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여에서
신동엽 문학관에서 일하는 김형수 작가와 인연이 되어 부여에 갈 일이 종종 있었다. 예전에는 정림사지의 단아한 풍경과 궁남지의 연꽃을 카메라에 담고 오기에 바빴다. 뜻하지 않게 부여에서 새로운 인연들이 생겨나고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풍경마다 상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풍경을 풍경으로 보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상처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바로 그 즈음에 ‘한국 토착사상 기행 사진전’을 하지 않겠느냐고 김형수 작가가 제안했다. 제안을 받는 순간, 그 의미가 무언지도 모른 채 그저 고맙기만 해서 ‘덜컥’ 하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덜컥’이 점점 무거워졌다. 사실 나는 한국 토착사상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아니다. 그에 대한 공부를 깊이 해본 적도 없었다.
천성산 적멸굴 경남 양산시 합북면 천성산 내원골
1856년 4월 최제우의 나이 33세. 양산 천성산千聖山 내원암內院庵에 들어가 49일간 기도를 시작했다.
이 기도는 숙부(최섭)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47일 만에 중단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857년 6월에 수운은 적멸굴로 갔다. 적멸굴은 내원암 조금 아래쪽 계곡을 건너 북쪽 능선을 따라 거의 정상 부근까지 올라간 곳에 자그마한 대나무 숲속에 자리잡은 자연 동굴이다. 원효대사가 기도를 했던 수행처로 알려져 있다. 동굴 입구는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한 입의 형상이고 안에는 석간수가 고인 작은 물웅덩이가 있다. 수운은 여기에서 단을 쌓고 49일 동안 기도했다.
먼저 책을 여러 권 읽었다. 수운 최제우에서부터 소태산에 이르는 한국 토착 사상의 계보를 익히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사상의 깊이에는 가닿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내 공부가 근본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내 눈으로 읽고 본 것만 얘기하기에도 벅차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상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지 않았다. 선천이나 후천을 내가 어찌 보고 만졌겠는가? 그래서 고민이 많았다. ‘사상은 사람살이의 길’이 아닌가 생각했다. 무엇 때문에, 무엇으로, 무엇을 위하여, 무엇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가? 이처럼 인간 내부로부터 끊임없이 던져지는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탐구와 사유를 나는 사상이라고 생각했다. 손에 잡히거나 눈으로 보이는 물성(物性)은 아니지만 삶을 움직이는 ‘그 무엇’인 것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수운 최제우 유허지 울산 중구 원유곡길 106
수운이 초가를 짓고 수도생활을 한 터이다. 수운은 1855년 이곳에서 신통하고 비범한 사람(승려라는 설도 있음)으로부터 비서秘書를 얻어 신비체험을 했다. 이 것을 일러 때 을묘천서乙卯天書라 한다. 더 깊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내원암과 적멸굴에 들어가 본격적인 구도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 때 제선濟宣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우매한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의 제우濟愚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부여에서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볼 때마다 나는 익산 왕궁에 있는 오층석탑을 떠올렸다. 백제처럼 외롭고 쓸쓸한 탑들이다. 백제의 탑들은 ‘옛 터’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 정림사지도 옛 터고 익산 왕궁도 옛터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보면서 바로 여기가 한국 토착사상의 ‘옛 터’이며 동시에 ‘출발’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상은 폐허에서 출발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당나라 군대는 부여를 태워버렸다. 불타오르는 부여를 뒤에 두고 삼천의 아낙네들은 외국의 병사들에게 잡혀 능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죽어 백제 여인의 존엄을 지키고자 했을 것이다. 그것을 역사는 삼천궁녀로 왜곡하여 기록하고 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그 폐허에 남은 돌탑이었다. 돌은 불에 타지 않았으니 말이다.
