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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18. 2018

당신이 걸었던 길, 걸음걸음마다 깊이

-항일투쟁 숨은 주역 최운산 장군의 손녀 최성주

글 | 신채원·사진 | 정찬웅 [개벽신문] 제68호, 2017년 10월호


 다음을 약속할 수 없는 만남이 있습니다. 그런 헤어짐에는 어떤 인사를 해야 할까 망설이다가 그냥 꼭 안고 돌아섭니다. 눈을 볼 수 없어 그냥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만남이자 이별이니 꽃이 핀들 지는 날 없으며, 꽃이 진 들 찰나인 것. 내 안에 당신이, 당신 안에 내가 그렇게 서로 작은 실타래 하나씩 가지고 있으니 먼 길을 돌아 지금처럼 다시 만날 것입니다. 나의 하늘이, 당신의 하늘이 열러 우리가 기억하는 것을 말 할 수 있을 때까지.


일제치하 무장투쟁 독립항쟁의 최대 승전인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이 두 전투에 대한 기록에선 홍범도, 김좌진, 이범석의 이름이 주로 거론된다. 그러나 이들의 이름 뒤에는 숨은 주역 ‘최운산’(1885~1945)이라는 인물이 가려져 있다. 만주 일대에 흩어져 투쟁하던 독립군들이 1920년 북로독군부라는 이름의 독립군 사령부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함으로써 봉오동·청산리 전투 승전의 기반을 마련한 이가 바로 최운산 장군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는 것이다.


지난 해 장군의 후손을 우연한 기회에 만났다. 생명미디어센터 최성주 대표는 언론운동을 해 온 시민운동가였다. 집회 장소에서, 시민단체 회의 장소에서 우연히 마주친 여러 날이 있었다. 그러다가 최운산 장군의 손녀이며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시간이 흘러 기념사업회가 출범되었고 여러 각 분야에서 독립운동가에 대한 기념사업에 대한 조명이 확산되었고 지난 7월 최운산 장군 순국 71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다녀오면서 그녀가 궁금해졌다.

최운산 장군이 창설을 주도한 연합부대인 대한북로독군부의 편제는 의무부대와 보급부대를 따로 편성할만큼 대규모였다. 대포·기관총·장총·수류탄·권총 등 일본군에 필적할만한 우수한 무기를 보유하고 훈련과 전투에 임했다.

대한북로독군부 총사령관 최진동 장군의 동생인 최운산은 1912년 봉오동에 창설한 자위부대를 모체로 1919년 670명 규모의 군무도독부를 창설했다. 이듬해에는 간도의 크고 작은 독립군 부대를 통합해 대한북로독군부를 창설했다.

‘최운산 장군’의 업적을 정당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최근 많이 나오고 있다. 지난 7월에 창립식을 가진 최운산기념사업회에는 학계, 시민사회, 언론계 인사 50여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이 사업회가 창립되기까지는 할아버지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작업을 벌여온 최운산 장군의 손녀 최성주 대표의 노력이 컸다.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최 대표는 주변 사람들이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고향은 봉오동”이라고 말한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전해들은 할아버지는 그에게 자랑스러운, 그러나 ‘ 비운의 영웅’이었다.


 몰랐다. 정말 몰랐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지금은 잃어버린 그 땅에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수많은 조선의 청년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처절한 전투를 벌여 왔다는 것을.

100년이 지난 오늘 역사의 한 장면, 한 장면을 써 내려간 그들의 후손들에 의해 역사는 다시 이어져 쓰여지고 있다.

“할아버지의 삶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채 묻혀 있는 게 늘 안타까웠어요. 언젠가는 역사학자들이 찾아서 밝혀 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한번 휘어진 역사의 기록이 다시 바로 서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더군요.”


그녀의 할아버지 최운산은 1885년 지린성 연길현 국자가(지금의 연길)에서 태어났다. 청의 군대에서 간부를 지내기도 한 최운산은 농지 경영과 공장 운영, 곡물무역으로 거액의 재산을 모았다. 그는 무장독립전쟁을 하려면 독립군의 규모가 더 커져야 한다고 보고 대종교 지도자 서일 총재와 함께 뒷날 청산리 전투의 주축이

었던 북로군정서 창설을 주도했다. 최운산은 봉오동 서북쪽 서대파 일대 자신의 소유지를 독립군 주둔지로 내주고 단기군사학교인 군사연성소를 설립, 운영을 지원했다. 또 소련에서 구입해온 신식무기로 사병들을 무장시켰다.

