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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Jul 16. 2019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

(2017년 7월)

가끔 중학교 때 선생님 한 분이 생각난다. 젊은 남자 영어 선생님이었다. 미혼이었고, 외모도 깔끔한 편이어서 여학생들에게 꽤 인기가 많았다. 친구들은 젊은 선생님들이 교실에 들어오면 늘 뭔가를 조르거나(일찍 끝내주세요, 재밌는 얘기 해주세요), 불만을 털어놓고 싶어 했다. 그날 주제는 두발 규정이었다. 앞에 앉은 학생 몇몇이 질문을 던졌다. “다른 학교는 단발머리를 할 수 있잖아요. 왜 우리만 숏커트 머리를 해야 해요?”


선생님이 다정하게 답했다. “너희들은 잘 모를 거야. 월요일 조회 시간에 너희가 운동장에 쫙 줄을 서잖아? 그때 조회대 위에서 보면 얼마나 깔끔한지 몰라! 정말 보기가 좋아.” 교과서 귀퉁이에 낙서를 하며 조용히 듣고 있던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떠들었다고 허벅지를 다섯 대 맞았을 때보다 훨씬 더 얼얼했다. “뭐 그런 거지같은 말이 다 있습니까? 우리가 당신들 보기 좋으라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라고 멋지게 반항을 했다면 거짓말이고, 찍소리 못하고 있다가 쉬는 시간이 되어서야 혼자 난리를 쳤다. 인기 많은 남자 선생님이어서 그랬는지 큰 호응은 없었다.


중간고사 이후였나. 선생님이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내가 그렇게 열심히 가르치고, 시험 문제도 쉽게 냈는데 말이야. 점수가 50점도 안 되는 애들은 사람의 두뇌를 가졌다고 보기가 어려워. 유인원 정도 쯤 이겠지” 쉬는 시간이 됐는데 한 친구 얼굴이 몹시 어두웠다. 늘 끝에서 5등 안에 들던 친구였다. “영어 선생님이 나를 두고 한 말이야. 내 점수를 아는 거야. 분명히 나를 봤어...” 전교에서 손꼽히는 날라리에, 맷집도 좋던 친구가 그렇게 풀죽어 하는 걸 처음 봤다. 며칠 후 그 친구는 느닷없이 모히칸 머리를 하고 학교에 나타났다. 우리 학교는 ‘여자도 귀 위까지 머리를 쳐올릴 것’ 이 교칙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 친구가 귀 위를 넘어, 정수리까지 머리를 쳐올리자 선생님들은 난리를 쳤다. 그 친구와 길을 걸으면 남학생들이 “재수 없다”고 뇌까리는 소리가 들렸다.


"50점 이하는 사람도 아니야" 라는 말. 그 시절 학교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너무 흔해서, 늘 최하위권 성적을 내던 그 친구와 가깝지 않았다면 나는 기억조차 못했을 거다. 같은 장소에 있어도, 90점을 받은 학생과 40점을 받은 학생이 기억하는 교실의 풍경은 너무나도 다르다. ‘너희들이 짧은 머리를 하고, 한 줄로 서 있으면 참 보기 좋아’라는 말은 내가 학창 시절 들은 최악의 멘트 중 하나다. 하지만 내 친구는 그 말을 기억조차 못한다. 그 정도는 귀싸대기, 성적에 관련한 폭언과 차별, ‘니 아버지 뭐하시노’ 류의 하드코어한 기억들에 차곡차곡 밀려나 사라졌다고 한다.


교사들이 이런 말을 많이 한다. ‘학부모들이 학교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모른다’, ‘본인 학생 시절의 기억만으로 학교와 교사들을 예단한다’, ‘사람들은 일단 교사라면 까고 본다’ 일리 있다. 억울한 심정도 이해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몇 가지 정도는 잊지 않았으면 한다. 내 또래의 교사들은 학생이었던 시절, 성적만이 최고의 가치였던 그 야만적인 공간에서 늘 상위 5% 안에 들던 사람들이다. 다른 이들이 기억하는 학교의 모습은, 비교적 모범생들이었던 교사들이 기억하는 학교보다 훨씬 다양하고 섬세한 방식으로 잔인할 수 있다.


‘학부모들은 자기 어렸을 때 학교만 알지, 요즘 학교 돌아가는 모양새는 몰라’ 라는 의견의 맹점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학부모들이 학교를 모른다고 하지만, 교사인 우리도 정작 옆 반 교실의 상황은 잘 모른다. 특정 교사가 ‘교사로서’ 어떤 사람인지는 동료교사, 학생, 학부모의 관점이 몹시 다를 수도 있다. 또 우리는 늘 학부모들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면서, 정작 그들이 학교에 대해 더 잘 알도록 도와주지는 않는다.


학교와 교사에 대한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상처를 ‘괴담’ 정도로 치부하는 교사들도 있다. 과거 사회가 이상했기 때문에, 학교도 당연히 그만큼 이상했던 것 뿐 이라고도 한다. 어찌보면 맞다. 교사들은 우리 사회가 원하는 가치와 규범을 참 충실하게 구현한다. 그래서 일단 이상한 제도가 만들어지면 그 속에서 어떤 교사들은 무섭도록, 덩달아 날뛴다. 제도, 구조, 문화가 문제였으니 교사들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주장을 하고 싶거든 교사를 지성인, 전문가라고 보는 관점부터 스스로 거뒀으면 한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덕의 상실>의 저자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는 말한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답하려면, 그 전에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교사인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를 생각해 본다. 그 이야기의 자취를 걷다 보면, 학교와 교사들을 향한 외부의 불신을 막연한 무지나 터무니없는 비난으로만 치부하기 어렵다. 학부모들에게 죄의식을 갖거나, 굽신거리자는 의미는 물론 아니다. 하지만 그 간의 역사, 경험과 관점의 차이, 자기방어 기제 등을 직시하고 학부모들에게 진정성있게 다가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교사와 학부모는 피해의식에 뒤얽혀, 지금처럼 늘 평행선만을 달릴 것이다.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 이 질문 속의 나는 참 작고도, 크다.


*이 글은 딴지일보에 실렸습니다. (2017년 7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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