울산 여시바윗골 초당 (내부) 울산 중구 원유곡길 106
30세가 되던 해 수운은 오랜 방랑을 끝내고 처가가 있는 울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울산 인근의 여시바윗골에 초가집을 짓고 정착했다. 이 초가에서 수없이 많은 기도와 독서를 통해 용맹정진하여 하늘의 내린 명령을 읽어내려고 노력했다. 현재 초당 내부에는 수운의 존영이 모셔져 있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이라고 해도 홀로 존재하는 사상은 없다.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출발하였고, 이슬람은 기독교에서 영향을 받았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레닌과 모택동은 마르크스에게 사상의 빚을 졌다. 사상은 서로 스미고 겹치고 이어져서 어느 순간 우뚝 솟구쳐 올랐다. 그것이 100년 전의 러시아 혁명이고 그 이전의 동학농민혁명이 아니던가. 그리고 후천개벽 사상은 불타던 백제로부터, 아직도 오지 않고 있는 미륵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성화문聖化門 경북 경주시 현곡면 용담정길 135
용담정은 도학으로 이름 높았던 수운의 아버지 최옥이 나이 60이 넘도록 자식이 없어 구미산 계곡에서
시를 읊조리며 살던 곳이다. 최옥은 나이 63세 되던 해 한씨를 세 번째 부인으로 맞아 1824년 10월 28
일 수운을 낳았다. 태어나던 날 구미산이 사흘 동안 진동하였다고 한다. 성화문은 성스러운 공간으로 들
어가는 문이다. 성화聖化는 ‘성인이 되다’라는 뜻이다.
전남 화순에 있는 운주사에는 온갖 종류의 ‘아직 오지 않은 부처들’이 풍화되고 있다. 풍화되고 있는 부처 앞에서 다소곳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언제나 경건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상의 ‘그 무엇’에 희망을 걸고 목숨을 바쳐야 했던가? 인간존재의 근원적인 한계로부터의 구원과 삶을 폐허로 몰고 가는 온갖 억압과 죽임의 제도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며 사람들은 사상의 깃발 아래로 모여 들었다. 그 무엇이 종교이든 혁명이든 중요치 않았다. 어제의 삶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선천이란 지리멸렬하고 지긋지긋하게 빼앗기고 가혹하게 빼앗고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죽였던 어제의 삶이고, 후천이란 서로 사랑하고 나누고 싸우지 않고 굶주리지 않으며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삶’이다. 후천개벽이 뭐 별 것이겠는가?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살자’는 것이 개벽의 삶 아니겠는가. 혼자만의 행복이 아닌 여럿의 행복, 사람만의 행복이 아닌 만물의 조화와 균형에서 오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후천개벽 아닌가 싶었다. 사람들이 계룡산의 산세를 보며 꿈꾸는 이상향도 모두 불행이라는 선천에서 행복이라는 후천으로 가고자 하는 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계룡산이 비치는 호수를 촬영하면서 후천으로 가는 길을 떠올렸다.
용담정 경북 경주시 현곡면 용담정길 135
구미산 용담정은 1860년 4월 5일, 최제우가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 라는 한울님의 계시를 받아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는 결정적인 체험을 한 곳이다. 수운은 이후 시천주侍天主, 곧 사람을 한울같이 존엄하게 섬기고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진리를 널리 알리며 본격적으로 동학을 포교하기 시작했다. 내부에는 수운의 존영이 모셔져 있으며 기도와 공부하기 좋은 구조를 갖고있다.
카메라에는 특수한 방법으로 촬영할 수 있는 기법들이 내장되어 있다. 다중 노출을 할 수도 있고 렌즈를 활짝 열 수도 있으며 빛을 이용해 본래 사물이 지니고 있는 본성을 왜곡할 수도 있다. 카메라 렌즈는 사용하기에 따라서 쓰레기더미를 회화(繪畫)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다. 카메라의 생명은 현장성과 사실성에 있다. 그러나 어떤 작가들은 소나무 한 그루를 잘 찍기 위하여 주변의 소나무를 모두 베어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혼자만 귀한 꽃을 찍고, 다른 사람이 그 꽃을 찍지 못하게 아예 뽑아버리는 사람도 있다. 물론 뛰어난 기법으로 밤하늘의 별들을 아름답게 찍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진정한 사진의 나라에는 위에 열거한 그러한 작가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로버트 카파(1913~1954)나 세바스치앙 살가두(1944~)처럼 위대한 작가들은 현장성과 사실성을 매우 중시했다. 한국에도 실력 있는 사진가들이 참으로 많다. 나는 실력이 뛰어난 작가도 아니고 나름의 독창성을 가진 전문 사진가도 아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이기에 이번 기행에는 현장성과 사실성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정직하기로 하였다.