최운산 장군은 1923~45년에 여섯 차례 투옥과 고문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산은 대부분 군자금으로 소진했다. 최운산이 사망한 것은 광복을 불과 한 달여 앞둔 1945년 7월5일이었다. 

 최운산 장군은 죽음이 임박해오자 “내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 일생 동안 나라를 위해 헌신했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고 의롭게 살고자 했으니 부끄러움이 없다. 시대가 격변하고 있고 우리나라의 해방이 얼마 남지 않았다. 너희 형제들이 지금은 모두 고초를 겪고 있지만 크게 잘못되는 일은 없을 것이니 너무 염려 말라”고 유언했다.


봉오동반일전적지


최운산 장군은 1977년 대통령표창(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그로부터 십여년 전, 서훈의 움직임이 있었다.

“애초 독립유공자 서훈이 결정된 것은 1961년이었는데 당시 서훈 업무를 맡았던 총무처 직원이 아버지(최운산의 장남)에게 뒷돈을 요구했고, 이에 격분한 아버지가 주먹을 날려 서훈이 취소됐어요.”

그런 시절이었다. 큰 권력을 가진 자 밑에서 그 권력을 나누어 받아 다시 자잘한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때였다. 아버지는 주먹을 날린 사실에 대해서는 후회했지만 총무처 직원의 요구 조건에 응하면서까지 서훈을 받아 할아버지와 증조부의 삶에 오점을 남길 수는 없었다. 결국 나중에 최운산의 부인 김성녀씨가 1969년 진정서를 내고서야 서훈이 받아들여졌다.

할아버지의 삶에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그리고 장군의 손녀로 살아온 삶은 어땠을까? 한겨레 신문을 통해 비운의 영웅 최운산 장군의 이야기를 연재하기 시작한 이야기부터 물었다.


한겨레 신문에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연재하고 계시던데 어떻게 이 이야기를 세상에 알릴 생각을 하셨나요?


워낙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아버지께서 들려주신 봉오동 이야기, 그리고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 증조할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어요. 아버지께서 이야기하시는 것을 좋아하셨거든요. 내가 어릴때부터 들었던 그 이야기를 기억하지 않기 위해 한겨레 신문에 연재를 시작했어요.


오래된 이야기이고 자료를 찾은 일도 힘드셨을 것 같아요. 그리고 아버지가 아닌 할아버지와 증조 할아버지 이야기인데, 와 닿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렇지 않아요. 내 가족의 이야기인데 와 닿지 않을 수 있나요? 우리는 어릴 때부터 매일매일 듣는 이야기였어요. 밥상이 들어오면 항상 이야기가 시작되었어요. 화제가 다양했지요. 우리 집안의 이야기가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있어요. 어떤 날은 증조할아버지 이야기, 어떤 날은 할아버지 이야기, 워낙 식구도 많았고요.


아버지께서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의 이야기를 후손들에게 전하고 싶으셨나 봐요. 주로 어떤 이야기들을 해 주셨나요? 어릴 때부터 집안의 이야기를 듣고 자라셨으니 ‘장군의 자손’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갖고 사셨을 것 같아요.


아버지가 1.4후퇴때 내려오셨으니 피난 중에 일어났던 이야기도 많이 들려주셨지요. 아주 드라마틱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늘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일 때면 화제를 끌고 나가셨어요. 그리고 나는 원래 이야기 듣는 걸 좋아했던 것 같아요. 드라마를 좋아하는 것처럼요. 내 가족의 이야기라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하시는 이야기의 스토리 자체가 재미있어요. 거기에 푹 빠져서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나는 어릴 때 부터 ‘장군의 손녀다’ 이렇게 생각하진 않았어요.

