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딴지 벙커 모임)
교사들 SNS가 한동안 떠들썩했다. 논란의 중심은 '학교 비정규직 정규직화'였다. 정부가 관계부처 합동 명의로 '공공부문 비정규직 근로자 정규직 전환 추진 계획'을 발표하자, 찬성과 반대가 첨예하게 맞섰다. 전교조 조합원들은 전교조가 뚜렷한 입장을 보이지 않는다며 비판했다. 항의성 탈퇴도 줄을 이었다. 반대로 노동계에서는 '기간제 교사의 즉각적인 정규직 전환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전교조의 잠정 결론을 비판했다.
전교조 내부 정파나 외부 세력에 관한 소문도 떠돌았다. 평범한 조합원인 나도 위기의식을 느낄 정도였다. 전교조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누가 내리고 있는가? 도대체 정파가 뭐고, 외부 세력은 누구인가? 왜 사람들은 무슨 일이 터지면 덮어놓고 전교조부터 욕하고 보는가? 혹시 난 덮어놓고 전교조 편부터 드는 건가?
혼란스럽고 답답했다. 조합원들이 다들 어디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SNS에 짧은 글을 남겼다.
“전교조는 소문대로 이상해져 가고 있습니까?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습니다. 만납시다!”
그러자 정말 30여 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2017년 9월 3일, 벙커1)
* 참가자는 대부분 전교조 조합원
* <조합원들의 목소리>는 만남에서 오간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옮긴 것
* 그 외 내용은 내 주관적인 해석과 의견임
* 개인들의 다양한 의견과 시선을 전교조에 관한 확고한 사실로 확대, 왜곡하지는 말았으면 함
<조합원들의 목소리>
- 전교조 가입하는 것만으로도 큰 용기다.
- 전교조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 때문에 조합원이 아닌 교사들과 대화하기가 겁난다.
- 지금처럼 활동가가 소모되는 투쟁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
- 전교조가 머리에 띠 두르고, 조끼 입은 채 거리에서 시위하는 모습만 언론에 비춰진다.
“전교조는 전투 유전자를 갖고 있다” 30여 년간 교육운동을 해온 조합원이 한 말이다. 태생이 그랬고, 바람 잘 날 없는 역사 속에서 그 유전자는 더 깊이 각인됐다. 전교조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가끔 이렇게 말한다. “말로 해도 되는데 왜 저렇게 싸우지?” 극단적 상황에 내몰려온 전교조 입장에서는 억울할 법도 하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전교조에 투쟁 관성이 붙은 것도 사실이다. 불필요한 전투 상황을 자처하는 경우도 있었다. “싸우면 되는 데 왜 말로 해?” 라는 식이랄까.
한 조합원은 전교조 초창기를 “혁명주의 세대”라고 규정했다. 단일 대오, 정면 돌파, 결사항쟁 전략이 효과적일 때가 있었다. 시대가 변했다. 많은 조합원들은 더 이상 법과 질서를 더러운 권력의 시녀쯤으로 보지 않는다. 무조건 들이대며 싸우는 것보다 차분한 문제 해결을 원하기도 한다(물론 오랜 시간 동안 표적 탄압을 받았고,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는 건 안다).
전투 대오에서 활동가는 돌격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무한한 헌신과 각종 징계 등 희생도 감수한다. 이를 지켜보는 조합원들은 불안하다. '나는 저렇게 살 수 없다' 혹은 '저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감히 발을 들여놓기도 힘들다. 전교조는 자주, 저 멀리 전장에 있다. 그러나 때로 사람들은 그저 누군가 ‘내 옆에 있어 주는 느낌’을 원한다. 지금 조합원들은 ‘전교조가 내 옆에 있는 느낌'을 얼마나 갖고 있을까? 소수 활동가들의 희생을 동력으로 삼는 현재 대열은 여러모로 분명 한계에 다다랐다.
<조합원들의 목소리>
- 전교조를 보험처럼 드는 교사들이 있다. 이기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해하고 포용할 필요도 있다.