나는 이번 카메라 기행이 예술사진을 촬영하는 기행이 아니라 한국 토착사상의 현장을 기록하는 기행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기로 하였다. 사실주의의 입장에서 사상이 태어나고 성장하며 널리 퍼져나간 현장을 기록하기로 하였다. 더구나 그 현장들이란 예술을 할 수 있는 풍경이며 정취를 가진 곳도 아니었다.
쓸쓸하고 초라한 사상의 거처 앞에서 나는 다만 최선을 다해보기로 결심하였다.
용추각 경북 경주시 현곡면 용담정길 135
용담정을 지나면 작은 계곡과 언덕이 나온다. 언덕 위로 연결되는 돌계단을 오르면 사각정에 용추각龍湫閣이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용추각 안에는 수운의 부친인 근암 최옥 선생의 문집 목판본이 보관되어 있다. 건물의 형태가 아담하고 담백하다.
2. 수운 최제우 1824~1864년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
최제우는 경상남도 경주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일찍부터 경사(經史)를 익혔으나 극심한 가난이 유년기를 사로잡았다. 13세의 나이로 울산의 박씨(朴氏)와 혼인하였고, 17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삼년상을 마친 20세에는 집안 살림을 돌보기 위하여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갖가지 장사를 하거나 환자를 치료하였고 점을 보기도 하였다. 가끔씩 서당에서 훈장 노릇을 하였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하늘의 명을 일러 성이라고 한다. 중용 1장에 나오는 말이다. 최제우는 세상이 이토록 어지럽고 각박해지는 이유를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 천명에 대해 공부하기로 하였다.
천명을 공부하기 위하여 그는 맨 먼저 서책을 놓았다. 서책을 놓고 하늘과 땅을 날것으로 만나는 공부를 시작하였다. 1856년 여름 천성산(千聖山)에 들어가 하늘과 땅을 정면에서 전면적으로 만나면서 시작된 그의 구도(求道)는 1857년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 동안의 목숨을 건 기도로 이어졌다. 적멸굴에서 나와 울산에서 공덕을 계속 닦았고, 1859년 10월 처자와 함께 경주 구미산 용담(龍潭)으로 돌아와 수련을 계속하였다.
최제우의 가난은 거의 절망적인 상태였다. 가난은 최제우뿐만 아니라 세상의 문제였다. 조선은 부패와 탐학으로 몰락 직전이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집단은 더욱 욕망을 크게 키워 나갈 뿐 공동체의 삶을 돌보지 않았다. 이러한 때 그는 한울이 명한 것을 알아내야 세상을 고칠 수 있다는 것에 희망을 걸고 이름을 제우(濟愚)로 고치고 더욱 정진하였다.
1860년 4월 5일 한울님께 정성을 드리던 중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하여졌고 하늘과 땅이 크게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공중에서 들려왔다. 이러한 체험을 통하여 그는 동학을 창시하였다. 1861년 포교를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이 동학에 입교하고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다. 동학이 점점 세력이 커지자 경주 지방의 유림에서 동학은 곧 서학이며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모함하였다. 조정에서 서학을 강력하게 탄압하자 최제우는 1861년 11월 호남으로 피신하였다.
남원의 은적암(隱寂庵)에서 다섯 달 동안 머물면서 동학론인「 논학문(論學文)」을 집필하였다. 1862년 5월 경주에 돌아와 포교에 전념하여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1862년 9월 혹세무민의 죄로 경주진영(慶州鎭營)에 체포되었으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몰려가 석방을 청원하니, 무죄 방면되었다.