자연스럽게 역사의식이 내재화 된 것 같아요. 훌륭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생각보다는 내 할아버지는 어땠고, 또 나도 그 시대에 살았으면 그렇게 살았겠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물론 아버지가 본인의 아쉬움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한 집안에 태어났는데 할아버지 서훈 받은 것 말고는 역사적으로 특별히 하신 일이 없어서 본인의 소회 이야기를 들을 때도 가슴이 아팠죠. 과거에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역사의식, 시민의식을 갖게 되었죠.


아버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니까 정말 생생하게 들려주셨을 것 같아요.


아버지의 이야기는 듣는 재미가 있었어요. 아버지가 역사에 해박하셨거든요. 우리나라 근현대 뿐만이 아니라 세계사에도 많은 지식을 가진 분이셨고 아버지는 살아있는 역사책 그 자체였어요. 나는 국정교과서 세대니까 학교에서 배운 이야기를 하면 아버지가 정사와 야사를 구분해서 다 알려주셨어요. 고3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으면 사학과를 갔을텐데 지금 생각해도 참 아쉬워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살림하느라 대학을 못 갔거든요. 어머니 간병하면서 아침에 병원에서 학교로 가고 아버지와 나랑 둘이서 어머니 간병을 하면서 살림도 했죠.


이루고 싶은 꿈이 참 많았을 나이인데, 그 시절을 건너 온 많은 분들이 그렇듯 집안을 일으키느라 헌신하는 삶을 택하셨군요.


어머니가 병원에 계시면서 병간호를 하는데 그때 간호사가 참 괜찮은 직업이라는 걸 알았어요. 나는 마지막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람의 마지막을 돌보는 간호사 헌신적인 모습들을 보면서 아무나 할 수 없는 직업 같았어요. 그래서 나도 간호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졸업하고 간호사가 되었어요. 결혼해서도 간호사로 일했죠.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지금은 언론운동, 시민사회운동을 하고 계시는데, 전혀 다른 길이잖아요.


새로운 삶에 적응하고 살아야하기 때문에 그런 여유가 없었는데 서울에 정착해서 살면서 시민이 세상을 바꾸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어요. 시민의 각성이 곳곳에서 퍼지던 시기였죠. 그럼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죠. 아이도 좀 컸고 여유가 생긴 거죠. 그때 경실련이라는 단체가 생겼어요. 전문가들이 역할을 잘 해서 세상이 바뀔 수 있도록 나는 회원이 되어 회비를 내고 그 사람들이 전문가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하겠다고 전화를 했어요. 회원이 되겠다고요. 그렇게 경실련의 회원으로서 시민사회 활동을 시작했는데 몇년 뒤에 경실련에서 전화가 왔어요. 방송 모니터 팀을 만드는데 같이 일하자고요. 그래서 나는 그쪽 일을 한 사람도 아니라서 잘 모른다고 했죠. 그런데 그 쪽에서 방송이 뭔지, 모니터가 뭔지 알고 시민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 말이 와 닿았어요.


이제 조금 이해가 되기 시작했어요. 경실련, 방송 모니터 팀, 그리고 언론개혁운동까지. 재미있는 일도 많았을 것 같아요. 어떻게 생각해 보면 그 시절 만주에서 전쟁을 이끌던 장군의 DNA가 그렇게 인연이 되어 이어져 내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요.


경실련이 생기고 나서 회원이 되겠다고 전화한 사람이 내가 처음이었다고 해요.

손목 끌려가서 활동하는 사람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전화한 사람이요. 모니터 팀을 만들 때 나에게 전화를 했고, 그때 제가 마침 직장을 그만뒀어요. 부천 성가병원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잠깐 쉴 때였어요. 그럼 한번 가보겠다고 하고 방송모니터를 시작했어요. 정말 재미있게 일했어요. 그때 시민단체에 대한 이해가 커졌고요. 경실련이 큰 단체잖아요. 몇 명이 모여서 하는 단체가 아니고요. 일반 시민이나 아주 작은 단체가 비평문을 써서 말했다면 아무도 안 들어줬을 거예요. 그런데 경실련이다 보니 방송에도 많이 다뤄졌죠. 조금 큰 단체는 사회에 영향

