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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Jul 15. 2019

교육계 면역 질환 : 고인 물은 썩는다

(2017년 10월)



학교 안과 밖


1932년 버트란트 러셀Bertrand Russell은 외부인과 내부자의 관점 차이에 관한 흥미로운 칼럼을 썼다. (As Others See Us, 남들이 우리를 보듯). 그는 이런 괴리를 마주할 땐 관심을 사람의 ‘감정’에 둘 것인지, ‘하는 일’에 둘 것인지 고려하라고 한다.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의 껍데기 속으로 침투해 그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 반면 그가 ‘하는 일’을 이해하고 싶다면 철저히 외부자의 시선으로, 마치 천문학자가 달과 목성을 관찰하듯 바라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당시 인도에 살던 영국인들은 자신을 무지와 편협, 미신에 맞서 문명의 빛을 전파하는 희생적인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외부의 관점에서 영국인들은 인도 민중들에게 공물을 쥐어짜는 잔혹한 압제자였다. 영국인들의 ‘감정’을 알고 싶다면 내부인 영국인들의 관점을, 그들이 ‘하는 일’을 알고 싶다면 나머지 세계인들의 관점을 취해야 한다.


러셀의 주장을 빌리면 교사들의 ‘감정’을 알고 싶으면 교직사회 내부의 관점을, 교사들이 ‘하는 일’을 보려면 외부의 관점을 취해야 한다. 교사집단 내부와 외부 시선의 온도차는 아찔할 정도다. 교사 집단 내부는 늘 억울함과 불안의 연속이다. 학교는 과거와 많이 달라졌음에도 사람들은 그 옛날 이상한 교사들과 학교문화를 현재에 투영한다. 수업과 학생 지도만으로도 벅찬데 사무행정업무에 이리저리 치인다. 문제행동을 보이는 학생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상한 학부모가 시비를 걸면 답도 없다. 문제 학생, 문제 학부모, 문제 관리자 누구를 만나도 일 터지면 교사 혼자 독박쓰기 딱 좋은 구조다. 의지할 데 없는 교사들은 위로와 공감을 갈구한다.


반면 외부에서 바라보는 모습은 이렇다. 교사들은 하는 일이 별로 없음에도 괜찮은 수준의 연봉과 방학이라는 특권에 가까운 긴 휴가를 누린다. 본격적인 공부는 학원에서 따로 한다는 말이 통용될 만큼 학교 교사와 학생의 지적 성취가 분리되어 있고, 제대로 일하는 교사들은 얼마 되지도 않는 것 같은데 웬만해서는 잘리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무사안일 철밥통의 화신이다. 거기에 본인이 과거 학창 시절 겪었던 폭력과 억압의 기억이 뒤섞여 교사들을 생각하면 괜히 부아가 치민다. (그러면서 자녀들은 교사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도 많다)



교사들의 감정을 알려면 내부관점, 하는 일을 보려면 외부 관점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말이 오롯이 옳은 주장은 아니다. 외부 관점에도 외부인들의 감정이 개입하고, 부족한 정보로 완벽히 합당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단 편향에 빠지기 쉬운 내부인들이 늘 외부 관점과 균형을 이루며 접점을 찾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있다. 꼰대 철밥통, 기레기, 떡검, 판새, 구케의원, 짭새라 불리는 이들 중 누구를 붙잡고 물어도 억울함에 오만가지 사정을 토로할 것이다. 인간은 누구든 자신이 처한 환경이 가장 복잡하고, 변화무쌍하며, 견디기 힘든 법이다.


최근 교사집단 사이에 ‘교사끼리, 안으로의 개혁’, ‘교육 특수성’, ‘전문가주의’ 의 기조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학교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과 관련한 논란이 본격화된 6.30 총파업을 기점으로 이와 같은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나는 교사를 전문직 노동자라고 보는 입장이며 이들의 주장에 부분적으로 동의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런 논의들이 학교를 사회와 분리된 배타적인 공간으로 인식, 교사를 제외한 다른 세력의 입장은 ‘현장을 모르는 소리’로 쉽사리 치부하는 태도가 심히 우려스럽다. 학교는 수도원이 아니다. 중립적인 교육, 사회와 유리된 교육만의 논리는 사고실험에서나 존재한다.