동학도가 점점 늘어나게 되자, 그 해 12월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接主)가 관내의 교도를 다스리는 접주제를 만들었다. 경상도와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교세가 확대되어 1863년에 교인은 3,000여 명, 접소는 13개에 이르렀다.
그해 7월 최시형(崔時亨)에게 해월(海月)이라는 도호를 내렸고, 8월에 도통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다. 11월 20일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심문받다가 3월 10일 41세의 나이로 참형되었다.
최제우는 천명을 한울님으로 파악하였다. 그의 한울은 곧 사람이었다. 하느님은 초월적 존재이지만 부모님처럼 섬길 수 있는 인격적 존재이며, 또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하느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최제우의 한울님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과 동시에 인간 밖에 존재하는 하느님이다.
남원 교룡산성 전북 남원시 산곡동 16-1
남원 시가지를 동쪽으로 바라보는 518m의 교룡산 정상과 동쪽 아래로 형성된 계곡에 걸쳐 축조된 성으로 현재 성문터와 옹성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돌로 쌓은 산성의 둘레는 총 3,120m이다. 성내에는 685년(신문왕 5년) 창건된 선국사가 있다. 선국사 오른쪽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동학군과 의병들의 군기터로 짐작되는 장소가 보인다. 군기 터에서 위로 더 오르면 수운이 기거했다는 은적암 터가 나온다.
3. 일부 김항 1826~1898년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影動天心月)
김항은 충청남도 논산군 양촌면 남산리에서 태어났다. 김항은 손이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학자풍의 모습으로 어릴 때부터 착한 성품을 보여주었다. 양보를 잘 하였으며 글을 익히고 쓰는 재능이 뛰어났다. 특히 글 읽기를 좋아하여 학문의 깊은 곳까지 곧잘 들어가 성리학과 예문(禮文)에 조예가 깊었다.
과거를 보거나 관직에 뜻을 두지 아니한 것은 순조와 철종 연간의 정치가 부패와 탐학으로 일관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한다. 새로운 문명은 철저하게 배제하고 오직 가문의 집권만을 정치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았던 세도정치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김항은 관촉사 은진미륵 앞에서 자주 기도하며 민중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소망하였다.
20세에 여흥민씨와 결혼하였다. 결혼 이후에도 입신양명의 공부에는 일체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로지 성리(性理)를 깨닫고자 하는 공부에 전념하였다. 36세가 되던 1861년에 관직에서 은퇴한 연담(蓮潭) 이운규(李雲圭)가 인근에 정착하자 그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수운 최제우(崔濟愚)와 광화 김치인(金致寅)이 동문이다. 나중에 수운은 동학을 창시하였고, 광화는 이운규의 남학을 이어받았다.
이운규는 김항을 가리켜 공자의 도를 이어받아 장차 크게 천시(天時)를 받들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어느 날「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이라는 오언절구를 던져 주고는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김항은 이운규가 남긴 오언절구를 화두로 정진하였다. 김항은『 서전(書傳)』과『 주역(周易)』을 탐독하고 영가(詠歌)와 무도(舞蹈)
를 통한 정신의 개발 등에 정진한 끝에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1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공부한 끝에「 정역팔괘도(正易八卦圖)」를 그리게 되었고「 대역서(大易序)」를 완성하였다.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
‘그림자가 천심월을 움직인다.’라는 뜻이다. 천심월에서 천심이란 우주의 중심을 의미하고 월이란 빛을 의미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림자는 빛이 없으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영동천심(影動天心)’이라고 할 수 없다. 천심이 중심이라 면 영은 변두리고, 천심이 빛이라면 영은 그림자며, 천심이 빛이라면 영은 그늘이다. 김지하는 이를 두고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고 하였다.
그는 조선 후기 후천개벽사상을 집대성한 『정역(正易)』의 저술에 들어갔다.
