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학실천시민행동 공동대표 고은광순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뜻을 거룩하게 받기만 하면 됩니다.
그 뜻이 그 분과 나 사이로 연결된 긴밀하고 엄밀한 소통의 끈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두려움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지지 않을까요? 마음을 모아 그 뜻을 기다려보는 겁니다.
“내 밑에 여자아이가 하나 더 태어났는데 바로 죽었데요. 그래서 어른들이 그 애가 제일 효녀라고 했데요.”
쎈 언니 고은광순 대표에게 첫 대화부터 여성의 인권, 남녀차별 철폐 등 쎈 질문을 했다. 차별과 갈등을 넘어서려는 준비된 싸움꾼 고은광순 대표와의 대화는 시작부터 격하게 수위가 높았다. 학생운동, 호주제 폐지, 평화의 어머니.세월이 흘러가며 온갖 핫한 운동들을 주도해 왔던 그녀였다. 준비된 싸움꾼에게 아직도 지킬 품위가 남아 있었다는 점에서 이어질 대화가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해졌다. 사람의 얼굴을 보면 주름의 깊이와 방향에 따라 그 사람이 살아 온 삶이 보인다고 했다. 글쓴이가 살아보지 못한 험한 길을 걸어 온 그녀는 어떻게 그 품위를
지켰을까.
◀ 큰 싸움을 여러 건 하셨어요. 그런데 갑자기 동학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내가 처음에 서울에서 내려간 데가 갑사동네였어요. 그곳은 명상캠프를 하던 동네였어요. 2008년에 명상 선생님을 운명적으로 만나 명상공부를 하다가 그 동네에 빈집이 있다기에 어머니와 거기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 동네로 갔죠. 거기 살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나는 더 이상 회색빛 하늘 맡으로 돌아가기 싫었어요. 서울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선언했죠.
언젠가 어머니와 절에 갔는데 멀리서 부처님의 미소를 보고 어머니가 절을 하래서 절을 하는데 까닭 없이 눈물이 흐르더라고요. 계속 눈물을 훔치면서 왜 눈물이 나지. 나는 슬프지 않은데 눈물이 흐른 적이 있어요. 아, 이게 뭐지? 생각했어요. 그 생각이 한참동안 내 숙제였어요.
나중에 알았는데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조용한 평화를 갈구하고 있었더라고요. 명상을 알게 되면서 부처님이 그래서 그랬구나, 예수님이 그래서 그랬구나, 비로소 이해가 되더군요. 성인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비로소 정신적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데 답을 얻고 청산으로 이사를 갔는데 도종환 선생님이『 정순철 평전』을 보내주셨어요. 개인적인 친분이 없었는데 말이죠. 그때 명상선생님이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알고 보니 선생님 자신이 동학접주의 외손자였고 해월의 외손자가 정순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내가 가부장제를 깨는 운동을 했는데 묘하게도 가부장제 그늘에 있었던 외손자들이 나타나서 길을 보여주더라고요. 또 부산 한살림에 강연을 갔는데 한살림의 뿌리가 동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리고 청산에 와서 정순철에 대해 알게 되면서 박맹수 선생님의 강연을 유튜브에서 찾아보면서 이걸 책으로 누군가 남겨야겠다, 생각했죠. 내가 쓸 생각은 못했어요. 그때 박맹수 선생님을 만나서 이야기하는데 동학에 대한 스토리가 여기저기 산적해있더라는 겁니다. 사방에. 그럼 15명을 모아서 다큐 소설을 쓰자, 박경리는 혼자서 수직적으로 대하소설을 썼지만 우리는 횡적으로 써 보자, 지역마다 스토리가 다 있으니 다큐로 해서 뼈대가 있으니 여성의 관점으로 본 동학다큐 소설을 쓰기로 했어요. 정말 운명처럼 다가왔어요.
◀ 동학다큐소설 이야기는 개벽신문에서도 여러 번 다뤘었죠. 1년 간 여성 13명이 한 권씩 소설을 쓰셨죠? 선생님 개인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전환점이었겠네요.