현장과 호흡하는 것들


첫 담임을 맡은 해 우리 반에 심한 문제행동을 하는 학생이 있었다. 전교에서 가장 유명한 아이였기 때문에 담임 배정이 이뤄진 당일부터 주위 교사들로부터 많은 위로와 걱정을 들었다. 몇 달이 지나 내가 교실을 잠시 비운 사이 사고가 터졌다. 그 때 많은 교사들은 다시 나를 ‘위로’했다. 다음 날 오후 학부모 17명이 교실로 찾아왔다. 난 있는 그대로 그간의 교실 사정을 털어놨다. 내 말을 유심히 들은 학부모들은 곧 교장실로 향하더니 매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우리 애들이 집에 와서 그 아이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를 호소한다. 담임선생님도 힘들어한다. 알고나 계셨는가? 도대체 교장 선생님은 여기 앉아 뭘 하시는 건가?”
“왜 신규교사에게 전교에서 가장 유별나다고 소문난 아이를 맡겼는가? 담임배정을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가?”
“문제를 일으킨 학생의 학부모가 다소 ~하다는 걸 알고 있다. 학부모 상담을 담임선생님한테만 맡기지 말라. 교장 선생님이 직접 만나 해결하라.”
“((교장 선생님이 앞으로 매일 아침 그 학생의 가방을 검사하도록 나에게 지시하자)) 그건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소지품 검사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 그 애 부모가 알면 가만히 있겠나?”
“선생님도 화장실 가야 하고, 볼일도 있다. 교실에만 24시간 있을 수 없다. 우리 아이들 안전을 누구한테 맡겨야 하나? 대책을 마련하라. 추후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할 시 반드시 교장선생님께 책임을 묻겠다.”


학부모들의 모든 발언이 공명정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부에서 오가던 막연한 위로와 공감보다 좀 울퉁불퉁하나마 학부모들이 다른 관점으로 제시했던 의견들이 결국 우리 반에 훨씬 도움이 됐다. 교육현장은 학생과 교사의 상호작용 이상의 범위에 놓인다. 학부모가 보내는 신뢰와 지지 혹은 불신과 반감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현장 곳곳에서 영향을 발휘한다.


사회 구조, 의제, 현안, 담론, 제도와 정책 역시 늘 현장과 호흡한다. 예를 들어 세월호 참사만 보더라도, 사회 분위기 변화에 따라 교육계 의제로서의 위치가 롤러코스터를 탔다. 모두가 쉬쉬하던 교실 내 금기어에서 국가의 책임과 의무를 논할 때 거론할 수 있는 주제로 바뀌었다. 교실 밖에 존재하는 교육 주체, 시민들과의 소통과 연대 없이 내부에서만 통용되는 논리만으로 교육의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는 건 불가능하다.


면역력 높이기



면역체계의 중요한 임무는 ‘싸워야 할 외부물질’과 ‘자기 몸의 일부’를 구분해 결정하는 일이다. 간혹 면역체계가 잘못 작동해 잠재적 공격자에 대해 쓸데없이 소모적이고, 파괴적으로 대항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현상이 알레르기다. 예를 들어 대개 꽃가루는 인체에 무해한데 어떤 이들의 면역체계는 과민하게 반응하며 눈물과 재채기, 알레르기성 비염과 건초열을 유발한다. 면역체계의 과민함은 이따금 도를 넘어 외부물질이 아닌 내부의 정상세포마저 적으로 간주하며 이를 ‘자가면역질환’이라고 한다.


지금 교육계의 면역력은 취약하다 못해 질환에 걸린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마저 든다. 내 집단이 공유하는 감정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이들은 공포와 불안, 무력감에 사로잡혀 마치 온 세상이 담합해 교사들만 공격하는 듯한 담론을 형성하기도 한다. (물론 내집단 편향은 모든 집단에서 보이는 보편적인 현상임) 어떤 교사들이 볼 때 나쁜 교육정책은 관료들이 교사들을 엿 먹이기 위함이다. 학생의 삐딱한 자세, 학부모의 무례함, 언론이 사용하는 자극적인 언어들도 교사들을 괴롭히기 위한 치밀한 작전이다. 많은 경우 상대방들은 별다른 의도가 없는데도 말이다. 세상이 유독 나만 괴롭힌다고 생각하는 상태가 심해질 때 우리는 이를 ‘피해망상’이라 부른다.


교직에 대한 사회적 편견, 일부 학생과 학부모의 무책임과 폭력성, 이에 대한 보호막 부재, 현장과 분리된 정책, 책임을 회피하는 관료체제, 교육을 입시와 동일시하는 사회 풍토에서 느끼는 교육자들의 무력감 역시 교육계를 더욱 방어적이고 폐쇄적으로 몰아간다. 오랜 시간 동안 권력은 그들의 이익을 위해 교육을 진공상태에 가두고 지성과 연대, 참여를 꿈꾸는 교육자들에게 정치꾼이라는 낙인을 찍어 쥐 잡듯 교실 안으로만 몰아왔다. 이를 동조 혹은 묵인해온 사회 분위기 역시 교육계 면역체계 약화의 주범들이다.


그럼에도 명심하려 한다. 고인 물은 반드시 썩고, 무균 상태의 환경은 장기적으로 유기체에 치명적이다. 무엇이 바이러스이고, 무엇이 정상세포이며, 누구의 손을 잡아야 할지 생각한다. 시인 김수영의 말이 맞다.


우리들의 전선戰線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힘들게 만든다.



* 이 글은 딴지일보에 실렸습니다. (2017년 10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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