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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y 25. 2019

개벽마을에서 천하를 생각하다 (4)

- 왜 동학이며, 혁명이 아니고 개벽인가

[이 글은 <개벽신문> 제84호, '개벽마을' 코너에 게재된 글입니다.]



강주영 (전주 동학혁명기념관 운영위원)



1. 왜 동학인가?


최근의 개벽파 논의를 벗에게 소개했더니 내게 물었다. 


"왜 동학인가? 왜 혁명이 아니고 개벽인가?"


말과 글은 시대성을 드러낸다. 해월이 말하기를 인오동포(人吾同胞), 물오동포(物吾同胞)라 하였다. 만인만물이 모두 하늘이니 말이나 글도 공평해야 한다. 사람은 남성, 여성이라고 하면서 동물은 수컷, 암컷이라 하는가? 표준 국어대사전은 ‘수컷’을 ‘암수의 구별이 있는 동물에서 새끼를 배지 아니하는 쪽’이라 하였다. 


남성과 수컷에는 인간계와 동물계를 가르는 사고가 있다. 수컷을 사람 남성을 깔보는 뜻으로도 쓴다. 동물은 무엇인가 열등하다.‘짐승’은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몸에 털이 나고 네발을 가진 동물’, ‘사람이 아닌 동물을 이르는 말’이고 제3정의는 ‘매우 잔인하거나 야만적인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 정의하였다. ‘짐승 같은 놈’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을 보면 사람은 만물의 주인이라는 우월감이 넘친다. 미개인(야만인)과 문명인은 물질개벽만을 중심에 두는 제국주의 사고이다. 국가와 국민, 촌놈과 도시인….만인만물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인문의 적폐이다.


‘사전은 문명 비평이다.’라는 야마다 다다오의 철학을 빌리면 이렇다.‘관사’는 ‘관청에서 관리에게 빌려주어 살도록 지은 집’이라고 표준국어대사전은 정의하고 있다. 야마다 다다오는 ‘관사’를 ‘공무원 등에게 부당하게 싼 집세로 제공하는 주택’이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동물원은 동물을 보여주는 곳인가? 자연에서 자라야 할 동물을 포획하여 가두어 구경시키는 동물 학대 시설인가?


친일·친미청산, 적폐 청산을 말한다. 그러나 통상적인 인문 견해가 적폐인 경우도 만만치 않다. 많은 경우 서구 사상 사대주의에 빠져 있다. 대표적으로 1894년의 동학혁명을 서구의 근대사관으로만 본다. 동학혁명이 ‘시민혁명이냐 아니냐.’ 한다. 동학혁명은 시민혁명이 아니고 혁명을 넘어 만인만물의 다시개벽 운동이었다. 서구적 근대를 의심하는 시점에서 동학혁명이 서구형 시민혁명이 아니고, 동방형 개벽의 전례로서 존재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동학개벽은서구의 시민혁명과는 결과 이치가 다르다. 동학은 영속적인 다시, 다시 … 다시 개벽이다. 정치적인 반봉건 반제가 핵심이 아니다. 동학혁명을 시민혁명이라 하는 것도, 시민혁명이라 하기에는 모자르다고 하는 것도 모두 서구적 근대 추종 식민사관이다. 시민의 정의가 무엇인지, 만일 그것이 사적 소유의 자유(결국 노동력을 팔 자유에 불과한), 합리적 이성(결국 시장의 이성인), 신분해방(무산자화), 정치의 공화정(국가주의에 포박된)이라면 분명 동학혁명은 시민혁명이 아니다. 동학혁명 또는 동학사상의 만인만물의 다시개벽성을 언급하는 것은 근대 지구마을의 문제가 시민혁명, 또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해결되지 않으리라 보기 때문이다. 사람뿐 아니라 만물에 이르기까지 자유, 민주, 평등, 국가, 성, 개발, 생태….등등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야 한다.


