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 이 글은 딴지일보에 실렸습니다. (2017년 6월 21일)
2008년 MB정부가 부활시킨 국가수준학업성취도평가(일제고사)가 다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초등학교 일제고사는 극심한 부작용과 어린 학생들의 학업 스트레스 등을 이유로 2013년 폐지되었고, 올해부터 중·고등학교의 일제고사까지 폐지된다. 기뻐야 마땅한데 솔직히 여러모로 씁쓸하다. 교육정책이 정권에 따라 요동친다. 정책이 폐지되어도 주도했던 사람들 중 누구도 사과하지 않는다. 늘 그렇듯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과 학교, 사회가 떠안는다.
일제고사는 1998년에 이미 한 차례 폐지되었던 바 있다. 서열화와 사교육을 부추긴다는 이유에서였다. 2008년 부활 초기부터 일부 교사들과 시민들이 격렬히 저항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일제고사를 거부하고, 시국선언을 주도한 많은 전교조 교사들이 징계를 받았다. 당시 징계 받은 교사들을 향해 ‘자업자득’이라 평한 교총의 성명서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일제고사가 사라짐과 부활을 반복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얼핏 보면 애들을 열심히 가르치자는 좋은 취지인 것 같은데, 왜 현장교사들의 반대가 그리도 극심했을까? 일제고사의 배경과 저변의 논리, 현장에서 벌어졌던 양상,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충분히 숙고하지 않으면 10년 후 같은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그래서 함께해서 더러웠던 일제고사의 마지막 길에 쐐기를 박고자 한다.
1) 일제고사의 배경
일제고사의 부활은 2002년 미국 부시 행정부가 도입한 낙오학생방지법(No Child Left Behind)을 배경으로 한다. 사실 미국에서도 많은 부작용으로 일찍부터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은 정책이다. 그러나 한국의 정책 입안자들은 미국에서 하는 건 일단 무조건 따라 하고 보는 못된 버릇이 있다.
나름 좋은 의도도 있었다. 일제고사의 근본 목적은 기초학습 부진 학생을 없애는 것이다. 공교육 기관에서 학업성취도가 낮은 학생들이 방치된다는 비판은 늘 있어왔다. 한 명의 학생도 뒤에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는 교육자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마음가짐 같기도 하다 (물론 최선은 ‘뒤’(behind)라는 영역을 없애는 것, 즉 획일적 서열화 자체를 없애는 거다). 얼핏 보면 교육의 결과에 대한 국가, 학교, 교사의 책무성을 제고하는 방향으로 선용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교사들을 향해 ‘애들 공부 좀 시키자는 게 뭐가 그리 문제냐?’며 손가락질하기도 했다.
2) 구체적 양상
"일제고사로 인해 선생님들은 말뿐 아니라 표정과 온몸으로 자기반의 성적부진아를 미워하게 됐다. 정말 우리가 왜 이래야 하나."
"심지어 우리 반에 누구만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조금만 이상하면 특수반으로 보낼 궁리를 한다."
"일제고사를 앞두고는 예체능도 안하고, 심지어 청소도 안하면서 문제풀이, 마킹연습, 찍기 연습을 한다."
어느 초등교사의 일제고사 피해 사례 발표 中 (링크)
경쟁에서 뒤쳐진 학교의 관심은 부진아를 ‘제거’하는 일에 맞춰져 있었다....6학년 수업 현장은 가관이었다. 일제고사 평가일 전까지 거의 한 학기 내내 미술과 음악 등의 수업이 시행되지 않았다. 시험을 치르는 다섯 개 주지교과, 해당 범위에만 집중해 문제풀이를 반복하는 수업 파행이 당연한 듯 이뤄지고 있었다. 복도를 지나다 보면 성적이 낮은 학생들이 늦은 오후까지 앉아 하염없이 빽빽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왜 학교에는 이상한 선생이 많은가>, p.52~53
⓵ 교사들이 더 열심히 수업하게 되었을까? 학생들의 학습능력이 향상되었을까?