- 교사가 교원단체에 가입할 때 고려하는 것이 지향점(나와 뜻을 함께하는가)과 효용성(나에게 이득이 있는가)이다. 전교조의 운영방향과 교사 대중에게 현실적인 이익을 주는 지점을 균형있게 살펴야 한다.
- 전교조가 교사들의 다양한 교육활동을 알리고, 교사들의 자존감을 키우려 노력해야 한다.
- 교육운동과 노동운동이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을 깨자.
- 전교조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본다. 전교조가 아닌 다른 친대중적인 교사 단체들이 정부의 반교육적인 정책에 얼마나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전교조가 더 잘해야 한다.
현재 전교조 활동 구도 자체가 매우 이분법적이다. 교육운동 vs 노동운동. 마치 이 두 가지가 대립하는 듯한 프레임에 갇혀 있다. 너무 단순해 발 디딜 틈이 없다. 교사는 전문직 노동자다. 조합원들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구도 자체가 문제다.
저 멀리서 깃발을 흔들며 조합원들을 한 방향으로 이끄는 투쟁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미시적인 유동과 양방향 소통이 조직에 실제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조직 구조를 전면 개편해야 한다. 조합원들이 각자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즐겁게 행하는 것만으로도 조합과 조합원이 ‘서로’ 큰 힘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말이다. 교사들의 다양한 그리고 변화된 성향과 욕구를 존중하자. 크고 작은 연구, 출판, 독서 소모임 등을 지원해 미시적인 공간에서부터 교육자로서 연대할 수 있는 힘을 이끌어내야 한다.
<조합원들의 목소리>
-동료 교사와 학부모 사이에 전교조 활동가가 학급을 잘 돌보지 않는다는 시선이 있다.
-전교조가 제기하는 문제들이 중앙 이슈나 제도와 정책 투쟁에 기울어져 있어 활동가들이나 조합원들이 정작 학교에서는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 무언가를 하고나 있기는 한 건지 미심쩍을 때가 있다.
-페이스북과 같은 온라인 공간에서 전교조 교사들이 자신들의 교육활동을 잘 말하지 않는 것도 이와 관련된 건 아닐까?
-달리 볼 필요도 있다. 삶과 수업이 일치하는 것을 지향하고 실천하다 보면 오히려 특별히 무언가를 내세우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최근 일부 교사들이 수업 ‘팁’이나 ‘기술’에 집착하거나 의존하는 모습도 좋게 보이지 않는다.
-교사들이 "함께 자긍심을" 갖는 방향으로 전교조가 움직이자.
-필요하면 전교조 지부나 본부에 이야기한다. 민원을 넣는다. 그런데 조합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전교조가 이렇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할 만한 일을 ‘내가 직접 한다’는 생각으로 실천하는 건 어떨까.
전교조는 교육자들의 노동조합이다. 교육을 등한시하는 교육자, 교육 현실에 무력한 교원노조는 존재 의의를 찾기 힘들다. 정치 투쟁은 필요하다. 그러나 관성적이고 소모적인 투쟁은 사양한다. 싸울 일이 있으면 함께 싸우겠다. 다만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비전을 공유하며 싸우고 싶다. 교육자 집단으로서 대중의 신뢰를 얻고 싶다는 열망도 크다. 학생, 교사, 학부모, 시민들과 ‘신뢰에 바탕한 연대’를 형성하고 싶다. 그 구심점에 전교조가 있었으면 좋겠다.
‘조합의 주인은 조합원’은 엄중한 명제다. 이는 단순히 조합이 조합원들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는 요구에 멈추지 않는다. 조합원은 ‘주인의식’과 주인으로서의 ‘실천’을 겸비해 진짜 주인이 되어야 한다. 조합이 무언가 해주길 기다리지 말고, 원하는 그림을 스스로 그려보자. 전교조가 대화의 장을 열어주길 바라면 내가 먼저 그 장을 열자. 전교조 내부에 언론 활동이 필요하다 느끼면, 내가 먼저 그 언론인이 되어 보자. 호명하자. 전교조를 내 안팎으로 호명하자.