을 줄 수 있다는 걸 알았고 성실하게 일을 했더니 모니터 팀 회장이 되더군요. 그러면서 여러 시민사회 활동을 어떻게 하면 사랑으로 할 수 있을까. 그게 제 시민사회운동의 모토였어요. 보통 그런 데서 하는 일들은 비판이 많은데 그 안에서 문제제기로 그칠 수도 있는 일을 그렇게만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제작자들도 애정을 가지고 방송을 만들어가는 건데, 나 역시 애정을 가지고 비평과 비판을 했어요. 그때 느낀 것이 시민들이 방송이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모른다는거였어요. 방송의 본질을요. TV는 우리를 즐겁게 한다는 것으로만 만족하면 안

된다고 생각 했어요. 그때 교육프로그램도 시작했죠. 같이 일할 사람도 만들었고 기본 교양을 주는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었죠.


현재 언론개혁시민연대 대표를 맡고 계신데 그런 시민운동을 적극적으로 해 오신 데 할아버지의 영향도 있나요?


그럼요. 당연히 그렇죠. 저는 할아버지의 삶을 닮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삶을 닮고 싶어 하셨고 우리 형제들 모두 그런 아버지의 뜻을 보고 들으며 자랐기 때문에 그런 삶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죠.


조금더 먼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1983년에 이산가족찾기를 통해 고모와 삼촌을 찾으셨다고 들었어요.


아버지가 1.4후퇴때 남쪽으로 내려오셨거든요. 이산가족찾기 방송이 시작되었을 때 우리도 TV 앞에서 온 가족이 울면서 그 프로그램을 봤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신청을 안 했어요. 혹시라도 그쪽에 살고 계신 고모와 삼촌에게 피해가 갈까봐서요. 그러다가 이산가족찾기는 “중공에서 찾습니다”라는 프로그램으로 전환을 해요. 그쪽은 공산주의 사회였잖아요. 중국까지 신청해서 될 거라고 생각도 안했고요. 북한에 고모가 살고 계셨는데 고모부가 공산당의 간부였어요. 아버지 친구 분이셨고. 고모가 공산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 형제가 있

다는 것이 알려지면 좋지 않을 것 같았다고 하셨어요. 아버지가 평양방송국 아나운서였거든요. 그래서 그 체제를 알고 계시니까 신청을 안 했고 그냥 울면서 프로그램만 봤죠. 우리와 수교 전이어서 ‘중공’이라고 불렀는데, 그 중국에 있는 우리 동포들의 이야기를 늘 가슴아프게 지켜봤어요. 그러던 어느 날 방송에서 저희 집을 찾는 날 그날, 무슨 일이 있어서 그날만 방송을 못 봤어요. 그런데 아버지의 친구 분들이 아버지 이야기를 들어 왔으니까 아버지의 이야기라고 전화로 알려주셨어요.


정말 극적인 순간이네요. 얼마나 가슴이 벅찼을까요. 이야기를 듣는 저에게도 그 설렘과 흥분이 전달되는 것 같습니다.


피난민들이 살던 부산 대청동에 살았으니까 아버지의 스토리가 비슷하니까 전화가 오더군요. 그래서 확인해보니 아버지의 옛날이름도 확인했고 중국에서 큰고모가 살아계셨고 아버지 막내 남동생, 여동생이 살아 있다는 연락이었어요. 아버지는 그때 60대였고 1.4후퇴 때 이후 33년 만에 만난거죠. 전쟁 중에 평양에서 없어진 거니까. 아버지는 혼자 피난 갔다가 전쟁 끝나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영영 못만난 거예요. 큰오빠가 평양에서 태어났고 할머니가 평양에 다니러 왔다가 전쟁이 났는데 어머니가 졸졸 쫓아다니셨데요. 헤어지지 않겠다고요. 아이를 들쳐 없고 평양에서 거제까지 걸어서 함께 피난을 온 거예요. 우리집의 피난 스토리만 해도 드라마틱해요. 우리식구들이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싶을 정도로요.