일제고사 도입 초기에 나는 6학년 담임을 맡고 있었다. 당시 내가 일했던 학교도 일제고사 대비용 교재가 있었고, 아침 자습시간마다 시험 대비 공부를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나는 아침마다 아이들과 다른 교육활동을 했고, 수업도 정상적으로 꾸려갔다. 교감이 반마다 한 권씩 문제집을 걷어 검사한다고 했을 때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여분의 문제집에 마치 피가 나도록 열심히 공부한 듯이 색연필로 마구 밑줄을 쳐놓고, 유사시 제출할 수 있도록 준비해뒀다. 그때만 해도 나는 제 멋대로인 성격을 잘 활용해(?) 아이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잘 대처했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첫 학교는 학업성취도가 높은 학교라 상대적으로 관리자들의 감시와 통제가 덜했던 것뿐이었다.
학교를 옮기고 6학년 영어교과 전담을 맡았다. 옮긴 학교는 과거 몇 년간 성적이 부진했던 탓으로 온 학교가 일제고사를 위한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전과 달리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고, 심적인 압박도 컸다. 담임일 때는 내 학급만 보였지만, 교과전담이 되니 6학년 전 학급의 교사들이 어떤 식으로 수업을 하는지도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때 깨달은 게 하나 있다.
교사가 정상적으로 수업을 하려면 수업 전후로 연구하고, 고민할 사항들이 많다. 수업과 평가가 선순환 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반면 문제 풀이, 요약정리 수업은 교사 입장에서 정말 쉽다. 학교에서 권장하는 대로 일제고사 대비를 위해 문제집 풀기만 하면, 수업은 솔직히 정말 식은 죽 먹기다. 그걸 깨닫는 순간 나도 남들처럼 편하게 일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느껴질 정도였다. 감히 말하건대, 일제고사라는 평가는 멀쩡했던 교사들까지 이상하게 되기 쉬운 토양을 만든다. 지적, 도덕적으로 무능하고 무책임한 교사들에게는 오히려 천국과도 같은 환경을 조성하고 말이다.
많은 교사들이 성취도가 낮은 학생들을 고려하고, 보충학습을 하며 자발적으로 지도해왔다. 일제고사와 강압적인 보충수업은 교사들의 이런 자발성을 압살한다. 상과 벌(학교평가, 학교성과급, 예산 차등분배)로 현장을 유인하려고 하는 순간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모멸감을 느꼈던 부분이기도 했다. 교사로서 당연한 책무로 여겨 열심히 하던 일이 하기 싫어진다. ‘상과 벌’이 주어지지 않는 영역에 대해 교사들의 눈이 멀고 만다. 초등학교에서 일제고사가 시행되던 5년 간의 기간 동안 교사들의 전문성, 내적동기, 책임의식은 5년만큼 후퇴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아이들과 교사 자신에게 돌아간다.
사람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교사들이 게을러서, 열심히 수업하기 싫어서 일제고사에 격렬히 반대한 게 아니다. 0교시, 7교시 지도로 몸도 불편했겠지만 마음이 더 힘들었다. 아이들 보기가 정말로 부끄러웠다. 교사로서 이런 형태의 학습과 줄 세우기가 학생들의 내적동기와 사고력 발달에 독이 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만약 한국에 정말 나태하고, 연구하기 싫어하고, 아이들의 성장 따위는 나 몰라라 하는 교사들만 존재했다면 일제고사는 현장에 스리슬쩍 안착되었을 것이다.
⓶ 교육에 대한 국가의 책임이 제고되었을까?
일제고사 반대를 외치던 세력이 주장하는 경쟁, 획일화, 서열화의 문제에 머리로는 동의해도 크게 와 닿지 않을 수 있다. 사실 내가 그랬다. 경쟁과 서열화로 말할 것 같으면, 현 중·고등학교의 내신제도가 최악이다. 그야말로 영혼 파괴 경쟁의 최고봉이다. 전국의 동급생과 하는 막연한 경쟁보다, 내 옆에 앉아있는 친구를 짓밟아야 하는 상황이 훨씬 더 비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국가수준학업성취도평가는 준거참조평가, 쉽게 말해 절대평가였다. 4개 수준 정도로 판정하기 때문에(우수, 보통, 기초, 기초미달) 기준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이지, 옆 친구와 경쟁을 하는 시험이 아니다.