서구의 신(이성)은 우리를 다스리지만 동학과 원불교의 한울님(영성)은 우리를 모신다. 서구의 신(이성)은 불과 홍수(전쟁)으로 사람을 심판하지만 우리의 한울님은 불택선악(不擇善惡), 악도 선도 선택하지 않고 우리와 같이 웃고 같이 운다. 서구의 신은 ‘보기에 좋았다.’고 공치사를 하지만 우리의 한울님은 늘 일을 하지만 공치사는 하지 않는 노이무공(勞而無功)의 존재이다. 하여 동학의 정치는 영성적으로 민을 모시는 정치이고 서구의 정치는 국가(지배체제를 의미)를 통해 민을 다스린다. 동학은 전통 사회의 두레, 촌계, 대동계, 향약에서 발전했을 ‘포’와 ‘접’이라는 자치조직을 통해 서로서로를 돕고 돕는 유무상자(有無相資)하는 모시는 살림의 경제공동체이자 정치공동체였다. 이 포와 접은 동학혁명기에 집강소로 발전하였다.


동학혁명을 탐관오리와 외세에 대항한 운동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더 많고 크게는 동학은 서구적 근대 이성과 대항한 동방형 영성 개벽이고, 횡포한 폭력체인 국가에 대항한 마을 자치 운동이며, 다투는 경제가 아닌 상부상조하는 모시는 경제이며, 성과 속이 조화를 이루는 동방형 정치였다.


“노동자(프롤레타리아)국가도 아니요 시민(부르주아)국가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만인이 주인 되는 20세기형 민주주의를 훌쩍 넘어선 만인이 성인되는 원만한 군자국가, 원대한 보살국가, 원숙한 개벽국가였을 터입니다. 그래서 미국에 기웃거리고 소련에 갸웃거리는 개화 좌우파의 짓거리를 흉내 내지 않는 줏대 있는 개벽파로 떳떳할 수 있었습니다. 실로 21세기가 요청하고 있는 ‘깊은 민주주의’(Deep Democracy)의 맹아입니다.” - 이병한,「개벽 좌우파의 대연정 : 나라살림과 지구살림」, 다른백년, 2019.4.29.-


서두에서 말했지만 말과 글은 시대성을 드러낸다. 19세기와 20세기를 풍미한 ‘혁명’은 이제 고물이 되지 않았을까? 좌우 모두에게서 사용된 서구형 ‘혁명’ 대신에 동방의 ‘개벽’을 쓰는 까닭이다. 다시개벽의 동학을 심고하는 까닭이다.



2. 터미네이터세(世)인가…? 노동 개벽세인가…?


노동운동하는 벗들이 내게 그런다. 마르크스를 버렸는가? 동학과 개벽을 말함이 곧 마르크스를 버린다고 여기는 것에 실소하고 말았다. 혁명 이념을 수행하지만 자신은 혁명하지 못하는 것이 세상을 제자리에 머물게 한다. 마르크스를 혁명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난 2019년 5월 1일은 129주년 노동절이다. 기록상의 최초 노동해방가는 묵자이다. 묵자는 목수였다. ‘묵’(墨)은 노동을 상징하는 글자이며, 검은 옷은 노동복이었다. 예수는 목수였다. 예수는 노동해방가였다. 노동을 수탈하여 성전을 세우는 짓을 질타하였다. 마르크스는 묵자와 예수의 제자이다. 자본론의 사회주의 이성도 훌륭하지만 딸이 굶어 죽는데도 자본론을 쓴 그의 영성은 더 뛰어나다. 영성이 없는 이성은 교조와 독단이 된다.


마르크스와 레닌을 잘못 읽은 일부 그릇된 노동운동가는 자신들만이 변혁의 선민 주체라 생각한다. 이 우쭐댐이 스탈린의 횡포를 낳았고 코민테른의 붕어빵 사회주의를 수출했으며, 그 결과는 국가사회주의의 몰락이었다. 공장과 사무실의 급식을 지역 농민의 식량으로 채우는 연대 따위는 고심도 하지 않는 노동운동은 농민을 수탈하고 있다. 역사상의 사회주의 국가 노동자는 실제로 농민을 수탈하였다. 노동자들은 자본과 연대하여 지구를 약탈하는 공동 정범이기도 하다. 친환경 생산을 위한 파업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우버, 유트브, 에어비앤비, 페이스북 같은 플랫폼 기업이 지구촌의 부를 휩쓰는 이른바 4차산업혁명 시대에 대해서도 인류를 구원할 노동 전망이 없다.