그렇게 우리가 부산에서 정착하고 살았던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에게는 북에서 살다 왔다는 긴장감 들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가족들끼리 앉아서 이야기를 매일 하셨어요. 의식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고요. 오늘은 이 얘기 내일은 저 얘기, 친척들 이야기.. 큰 살림을 하던 집이었으니까 이야기가 많았어요. 독립군 이야기도 끝이 없었고요. 독립군 밥 해먹인 할머니의 이야기도 굉장했어요. 한 끼에 3천명의 밥을 해 먹인 적도 있다고요. 할아버지 개인이 설립한 부대가 670명이었어요.



최씨 일가를 한번 정리해보죠. 큰아들이 최진동, 선생님의 할아버지 둘째아들 최운산, 셋째아들 최치홍, 넷째 아들 최명철 이렇게 되네요. (가계도를 그리면서 물었다.)


원래 명록, 명길, 명순, 명길. 이렇게 명자 돌림이었는데 독립운동하면서 그 이름들로 활동하신 거죠. 그런데 실제로는 더 많은 이름들로 사셨어요. 증조할아버지 최우삼씨는 연변 도태였어요. 도태는 직책인데 연변 도지사 정도였어요. 최우삼과 전주이씨 부인이 계셨죠. 할머니 전주 이씨는 고종과 인척관계인 분이셨어요.. 왕족이었죠. 그래서 증조할아버지에게 기죽지 않고 아들 셋을 낳을 때까지 싸우면 서울로 가곤 하셨다고 해요. 증조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겐 할아버지잖아요. 조선시대 선비 같았다고 해요 수염이 길고요. 여기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들려드리면 어느 날 증조할아버지가 기생집을 다녀오셨는데, 증조할머니가 증조할아버지 수염을 잡아당겨서 수염이 빠졌다는 거예요. 그러고는 친정으로 도망가셨다고 해요.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였어요. 우리 할머니들도 참 대단하신 분들이에요. 그 위로 고조할머니는 더 기가 대단한 여인이었어요. 증조부 최우삼의 어머니는 청주 한씨였어요. 증조 할아버지가 연변 도태였기 때문에 청나라에서 간도에서 내쫓고 전쟁을 벌였죠. 무력충돌에서 패하고 두만강 건너서 도망을 가요. 그때 청나라 군이 아들, 최우삼을 못 잡으니까 그 어머니를 잡아가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그 할머니가 청나라 군에게 호통을 치셨다고 해요. 한 군인이 기가 죽지 않으니까 감동을 받아서 옥사에 아침저녁으로 와서 문안들 드렸다고 하더군요. 또 경신참변 때 봉오동의 집이 다 불탔는데 그때 집에서 당신은 못 나가니까 나도 같이 태우라고 집 안에 앉아계셨다고 해요. 증조할머니가 버티고 있었는데 이웃에 살던 중국 사람들이 구하셨다고 해요.

할아버지들의 기질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아요. 지금 말씀드린 이야기가 바로 ‘도태의 난’이라는 사건입니다.  (‘도태의 난’이라고 불렸던 최우삼의 무력충돌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간도지역이 원래 조선의 땅임을 천명하고 고토회복의 의지를 마음에 담았던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중국의 군사력을 모르는 바 아니나, 그 당시 모종의 정세변화를 이용하여 목숨을 걸고 간도가 우리 조선의 땅임을 드러내 알리려고 군사행동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군사적 열세로 패하였고, 최우삼은 전통무술 고단자인 지인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명록과 명길 두 아들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피신하였다 그러나 어머니 청주 한씨가 대신 잡혀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돌아와 자수하고 감옥에 갇히게 된다. 가족들은 모든 가산을 정리하여 세 항아리의 은자로 최우삼의 목숨을 구했고, 이후 가족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정말 우리가 알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가 참 많습니다. 자료조사 하면서 많은 사실들을 발견하셨다고 들었어요.