내가 경악했던 부분은 국가의 무책임한 행태였다. 시험을 보고 ‘진단’만 할 뿐 그 후 결과에 대한 책임은 학교에 오롯이 떠넘겼다. 학업성취도에 영향을 끼치는 변수는 무수히 많다. 그 중에서도 학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 사교육 여부 등의 요소는 절대 무시할 수 없다. 국가는 이에 대한 고려 없이 획일적인 잣대로 학교들을 줄 세우고, 차별을 종용했다. 성취 결과에 따라 학교평가, 학교성과급, 지역별 예산 배분 등에 교묘한 방식으로 차등을 뒀다. 교장들의 체면 세우기 놀음도 한몫했다. ‘본교의 성적이 낮아 다른 교장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었다’는 등의 야만적 언행으로 교사와 학생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례들이 속출했다.
내 직간접적인 경험으로 볼 때, 중산층이 모여 사는 학군에서는 교사들이 따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학생들의 성적이 높았다. 형편이 어려운 가정이 많은 학군에서는 교사들이 발을 동동 굴러도 기준에 도달하기 쉽지 않았다. 근본적인 대책 없이 교사와 학교만 쪼아댄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만약 일제고사를 통해 국가, 학교, 교사의 책무성을 제고하려 했다면 오히려 성취도가 낮은 학교에 추가 인력과 예산 지원을 하는 편이 옳았다. ‘기초학습부진 제로화’와 같은 전시 행정성 사업을 벌여 치적만 알뜰하게 챙긴 후, 책임은 일선 학교와 교사에게 떠넘기는 행태를 더 이상 좌시해서는 안 된다.
⓷ 위법적, 퇴행적 행위가 속출한 원인들은 무엇일까?
사진 출처-오마이뉴스
일제고사와 같은 제도는 필연적으로 도덕적 해이, 부정부패, 퇴행적 행위들을 낳는다. 어느 집단이든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면, 구성원들에게 잠재되어 있던 괴상한 면면들이 총출동하기 마련이다. 일제고사로 인해 순식간에 교육현장의 시계가 20년 전으로 돌아가 버렸다.
예를 들어 모 지역의 한 초등학교에서 6학년 담임교사가 성적에 따라 학생들을 초신, 귀족, 평민, 천민, 노예라는 5단계로 나누고 노예 등급 학생들을 5학년 교실로 보내 망신을 준 사례가 있었다. 같은 학교의 6학년 영어전담 교사는 학생들이 모의고사 재시험에 응하지 않고, 요점 정리집을 가져오지 않자 학생들의 발바닥을 15~90대나 때려 논란이 되기도 했다. 2년 연속 학력향상 모범사례로 선정된, 지역의 자랑거리였던 학교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모 지역교육청은 기초학력미달 학생 수를 허위기재해 논란이 됐다. 또 한 중학교에서는 일제고사 당일 한 교사가 시험 도중 학생들이 답안지를 공유하게 한 사례가 드러났다. 도무지 믿을 수 없어, 기사를 다시 살펴보니 감이 잡혔다. 해당 교사는 운동부 지도 교사였고, 공부 잘하는 학생의 시험지를 운동부 학생들에게 보여줬던 것이다. 내가 일하던 학교에도 운동부 학생들이 있었다. 이들은 잦은 경기와 연습으로 수업에 참여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시험일이 임박하자 교사들 사이에 운동부 학생들의 시험 당일 출석 여부에 대해 설왕설래가 있었다. 한 교사는 공부 잘하는 운동부 학생만 학교에 오게 하자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기도 했다.
