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2013년도 이 책이 출간되고, 전국 곳곳으로 강의를 다녔습니다. 그러나 당시만 하더라도 기후 위기나 생태계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감하지 못했고, 그저 철학의 한 분과로서, 식자층의 교양으로서 이 책을 읽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인식의 전환은 순식간에 이루어졌습니다. 생태계 위기와 기후 위기를 현실로 체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비근한 예로 2013년 당시만 해도 강의를 듣는 사람들 중에 필기를 하고 질문을 하는 경우는 극히 적었지만, 2018년 이후 기후 위기 강의나 생태철학 강의에서는 엄청난 에너지, 빛나는 눈동자가 등장하고, 수많은 질문들이 쏟아지고,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필사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이 전반적인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기후 위기와 생태계 위기가 바로 코앞에 다가왔다는 증거이기도 했지만, 전환사회에 대한 열망이 전에 없이 뜨거워졌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이 책 [지구 살림, 철학에게 길을 묻다]는 한알마을 이사장인 김용우 선생님과 생명학연구회 주요섭 선생님의 개정증보판 출간에 대한 제안이 없었다면 여타의 책처럼 지나간 이야기로 묻힐 수도 있었습니다. 그 두 분은 생태철학의 맥락이 출현했다 사라지는 것을 반복하는 것을 안타까워했고, 다가올 후배들과 미래세대를 위해 하나의 참고도서이자 지적 토양으로서 이 책이 계속 이어지기를 원했지요. 저는 어쩌면 이러한 두 사람의 바람이 모든 사람의 바람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이 책을 다시 꼼꼼히 손보았습니다.
크게 맥락을 바꾼 것은 피크오일과 기후 위기에 대한 핵심 장입니다. 피크오일 개념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러시아 영구동토층이 녹으면서 거대유전이 발견됨에 따라, 사실상 향후 인류가 120년 이상 쓰고도 남을 석유를 보유하게 된 ‘비극적인 현실’로 귀결된 것입니다. 그 시간만큼 기후 위기는 심각해질 테니 말이지요. 기후 위기는 사실상 2013년도에는 그저 예측적인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모든 사람이 직면한 현실이 되었고, 국제사회, 국가, 공동체, 시민 등이 모두 그 해결을 위해서 부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를 비롯한 몇 가지 현실의 변화가 이 개정증보판에 추가되었습니다.
이 책이 미래세대와 생태철학의 토양이 되고 거름이 되고 씨앗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작금의 코로나19 사태와 기후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아이디어와 힌트, 단서를 주는 참고도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여기 우리가 당면한 기후 위기의 심도가 너무도 막대하여 넋을 놓거나, 될 대로 되라거나 침울해 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생태철학의 전략적 지도 제작을 가능하게 하는 영감과 활력을 주는 책이었으면 합니다. 2013년도에서 2020년도까지의 생태계 위기와 기후 위기 전개 과정을 보면, 어쩌면 이미 한 세기가 끝나 가는 느낌도 듭니다. 달콤하고 부드럽게 문명 내에서 누리고 살던 시대가 가고, 문명 자체의 위기와 절멸의 위협 속에서 끊임없이 분투하며 모색하고 실천해야 하는 시대가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문명을 전환하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다는 절박함도 어느 때보다 널리 퍼져 있습니다.
이 책은 울산의 한 대학에서 강의 교재로 6년간 쓰였습니다. 그리고 수업하는 교수는 학생들로부터 많은 질문을 받았으며, 그 질문들이 이 개정증보판의 문제의식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책이 여럿의 다양한 독자에게 읽힐 때, 그것은 사적 전유물이 아니라 커먼즈(commons)의 영역으로 변모하는 것 같습니다. 학생들의 집단지성을 통해서 첨삭하고 부연하고 덧붙이고 가감되었던 부분이 이 책의 개정증보판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크게 참고가 되었습니다. 이 책이 생태적 지혜의 향연으로 가기 위한 디딤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의 디딤돌을 놓는 것은 다음 돌을 기약하기 위함입니다.