최근 독립관련 서적을 읽다가 ‘총대’라는 말을 보았어요. 북로군정서 중국인 총대를 만날 때의 태도에 관한 기록이었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그 일을 하셨다고 해요. 그리고 아시는 것과 달리 만주 쪽은 훨씬 산업화가 빨리 되었고 해요. 남한은 농사를 짓고 있었고 북한은 공장을 짓고 있었거든요. 할아버지가 운영했던 공장도 여러 개였다고 해요. 할아버지의 공장은 국수공장, 콩기름공장, 술 공장, 성냥공장, 비누공장 등 생필품 공장을 하면서 만주의 거부였고 그 많은 돈을 독립운동에 쓰신 거죠. 아주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려야 했어요. 독립운동을 하는데, 혼자 오지 않거든요. 아이들, 친척들이 따로 밥을 먹지 않았고 부대밥 이라고 하죠. 종치면 가서 먹어야 합니다. 나팔을 불면 일어났고요. 3천명의 밥을 했다는 것이 틀린 말이 아니었어요.

할머니가 남긴 기록에 봉오동 전투의 규모, 대포와 수류탄이 얼마나 있었는지, 병사가 몇 명이었는지, 몇 명이 죽었는지 조직도가 어땠는지 상세하게 나와 있어요. 1919년 3·1운동 이후에 애국 열기가 모여들면서 많은 젊은이들이 만주로 갔어요. 거길 가면 독립운동을 할 수 있다고요. 여러 부대가 생기게 된 배경이었어요. 그들이 다 맨 몸으로 왔죠. 그사람들을 무장시키고 군사학교를 열어 훈련시키는데 들어가는 비용들을 할아버지가 전 재산을 털어 쓰신 거예요.


독립운동가 최우삼 기념비 제막식


최운산 장군을 그림으로만 뵈었지만 눈빛에서 굉장한 기운이 느껴지고, 그 눈빛이 많은 이야기를 담고 계신 것 같아요.


우리 할아버지는 굉장한 페미니스트였어요. 여자가 잘 되어야 집안이 잘 된다고했고 딸을 교육을 시켜야한다고 하셨대요. 할머니를 인격적으로 대했고요. 따뜻한 이야기도 있어요. 겨울에 눈이 오면 슬그머니 나가셔서 장독대의 눈을 치워주고 오셨다고 하더군요. 고모가 할아버지 얼굴을 기억하지 못 할만큼 밖으로 많이 일하셨다고는 하지만 할머니와 굉장히 돈독하고 다복하게 사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도 스스로 아버지의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어요. 참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증조할아버지의 묘를 찾은 일이에요. 아버지가 늘 봉오동에 가서 증조 할아버지의 묘를 찾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산소를 알려주시겠다고. 당신밖에 모른다고요. 흑송 세 그루 아래에 묘가 있다고 하셨어요. 조카가 살고 있지만 공산치하에서 묘를 찾았을리 없으니까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2~3년 전쯤 다녀오셨어요. 마지막으로 하신 일인 거죠. 깔끔한 성격이었어요. 그런데 정말 그 묘 뒤로 흑송 세 그루가 딱 있었어요. 놀라운 순간이었죠.


직접 비석도 세우셨죠? 한국식으로 묘비를 세우셨다고 들었어요.


봉오동의 역사를 아는 우리가 중국식 비석을 세울 수가 없었어요. 우리식의 비석을 세우려고 크레인까지 동원되었고 묘비문도 한글로 새겼죠.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정말 이 일을 하고 싶으셨을 거예요. 그런데 살아생전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거예요. 저희 형제들은 모두 아버지가 하셨을 것 같은 일을 하는 거예요. 봉오동에 산소를 찾으러 갔다 오셔서는 신부전증이 심해져서 투석하고 못 움직이시고 1년 반 정도 계시다 돌아가셨어요. 그때 우리 형제들은 모두 우리는 각자 인생에서 제일 바쁜 시기를 보냈고요.

우리가 할아버지 일을 하면서 세운 기준이 있었죠. 아버지가 좋아하실 것 같은 방향으로 결정했고요.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셨는데, 일생을 걸고 그걸 하셨는데, 그 이야기를 다 아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 그걸 못하면 안 된다. 아버지가 얼마나 이렇게 하고 싶었을까. 저희 형제들은 아버지의 대리자같은 기분이었어요.


큰할아버지 최진동 장군의 친일논란도 있었죠. 후손으로서 밝혀야 할 입장이 있을 것 같습니다.