『정역』을 저술하고 있을 때 국사봉 정상 부근에 있는 향적산방에 거처를 정하고, 거북바위 아래 작은 바위굴에서 기도하며 수행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정역』을 배울 것을 청하여 제자들이 생기게 되었다. 이후 제자들이 신종교 영가 무도교(詠歌舞蹈敎)를 창시하였지만 직계가족과 유교적 성향의 제자들은 이를 인
정하지 않고 있다.
김항은『 정역』을 통해 후천개벽의 사상을 열었다. 그것을 ‘후천역(後天易)’이라고 한다. 또 선천과 후천이 서로 맞물릴 때에 큰 재난이 오기 때문에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닦아야 한다고 했다.
은적암 터 전북 남원시 산성길 239
수운은 1861~62년 사이 덕밀암에서 한 해 겨울을 보냈다. 덕밀암의 방 한 칸을 얻어 지냈는데, 그 방의 이름을 수운은 은적암이라고 불렀다. 수운은 그 방에서 <논학문> 등을 집필했고 칼노래를 부르며 칼춤을 추었다는 기록 등이 있다. 1894년 동학혁명 당시 김개남 장군이 전투를 치른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잡목만 무성한 채 공터로 남아있다.
4. 증산 강일순 1871~1909년
우주의 가을시대로 돌아간다(原始返本)
강일순은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연월리 신송마을에서 태어났다. 옛 지명으로 는 고부군이다. 어려서부터 비범한 일화가 많은데 무릇 위대한 인물을 구성하자면 그러한 이야기가 전해오기 마련이다. 일종의 상징으로 여기면 된다.
강일순은 천재였다. 천자문에서 하늘 천(天)과 땅 지(地)만 한 번 읽고 그 이치를 깨달았다고 한다. 일곱 살에 “멀리 한 발 내딛으려 하니 땅이 꺼질까 두렵고, 크게 소리치려 하니 하늘이 놀랄까 두렵구나. 遠步恐地坼 大呼恐天驚” 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열다섯에 유랑을 시작하였다. 고향을 떠나 떠돌면서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탐학, 도탄에 빠진 백성의 삶,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백성들의 열망과 동학운동을 보고 들었다. 두어 해의 유랑을 마치고 돌아와 스스로 증산이라 하고 스물한 살인 1891년에 결혼하였다.
1894년에 전봉준이 찾아와 도움을 청하였으나 “때가 아니니 나서지 말라.”며 “성사도 안 되고 애매한 백성만 많이 죽을 것이라.”며 오히려 만류하였다. 스물일곱이 되는 1897년에 다시 전국 유랑을 시작하였다. 폐허가 된 조선을 직접 보고 1900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1년 모악산 대원사의 방 한 칸에 창문을 봉하고 49일 동안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공부한 끝에 김형렬의 집에 거처를 정하고 천지공사를 시작한다. 천지공사(天地公事)란 천지인 삼계(三界)를 다 뜯어 고치는 공사라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상극(相剋)의 세상을 상생의 세상으로 바꾼다는 뜻이다.
강일순은 후천개벽(後天開闢) 원시반본 사상을 펼쳤다. 선천은 봄과 여름이며 만물이 태어나고 자라는 시기이며, 후천은 가을과 겨울이며 만물이 성숙해지며 열매를 맺는 시기이다. 후천개벽은 양의 시대에서 음의 시대로 개벽되어 생명의 성숙과 상생의 미륵세상을 이루는 시기이다. 원시반본에서 원시는 후천이며 우주의 가을시대를 뜻하고, 반본은 본성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강일순이 천지공사를 하자 김제 구릿골에 주요 성도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행과 기적을 체험했다고 전한다. 1909년 8월에 사망했다.
강일순 사후, 제자들이 보천교, 미륵불교, 증산대도교, 제화교, 태을교, 고부파, 도리원파, 김병선 교단 등 9개 교파로 갈라졌다. 보천교는 만주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보냈다. 그 사건으로일제는 강증산의 교단과 제자들을 지속적으로 탄압하였다.