"심지어 우리 반에 누구만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조금만 이상하면 특수반으로 보낼 궁리를 한다.“
미친교육은 이제 그만... 일제고사 폐지하라, 오마이뉴스 (링크)
위와 같은 초등교사의 절규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쯧쯧, 선생들 인성이 저 따위니 나라가 이 모양이지’라며 혀 차는 소리가 들린다. 누차 말하지만, 교사들은 특별히 이상한 사람들이 아닌 보통 사람들이다. 집단의 목표 달성에 매진하다 보면 누구라도 저렇게 터널처럼 좁은 시야에 갇힐 수 있다. 솔직히 말해, 부진학생이 많이 발생한다고 해서 교사의 월급이 줄거나 승진에 불이익을 받는 것도 아니다. 단지 학교 평가에서 좋은 등급을 받고, 학교와 우리 지역의 체면이 서는 정도다. 오히려 이런 이유 때문에 위법적인 행위를 하면서도 죄책감은 반으로 줄고, 대담함은 커졌을 것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게 아니라, 집단의 목표를 위한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극단적으로 비상식적이고, 퇴행적인 행태를 보인 이들은 현장의 교사들이었지만 그 뒤의 배경과 원인을 누가 제공했는지는 찬찬히 뜯어볼 필요가 있다. ‘쯧쯧, 교사들 인성이 이래서야’ 라는 손가락질로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3) 바람직한 정책의 방향
기초학습 부진은 제거보다는 ‘예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바람직하고 효과적이다. 학교 현장에 필요한 건 근본적인 대책이다. 교육을 가시적인 단기 성과로 치부하는 낡은 관점부터 버려야 한다.
우선 학급당 인원수 감축이 필요하다. 또 기초학습 부진을 예방하기 위해 저학년 시기에 집중적으로 예산과 인력지원을 해야 한다. 교육 분야에서 앞서가는 나라들은 보조교사 제도가 정착되어 있다. 예를 들어 핀란드 초등학교의 경우 보조교사들이 수업 진행의 보조, 개별학생 지원, 수업 커리큘럼 구성, 평가지 작성 참여에 이르기까지 많은 역할을 한다. 한국도 특수교육 대상 학생들뿐만 아니라, 기초학습 부진 학생들과 그 경계에 있는 학생들에게도 보조교사를 집중적으로 배치해야 한다.
가정, 학교, 지역 사회의 연계도 필요하다. 학교에서 교사가 아무리 열심히 지도를 해도 가정과 긴밀하게 협조하지 않으면 학습능력 향상을 꾀하기 힘들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기초학습 부진은 나라님도 못 구한다’는 현장교사들의 한탄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또 학교와 교사만 닦달하기보다는 기초학습 부진 학생들을 지역사회가 함께 책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학교와 지역사회가 긴밀히 공조해 장기적이고, 안정적으로 학생을 추적 관찰해가며 지원해야 한다. (참고: '공교육은 왜', 홍섭근, 살림터)
궁극적으로는 획일적인 줄 세우기 제도 자체를 혁파해야 한다. 최근 한국의 많은 교육 전문가들이 ‘무학년 학점제’를 주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핀란드의 고등학교에는 학년과 학급이 존재하지 않는다. 학교가 다양한 수준의 강의를 개설하고 학생들이 자신에게 맞는 강의를 선택해 듣는다. ‘개별화 교육’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적합한 제도라고 볼 수 있다. 또 학생들의 흥미와 수준 차이를 고려해 선택권을 확대하면, 획일적으로 줄을 세우는 것 자체가 힘들어진다. 모든 학생들에게 높은 학업성적만을 강요하지 말고, 학생 각자가 적성에 맞는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교육을 입시와 선발의 도구로 삼지 않는 사회적 합의를 이뤄야 한다.
내 교직 생활 대부분은 지난 9년간의 이명박근혜 정권기와 맞물린다. 혹자는 그래서 내가 학교를 더욱 숨 막혀 했으리라 보기도 하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다. 직접 비교하고 대조할 수 있는 경험이 아직 없으니까. 교사 일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난 내가 당연히 정년퇴임을 하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늘 마음 속에 사직서 한 장을 품고 다녔다. 그 출발이 일제고사였다는 걸 정확히 기억한다. 망가지는 교육현장, 이에 무비판적인 교육자들을 보면서 느낀 분노와 부끄러움, 그리고 아무 말도 못 하는 나에 대한 자괴감 때문이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한다. 실수는 한번으로 족하다.
일제고사, 함께해서 더러웠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