시민운동가, 명상도반 등 사람들을 모아서 2013년 겨울에 용담정에서 일주일 합숙훈련을 했어요. 그리고 1년간 소설을 썼죠. 소설을 쓰는 동안 청산에서 수행하면서 조용히 살려고 했던 인생의 후반기에 동학이라는 운명적 만남으로 다시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게 됩니다. 호주제 폐지운동 하면서 알게 된 족보, 성씨문화, 제례문화가 새로운 이 시대의 걸림돌이었죠. 그게 왜 한국의 이렇게 전체적으로 퍼져서 양반문화가 되었는가 알고 보니 일제 강점기부터 가짜 가부장제가 있었어요. 양반흉내놀이였죠. 그 이전에는 동학이 있었어요. 동학이 왜 다 없어졌지? 아, 일본이 첨단무기를 가져와서 다 죽였구나. 아, 무기 없애는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운명이에요.
◀ 굴곡진 생의 한 가운데에서 모든 것을 내려두고, 어머니를 모시고 시골 생활을 시작하셨다고 하셨는데 선생님도 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남녀차별을 많이 겪으셨을 것 같아요.
나는 넷째 딸로 태어나서 싸게 키웠다고 했어요. 다 물려 입었어요. 나를 위해 산 옷은 교복뿐이었어요. 말이 없고 조용한 아이였어요. 성가시게 안하고 책만 좋아했어요. 감사하게도 책은 많이 사주셨어요. 저는 참 모범생으로 조용하게 자랐어요. 철들면서 어렸을 때 존재감이 없는 아이도 나처럼 변할 수 있는 거구나. 지금 존재감 없는 아이들도 충분히 자기만의 꽃을 피울 수 있다고 기대하게 되었죠.
나는 원래 정의감은 많았어요.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흥사단 이화여대 아카데미에 들어갔고 사회과학 공부하다보니 선배들이 다 나라걱정을 하더라고요. 그 때 박정희 독재가 심할 때였죠. 긴급조치 9호, 별거 아닌 사건으로 구속되더라고요. 전두환 들어서서 복학했는데 별 이유 없이 재적되고 그랬죠. 두 번 재적되고, 두 번 구속되었죠. 부모님을 그렇게 두 번 걱정하시게 했어요. 그 때마다 아버지는 울고 어머니는 강단 있게 지지해주셨어요. 부모님은 6남매를 낳으시고 희생과 헌신으로 키우셨어요. 아버지는 무걸 호인으로 심지가 약한 분이셨고 어머니가 아주 대가 세신 분 이셨어요. 제가 어머니를 좀 닮았을 거예요. 어머니는 매일아침 불경을 외우셨어요. 하루도 안 빼고 수년을 꼿꼿하게. 내가 108배 매일 해 봤지만 그게 1년을 넘기기 쉽지 않더라고요. 6남매 중 넷이 미국 가 있고 아버지와 둘이 사시다가 돌아가시니까 미국 큰아들이 모시고 사시겠다고 갔는데 내가 모시고 있다 돌아가셨죠.
◀ 어머니와 마지막을 함께 하셨겠군요.
어머니야 말로 아들에게 올인하신 분이셨어요. 오빠는 매일 달걀 후라이에 멸치를 먹었어요. 미국에 계시다가 한국으로 모시고 와서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게 되었어요. 그렇게 1년 쯤 되니 점점 수척해 지시더라고요. 말을 전혀 안하시고. 내가 2주에 한번 뵈러갔는데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 “밥먹고 가” 였어요. 그런데 요양사 분들이 깜짝 놀라셨어요. 말을 전혀 안하셨다고 하시더군요. 그때 어머니, 우리 나가서 우리 시골가서 같이 살까? 하니 고개를 끄덕이시더라고요.
이후로 시골에 거처를 마련하고 한의원을 정리하고는 시골로 내려갔죠. 거기서 6개월 정도를 함께 사시고 돌아가셨어요. 그때 쓴 책이『 시골 한의사 고은광순의 힐링』이라는 책이었어요. 어머니는 그때도 침대에만 누워계셨어요. 한의원을 시골에 열고 낮에는 간병인이 와서 돌봐주셨고요. 어머니가 식사를 한 시간씩 하세요. 아마도 요양원에서 제대로 못 먹어서 수척해지셨던 것 같아요. 나의 목표는 다시 살찌워서 건강하게 살다가시게 하는 거였는데, 이미 가는 길이 정해져있더라고요. 참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소리를 내신 날이 기억나네요. 그 해에 첫눈이 와서 쌓였는데, 어머니를 거실로 모시고 나와서 보여드렸어요. 그때 어머니가 “옴마!” 라고 하셨어요. 그 말이 마지막이었어요.