1936년 보천교 교주 차경석이 사망하였다. 차천자가 사망하자 일제는 본격적으로 보천교를 탄압하였다. 십일전 건물을 해체하여 일부는 지금 서울 종로에 있는 조계사 건물을 짓는데 사용하였고, 일부는 전주 역사를 짓는데 사용하였다.
5. 소태산 박중빈 1891~1943년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物質開闢 精神開闢)
박중빈은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태어났다. 3세인 1893년, 어머니 등에 업혀 “노루목에 달 따러 가자”고 졸랐고, 4세에 동학군의 존재를 알았으며 7세에 “하늘은 왜 푸를까?”하는 자연현상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9세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왜 다정할까?”하는 의문도 품었다. 10세에 구호동의 서당에 다니기 시작했으나 질문이 많아 훈장을 곤혹스럽게 하고, 그 해 11월에 서당을 그만 두었다.
11세에 선산의 시제에 갔다가 산신이야기를 들었다. 산신을 만나 의두를 풀겠다는 생각으로 구수산 삼밭재 마당바위에서 기도를 시작하여 4년간 계속하였다. 15세에 결혼했다. 16세에는 스승을 찾아 떠돌았다.
박중빈은 결혼생활이나 살림, 글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구도만을 위해 노력하였다. 부친은 그 뜻을 알고
19세인 1909년에는 삼밭재에 초당을 지어 기도하도록 뒷바라지하였다. 20세 10월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큰 충격에 빠졌고 가세는 크게 기울어졌다. 집안의 빚을 갚기 위해 바랭이네를 만나 주막을 열기도 하고, 타리파시에 가기도 하였다.
22세에 ‘장차 이 일을 어찌할꼬?’ 라는 탄식과 함께 집중적인 명상 수련에 들어갔다. 한 생각에 빠지면 그대로 몸이 멈춘 상태로 명상을 지속하기도 하였다. 온몸을 부스럼 등의 피부병이 덮어 사람들은 그를 폐인으로 여겼다. 23세에 노루목 외딴 집으로 이사했다.
마침내 26세인 1916년 4월 28일 이른 아침, 사상의 폐허 위에서 마침내 대각하였다. 원불교에서는 이 날을 대각개교절이라 부르며 창립일로 삼아 기리고 있다. 박중빈은 대각의 내용을 “만유(萬有)가 한 체성(體性)이며 만법(萬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뚜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라고 밝혔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그는 당대의 세계를 흔들던 물질문명의 흐름을 변두리 중의 변두리인 조선의 궁벽한 오지에서 온몸으로 천지(天地)와 접촉하여 깨달았다. 그는 물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인류의 정신을 구원하기 위하여 새로운 종교를 열었다.
방언사업이라고 불린 간척사업을 통해 물질개벽을 이뤄내면서 혈인기도라고 하는 용맹정진을 통해 정신개벽을 이뤄냈다. 물론 방언사업과 혈인기도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물질개벽과 정신개벽 또한 이분법으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개벽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이 계속되는 식민지 시절에 조선인들로 결사체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것 자체가 커다란 독립운동이었다. 일제는 박중빈을 천황 앞에 무릎 꿇리고 일본 불교의 한 종파로 만들고자 끈질기게 노력하였지만 그는 시골 농투성이 노릇을 하며 이를 물리쳤다. 그러나 더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되자 1943년 6월에 열반하였다. 그의 열반은 종교적인 순교였다. 그의 순교를 통해 원불교는 위기를 넘어갈 수 있었다.
6. 또 다른 풍경들
정림사지 5층석탑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백제시대에 건립된 탑이다. 예술적 기품이 뛰어난 아름다운 탑이며 미학적으로도 완성도가 높다. 백제 석탑이 목탑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보여주고 있다. 백제의 탑 형식 중에서 전형적인 석탑이며 동시에 석탑의 시조(始祖)라 할 수 있다.