생태적 지혜, 즉 생태철학이 만들 미래의 돌의 형식과 성공 여부는 지금-여기-가까이에 있는 현재의 돌에 달려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책이 생태계 위기, 기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쓰일 수 있는 연장(tools) 중 하나였으면 합니다. 책이 저자의 손을 떠날 때 그것은 더 이상 저자의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것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손을 타고, 매만져서 반들반들해지고, 손때가 묻는 것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불어 이 책이 수많은 사람들이 전환사회로 향할 때 사용할 나침반이자, 지침서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책의 개정증보판이 있기 위해서 가장 큰 힘이 되어 준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의 박길수 대표님께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최수미 교수님, 고은희 교수님, 유정길 선생님, 윤상훈 님, 김용우 님, 주요섭 님, 임지연 님, 이무열님, 박종무 님, 이승준 님 그리고 언제나 전환사회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강렬한 생명 에너지를 갖고 있는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의 조합원들과, 사랑하는 나의 아내 이윤경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 초판 제목 : "갈라파고스로 간 철학자"
갈라파고스에 간 생물학자 다윈은 진화의 신비를 발견했지만, 만약 갈라파고스에 철학자가 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미노스궁의 미로에 놓인 실타래를 따라가듯이 저는 생명, 생태, 생활의 비밀의 열쇠를 철학자들과 연결시켜서 추적하고 탐색했습니다. 이 일련의 작업에는 철학이 갖고 있는 생각의 경로를 통해서 현재의 문명을 진단하고, 이를 넘어서 대안을 찾고자 하는 저의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생명 위기의 시대에 막 접어든 현재의 상황은 생물 종의 대량 멸종 상황과 기후 변화와 온실가스의 과도한 배출, 에너지 위기와 석유정점(피크오일), 생명의 도구화 등의 위기의 깜빡이로 경고음이 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전반적인 위기의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색다른 사유의 경로의 단상과 영감을 얻고자 철학자들의 사상을 뒤적이기도 하고, 환경전문가들과 인터뷰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직접 현장방문을 하고, 전화를 걸어 취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저의 실존적인 방황과 대안을 향한 모색, 삶의 재발견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철학이 생명 위기 시대에 나침반이 되고 지도가 된다면 얼마나 흥미진진할까요? 프랑스 철학자 펠릭스 가타리의 에코소피(Ecosophy) 사상은 저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생명, 생태, 생활을 범주로 한 삼원다이어그램을 그려보았습니다. 그리고 세부적으로 ‘생명’의 문제에서는 야생동물, 공장식 축산업, 실험동물, 동물권 등을 배치해서 철학자들의 사상과 이종결합을 시도했습니다. 또한 ‘생태’의 문제에서는 마음생태, 자연 생태, 사회생태라는 세 가지 생태학의 구도를 더 발전시키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생활’의 부분에서는 탄소중독적인 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 TV, 자동차, 아파트, 육식 등의 삶의 방식을 진단했습니다. 그리고 외연적이고 실물적인 성장이 아닌 관계의 성숙을 통한 발전을 모색하기도 하고, 재생 에너지에 대한 탐색과 생태계 보존, 화석연료 정점의 문제도 다루어 보았습니다.
마치 어떤 전략에 따라 사람들을 배치하듯이 각각의 생태문제에 철학자들의 사상을 배치해서 문제 해결의 단서를 찾으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것은 플라톤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까지 이르는 철학사 전반을 다시 재검토하는 작업이었고, 철학의 의미 좌표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생태계의 관계성좌에 그려 나가는 작업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결론이 나와 있는 관광이 아니라, 결론도 목적도 없이 떠나는 여행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치 밤길을 헤매다가 친구를 우연히 만나 반가워하는 것처럼 철학자와 조우하는 우발성에 따라 생각의 경로를 바꾸어나갔습니다. 그 결과 기존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철학자들의 사상이 생태철학자로 재탄생하였습니다.
