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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18. 2018

장흥 동학혁명은 동학혁명의 대미다

심 국 보 | 본지 기획위원 [개벽신문] 68호, 2017년 10월호


동학혁명의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전라도 동학, 보다 정확히는 정읍, 고창, 부안 등을 중심으로 한 동학혁명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서산·태안·예산·당진·아산·홍천 등 내포지역과 금산 등 충청 지역의 동학세력도 막강했고, 진주를 중심으로 한 산청, 하동 등 경상도 지역의 동학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또 놀라운 것은 전남 해안의 다도해에도 수많은 동학군이 스며들었다는 것이다. 공주 우금치에서 패배한 동학군을 왜놈들은 북으로, 동으로 가는 것을 차단하며 남으로, 서쪽으로 몰아붙였다. 지금의 전남 해안, 다도해 쪽으로 동학군은 쫓겼고, 장흥동학군과 합류하여 3만여 명이 넘는 대오를 이룬다. 장흥, 강진 일대를 석권하지만 왜놈들에게 패배한다. 장흥 석대들에서 보름 넘게 항전하며 숱한 사상자를 남기고 동학군은 섬으로, 타향으로 흩어진다.


소안도, 동방의 모스크바 

최근까지 약산도에는 천도교약산교구(아래 사진)가 있었고, 일제강점기 때 소안도는 인구비율로 보면 한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지사를 배출한 곳이다. 동학혁명의 후예들이 섬에서도 저항을 계속했던 것이다. 소안면 소재지인 비자리에는 소안항일운동 기념탑과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일제시대 소안도는 함경도의 북청, 부산의 동래와 더불어 독립운동이 가장 강성했던 곳 중 하나였다. 1920년대에는 6천여 명의 주민 중 800명 이상이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혀 일제의 감시와 통제를 받았다.

  

소안도 항일운동의 뿌리는 갑오년의 동학혁명에서 시작된다.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동학의 접주 나성대가 동학군을 이끌고 소안도 들어와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 때 소안도 출신 이준화, 이순보, 이강락 등이 동학군에 합류했고 동학군의 군사 훈련 때 소안도 주민들은 군사들의 식량을 조달했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천도교조선농민사 방식의 영농형태가 소안도에서 제대로 뿌리를 내렸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공주 우금치에도 없는 동학혁명 기념관이 한반도에서 외진 전남 장흥에 자리잡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장흥동학에 깃들어 있는 숱한 사연은 몇날 몇일을 얘기해도 한이 없다. ‘장태’장군 이방언! 여동학 이소사! 소년동학 최동린! 소년 뱃사공 윤성도! 접주 이인환, 구교철, 이사경, 김학삼! 사육신 박팽년 후손들! 동학혁명 최대최후의 전투 석대들 전투! (장흥 동학에 얽힌 세세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완도 약산천도교당 터

다시 일어서는 석대들

지난 추석 연휴 때다. 장흥천도교당에는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주문 소리가 높이 울렸다. 장흥 천도교의 기운을 다시 살려보자며 2박 3일의 일정으로, 광주에서, 부안에서, 보성에서, 부산에서, 진주에서, 창녕에서 여러 동덕들이 모였다. 오랜만에 교당에 사람들이 가득하니 전교구장이신 청암 김동철 도훈께서는 신이 나셨다. 저녁 한때 잠드셨다 다시 깨어 밤 1시가 넘도록 얘기를 이어셨다.


일제 강점기하의 노동운동, 농민운동, 신간회운동 등등.... 문득 민준호와 김학진을 언급하신다. 어떻게 민준호가 동학에 우호적이었나고 내게 묻는다. 내가 진주사람이라기 물은 것. 경상 우병사 민준호, 1894년 갑오년 당시 진주동학군을 진주성으로 불러들여 소 잡아 대접했고 동학군들은 진주성에 무혈입성하여 보국안민의 붉은 깃발을 성루에 내걸었다. 여차여차하여 그랬다고 설명해드리니 수긍하신다. 덧붙였다. 이방언과 동문수학했던 김한섭, 장흥부사 박헌양 등 장흥 동힉군에 맞서 순절한 이들의 한계를. 자신들은 나라에 충성했다고 여기며 숨졌겠지만, 결국은 왜군에 부역했던 것. 왜군의 지휘하에 있었고, 을미년 민비가 왜놈들에 살해당한 뒤 의병으로 일어나지만 때늦은 일. 저항의 주도세력 동학군을 제거한 뒤 왜가 조선을 삼키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던 것.


장흥천도교당을 찾게 된 계기도 젊은 박 동덕 때문이다. 2박 3일 수련 기간동안 시장에서 장보기, 음식 만들기, 설거지 등을 도맡아 했다. 단지 나이가 젊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동학과 천도교에 대한 신심이 속 깊이 내재하여 있었다. 앞으로 장흥에서 벌어질 동학관련 사업, 김재계 선생 추모사업 등 천도교의 일은박경훈 동덕을 손을 거치야만 제대로 움직일 듯했다. 박경훈의 다부진 각오가범상치 않다.