◀ 여성들의 인권문제나 남녀차별, 남아선호사상 등의 문제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가지셨어요?
여자들에게 가혹하던 시절은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왔어요. 삼종지도, 칠거지악이라는 말부터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80년대 중반에 초음파가 들어오면 서 과학까지 동원해서 여성차별이 심했고 거기에 호주제로 종지부를 찍은 거죠. 내가 미국에 가서 2000년도에 어학연수 겸 갔는데 문화인류학 강의를 들었어요.
‘제3세계’의 공통점이 아들, 딸 차별을 한다는 거예요. 아들에게만 정성을 쏟는거더라고. 일본도 그랬데요. 아들만 하이프로테인을 먹인대요. 그때 생각났죠.
오빠가 먹었던 달걀. 멸치. 다 하이프로테인이었어요. 그리고 의료혜택도 남자들만 준다더군요. 제 밑으로 남동생이 있어요. 그 아이는 아프면 바로 병원을 데려갔어요. 나는 잘 체했는데 양은 냄비에 밥을 태워서 그 재를 절구에 빻아서 먹었어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민간요법이었죠. 재를 먹으면 내려간다고. 체했을 때 나는 재를 먹고 내 남동생은 병원을 데려갔어요. 또 ‘제3세계’교육에 대한 남녀차별이 있었어요.
그런데 다행히 저희 부모님은 교육에 관해서는 차별이 없으셨어요. 1919년, 1924년생이신 부모님이 유학도 다녀오시고 교사생활도 하시고 당시에는 많이 배우신 분들이다 보니 그랬던 것 같아요. 아주 감사한 일이죠.
◀ 모든 것이 운명처럼 다가왔다는 말씀을 자주 하시네요.
어쩌면 내가 딸 부잣집에 태어난 것도, 한의사가 된 것도 운명이었더라고요.
그런데 내가 한의사가 되고 나서 보니까 아들 낳는 처방을 그렇게 찾더라고요.
그래서 설문지를 만들었어요. 여한의사 회보를 냈어요. 끔찍했어요. 아들을 낳기 위해 스무 번을 낙태한 사람도 있었어요. 그리고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한 여성들이 많았죠. 내가 차별을 그렇게 받고 자랐는데 아직도 그런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죠. 그래서 아들 낳는 약을 처방에 대한 문제제기도 했고 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여성단체와 연대해서 호주제 폐지를 여성운동의 1대 과제로 삼았고 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도 시작했고요. 그때 호주제 폐지운동을 하게 되었죠. 공격도 많이 받았죠. 어떤 방송에 나갔는데 토론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한정되어 있잖아요. 방송 끝나고 나서 죽인다고 까지 했어요. 그들의 폭력성, 평등을 주장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는 거죠. 질서였으며 아름다운 전통이었으니까. 그때『 어느 안티미스코리아의 반란』이라는 책을 냈는데 그때 마초들 이야기를 많이 썼어요. 평등이라는 고차원적인 개념에 한참 떨어져 있던 남성중심 문화가 만연했죠.
호주제 폐지가 갖는 의미는 여성을 남성의 도구로 보는 것, 모든 남자는 모든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걸 법으로 명기한 거였는데, 그걸 폐지했다는 건 대한민국 여성 역사에서 최고의 획기적 역사라고 했다더군요.
◀ 평화의 어머니회는 꾸준히 활동하고 계시는 데 언제부터 시작하셨나요?
2015년 5월에 현경씨가 하던 <위민 크로스 DMZ>에 참가하고 와서 5월 24일에 평화어머니회를 조직해서 피케팅을 했어요. 평화어머니회를 만들어서 플래시 몹을 광화문에서 하고 있죠. 평화의 어머니는 40명 정도 되는데 당번을 정해서 꾸준히 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결속력이 강해지고 있죠. 화목하게 살겠다고 화요일과 목요일에 합니다. 요즘에 와서 시작할 때 평화협정 하라고 주장했고 단체나 모임들이 급증하고 있어요. 평화협정을 해야 미군이 철수할 수 있어요. 미군이 철수하지 않기 때문에 긴장이 계속되는 겁니다.