“전교조 정파 활동가들은 민주적 조직체계를 왜곡한다. 쟁점이 있을 시 조합원들의 의견을 묻기보다 먼저 정파 내에서 논의를 거쳐 입장을 정한다. 그 후 이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대의원에 출마하고 집행부에 진출한다. 이들은 조합원들의 의견이 아닌 ‘정파의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예를 들어 전교조의 공식 기구가 본인이 속한 정파의 입장과 다른 결정을 내릴 기미가 보이면 끝없는 ‘필리버스터’로 의사결정을 방해한다. 회의가 새벽 3~4시까지 이어지면 지친 참가자들이 자리를 뜬다. 그러면 정파의 구성원들만 남아 자신들의 뜻대로 결정한다. 이렇게 결정된 사항을 ‘공식 결정’이라는 이름으로 하달한다. 지부와 지회에서는 현장과 동떨어진 방침을 전달받고 고민에 빠지기 일쑤다.”
송원재의 페이스북/ (전)전교조 서울지부장, (전)전교조 대변인 / (현)전교조 서울지부 교권상담실장
온라인에서 정파에 관해 격렬한 논쟁이 오갔지만 3일 만남에서는 치열한 토론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안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 차도 컸다. 그렇지만 최소한의 얼개 정도는 기록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더 많은 조합원들이 문제의식을 공유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파’는 본래 특정한 정치, 사회적 견해에 따른 의견그룹이다. 전교조 양대 정파는 교찾사와 참실련이다.
정파를 비판하는 이들은 ‘비밀주의’와 ‘무책임성’을 가장 큰 문제로 꼽는다. 비공개적인 활동 탓에 누가,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정파의 입장을 결정했는지 알 수 없다. 또 외부와 연결이 ‘비밀리에’ 진행되면 전교조 대의 체계의 근간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활동가들의 비밀주의는 정파의 입장과 결정에 대한 ‘책임’ 또한 물을 수 없게 한다.
비슷한 문제 제기가 이전에도 있었다.
“조직 내의 중요한 의사 결정이나 교육 운동의 방향성을 정립하는 데 선량한 전교조 교사 대중의 바람은 무시한 채 극소수 종파 활동가들의 의지를 관철하는 독재가 만성적으로 자행되어 오고 있습니다(…)전교조 내 정파 문화는 자구 그대로의 의미인 정치적 파당이 아니라 종파주의의 화신이고, 더 적확하게 말해 ‘패거리 문화에 터한 파벌 다툼’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 중요한 것은, 선량한 지도자라면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이런 저런 노력을 할 것이나 종파주의자들은 대중의 그러한 무관심을 악용해 독재적 리더십을 지속시켜 왔다는 점입니다.” <교사가 교사에게>, 이성우, 2015년, 우리교육, 121~123쪽
“전교조는 내부적으로는 너무 정치적이었고 대외적으로는 너무 비정치적이었다. 밖으로 알려지지 않은 전교조 내부의 의사결정 과정은 정파들 간의 이전투구와 권모술수로 점철되어 정치판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지금 철저히 비밀 조직으로 운영되는 전교조의 양대 정파들 때문에 전교조 내부의 의사결정은 무슨 음모가들의 술수처럼 되어 버렸다. 그러나 정부와 대항하거나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자 할 때 전교조는 그 권모술수가 다 어디로 갔는지 정면 돌파와 떼쓰기로 일관했다.” <학교라는 괴물>, 권재원, 2014년, 북멘토, 285~286쪽
정파 문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부 정파 활동가들은 조합원이 아닌 ‘정파 구성원’ 정체성에 매몰되어 있고, 정파 이익을 위해 과도한 내부 정치를 펼친다. 예를 들어 조합원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활동가가 특정 정파 소속이라는 이유로 중요한 위치에 배치되거나 그 반대 사례들이 벌어졌다. 이는 전교조 대의체계와 집행체계를 교란시킨다. 전교조가 정치 투쟁에 열을 올리며 현장과 괴리된 지침을 하달한다는 비판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정파 활동가들의 암약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해 다른 견해도 존재한다.
<조합원들의 목소리>
- 6만 명에 가까운 조직에 다양한 정파가 있다는 것은 오히려 건강함을 증명하는 증표다.
- 정파가 없는 조직은 독재 체제다.