4차산업혁명은 극소수의 천재들과 우등한 인공지능이 열악한 인공지능과 인간을 지배하는 시대이다. 긍정어이든 부정어이든 인류세(파울 크뢰천이 이 말을 쓸 때는 인간의 지구 약탈을 빗댄 부정적 언어였다.)는 사라지고 곧 터미네이터세가 된다. 아니다. 이미 시작되었다. 터미네이터세를 로봇전쟁세가 아닌 만인만물이 상생상화하는 개벽세로 만드는 것은 가능한가…? 노동운동가는 터미네이터세를 개벽세로 바꾸는 “신자본론”을 집필하여야 할 것이다. 신자본론은 천하학이고 만인만물의 개벽학이어야 한다. 생산력 진화에 기댄 사적 유물론의 역사발전단계설은 수정되어야 한다. 노동해방이 아니라 만인만물의 상생상화여야 한다.



3. 노동해방이란?


노동해방은 무엇인가? 노동해방의 조건으로 5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자신의 노동이 자신의 자아와 일치하며, 

둘째, 타인의 노동을 수탈하지 않고, 

셋째, 타인과 상호부조 연대하며, 

넷째, 지구를 약탈하지 않는 노동이며, 

다섯째 먹고 입고 자고 즐길 수 있는 기본적 여건이 마련되는 삶이라 할 수 있다.


사회주의 사회가 되면 노동해방이 될 것인가?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지 국가, 법인, 개인을 계급성을 가진 프롤레타리아로 역전시켰다. 참으로 ‘멋진 신세계’였다. 동학의 문법으로 말하면 프롤레타리아혁명은 부르주아지혁명에서 ‘다시 개벽’이었다.


그런데 역사상의 사회주의 국가가 보여주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자아는 당과 국가에 장악되었다. 혁명에 종속되었다. 만인이 혁명가가 되어야 한다. 대약진운동, 천리마운동에서 보는 것처럼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생산력 진화로 노동자들을 내몰았다. 자리바꿈만 있었을 뿐 변한 게 없었다.


프롤레타리아 국가 역시 횡포한 개인으로서의 국가를 벗어나지 못했다. 소수의 부르주아지가 타도되고 다수의 프롤레타리아가 국가를 잡았으니 ‘멋진 신세계’, ‘다시개벽’이 되었을까? 오히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구호는 마르크스 자신의 말대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 되지 않았다. 역사상의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를 당과 국가의 사슬에 묶인 한 무리의 개인인 붕어빵으로 찍어내고 말았다. 공산주의로 가는 과정은 노동해방을, 좋은 삶을 최종 국면에서 얻는 게 아니라 모든 과정과 단계마다 보장해야 한다. 즉 생산력이 낮아도 노동해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금 인류의 물자는 전 지구촌이 노동해방을 해도 충분하다.


여기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와 예기 예운 편의 대동사회를 견주어보자.


“그는 사냥꾼, 어부, 목동이거나 비판적인 비평가이다. 생활수단을 잃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는 그래야만 한다. 어느 누구도 배타적인 활동 영역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분야에서 일을 완수할 수 있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사회가 일반적인 생산을 규제한다. 그래서 사회는, 내가 오늘은 이 일을 하고 내일은 다른 일을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그래서 내가 사냥꾼, 어부, 목동, 또는 비평가가 되지 않고서도 단지 마음 가는 대로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를 하고, 저녁에는 가축을 돌보고, 저녁 식사 후에는 비평을 할 수 있게 된다.” - 마르크스,「독일이데올로기」-