◀ 양쪽군인 모두 어머니의 자식이라는 카피가 인상적입니다.
무기 없는 세상 어머니가 만든다는 말로 패권주의 군비경쟁으로 그 세력을 이겨낼 수 있는 것, 그게 어머니의 그 마음입니다. 평화 어머니 운동이 당분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어요. 될 때까지 가는 것이죠. 평화라는 것도 그렇죠. 평화가 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평화는 잠자는 사이에 하늘이 만들어주지 않아요.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겁니다. 우리 문제에 대해 성실하게 절실하게 해 나가면 이뤄질 거라고 믿어요. 앞으로는 여성의 세상, 모정의 세상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전쟁과 분쟁은 남성 중심의 내 것은 내 것, 네 것도 내것이라는 세상에서 시작되었어요. 어머니의 마음은 그렇지 않잖아요. 갈수록 여성들의 가치가 많이 필요하고 인정되는 세상이 될 거라고 하더군요. 시대의 변화라고 할까요. 운동의 변화를 보면 화염병에서 촛불로 진화하고, 대포와 총에 꽃을 달아주기도 했잖아요. 양쪽 군사 모두 어느 어머니의 자식이라는 문구는 많은 지지를 얻고 있어요. 무기를 통해 얻는 평화는 저급한 평화입니다. 무기가 필요 없는 세상, 사랑과 소통으로 평화를 이뤄내면 좋겠어요.
◀ 동학실천시민행동의 공동대표가 되셨어요.
동학 책을 쓰면서 과거에 이렇게 치열하게 살다가 다 사라진 조직이 아쉬웠어요. 그러던 차에 동학모임이 있다는 것을 출판기념회 때 오신 분들에게 들었어요. 그런 시민단체들이 있다니 반갑더라고요. 그 조직이 본격적으로 결성한 다고 했을 때 그분들이 공동대표를 제안하더군요. 그 때 나는 그 조직을 전국적으로 살려내면 좋겠다는 욕심이 있었어요. 라이온스클럽이나 로타리클럽이 시골마다 있잖아요. 새마을조직처럼 관존민비시절처럼 기득권 가진 사람들이 그것들을 확인하는 모임이 되기 십상이었죠. 그래서 풀뿌리 조직을 만들고 싶었어요. 내 인생계획이 65세까지 일하고 이후로 한 5년은 놀고 70에 돌아가겠다고 생각했어요. ‘좋아, 그러면 동학조직을 만들어 놓고 손 떼고 시골에 파 묻혀서 산다’고 마음먹었죠. 수운이 ‘입산불출’한 것처럼.
그런데 실제로 나는 이 그룹에 굉장히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어요. 동학이라는 가치를 아는 사람,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 우리의 자산입니다. 동학의 기본정신은 저항이 아니고 수행이었어요. 진화된 세상을 꿈꾸고 저항이 일어난 것은 1년이었어요. 1894년 저항이 일어난 거죠. 저항의 아이콘처럼 대나무 끝에 피를 묻히지 말고 진화된 시민의식을 보여주려고 한 아름다운 삶의 철학이었어요. 그 시절에 우리는 이미 수행을 통해 가슴 속에서 우러나는 생명존중, 상호존중, 함께 잘 살자는 사람들이 많아져 개벽세상, 그런 진화된 세상이 오기를 꿈꿨던 겁니다. 우리가 지역조직에서 바라는 것은 그 안에서 신명나게 무엇인가 해 나가고 주변 사람들을 끌고 권력에 조종당하지 않고 그들에게 길들여지지 않는 제대로 된 역사의식과 제대로 된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주인공들이 되길 바랍니다.
◀ 동학실천시민행동은 지난 3월에 출범했는데 몇 달 사이에 큰 행사를 많이 치렀더군요. 동학은 우리 역사 안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빛나는 시간이 또 올까요?