철학은 정의(definition)에 따라 경화되고 침범될 수 없는 관계 외부의 지적 구축물이 되는 방향과, 문제의식에 따라 부드러워지고 언제든 개입이 가능한 관계 내부의 지혜의 방향이라는 두 가지 방향성에서 움직입니다. 저는 후자의 노선을 좀 더 발전시켜 나갈 의도를 가지고 철학을 마음껏 변형하였습니다. 자본주의의 등가교환을 가능케 할 아카데미 고정관념을 발전시킬 의도는 추호도 갖고 않았습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철학자가 되었고, 모든 삶이 철학의 문제의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색다른 문제의식으로 가득 찬 이 책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세상을 관조하도록 만드는 창문이 아니라, 거주지를 벗어나서 세상에 들락날락하며 접속을 만들어낼 뒷문(back-door)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을 읽어야 할 사람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신의 삶에서의 변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를 실천하려는 가정주부
○생태적 위기에 대해서 눈떠서 자신의 활동을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것에서 출발하려는 청년들
○기성세대가 알려주는 정상영업 상태의 자본주의의 표준적 인간형을 거부하며 대안을 모색하는 학생들
○철학을 통해서 새로운 생각의 경로를 모색하며 자신의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직장인들
○성장보다 발전을 통해서 관계를 성숙시키며 경쟁사회의 승자독식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협동조합의 조합원들
○생명과 동물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지며, 생명보호가 인류가 풀어야 될 숙제라고 생각하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
○생명, 생태, 생활을 바꿈으로써 환경 위기를 극복하려는 NGO 단체의 활동가들
이 책을 통해서 생명 위기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대규모 주체성 생산의 시대가 개방되기를 희망합니다. 이는 현재의 지구의 위기가 심각한 상황에 도달해 있고, 이를 극복하려는 색다른 삶의 형태와 마음의 변화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변화는 아주 미세한 균열과 같은 색다른 마음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미세한 마음의 변화를 만들어낼 잔잔한 울림과 향기를 가진 독서의 소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이 있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조력과 조언이 숨어 있습니다. 전남대 윤수종 교수님의 논문을 통해 자유라디오운동을 설명할 수 있었으며, 마을지원센터장 유창복 님은 마을 만들기의 일련의 과정을 들려주었습니다. 또한 제주도 강정마을 평화활동가 최경한(동소심), 녹색당의 조상우 님과 정유진 님, 장정화 님, 스폰지밥 님, 녹색당 개나소나 모임의 한쏭 님, 이지현 님, 소망농원 여러분들, 한겨레두레공제조합의 박승옥 대표님, 참살이연구원 최윤하(참살이), 개똥이네 책방의 정영화 님, 모심과살림연구소 주요섭 님과 이근행 님, 전 환경정의연구소 최승철 소장님, 귀농운동본부 텃밭연구소 안철환 소장님, 녹색연합의 윤상훈 님과 신수연 님, 신근정 님, 배보람 님, (사)사람과마을 위성남 님,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 이재용 님, 레알텃밭학교 황윤지 님, 에너지기후연구소의 이진우 님, 빈집의 지음 님과 들깨 님, 전쟁없는세상 유민석 님, 풀뿌리자치연구소 강내영 님, 22days 배병호 님,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의 박상희 님과 김혜란 님, 김효진 님, 임순례 대표님, 흙이시를만나면 이상배 님, 지리산생명연대 김휘근 님, 푸른아시아 신혜정 님, 마을연구자협동조합의 현광일 님과 이규원 님, 환경철학회 양혜림 대표님, 김완구 님, 김명식 교수님, 채식인 강대웅 님 등이 조언과 인터뷰, 토론에 참여해 주었습니다. 특히 출간을 기대하고 기뻐하실 홍윤기 교수님과 늘 최초의 독자로서 세심히 조언해 주었던 저의 아내 이윤경 님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이 책을 통해 생태적 지혜에 다가가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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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