- 정파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문제는 이거다. 가령 특정 정파에 소속된 지부장이 지역 내 조합원들의 의사를 제대로 대변하고 있는가라는 점들 말이다.
교사 정은균은 정파의 비밀주의와 책임성 문제에 동의하면서도, 정파 활동이 사사로운 이익이 아닌 신념과 의지에 따른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정파가 전교조 전체의 지향과 목표를 풍성하게 하는 기제일 수 있다고 본다.
정파가 전교조의 권력인가. 정파 활동이 전교조 내 권력을 틀어쥐기 위한 권력 활동인가. 정파주의자들이 본부나 지부에 자파를 앉히고, 더 많은 전국대의원을 만들기 위해 펼치는 이른바 ‘내부 정치’가 그 자리에서 얻을 수 있는 파이나 고물을 위해 하는 사사로운 행동인가. 해직과 징계를 당하거나, 경찰과 검찰 조사의 제일 표적이 될 가능성이 높은 그런 자리들(지부나 본부의 상근자, 전임자나 지회장, 전교조 위원장)을 권력 작용의 관점에서 상상하기는 힘들 것 같다. 출처: 정은균의 블로그/ (전)전교조 군산중등지회장
정파가 건전한 의견그룹인지, 사사로운 패거리 집단에 불과한지에 관한 논의는 여기에서 일단 생략한다. (내 개인적인 관점은 기사 말미에 따로 덧붙인다) 지금은 정파에 관한 논의를 공론의 장으로 이끄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조합원들의 목소리>
-전교조가 젊은 교사들의 소통을 위해 출범시킨 ‘2030위원회’는 군대 내 ‘문화선봉대’같다. 2030교사들을 대상화하고, 소모품으로 쓰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교조의 깜깜이 선거 문제가 조합원 간 소통의 현주소를 말해준다. 현장 조합원들이 선거공보물이나 선거 관련 자료들에서 후보들 간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전교조가 폐쇄적이라는 이미지가 널리 퍼져 있다.
-활발하고 건강한 토론, 현장과의 소통, 피드백이 필요하다.
전교조의 민주적 조직 체계는 자타공인 매우 훌륭하다. 대의체계 (‘전국대의원대회’는 날밤을 새가며 토론하는 문화로 유명함)와 집행 체계(분회-지회-지부-본부)를 별도로 갖추고, 견제와 협력을 이루도록 조직을 구성했다. 그 형식적 견고함은 아름다울 지경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민주적 조직 체계’가 ‘관료제’와 만나 최악의 결과를 도출할 수도 있다. 정파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목된 ‘비밀주의’와 ‘무책임성’은 사실 관료제의 대표적이고 고질적인 문제다.
한 조합원의 주장에 따르면, 정파 활동가들은 조직 의사결정에 영향을 행사하고자 기를 쓰고 대의원에 출마한다. 또 정파 입장이 관철될 때까지 끝없는 필리버스터를 진행한다.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복장 터질 일이다. 그렇지만 냉정하게 볼 때, 이는 민주적 대의체계와 절차를 매우 잘 활용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
형식적 완결성을 갖춘 민주적 기구는 언제든 '권력을 제도화, 합법화'하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 역설적이지만 매우 빈번한 사례다. 대표적인 예가 학교운영위원회(학운위)다. 학교장이 학운위를 휘하로 접수하기 위해 필요한 건 애매한 인간관계와 구성원의 무관심뿐이다. (모든 경우가 그런 건 아니지만) 학내 주류 권력의 의중이 그대로 투사된 의견에 불과할지라도, 학운위의 심의를 거친 사항은 막강한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여타 민주적 기구들도 마찬가지다. 무슨무슨 민주적 위원회 등에 참석해본 사람들은 안다. 팀 대표들은 팀의 의견이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 쉽다(심지어 악의가 있어 그런 것도 아니다). ‘대의성’은 근본적으로 엉성하고 한계가 있는 개념이다. 형식적인 면에서 완벽하게 민주적인 의사결정조차 졸속적이고 아둔할 수 있다.