그럼요. 만들어야죠. 천국천인, 하늘사람이라고 했어요. 앞선 문명을 가진 사회는 다 그와 비슷하게 살지 않았나요?
본격적으로 7월 전체운영위원회를 통해 16개 시,도에 지역 조직을 조금씩 키워나가고 그런 작업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촛불이 광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꽃불로 계속 타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정말 대단한 조직입니다.
◀ 창립대회에서 발표한 동학실천시민행동의 큰 과제들이 있었는데 지금 선생님께서 하시는 평화운동과도 큰 틀에서 보면 연결이 되는 것 같아요.
우리도 통일이 되면 전쟁을 위해 투자했던 모든 것들을 우리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하나가 되어서 살아보는 데 쓰면서 빠른 진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천민자본주의가 기승을 부리지도 않을 것이니 획일화를 강제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남쪽 동학은 1894년에 다 죽었지만 이후 해월은 4년을 더 살아요. 북에서 온 사람들이 악착같이 해월을 만납니다. 북의 동학은 살아남았거든요. 동학은 남북통일 이후에도 갈등이나 문제들이 생길 수 있는 것들을 녹여낼 수 있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무엇보다도 내안에 하늘이 있고 네 안에 하늘이 있다고 하는
자본주의에 찌든 사람들 영혼의 씻김을 받는 것, 동학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여기까지가 지난 6월에 했던 인터뷰였다.
글쓴이와 인터뷰를 한 직후 동학실천시민행동은 큰 홍역을 치렀다. 공동대표와 사무국 소통문제는 회원 간의 분열로 번졌다. 수백 명의 소통의 장이었던 단체 채팅방은 오해가 확산되었다. 모든 화살은 고은광순 공동대표에게로 몰렸다. 진위 여부를 떠나 공동대표로서, 여성으로서, 한 개인으로서 큰 상처로 남았다. 글쓴이는 이 인터뷰를 기사화하는 것을 미루기로 했다.
조직적 문제는 감사 요청으로 이어졌고 황선진, 선한길 두 분의 감사는 고민 끝에 이 문제는 개인의 문제도, 대표단 및 사무국의 문제도 아닌 조직 전체의 문제로 판단하고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전체회의를 거쳐 임시총회를 요청했고 감사보고서에 ‘49일 수련’할 것을 제안했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회원들은 의견이 분분했지만 눈앞에 닥친 조직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동의했다.
그리고 49일간 수련을 수행했다. 두 차례 모여서 집단 수련이 있었고, 매일 아침 단체 체팅방 안에서 주문과 묵상의 연대를 통해 49일간 수련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다시 고은광순 대표를 만났다. 임시총회를 닷새 앞둔 날이었다.
◀ 석 달 만에 뵙습니다. 먼저 49일 수련을 마친 소감을 여쭙고 싶습니다.
크거나 작거나 시간들을 이어주는 톱니바퀴에 하나였어요. 신의 한 수처럼 문제가 풀리더군요. 황 감사님이 아무도 버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셨기에 끝내 함께하지 않고 스스로 떠난 사람도 덜 상처받고 떠났어요. 남은 사람도 49일 수련을 통해 몇 명이라도 수련의 맛을 느끼게 되었죠. 이 수련을 정기적인 프로그램으로 가져갈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어요. 수행하면서 자기를 영적으로 고양시켜가면서 시민운동을 하는 그룹이 얼마나 될까요? 동행이 특별하게 그런 기회를 갖게 된 거라고 생각해요. 하나하나의 사건과 인물들이 다 소중하게 여겨졌어요.
◀ 49일 수련이 대표단뿐만 아니라 조직 전체에 큰 영향을 줬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프라인에서 시작한 사람들은 색다른 경험이었을 것이고 긍정적으로 다가온 사람, 호기심으로 다가온 사람, 낯설게 느껴진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주문수련은 동학에 뿌리를 깊게 두고 있는 건데 그걸 맛보게 된 걸 큰 의미로 보았어요. 깊은 수련으로 들어간 사람도 있었고 자극, 통로가 된 사람도 있었어요. 과거의 동학도들은 신선이 되고자 했어요. 그것과 다르지 않을 거예요. 저는 49일 수련을 통해 끈끈한 연대가 생길 것이고 그 힘으로 차분하게 나갈 거라고 생각해요.