“저는 2004년 무렵 광주·전남·전북 생명과 평화의 길, 한 살림 식구들과 동학유적지 답사모임에서 길잡이를 맡으신 원광대 박맹수 교수님과 김춘성 교수님의 신인간사 대담을 계기로 화악산수도원에서 김춘성 교수님을 전교인으로 입도하였습니다. 그후로도 화악산, 경주, 호암수도원에서 수련을 하였습니다. 입교 후 한울연대 창립 때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여러 모임과 수련을 통해 여러 동덕님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광주에 있을 때는 간혹 광주교구에서 시일을 모시다 광주에서 함께 수련하신 안웅·박요섭·김형만 동덕님들과 산알교구를 하게 되어 몇 차례 모임과 시일을 모시다 장흥으로 귀향하였습니다. 귀향 후 장흥에서 농사를 짓다가 장흥교당소식을 접했고 현재 보성에 사시는 신승한 동덕님과 함께 김년홍 장흥교구장님을 뵙고 장흥동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교구장님 소개로 회진사시는 청암 김동철 선도사님과 윤병추 어르신으로부터 선열들의 동학정신과 귀중한 가르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원로 교인분들이 못다 피운 동학의 꿈을, 교세가 없음을 한탄할 즈음에 지난 여름 김춘성 교수님 소개로 장흥도서관이 주관하는 초등학생들의 1박2일 동학캠프 ‘미래에서 온 동학이야기’를 이끌며 천도교이야기와 주문수련을 함께 했습니다.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더불어 천도교의 시운인지 경향각지에서 7월에 1박2일로 장흥을 찾아주셨고, 추석 전 2박3일 수련을 제안하셔서 많은 분들의 격려와 응원 속에서 추석수련을 잘 마쳤습니다.

지금도 장흥에서는 항일독립운동추모사업과 장흥교당의 여건 개선를 위해 몇 안되는 분들이지만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동학혁명과 항일운동 민족분단과 민주화 통일운동에서 찬연히 빛났던 장흥동학이 다시금 일어나려고 합니다. 많은 응원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장흥 천도교당

동학혁명 12년 후, 포덕47(1906)년 4월 10일 천도교장흥교구가 설립된다. 왜놈들의 총칼에서 살아남은 동학군과 그 후예들이 세운 당당한 교당이 장흥에 들어선다. 천도교라는 조직으로 다시 동학이 살아났다. 그리고 왜정 하에서 장흥 천도교는 지역의 활동을 주도하게 된다.


장흥천도교당은 처음에 초가로 지었다가 1917~1918년 간에 새롭게 지었다. 건축비용 1600원(지금 돈으로 2억 5천~3억여원). 교당 짓기 위해 김재계 선생 등이 2300원을 모금하여 500원(지금 돈으로 1억원 정도)은 3·1운동기금으로 서울로 보낸다. 전남 문화재로 지정되어 2004년 12월 개축하였다.


3·1혁명(1919년) 이후 장흥교당은 장흥 사회운동의 중심역할을 했다. 많은 천도교인들이 있었으니 인적 보급, 물적 지원을 거의 장흥 천도교에서 도맡아 했다. 포덕 68(1927)년 김두환 선생 등이 신간회장흥지회를 결성하였고, 교당을 사무실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2004년 개축, 개축한 지 13년. 여기저기 둘러보니 엉성하게 복원되었다. 본래 있던 단청은 없어졌다 하고, 정면입구의 궁을장 목각도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마루바닥은 틈이 나 아래가 보이고, 뒷벽은 판자 사이가 벌어져 바깥이 훤히 다보인다. 한때는 지붕 쪽에도 뚫린 데가 있어 새가 날아들었다가 나가지 못하고 죽어 있었다고 한다. 김년홍 교구장은 단청복원, 마루-벽 보완, 별채의 주거환경 개선, 동네 입구에 안내판 설치 등을 장흥군에 공문으로 보내고 보완 답변을 받았다고 한다.


장흥교당에서 수련과 간담회

김재계 선생

비가 흩날리는 중에 김재계 선생 묘소와 신간회 장흥지회장(1927년), 천도교청년동맹 장흥지부장(1930년)을 역임한 김두환 선생(1909~1956) 송덕비를 다녀왔다.


김재계(聲菴, 1888-1938) 선생은 장흥의 대표적 독립운동가로 추앙받는 분이다. 선생은 장흥 3·1혁명을 주도하고 3년 옥살이를 했다. 선생의 부친은 동학군이었던 김규현, 대를 이어 동학-천도교에 열성이었다. 17세 때 의암성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으나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홀로 3일간 단식을 한 뒤 청운의 꿈을 뒤로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선생은 독립자금조달에 탁월한 성과를 냈다. 1906년 장흥천도교당이 개설할 당시 자금을 모았다가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 당시 여비에 보태기도 했다. 1919년 장흥에서 500원을 서울 천도교총부로 보낸 것은, 그 전해 장흥교당 건축기금 2300원의 일부였다. 선생은 서울 천도교에서 금융관장을 맡았다. 격에 맡은 역할이었다. 1936~1938년 사이 무인멸왜기도 사건 때 자금조달도 선생의 역할이었다.