“대도(大道)가 행해지는 세계에서는 천하가 공평무사하게 된다(대동). 어진 자를 등용하고 재주 있는 자가 정치에 참여해 신의를 가르치고 화목함을 이루기 때문에(민주 평등), 사람들은 자기 부모만을 친하지 않고 자기 아들만을 귀여워하지 않는다(공동체). 나이든 사람들이 그 삶을 편안히 마치고 젊은이들은 쓰여지는 바가 있으며 어린이들은 안전하게 자라날 수 있고 홀아비·과부·고아, 자식 없는 노인, 병든 자들이 모두 부양되며, 남자는 모두 일정한 직분이 있고 여자는 모두 시집갈 곳이 있도록 한다(복지). 땅바닥에 떨어진 남의 재물을 반드시 자기가 가지려고 하지는 않는다. 사회적으로 책임져야 할 일들은 자기가 하려 하지만, 반드시 자기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공유제). 이 때문에 간사한 모의가 끊어져 일어나지 않고 도둑이나 폭력배들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문을 열어놓고 닫지 않으니 이를 대동이라 한다(평화).” - 예기 예운편, 기세춘 역-

유토피아가 다르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생산력이 넘쳐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의 삶을 말하고 있다. 예기의 예운은 처음부터 끝까지 개인이 아닌 관계 속에서 말하고 있다. 물론 마르크스 역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관계를 말하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은 이미 대동에서 훨씬 더 구체적으로 말해지고 있다. 개인의 자유가 아닌 평등을 담지하는 자율과 자치였다. 생활의 협동이었다.


쇼펜하우어는 서구의 (사회주의까지를 포함한) 합리주의를 ‘권력의지의 표상’, 개인이 자연과 인간과 사회를 지배하고 정복하려는 ‘권력의지’가 만들어낸 산물에 불과한 것이다고 하였다.


푸코는 좌우파 모두 ‘근대적 인간’, ‘근대적 개인’은 생산되고 주조하고 세뇌된 존재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어리석은 독재자는 국민들을 쇠사슬로 묶어 두지만, 현명한 정치가는 녹도 슬지 않으며, 감시원도 필요 없는 관념의 사슬로 인민들을 엮는다. 한번 길들여진 부드러운 뇌세포는 영원한 제국의 흔들리지 않는 기초다.”고 한다. 아울러서 푸코는 서구 좌우파의 “정치학과 정치사상은 아직까지 왕의 머리를 자르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생각으로 푸코는 1979년 이란혁명을 열렬히 지지하였다. 이병한은 이렇게 적었다.


좌/우 및 종교의 극단을 배제한 80%의 일반 의지가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사회계약과 역사계약을 견인한 것이다. 그래서 이슬람 근본주의도 아니요, 좌/우 근본주의도 아닌 성/속 합작의 독자적이고 독창적이며 독보적인 체제를 일구게 된다. 푸코는 테헤란에서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과는 성격을 전혀 달리하는 ‘혁명적 혁명’을 목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좌/우 혁명의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창조적 혁명’, 진정한 ‘문화대혁명’이었다. 나는 불길처럼 뜨거운 그의 문장에 녹색 밑줄을 치고, ‘계몽 이후의 개벽’이라고 말을 보태었다. 

- 이병한, 유라시아 견문,「누가 촛불을 낚아채는가?」, 프레시안, 2017.6.17 -


서구식 민주주의나 서구식 사회주의에만 익숙한 사람들은 이병한의 이런 글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것이다.


노동해방이 된 삶이 좋은 삶이라고 보았다. 그 조건을 다섯 가지로 말하였다. 마르크스의 문장과 예기의 문장으로 노동해방의 구체적 모습을 살펴보았다. 대기업 노동자로서 행복하다고 여기는 노동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노동이 비정규직의 노동을 수탈하는 것이라면, 지구에 환경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라면 자신은 행복할지 모르지만 타인과 지구를 불행하게 하기에 그의 행복은 이기적인 행복이지 결코 노동해방의 좋은 삶은 아니다.