◀ 며칠 앞으로 다가온 임시총회는 어떤 마음으로 임하고 계신가요? 이번에 재신임에 대해 회원들의 투표가 있다고 들었어요.
특별히 이 사건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어요. 혼란이 정리되어가는 과정들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실제로 그랬어요. 그 과정들도 귀하고 감사한 과정이었어요. 상처라는 생각은 전혀 안 들었어요. 이미 그런 일에 상처받을 정도로 휘둘리지 않는 정도는 되니까요. 사람들은 말했어요. 왜 대꾸하지 않는가. 왜 침묵을 지키는 가를요. 이 일이 벌어졌을 때 내가 사임을 한 이유는, 만약 그 자리에서 사임하지 않았다면 꾸준히 호기심과 해명을 요구하는 사람이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큰 뜻을 품은 동학실천시민행동이 난장판이 될 것 같았어요. 그런 사건들을 겪으면서 황선진 감사님이 명약을 처방해주신 것 같아요. 신의 한 수가 작동했다고 생각해요.
◀ 재신임의 결과에 따라 공동대표로 남을 수도, 또 내려놓으실 수도 있겠지만 대표로서가 아닌 회원의 한 사람으로서 49일 수련을 끝내고 새롭게 출발하는 동학실천시민행동에 기대라는 바가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제가 얼마 전 미국에 보름정도 다녀왔어요. LA에서 간담회를 했어요. 거기서 만난 분들이 동학이 이렇게 훌륭한 줄 몰랐다고 동학에 관한 책을 번역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몇 권 소개했어요. 그런 식으로 인연이, 사건이 이어지더군요. 동학을 영어로 번역해서 소개하는 일도 우연히 시작되는 것 같아요. 전라도를 벗어난 기타 지역의 동학들이 봉우리를 맺고 꽃을 피우려고 하고 있어요. 그런 일들을 동학실천시민행동이 부채질해주는 역할을 하게 돼서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3.1운동 100주년도 동학실천시민행동의 힘으로 무엇인가 할 수 있으면 좋겠고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초대 대표단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차근차근 해 나갈 일이고 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동학이 살아나는이 느낌이 저는 참 좋습니다.
◀ 끝까지 고은광순 대표님을 믿어주고 따라와 준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도 갖고 계실 것 같아요.
물론이죠.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었어요. 그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그 시간을 여여하게 지나갈 수 있었어요. 그 분들이 저에게 전한 긍정의 기운들이 저를 이끌고 건너갈 힘이 될 겁니다. 늘 감사하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조금은 무례한 질문일 수도 있겠으나 ‘평소 쿨하기로 소문난’ 고은광순 대표를 향해 글쓴이의 소심한 마지막 질문이다.(실수했다. 글쓴이는 동학실천시민행동 내부의 일들을 지켜보면서 한 여성 개인을 향한 가혹한 공격들을 고스란히 받고 계실 고은광순 대표를 크게 걱정했으나, 인터뷰를 미뤄야 할 것 같다는 연락을 드렸을 때, 오히려 글쓴이를 걱정했던 고은광순 대표가 얼마나 쎈 언니였는지를 잊고 있었던 거다.)
◀ 선생님을 향해 ‘쎈언니’라는 표현을 많이 하던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람들이 나에게 맑고 센 기운을 가졌다고 하더군요.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평가가 고맙게 느껴졌어요. 내가 개인적으로 가진 기운이라기보다 그동안 동학 공부와 명상, 사회운동을 하면서 나름대로 성장했다고 할까요? 맑고 센 기운은 동학, 명상을 통해 누구나 가질 수 있고 그런 기운을 가진 사람이 많아질수록 해월이 꿈꿨던 개벽세상을 이룰 겁니다. ‘세다’라고 하는 것은 분명하다는 거라고 생각해요. 목표, 나아갈 길,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 그러니까 세게 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요? 장애물을 넘을 때 주저하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 같아요. 배불리 먹고 따뜻한 방에서 잔다는 것이 고결하고 가치 있게 사는 삶은 아니잖아. 길게 보면 자기가 원하는 세상, 함께 더불어 같이 사는 행복한 세상을 위해 가는 것이 오래 남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