최씨 일가에 재산도 많았고 이 사람 하나를 무너뜨리려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협박하고 고문하고 그랬다고 해요. 큰 할아버지에게는 어린 후처가 있었는데 그걸 감당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최씨일가의 시련인 거죠. 문화혁명 때 대대적 숙청을 하면서 지주였던 사람들의 역사를 지웠어요. 묘도 파서 없애기도했고 가혹했어요. 그래서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몰라야 했고 후손들은 공산치하에서는 꺼낼 수도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할아버지를 밟고 살아갔어야 했죠. 공산당에 충성하고요. 연변 사학자들은 그런 기록을 가지고 연구했기에 손자가 할아버지가 친일을 했다고 한 기록을 논문으로 발표했죠. 최진동 장군이 1941년에 돌아가시는데 문화혁명은 1960년대잖아요. 후손은 그 분의 역사를 모르죠.


지금 이렇게 기념사업회도 만들고 학자들에게 다시금 학술적 기반과 역사적 기록들을 제공하시는 것을 보니 최씨 일가가 다시 집안을 일으키는 순간이 오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재작년에 처음으로 자료조사를 직접 했어요. 동생과 함께. 늘 하려고 했던 일이었는데 지금 우리세대가 아니면 못하는 일 같았어요. 연구자들은 깜짝 놀라곤 합니다.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학자들도 놓친 부분들이 많았을 겁니다. 도서관에 찾은 자료와 기록을 많이 보여줬어요. 그렇게 연구가 새로워질 수 있었고 받아들인 사람들은 좋아하고 기존의 자료들을 반박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많죠.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에서 연구를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독립운동사가 너무 사람중심으로 연구되어 있고, 사건 중심으로는 연구되지 않았다고 해요. 자료도 많지 않고요. 연구할 과제들을 제공할 수밖에 없어요. 할아버지의 역사는 왜곡되었지만 봉오동전투가 있었기에 기억하지만 증조할아버지에 대해 묻혀있었어요. 그때의 역사는 하나도 없어요.


최근 근현대사를 다룬 영화나 콘텐츠가 많은데 만약 최운산장군의 삶을 다룬다면 어떻게

다뤄야 할까요?


우리는 우리가 독립운동이 그야말로 의기 하나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한다고 생각해요. 애국심 하나로 다 무찔렀다는 것은 불가능했어요. 우리 할아버지에 대해 정리하고 싶은 것은 그런 부자가 있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사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서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도 있다는 것, 이회영 일가처럼 최씨 일가도 있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할아버지는 10대 때 독립운동에 뜻을 세우고 돌아가실 때까지 했어요.

아버지가 할아버지 서훈 신청을 할 때 1945년 7월 5일에 돌아가셨는데, 독립운동을 언제까지 했는지 쓰는 데, 7월 4일까지라고 적었어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라고 보는 거죠. 그만큼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삶을 존경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할아버지의 형제들이 끝까지 힘을 합쳐서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이 분들의 우애였다고 생각해요. 대의를 위해 큰 아들을 중심에 세우고 동생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그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한 거죠.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가 생기면서 하시는 활동이나 연구들이 공신력을 갖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여쭙겠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들은 모든 것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바치셨어요. 그런 절박함이 우리를 밀었어요. 우리 형제들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고 보니 더 늦으면 누가할까 싶고 우리도 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거기에 역사적 사실과 검증해 주실 학자 분들도 관심을 가져 주셨고요. 학술책임을 맡아주시는 분들이 학계에서 인정받는 독립운동사를 연구하신 분들이에요. 감사하죠.

우선 그 역사적 사건들과 그분들의 삶이 학술적으로 정리 되어야 하고 사회상과 시대상 잘못 알려진 것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가족사를 통해서 말해주는 시대상, 사회상, 경제력 등 독립군의 규모와 체제도 다시 연구해서 밝혀야 하고요.


최성주 약력

현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이사,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생명미디어센터 대표. 전 케이블협회 시청자협의회 위원, 전 서울시교육청 정보공개위원회 위원장, 전 방송통신심의 위원회, 광고특별위원회 위원, MBC 시청자위원회 부위원장,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 상임이사, 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상임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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