노동자들은 자본과 연대하여 지구를 약탈하는 미필적 고의의 범죄를 하고 있다. 일부 노동자들은 농민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에 대해 관심이 없고 자신의 처지 개선에만 관심이 있다. 그는 노동자이지만 노동해방가는 아니다. 노동운동가가 노동해방가인 것은 아니다. 노동투쟁이 노동조건 투쟁인지 노동해방 투쟁인지…?


4. 노동개벽이 필요하다

첫째는 동일노동 동일임금 사회연대임금제를 쟁취하는 것이다. 이 구호는 노동운동가들의 수사로만 있지 실제 그런 노동운동은 한국에 없다. 동학의 유무상자 정신을 실현하자.


둘째는 스스로 정규직, 비정규직 연합노동공제기금 - 노동자치금융을 만들어 열악한 노동자 지원과 복지, 그리고 주식 매입을 통해 경영에 참가하는 것이다. 사내근로복지기금과 고용보험 재설계를 통해 연합노동공제기금을 만들자. 교원 공제기금과 행정공제기금은 있는데 왜 노동공제기금은 없을까? 노동자들은 왜 그 흔한 (노동)신용협동조합 - 노동금고를 못 만들까? 금융수탈만을 말하지 말고 스스로 자치금융을 세워라.


셋째는 노동공제기금으로 특정 기업을 전 노동자 이름으로 매입하여 노동자 자주관리운동 모범을 세우는 투쟁이 필요하다. 전복과 탈취도 있지만 스스로 대안을 만드는 모범 투쟁이 필요하다. 군산 GM을 (부채를 안고) 1천억에 인수한다는 보도를 들었다. 생산 설비 개조까지 4천억 원이 든다고 한다. 노동자들은 지자체와 시민사회와 연대하여 4천억 원을 못 만드는가? 왜 그런 발상을 못 하는가?


넷째는 공유자산운동을 해야 한다. 현 정부 도시재생사업비 50조 원이 건물주의 배만 불린다는 지적이 있다. 3,509개 읍면동으로 나누면 한 동마다 142억원이 갈 수 있다. 이 재정으로 3,509개의 마을주민의 공동자산인 마을작업장, 마을학당을 세울 수 있다. 도시재생이 아니라 지역적 삶의 개벽에 쓰여야 한다. 전후 방으로 1 마을 작업장마다 20명을 고용한다면 전국적으로 7만명이다. 당장 임금은 낮을지 몰라도 주민총유자산, 공동자산이기에 노동해방에 근접해진다. 상품이 아닌 마을의 생필품을 생산한다.


다섯째는 환경 파괴적인 생산에 대해 할 수 있는 최대한 친환경 생산 투쟁 - 지구연대를 해야 한다. 노동이 자본과 지구 약탈의 공동정범이 될 수는 없다.


여섯째는 대형노조나 중소노조연합체에서 지역농산물 직거래 운동을, 즉 로컬푸드 매장을 공단이나 공장 내부에 들여오는 노농연대- 적녹연대를 해야 한다. 생산과 소비의 연대로서 자본 주도 시장에 균열을 낼 수 있다. 사회연대임금, 노동자치금융, 자주관리, 공유자산운동, 지구연대, 적녹연대 위의 방향은 결국 지금 있는 부의 총량을 키우는 것이 아닌 있는 것의 새로운 분배와 새로운 운영에 관한 것이다. 인류의 부는 지금으로도 충분하다. 성장률에 얽매일 이유가 전혀 없다. 노동개벽을 위해 우리는 노동적폐를 발굴하여 청산해야 한다.


곧 전면화될 터미네이터세를 만인만물의 개벽세로 바꾸는 일에서 노동이 할 일이 너무 크다. 이슬 한방울이 떨어져 꽃을 피우고 장강을 이루리라.


※이 글은 전북포스트에 5월 1일 노동절 기념으로 적은 글을 수정하고 1장을 더 적어 새로이작성한 글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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