춘암상사는 1936년 8월 14일 지일기념일에 교인들로 하여금 아침저녁 식고할 때마다 일제의 멸망을 기원하는 특별기도를 실시하라는 지시, 즉「 안심가」의 한 구절인 “개 같은 왜적 놈을 한울님께 조화받아 일야간에 소멸하고 전지무궁하여 놓고 대보단에 맹세하고 한의 원수 갚아보세.”라는 기도문을 읽게 한다. 또한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국권회복의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여기고 천도교 중앙간부들과 함께 전국을 4개 구역으로 나누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일본 패망을 기원하는 멸왜기도를 실시한다. 멸왜기도 사건으로 김재계 선생은 황해도에서 1938년 2월 피체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석방되었다가 곧장 환원하였다. 4월22일이 선생의 기일이다.


묘소가 잘 단장되어있다. 남도대학 교정에 들어서면 오른쪽. 입구에 안내판은 없다. 유족들은 국립묘지로 옮기자는 의견이고 장흥 분들은 그대로 두었으면 한다고 한다. 장흥의 가장 대표적인 항일투사를 장흥 사람들이 모시겠다는 것이다.


향토사학자 위의환 선생은 김재계 선생의 생가복원도 필요하다고 한다. 생가는 한때 천도교전교실로도 활용되었다. 김재계 선생 생가 바로 옆집은 소설가 한승원의 생가다. 한승원 부친도 천도교인이었고, 한승원은 자신이 7권의 대하소설『 동학제』를 집필한 계기가 성암 김재계 선생의 영향이라고 책 서문에서 밝혔다.


맨부커상과 말라파르테 상을 받으며 장차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손꼽히는 소설가 한강은 한승원의 딸, 동학-천도교의 정신이 이들 부녀에게 면면히 이어지고있다.


김재계 선생이 해설한 의암성사의 시문 한 구절을 읊어 본다.


勇拔天賜劍 一斬萬魔頭 魔頭如秋葉 枝上月精神

날래게 한울이 준 칼을 빼어서 단번에 만마의 머리를 베니,

마귀머리 가을잎 같고 가지위에 달빛과 같은 정신이로다 (천도교경전 770쪽)


김재계 선생은 이 시를 이렇게 해설하였다.


“용단력으로 주저치 말고 마의 근저인 사념을 일 찰라 간에 해탈하여야 비로소 정견이 있다. 우리의 본래 가지고 온 보경이 광명을 발휘하게 된다. 이 광명의 하에서 세계관, 사회관, 도덕관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에 비로소 나를 알게 된다.”「 천도교회월보」(1926.5)


셋째 날 새벽, 대신사의 <시문>을 읽다. 대신사의 안타까움이 서러울 정도로 느껴진다. 한참 주문을 욀 뿐이다.


苦待春消息 春光終不來 非無春光好 不來卽非時

안타까이 봄 소식을 기다려도 봄빛은 마침내 오지를 않네.

봄 빛을 좋아하지 않음이 아니나 오지 아니하면 때가 아닌 탓이지.


향토사학사 위의환 선생과 김명기 장흥농민회장이 교당으로 방문하셨다. 지난 4월 23일, 위의환 선생이 페북에서 김재계 선생 추모식을 하며 아쉬운 점을 토로 하시길래 ‘돕겠다’고 했더니, 언제 한번 장흥을 방문하라기에 미리 연락을 해두었다. 이럴 땐 페북이 많은 도움이 된다. 위 선생이 재배하는 차와 자신의 지은 책을 선물로 주셨다. 김명기 장흥농민회회장과 함께 오셨다. 김명기 회장은 김재계 선생 집안사람이기도 했다.


김재계 선생 생가터 왼쪽 담장 집은 소설가 한승원 생가

장흥동학혁명 탑을 방문하고 김재계 선생추모제, 항일운동탑 건립 등에 대해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1955년생인 위 선생은 어릴 때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다. 한문 실력을 바탕으로 장흥동학연구에 일가를 이루었다. 2009년 위 선생이 펴낸 두 권짜리『 장흥동학농민혁명사료총서』는 장흥, 강진 전투, 사료번역해설, 연구논저 소개, 현지의 증언전설을 소개하고 있는 아주 방대한 책이다. 장흥의 6개 시민사회단체를 포괄하면서 장흥천도교도 참가하고, 유족들도 참여하는 ‘성암김재계선생기념사업회’가 새롭게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추석을 앞두고 장흥 읍내 곳곳에는 ‘어머니 품 같은, 장흥’이란 현수막이 걸렸다. 두 밤을 지낸 장흥교당은 어머니 품 같은 곳, 교당에서 바로 보이는 해발 518 미터의 제암산, 그 아래 펼쳐진 더넓은 석대들과 석대들에 담긴 동학 이야기, 아담하게 흐르는 탐진강,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 그리고 기념탑. 동학, 천도교가 새롭게 도약을 하기 위한 조건을 착착 갖추어 가고 있는 장흥을 뒤로 하고 장흥의 여러 동덕들과 다시 만날 기약을 하였다. 

(사진출처 : 동학으로여는 세상블로그, 강제윤블로그, 위의환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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