화순 운주사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승려 도선이 창건하였다는 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1942년에만 하더라도 석불 213좌와 석탑 30기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석탑 12기와 석불 70기만 남아 있다. 10m 이상의 거구의 부처에서부터 작은 부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산재해 있다. 매우 투박한 솜씨로 제작되어 있어 오히려 정겹다. 미륵세상,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염원이 매우 강렬한 곳이다.
계룡 저수지 충남 공주시 계룡면 하대리
1954년 착공하여 1964년 준공된 농업관개용 저수지다. 동쪽은 계룡산과 완만하게 이어지고 있으며 남쪽과 북쪽에는 화강암 구릉지가 있다. 붕어 등 민물고기가 풍부하여 낚시터로 잘 알려져 있다. 전라북도의 모악산과 함께 민족종교가 탄생된 영험한 계룡산이 저수지에 비치고 있다.
솟대
솟대는 삼한시대의 소도(蘇塗) 유풍으로서 ‘솟아 있는 대’이다. 솟대는 긴 장대 끝에 오리 모양의 새를 올려놓아 천지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여 화재, 가뭄, 질병 등 재앙을 막아 주는 마을의 지킴이였다. 솟대를 가리키는 호칭은 솔대, 진대, 오릿대, 대장군영감님, 거릿대, 골맥이성황 등이 있다.
깃발(염원)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
7.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카메라를 메고 신동엽의 이 질문과 함께 이 땅의 토착사상을 기행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신동엽의 질문에 수운은 오래 전에 대답을 내놓았다.
“사람이 하늘이다.”
“사람을 하늘처럼 모신다.”
수운의 대답을 발견하면서 마음이 아팠다. 그렇다. 우리는 날마다 수없이 많은 하늘들을 보고 있다. 농사짓는 하늘, 노동하는 하늘, 비정규직 하늘, 알바 하늘, 취준생 하늘, 왕따 하늘, 굴뚝에서 농성하는 하늘, 일 년 농사를 땅에 파묻는 하늘, 손가락을 잘린 하늘, 휴지 줍는 늙은 하늘 등등. 그런데 우리는 그 하늘을 하늘로 보지 못하고 모두 실패한 사람들 쯤으로 보고 외면하며 살았다.
사상의 거처들은 쓸쓸하고 초라했다. 백년을 견디지 못하고 스러져간 사상들이 있는가 하면 원불교처럼 겨우 백년을 넘긴 사상들도 있다. 강력한 변혁을 추구했던 어떤 사상은 혁명의 길로 나섰고, 기적과 신비만을 추구하는 사상은 끝내 지리멸렬해지고 말았다. 또 어떤 사상은 다른 사상에 영향을 끼쳤지만 겨우 흔적만 남기고 비닐하우스 안에서 초라해진 경우도 있었다. 소태산의 사상은 종교의 회상으로 남아 ‘현하’를 살고 있었다.
토착사상 기행을 하면서 삶의 폐허, 역사의 폐허에서 새로운 꿈을 꾸며 사상이 끊임없이 다시 시작되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민중의 이뤄지지 않는 그 꿈들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 나도 사실은 민중의 하나가 아닌가. 현생에서나 내 생에서나 ‘행복하게 살자’가 모든 사상의 핵심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지금보다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신동엽의 아사달과 아사녀는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만나지 못한 채 하늘만 바라보며 떠돌고 있는 것일까? 이런 유치한 생각들도 해보았다.
카메라에 담아뒀던 사상의 거처들을 꺼내 벽에 걸었다. 빼어난 실력을 가진 사진가가 아니라 많은 날들을 번뇌했었다. 하지만 이미 벽에 걸렸으니…… 이또한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의 책임일 것이다. 따가운 비판보다는 따뜻한 격려를 요청하며 한국 토착사상의 기행을 마친다. 삶에 감사한다.
공존
빈 배 주변에는 갈매기가 모이지 않는다. 어부들이 멸치잡이를 시작하면 갈매기들이 몰려들어 먹이를
얻는다. 새벽 바다에서 펼쳐진 아름다운 삶의 공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