형식이 본질을 압도해 구조적 폭력과 권력의 제도화를 양산한다. 정부, 기업, 학교뿐만 아니라 전교조를 비롯한 민주적, 공익적 관료제에서도 수없이 일어나는 현상이다. 결과는 최악이다. 이런 경직된 시스템은 대중적 호소력이 없고, 정책들은 실현 가능성이 부족하기 마련이다. 민주주의 조직 체제가 갖는 '근본적인 한계' 를 직시하고,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시점이다.
현재 전교조가 당면한 문제는 결코 녹록지 않다. 각종 대증적인 해결책들을 나열하다 지우고 말았다. 예전에 이런 요지의 글귀를 읽은 적이 있다. 「즉각 참여하고 싶은 충동에 저항하는 것, 끈기 있고 비판적인 분석을 통해 ‘일단 기다리며 두고 보는 것’이 진정으로 ‘실제적인’ 일이 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싶다.
“당장의 해결에 집착하지 말자. 먼저 현실을 직시하자. 상상하자. 사유한 적 없었던 영역으로 침투해가자. 그리고 교육자답게 존재로 말하자.” 전교조를 둘러싼 한바탕 논란 끝에 내가 내린 잠정적 결론이다.
섣부른 희망을 경계한다. 하지만 일개 조합원인 내가 '전교조 한번 모입시다!' 라고 말하자 전국에서 30여 명의 교사와 시민들이 모였다. 9월 3일에 우리는 애증, 애틋함, 답답함, 교육을 향한 열망이 온통 뒤섞인 얼굴들을 마주했다. 이를 희망이 아니면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한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나 퇴임하려면 2년 남았다. 더 할 수 있다. 끝까지 가볼 거다.”
이하 동문이다. 난 20년도 더 남았다. 아직 시작도 안 했다.
+ 개인적인 견해 덧붙임
정파: 건전한 ‘의견 그룹’인가, 사사로운 ‘패거리’ 집단인가?
사실 측정과 확인이 다소 불가능한 문제다. 한 인물이 특정 정파에 소속된 이유가 정파의 지향점인지, 사사로운 인맥인지 구별하기 매우 어렵다는 뜻이다. 물론 누구나 어느 정도 심증은 있다. 그럼에도 본인들이 부인하면 그만이다. 또 설사 개인에게 아무런 의도가 없다 해도, 실제 많은 경우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은 자연스레 얽혀 들어가곤 한다.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있다. 1970년대 미국의 정치학자 조 프리먼(Jo Freeman)은 ‘무조직의 압제(The Tyranny of Structurelessness)’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애초 무정부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시작한 조직들이 있다. 초기에는 모두 조용히 맡은 일을 잘 처리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이상의 규모가 되면 반드시 조직 내에 비공식적인 파벌이 출현한다. 예외는 없었다. 이 소집단들은 정보를 통제하고, 의제를 설정하고, 온갖 종류의 미묘한 방식으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대의와 무관한 소집단 혹은 소위 ‘라인’은 세계 어디에나 존재한다. 학교 관리자 라인, 회사 상사 라인, 부녀회 라인, 강호동 vs 유재석 라인 등. 전교조 내부 정파를 (본래 취지나 건전성과는 별개로) 비슷한 선상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개인의 품성 및 자질 문제로 단순히 환원하거나, 무작정 죄악시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전교조 정파 활동가들이 금전적인 이익이나 명예를 좇는다고 보기 어렵다. (적어도 밝혀진 바가 없다) 그래서 이들을 극악무도한 악마 혹은 모리배로 단순히 규정하는 걸 나는 반대한다. 그러나 파벌 형성의 문제를 경계하고 널리 문제의식을 가질 필요는 분명하다. 이들 중 일부가 자기 확신이 지나치고, 의사소통에 서툴며,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정황도 여럿 포착된다. 의견 그룹답지 않게 결성과 해체가 자연스럽지 않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무엇보다 정파의 ‘비밀주의’는 분명 병리적인 문제이고, 해결해야 할 사안이다. 조합원들이 문제의식을 갖자. 공개적인 정파 활동, 일상적인 공개 토론과 정보 공유를 요구하자.
*이 글은 딴지일보에 실렸습니다. (2017-09-13)