한 시도조차 불가능 했을 것이다. 특히 통일을 주제로 한 미디어였다면 오죽했을까 싶었다.


“한국의 대중문화가 한류로 인기가 있었고 싸이의 노래가 지구촌에 수십억 명이 보고 그러잖아요. 그런 미디어 기반을 잘 활용하면 우리가 전파하고 싶은 메시지를 얼마든지 세계에 퍼트릴 수 있는데 무엇을 말해야 할까가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한반도의 평화에 대해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이런 메시지를 얼마든지 재미있게 만들어서 전세계로 퍼트릴 수 있는데 기존의 사회운동권은 이런 운동에 미디어를 활용한다는 것을 시시하게 여긴 것 같다고 말하며 안타까워했다. 이어 특히 통일은 더 그렇다고, 또 미디어 엔터테인먼트는 그 메시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양쪽에서 결합되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 사회운동과 융합이 이뤄진다면 파워풀한 세계적인 미디어가 될 수 있겠죠


미국에서 영어권 젊은 인재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주류 미디어는 북한에 대해 악의적이고 부정적 이야기만 했다. 북한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도 많았다. 그래서 북한에 대해 사람들의 편견을 해소해 줄 수 있는 영상을 제작해보자고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최근 들어 그런 필요성을 더 절실히 느낀다고 말하는 그녀는 북한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북한이 인권탄압 국가이며 부정적인 내용만 발표하고 미디어를 접하는 사람들은 이중 잣대에 스스로 휘둘리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최근 미국인이 북에서 죽었다. 그 죽음의 원인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접할 수 있는 팩트가 없다. 여기에 한국 언론도 가세하고 있다.

“그 사람이 죽은 것은 물론 애석하죠. 그러나 미국이 우리에게 저지른 민간인 범죄들, 예를 들어 노근리에서 학살된 사람들은 어떠한가요? 72시간동안 난사를 했어요. 그런 사람의 인권은 소중하지 않은 건가요? 한국사회 자체에 사람답게 사는 세상에 대한 철학적 자성이 있어야만 합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통일이라고 하면 북을 흡수하려고만 생각해요. 그래선 안 돼요. 거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걸, 인권이 존재하는 사회라는 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그런 팩트를 알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 달라진 통일운동, 어떻게 전개해나가야 할까


미국 교민들 안에서의 통일운동권은 주로 북한에 이산가족이 있는 사람들이 주를 이루었다. 북한에 많이 오가다보니 친북 낙인이 찍히면서 동포사회에서 격리된 느낌이었다. 또 국내의 통일운동은 목숨을 내 놔야 할 정도로 위험한 운동이었다. 통일운동은 비장할 수밖에 없었고 일반인들은 쉽게 참여하기 어려웠다.


악순환의 과정이 이어졌다. 김정일 위원장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3대 지도자가 들어서면 분단이 더 고착화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 속에서 준비는 안 되어 있지만 통일운동을 시작했다. 그때 그녀가 주목한 것은 페이스북이었다. 페이스북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고 묻는 페이스북 화면을 통해 지구촌 어디에 있던 실시간으로 동포들과 국내외 의견교환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거기서 새로운 가능성을 본 거죠. 바로 여기가 사회운동의 틀이 되겠구나, 생각하고 하루에 7시간씩 페이스북에 매달렸어요. 2012년 초에 한국에 와 보니 페이스북이 활성화되었고 그 시기에 많은 모임이 만들어지더라고요. 그런 모임에 나가서 새로운 통일운동을 제안했고 그룹 멤버가 300명 정도가 되던 2013년 4월에 출범식을 하고 1년간 준비해오다가 온라인 기반으로 운동의 방향을 넓혀갔어요. 온라인의 특징들을 잘 활용했어요. 그렇게 모인 천차만별의 사람들을 어떻게 하나로 묶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액션원코리아를 출범하게 되었어요.”


◀ AOK, Action One Korea


하나된 대한민국을 실현하다. 전세계 어디서든 대한민국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전세계 동포들이 함께 행동하는 단체이다. SNS를 통해 전세계 어디서든 온라인으로 통일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념과 종교, 지역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네트워크의 장점을 분석하고 다양한 채널을 통해 퍼져나갈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법들을 고민했다. 물론 시간이 가면서 페이스북 친구 수는 많았지만 초창기 같지는 않다. 자기 의견을 쓰는 것에 대해 주저하지 않는 것이 큰 장점이 되긴 하지만 지금은 채널이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온라인을 통해서 사회운동을 한다기보다는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내면서 각자 함께 하기 편리한 방식들을 찾아야 할 것 같다고 말하는 그녀는 “해외 나가서 살면 다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코리아에서 왔다고 하면 항상 외국인들이 걱정스럽게 묻기도 해요. 물론 교포들끼리 만나면 대한민국의 통일에 대해 이야기 많이 하죠.”


◀ 풀뿌리 시민운동으로 Ready, Action!


통일이라는 이 영화 같은 기적을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식이 깨어나 통일이 모자이크처럼 집단적 열정과 방향으로 스스로 주인의식을 가지고 만들어가자고 말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통일된 나라가 과연 내가 살고 싶어 하는 나라가 될 것인가이다. 나라가 만드는 통일은 국가의 정책에 따라가는 통일일 것이다. 통일된 나라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비전이나 꿈과 희망이 있으면 저 큰 목표를 위해서 이 어려운 역경을 넘어서야겠다는 의지가 나온다. 누구도 분단을 원하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 된 조국을 원한다.

“우리 역사를 볼 때 분열이 있었으면 통합이 있었어요. 하나의 나라를 원하는 우리 민중이 기반되고 중심이 되는 시각으로 통일시대를 준비해 나가야 합니다. 이제는 많은 소통과 교류가 이루어지는 세대로 이어질 것입니다. 인공위성에서 바라본 북한은 깜깜합니다. 세계사의 큰 흐름은 소통과 교류입니다. 국가의 단절은 점차 해소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 처럼


누구처럼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누구처럼 되고 싶게 만드는 것이 더 어렵다. 분단 70년 간 수없이 많은 통일운동의 시도가 있었다. 눈물 없이는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그리움을 품고 살았다. 국가가, 국민이 남북의 통일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를 묻기 전에 우리는 뿔뿔이 흩어져 서로의 이름을 부를 수도 없었던 상처를 딛고 일어서야 한다. 너무 먼 길을 돌아서 만나야 하겠지만, 어쩌면 그 길이 가장 빠른 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위인전을 보고 유관순 언니처럼 되겠다고 했다. 모자이크 조각들은 하나를 이룰 것이다. 분단 70년 간 수많은

사람들이 한 평생을 바쳐 통일을 위해 모자이크를 그려낸 것처럼, 그녀가 전세계를 향해, 또 대한민국을 향해 한조각의 모자이크가 되어 달라고 말한다.

여기 또 한 소녀가 말한다. 정연진 언니처럼 되겠다고.



정연진

80년대초반 서울대 서양사학과에 입학했으나 당시의 암울한 시대적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역사를 바꿀 힘을 기르겠다는 각오로 한국을 떠났다. 미국에서 USC, UCLA 에서 역사학을 수학하며 ‘영국민중항쟁사’를 전공했다.

현재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AOK(Action for One Korea)라는 단체를 설립하여 풀뿌리 통일운동을 펼쳐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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